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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보기 편한 이 글의 원문은

http://blog.cyworld.com/char-babe/3964519

여기입니다.

 

 

 

 

 

 

 

 

 

예쁜 책이 한 권 도착했다. 

알라딘 신간평가단 활동 중 매달 초 그 전달의 신간도서 중 골라 위시리스트를 알라딘 블로그에 기재하게 된다.

그런데 Char가 8월 신간도서 위시리스트 중 꼽았던 이 책이 이달 2권의

평가단 리뷰 신간도서 (에세이)로 선택됐을 때 무언가 당첨된 거처럼 기뻤다.  

 

'책으로 가는 문(本へのとびら 岩波少年文庫を語る, 2013.8.8)'은 두 파트로 나뉘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글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꼽은

자신이 아끼는 50권의 어린이문학을 정리 후 이에 대한 수필식의 여러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나 그의 작품세계에 관심이 있다면 솔깃한 책인데,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 책을 그냥 사랑하는 사람, 일러스트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던지

단지 어렸을 적 가장 좋아하던 동화책이 한 권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즐거운 책이다.

 

예를 들어, Char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세계에 관심이 가고 영국 아동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매우 유익한 책이었는데,

본래 이 책을 위시리스트에 넣었던 이유가 미야자키 하야오 광팬인 소년 때문인데, 소녀은 사실 독서에 큰 관심이 없는지라 아동문학이라지만

엄연히 책에 관한 이야기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그가 영향을 받은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 몇 개 보아 별 집중력을 부르지는 않는다는 개념임.

 

 

※ 그래서 Char는 '책으로 가는 문'을 읽고 알지 못했던 미야자키 하야오를 만난 느낌이었고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치우치는 이야기의 리뷰가 될 듯 하다. 즉, 자주 그런다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

이 책은 순서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는 꼭 앞에서 뒤까지 읽는 식의 순서를 좋아하지 않음을 책에서도 말한다.

그래서 이 리뷰도 꽤 뒤죽박죽으로 올리게 됐다.

어느 정도 수정할까 하다 그냥 올리니 아무 곳이나 스크롤하며 읽다 말았다 하면 될 듯.

 

 

 

 

 

 

 

 

눈을 아주 크게 하고 위 사진을 드려다 보면

하얀 표지에 점자처럼 타이포그래피가 움푹 파인 것을 미세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책의 넥/스파인 (목) 부분도 그렇고 책의 뒤까지 이어진다.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대단히 일본 책답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다른 도서 리뷰를 통해 할아버지 이야기를 잠깐 했다. 할아버지의 일상 중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다니는 것이 있었는데, 따라가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일어로 책을 읽으셨고, Char는 영어로 책을 읽었으니, 같은 원서 코너를 찾아가 한참 책을 골랐다. 할아버지께서 고르신 책은 언제나 똑같았다. 한 손에 쏙 들어와 소설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하얗고 깔끔한 책이었다. 디자인도 없이 모두 동일했다. 하루는 물어보았다. “할아버지 왜 책이 다 그렇게 작아요?”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일본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책을 자주 읽는데, 옆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작게 만들어 어디서든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든 거라 하셨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한 손에는 손녀의 손을, 나머지 한 손에는 자그마한 하얀 색 일본 원서- 그때 그 원서가 생각나는 표지다 ('책으로 가는 문' 113쪽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러스트와 표지의 중요성에 대한 에세이가 나온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잘한다.

자신이 들은 이야기, 읽은 책에 대한 열정이 순수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있는 사람이라 그런 것 같다.

 

 

 

 

 

 

 

 

 

다리가 180도 펴지는 유연한 발레리나 같은 바인딩

 

바인딩 전문가가 아니니 깊게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일본 책다운 바인딩이 정말 매력적이다. 대학시절 일본노트가 유행했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펴지지 않아서 손으로 꾹꾹 눌러서 펴야 하는 노트뿐이었고 그게 귀찮으면 스프링노트를 코스트코에서 대량 구매해 사용하곤 했었다. 꼭 무슨 80년대 이전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낡아빠진 시절의 얘기 같지만 2005년엔 그랬다. 그러고 보니 2005년에 태어난 아이가 듣는다면 정말 낡아빠진 시절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겠다. 아무튼 공책을 180도 펼치기 위해서는 바인딩부터 달라야 했는데, 이를 일본에서 대단히 잘하는 거. 그래서 당시 대학교내 문방구에는 일본노트가 인기였다.


