역사의 풍경 - 역사가는 과거를 어떻게 그리는가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강규형 옮김 / 에코리브르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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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내 인생을 바꾼 사람에게 이 책을 헌정하고 싶다. -10쪽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더 큰 세계에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하찮음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 권위자가 됐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들이 일어난다. ... 일부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인간이 덜 중요한 존재라는 인식은 인간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의 대리인의 역할을 향상시키지 않았고, 정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역사상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책임을, 역사를 사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묻는 세속적 자각이 생겨났다. -22쪽

카를 읽어보면, ... 마르크 블로크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과학을 역사가가 지향해야 할 모델로 보았으나, 그것은 역사가가 더욱 더 과학적으로 되어가고 있다든지 혹은 그렇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보기에 과학자가 역사학적으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 현재 존재하는 것들이 과거에도 늘 그런 형태로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또한 그 물체와 유기체가 언제나 동일한 형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해왔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과학자는 과정에서 구조를 추론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과학에 역사를 도입한 것이다. ... 그렇다면 역사는 과학인가? 나는 예일 대학교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았는데, 그중 한 학생의 대답이 일리가 있었다. 그는 "그것보다 어떤 과학이 역사적인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이를 판별하는 기준은 실질적인 반복 가능성--실험실에서 실험을 다시 돌릴 수 있는 것--을 가상적 반복 가능성과 구분하는 선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그 과정에 접근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67쪽

푸앵카레의 통찰력이 위대했다는 것은 선형적 관계와 비선형적 관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동일한 시스템이라도 그 안에서 단순성과 복잡성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애덤스는 이것이 역사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다가, 그만 두 손을 들어버렸다. 이 도깨비 같은 상황을 자기가 아는 과학 언어로 특징지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덤스는 푸앵카레의 작업이 후일 과학이 새로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는 점을 예견하지 못했다. 푸앵카레가 제시한 새로운 길이란, 예측 가능한 것과 예측 불가능한 것을 구별하는 것,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축소하지 않는 것, 그리고 변수 간의 상호종속성을 인정하고 즐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결국 과학이란 역사와 대단히 닮은 것이었다. -121쪽

그러나 굴드가 제기한 바와 같이, 전술한 견해들은 미래 예측이 아주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들이 다루려는 복잡계에서는 과거를 테이프 돌리듯 재실행하더라도 두 번 다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과거를 단순화하겠다는 환원주의는 복잡계에서는 쓸모가 없으며, 우리는 여기서 다시 옛날 식의 서술적 역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이라는 과학 개념이 역사가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회과학자가--또한 대부분의 역사가조차--인정했던 것보다도 더 세련된 연구 도구로서 새로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28쪽

이와 반대로, 역사가는 전혀 추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방법론적으로 자기네들의 섬 안에 행복하게 안주해왔다. 대다수 역사가가 그런 추세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수평선을 세심히 바라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마르크 블로크나 E.H.카와 같은 소수의 역사가만이 다음의 역설을 알게 되었다. 인간사라고는 전혀 다루지 않는 '순수'과학이라는 배가 역사가를 향해 다가온 반면, 정작 사회의 과학을 만들겠다고 떠들어대던 배는 역사가의 시야에서 멀어져깄다는 역설을 목격하 것이다. 그러나 블로크는 미처 이런 주장을 확대해 나가기도 전에 1944년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의 손에 죽고 말았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개정판에서 이런 주장을 해보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이 역시 이 과업과 관련된 단편적인 메모만을 남긴 채 1982년 세상을 떠났다. -141쪽

역사란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 나름대로 다시 써야 하는 것이다. 신세대 역사가는 오래된 문제에 새로운 해답을 내는 데 만족하지 말고 문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 역사적 문제의식이란 담보할 수 없는 강물과 같아서, 설혹 일정 기간 단일 주제를 연구하는 동일한 역사가라 할지라도, 오래된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면 그 문제가 예전과 다름을 깨닫는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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