이 책 역시 바인딩이 매력적인 책이다. 쉽게 펴지기에 한국에서 흔히 보이는 양손으로 잡고 겉으로 당겨야 하는 책이 아닌 게 편했다. 글을 많이 쓰던 Char에겐 마치 한 종류의 꽉 막힌 여자만 만나다 상상도 안 했지만 알게 된 이상 나와 너무 잘 맞아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상형을 만난 느낌과 비슷했다. 아마도 스미스 서운 (Smyth Sewn) 방식일 거다. 각각 책 전체가 분할되어 작은 책자가 만들어지고 그 책자를 하나로 이어주는데 이을 때 일일이 실로 묶인다는 거다. 그래서 어렸을 적 도서관에 가면 앞장이 너무 너덜너덜해진 탓에 떨어져 분실되는 그런 일이 요즘은 발생할 수 없다. 현존하는 가장 우수한 바인딩 법이고, 풀로 종이 하나하나를 스파인(spine, 책의 목부분)을 붙이는 옛날 방식인 퍼펙트 바인딩 (Perfect binding)도 흔히 이야기되지만 이는 책이 180도 펴지지 않는다.

 

대신 이 책을 하루 정도 읽는데, 금세 표지와 책이 분리됐다. 그냥 부실한 상태로 표지가 온 것일 뿐이라 직접 문방구 “딱풀”로 붙였고 다시 떨어지는 일이 이후 없었다. 단지 표지의 문제였음. 책 자체는 절대 분리될 수 없는 형태로 묶인 거. 이 책의 바인딩 방식 덕에 펼쳐서 보다 보면 10개의 구멍이 계속 보일 것이다. 독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는 바인딩 방식이라 읽는 수월했고 다른 책도 다 그랬으면 좋겠다. 확 펼쳐지는 큰 동화책의 느낌도 사뭇 느껴졌다. 


 

 

 

 

                                           "책으로 가는 문" Book Review                                          

 

※ 사진과 아래 설명은 리뷰내용과 전혀 이어지지 않으니 따로 읽길 바람.

 

 

 △ 팬이라면 더욱 정감가는 그의 시그니처 일러스트로 시작되는 '책으로 가는 문'은 팔을 넓게 벌려 따뜻한 풍경으로 독자를 반긴다. 여느 창조 작업도 그렇겠지만 "추억"이 담겨있는 모든 것들에는 의미가 담기고 공감을 부른다.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의 대단히 섬세하고 훌륭한 그림솜씨 외에도 그의 진실됨이 묻어나는 직접 느끼고 듣고 기억하는 것들이 그림 속에 바로 티가 나서일 거다.

 

 

 

지겹게 싫어하던 그의 작품세계, 그 이유를 알고 해소하기까지


윌리엄 골딩 (William Golding, 1911-1993)의 소설 ‘파리대왕 (The Lord of the Flies, 1954)’에 등장하는 소년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나인 것 같다. 삭막함 속에서 아이의 몸으로 어른이 된 아이들이 섬 속에 갇혀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날라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ハウルの動く城, 2004)’?!! 화들짝 놀란다.  얼마 전 모재형과 이야기 나누다 나왔던 미야자키 하야오 (宮崎駿, 1941-) 바로 그의 움직이는 성 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내게 그런 느낌이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원작은 영국작가 다이애나 윈 존스 (Diana Wynne Jones, 1934-2011) 의 것이다. 아, 감이 잘 안 잡혔을 테니 미리 의견을 부각시키자면 향수가 짙은 추억 속 갑자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창조에 한 여름 밤의 꿈에 빠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느낌이다. 즉, 난 이미 꿈꾸고 있는데 거기에 무언가 엉뚱한 세상에 빠지게 만든다. 트레이싱 페이퍼 위에 또 다른 투명한 종이를 겹친 묘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는 긍정 보다 부정적이게 다가와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애니메이터로 대단하다 생각하지만 Char는 그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 가지런히 놓인 '이와나미 소년문고'와 미야자키 하야오. 그가 읽은 400여권 소년문고 중 50권을 추천한 것.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하나 이는 현대에 들어 너무 번번히 핑계처럼 쓰여진다. 개인적으로 카피나 너무 잦은 “남의 작품 재사용/재활용”은 용납되지 않는다. 영향을 받더라도, 자신의 것을 만들지 남의 정원의 꽃을 여럿 모아 자기 정원에 심으면 그만큼 흉측한 경관도 없다 느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정말 재미있게 보았어도 두 번 본 그의 애니메이션은 없었다. 그를 좋아하고 싶은데, 마치 디즈니 (Walt Disney)의 일본 판처럼 너무 많은 작품이 그의 것이 아니란 이질감이 글이라는 예술을 하는 아이의 입장에서 불편했다. 형제 같은 그들의 그러한 “외모” 덕에 디즈니가 지브리 스튜디오 (株式会社スタジオジブリ)의 해외 수출을 담당인 것 정도는 놀라운 사실도 아니었다. 그나마 미야자키 감독이 1985년에 공동창립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고양이의 보은 (猫の恩返し, 2002)’을 무척 좋아해서 유일하게 지브라 애니메이션 중 3-4번 보았는데, 이조차 모리타 히로유키(森田宏幸)  감독의  작품에 원작은 만화가, 히이라기 아오이(柊あおい)의 바론 고양이 남작 (バロン 猫の男爵)이다.

 

 

 

 

 

 

 

전혀 다른 세상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단지 호기심을 부르기 이상으로 관심도가 “싫다”의 게이지로 넘어간 계기는 아마 이 책에도 소개되는 그의 영국의 어린이 문학 사랑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책으로 가는 문’을 읽기 전까지 이것이 단지 자신의 젊은 시절 읽은 독서목록과 어린이 문학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몰랐으니 계기를 제대로 못 적은 걸지 모르겠다. 두 살부터 보고 읽고 느끼고 지냈던 것들이 그의 손으로 관객이 그의 것이라 오해하며 보는 그것이 성인이 된 나이에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 느낌이 무엇인지는 그도 책을 통해 이야기 한다.

 


마루 밑 바로우어즈’는 무대가 영국,

그것도 오래전 시대였기에 그대로는 도저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거라면 영국인이 해야지 일본인의 몫은 아니겠지요.

107쪽 “영화화하는 타이밍” 中

 

 

 

 

 

 

 

그가 아마 더 많은 영국 어린이 동화로 작품을 만들었다면 엉엉 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소년이 소년이란 별명을 가지게 된 간접적인 계기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광팬이라 그러한 것인데, 분명 같이 극장 나들이를 가야 했을 터이니 ‘마루 밑 아리에티 (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 2010)’ 같은 사태가 일어났을 터다. 메리 노턴 (Mary Norton, 1903-1992)의 ‘난쟁이가족 (The Borrowers, 1952)’은 수작인 만큼 여러 번 영화와 TV를 통해 사랑을 받았으니 당황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그것도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그림 체로 볼 때면 항상 괜한 찝찝함이 느껴졌다. 이는 단지 개인적인 취향이라 당시에 생각했지만 그의 에세이집‘책으로 가는 문’을 읽은 후, 그것은 나의 작은 오해에서 온 것이라 느꼈다.

 

 

 

 

이 작품은 우리가 평소에 ‘집이 참 좁구나’ 생각하며 생활하는 아주 평범한 공간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영상에 담아낼까’하고 궁리하는 일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107쪽 “영화화하는 타이밍” 中

 

 

 

 

아니나다를까 그가 보로워즈를 만들게 된 뒷이야기를 읽고 정말 그 공간을 그대로 베끼듯 그렸음에도 전혀 표현이 안된 건 많은 경험과 고난을 공유한다 한들 영국 집에서, 그 역사 속에서 자라지도 살아보지도 않은 데서 온 한계가 아닐까? 작가 본인도 어느 정도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해서 의외였다. 그가 표면적인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더라도, 소인의 역사적인 이야기를 이해한들 109쪽에 등장하듯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갑니다”의 순간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그의 작품을 보고는 오락성 말고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아쉬웠다. 그의 작품을 먼저 보고, 원작이나 영국의 여러 리메이크를 몰랐다면 달랐을까? 하고… 뭐 그렇다고 원작 보다 먼저 보는 거로 마음이 편치는 않았겠지만…

 

 

 

 

 

 

일러스트와 글의 트렌드 

 

 

 

그렇게 일러스트의 시대를 지나자 영화의 시대가 되고 텔레비전의 시대가 되고 또 다른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전송할 수 있듯, 영상은 개인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은 점점 취약 해져갑니다. 진짜라고 할까, 날것 그대로를 포착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생략)


그렇기 때문에 랭의 동화집 랭의 동화집 일러스트를 읽어내려면 이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멈춰 서서 그림 구석구석까지 읽어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 130쪽, 세계로의 접근 中


 

 


예전과 달리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게 된 이 시대 속, 책이란 그것에 걸맞게 조금씩 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으고 싶은 책에 대해서는 이전에 포스트/링크 한 적 있는데 이 책도 그렇다. 보면서 더럽히면 큰일 날 거란 생각이 드는 소장용 책이라 포셀린 인형을 받은 느낌이다. 재미있게 볼 때 조차 조심조심 책답데 다룬다. 책이란 바닥에 둬서는 안 될 고귀함이 묻어있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요즘 e북과 개나 소나 내는 책에 쉽게 잊은 걸 이런 예쁜 아이가 다시 알려준다. 그런 시각적인 매력을 다시 찾아갈 수록 책도 차세대에게 사랑을 받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e북으로 전략하면 큰일날 거 같다.

 

 

 

 

 

 

 

바람, 불지 않는다

 

끝에는 조금 더 소소하고 작가의 개인성향을 상상할 수 있는 수필이 가득해 읽기 편했는데, 특히 ‘바람’과 ‘아버지 (147쪽)’ 등 자신 그리고 최근 들어 팬에게도 중요해진 부분도 이야기 한다. 최근 알 수 없게 논란이 붉어졌던 '바람이 분다'를 예상할 수 있는 챕터가 144쪽 ‘불기 시작한 바람 속에서’로 등장한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의 바람이란 상쾌한 바람이 아닙니다.

무섭고 요란하게 지나가는 바람입니다. 죽음을 안고 독을 품은 바람입니다.

죽음을 안고 독을 품은 바람입니다. 인생을 뿌리째 뽑으려는 바랍입니다.

146쪽,‘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 中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싫어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바람이 분다 (風立ちぬ, The Wind Rises, 2013)’ 이후인 거 같다.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이 애니메이션이 최근 국내개봉을 무사히 해내며 많은 팬들의 아쉬움을 불렀다. 결론적인 문제점은 일본과 전쟁의 입장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너무 미화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론가와 팬들의 따갑고 도를 지나치는 악성 리뷰를 보고도 큰 마음 먹고 소년과 찾은 극장의 공기는 의외로 가벼웠고, ‘바람이 분다’를 관람 후 왜 사람들이 이를 그토록 힘들어하며 봤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애니메이션 끝에 ‘바람이 분다’는 거였는지 아니면 소년의 지적대로 원제에 맞게 ‘바람이 안 분다’를 이야기하는 건지 명확하지 않았으나 확실한 건 “비행”, “바람”, “시대의 변화” 그리고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전쟁반대”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생각이었다. 그의 은퇴작인 ‘바람이 분다’는 하염없이 애니메이터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가진 욕심을 마음껏 풀어 작품성 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팬질 (고로 오히려 골수 팬들에 대한 오마주가 된 샘)로 끝났다. 비난 포스트가 넘치고, 선플식 포스트를 올리는 블로그를 테러를 당하기 일쑤였는데, ‘책으로 가는 문’을 읽으면 후반에 이에 대한 의문이 많이 풀린다. 그가 바람이 불고 불지 않는 것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이 현재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수필로 적어놓았다. 

 

 

 

 

일러스트의 인상깊음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일러스트가 필요하지 않지만 있어서 '어린 왕자'처럼 새로운 생명력을 지니는 작품이다.

 

수 많은 일러스트레이터와 화가의 손을 거쳐 재탄생된 작품의 장면들 덕에 이상한 나라 앨리스 일러스트를 모으는 이가 곰돌이 푸우만큼 많지 않을까 예상한다. Char 역시 가장 사랑하는 책이 바로 영국작가  루이스 캐럴 (Lewis Carroll, 1832-1898)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865)'이다. 상상력을 자극해 그림 그리는 이들의 펜을 움직이는 대표적인 명작이며, 인생의 모든 철학을 담은 것이다. 답을 찾지 못할 때 성경책을 찾는 이가 있지만 어려서부터 Char는 답을 모를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찾았다. 그 중 '책으로 가는 문'에 소개된 체셔캣 (The Cheshire Cat)이 갈림길에 등장하는 장면은 아이코닉하다. 천천히 사라질 때 이빨만 괴기스럽게 남기다 가는 것 역시 지금 읽어도 소름이 끼친다. 그러니 일러스트 역시 사랑 받을 수 밖에. 이 외에 동물들의 경주 장면과 화이트 래빗과 시계나... 아 너무 많구남... 넘어가자.

미야자키 하야오도 이야기 하는 이 책의 속편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 (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 1871)' 역시 추천도서다.

 

 

 

 

 

 

 

   트렌드 블로그를 운영하니 팝 컬처 (pop culture)로 번외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으니까 -  

팝 컬처를 만드는 것- 미야자키 하야오가 트렌드이자 아이콘인 이유

 

트렌드 블로그를 운영하며 오해를 자주 받는 부분이 "유행"은 한 순간에 지나가는 것이나 알맹이뿐의 스피디한 것이라는 거다. 하지만 트렌드는 시대나 순간마다의 성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꼭 대중에만 한정된 것도 아닌 인류 전체의 것이고 영원히 빛난다. 이 중 팝 컬처는 순간적일지 몰라도- 벼락스타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듯, 모든 트렌드의 뒤에는 여러 인생을 투자해 걸작을 탄생시킨 명인의 손길이 남아있다. 그것이 주목되는 순간"트렌드"를 바라보면 시대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음과 동시에 "위대한 예술"과 가장 "고귀한 스타일"을 포착할 수 있다.

 

 
오타쿠가 아니다 NERD다! 현대 핫피플은 너드, 그들의 세계정복
여기서 또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니버설한 대단함이다. 하지만 그 전에 빙~ 돌아가며 여러 다른 이야기부터 할 테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계의 윌아이앰(Will.i.am)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뮤직 프로듀서 하면 윌아이앰 정도 밖에 모르겠다 하는 거처럼 애니메이터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 정도 밖에 대중이 모르는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건 윌아이앰은 대단한 너드다. 가장 핫한 뮤직 트렌드를 파악하는 그가 어떻게 너드인지 이해 못할 테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폐증인가 싶을 정도로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있고 (ADHD 있음) 천재임과 동시에 남들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이 그와 대화를 하는 것은 보기 갑갑한 수준이니 가장 인기 많은 세계적인 가수이자 뮤직 프로듀서인 그의 약간 민망하고 어색한 사회능력은 놀랍게 사교적일 수준으로 잦게 미디어를 통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너드 특유의 “전문성 쩌는 열정” 때문에 음악에 대해 365일 24시간 멈추지 않으니 그렇게 대중음악의 방향을 이끄는 영향력을 갖춘 것이다. 패션으로치면 안나 델로 루소 (Anna Dello Russo) 같은 것이다. 안나 델로 루소도 철저한 패션 너드다. 그녀의 괴짜스러움을 지극히 사랑하는 데는 그녀의 패션에 대한 엄청난 지식과 끊임없는 사랑 때문이다. 누가 너드를 말리라, 누가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 왼쪽, 안나 델로 루소 (annadellorusso.com) / 오른쪽, 윌아이앰

 

 


결국 이들처럼 미야자키 하야오도 별다른 언론플레이를 알지 못하고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확장기를 몸에 달고 등장한 레이디 가가나 저스틴 비버 같은 사람들과의 “개고생”과는 전혀 퀄리티가 다른 수준의 “개고생” 통한 세계정복이다. 자기가 열정을 가진 것에 대해 파고 파고 파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닌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자아도취에서 발견되고 키워지는 취미생활과 프로패셔널한 라이프에까지 스며드는 그것.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충 짐작하기로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러스트/애니메이션/비행기 너드다. 너드의 특징이란 똑똑하다 못해 천재이고, 관심사에 대한 열정이 하도 대단해 보통사람과는 도무지 어울리기 어려운 특이함이다. 우리가 미국 코미디 시리즈, ‘빅뱅이론 (The Big Bang Theory, 2007-)’으로 만난 그들 통해 대중성을 유지한 너드다.


20년전만 해도 이는 단지 특이함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 특이함이 특별함이고 특별함이 대세이기 때문에 nerd가 현재 세상에서 가장 핫한 피플이다. 오타쿠처럼 사회능력이 급격히 저하된 수준은 아니지만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자기의 취미생활을 프로패셔널한 수준으로 즐기는 (introvert) 너드. 거의 99% 동일한 성격과 성향의 오랜 반쪽 지인 모재형과 요즘 자주 이야기 나누길- 그것은 상당한 매력이라는 것. 특히 트렌드가 너드의 방향으로 틀어버린 상황에서, 변하기만 하는 패스트 트렌드에 일시적인 열광만 하는 “평민”과 달리 너드는 정해진 범위의 엄청난 지식과 시간을 얻고 투자한 신비한 외계존재 같아서 그 이색적인 매력에 현재 세대가 끌리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것에 끌리면 그것에 정복되기도 쉬운지라 90년대에 우리는 톰 크루즈,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트라이앵글 속에 갇혀 “오 아름다운 자여~”하고 숭배했다면 20년 지난 지금 2013에는 니콜라스 케이지, 조니뎁과 로버트 다우니 Jr. 같은 진정 어색하게 너디한데 간지 넘치는 그들의 대열에 집착증이 생겼다 (여기에 키아누 리브스가 들어간다면 좋으련만 그는 너무 A급 너드인 듯).

 

한국에서 안티가 조금 늘어났을지 몰라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엄청난 것을 해낸 작가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애니메이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표현이 가장 걸맞는 애니메이터다. 생각해보자. 당신이 나는 애니메이터가 몇 명인가? 애니메이터? 그게 뭔데? 그쪽 종사자나 오타쿠가 아닌 이상 당신은 월트 디즈니 (Walt Disney, 1901-1966)와 팀 버튼 (Tim Burton, 1958-) 정도를 알겠다. 어? 팀 버튼이 애니메이터야? 하는 사람도 있겠다. 또 만화에 관심 있다면 아마 심슨 (The Simpsons, 1989-)과 퓨처라마 (Futurama, 1999-2013)의 맷 그레이닝 (Matt Groening)은 기본으로 알 테고, 주로 ‘아메리칸 대드! (American Dad!, 2005-)’와 ‘패밀리 가이 (Family Guy, 1999-)’의 세스 맥팔레인 (Seth MacFarlane, 1973-) 그리고 스누피가 등장하는 ‘피너츠 (Peanuts, 1950-2000)’ 시리즈의 찰스 슐츠 (Charles Schulz, 1922-2000), ‘가필드 (Garfield, 1978-)’의 짐 데이비스 (Jim Davis, 1945-) 등 유명한 신문 코믹스트립 만화가 몇 명 정도는 낯익다며 손꼽아 말할 수야 있겠다. 하지만 그들을 다 합하더라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나오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뭐랄까.. “브랜드”로 전략해버린 월트 디즈니를 넘어선지 오래다. 세계 1위를 차지하는 월트 디즈니는 단지 영어권이라 그런 거고, 미국인도 영국인도 세계 누구도 무식하지 않고서야 그를 모르는 사람이 적다. 외우기도 어려운 그의 이름을 상당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그 알리게 된 방식은 오르지 그의 작품뿐. 야한 비디오를 찍던지, 사회적인 이슈를 알몸에 걸치지도 않았다. 사치스럽게 돈을 뿌려 유명하지도 않고, 누구와 연애해서 알려질 필요도 없었다. 그는 단지 세계적으로 가장 이야기를 멋스럽게 해낼 수 있는 우리의 스토리텔러 할아버지다. 얼마 전 Char도 그의 은퇴작 ‘바람이 분다’를 보고 얼마나 섬세하고 훌륭한 아티스트인지 이전 작품의 화려함에 눈치 못 챘던 부분을 뒤늦게 보면서 놀랐다.

 

 

 

 

 대부분의 사진에 안 보이지만, 도서목록은 위 사진과 같이 노란 빛의 페이지다. 따뜻한 느낌이 나고 책다운 느낌이 난다.

 

 

 

애니메이션의 미래에 대해서는 언급없는 조금은 어두운 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 하야오는 ‘책으로 가는 문’을 통해 에세이에서 꽤 암울한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중 Char도 믿는 니힐리즘 (Nihilism)을 이야기 한다. 이는 사실 믿는다 하려면 테러리스트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만 단순하게 말해 그 어떤 것도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꽤 괴팍한 사상으로 그가 149쪽에 언급하듯 “니힐리즘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깊은 니힐리즘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물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만, 값싼 니힐리즘은 게으름의 변명이기 일수입니다.” 이어서 그는 지금은 판타지를 만들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여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 (과거든 현재든)에 행복한 애니메이션은 어울리지 않음을 표현한다. 이쯤 되면 사실 도대체 왜 그의 은퇴 작 원제가 ‘바람이 불지 않는다’의 부정형인지 전혀 감이 안 잡혀 궁금하지만 어쨌든 현대의 애니메이션의 변화에 그가 전혀 언급하지 않는 데는 애니광으로 조금 슬펐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린이 문학이 “아이들에게 절망을 말하지 마라”라 생각한다. 그리고 삶을 살 가치를 부여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동화를 쓰고 싶어하는 Char는 이를 완전히 반대한다. 어린이에게는 무엇을 보여줘도, 무엇을 읽어줘도 순수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른과 다른 시야로 관찰한다. 몸이 유연해 우리가 하지 못하는 동작을 곧잘 해낼 수 있는 것처럼 문학과 이야기 속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눈밭이 보이지만 그들은 백곰의 등이 보이고, 우리는 사랑 이야기가 보이지만 그들은 모험을 본다. 절망을 감출 필요 없이 펼치는 것이 훌륭한 동화이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팬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의 한계가 그곳에서 오지 않나 상상해본다. 그는 세계를 대표하는 이 시대 애니메이터임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상실을 많이 담아 아이들에게 차별 없이 여러 감정을 선물한 감독치고는 “태어나길 잘했구나”라는 의미를 전해준다는 이상은 오히려 애 보다 어른에게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막말로 Char는 영국아이라 자라며 그가 이 책에 소개하는 작품을 다 초등학교 시절에 읽으며, 바로 그때 때로는 밤 늦게 거실로 내려가 음소거로 성인방송을 보곤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그랬는데, 영국은 조금만 성인소재의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해도 11시 넘어서 방송해서 (한국과는 수위가 전혀 다른…;;;;) 지금 생각하면 아주 무서운 공포영화, 정말 야한 성인 드라마 그리고 심지어 섹스 다큐멘터리까지도 눈 크게 뜨고 음소거로 조용한 새벽에 보았으니 경악스럽다. 하지만 어른의 입장에서 생각한 자신을 붙잡고 어린 자신을 떠올리면- 전혀 후회가 없다. 기이한 새로운 세계였고, 아이의 상상력은 그것을 대단히 멋진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희망을 꺾지도 마음을 탁하게 하지도 않았다. 오르지 창의력의 순간, 확장의 기회 그리고 모험의 나날이었으니까. 

 

 

 

 

△ 어렸을 적 사랑하던 작가들의 작품을 참 많이 겹쳐 소개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목록 덕에 추억에 빠져버리지만

이야기뿐 아니라 일러스트에도 큰 영향을 받았음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The Wind in the Willows 역시 일러스트를 포함해 명작 중 명작이다.

 

 

 

‘책으로 가는 문’ 속 에세이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야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야기 속 그림과 일러스트의 영향력과 풍부한 상상력에 반해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이미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토록 위대하고 순수한 열정을 느끼는데, 짧지만 소중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수필 통해 그것을 나눠 받는 느낌이다. Char의 것보다 조금 더 빛나고, 조금 더 환상적인 그의 아름다운 추억과 비행에 동참하려 손을 뻗게 된다.

 

Char는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글쓰기 클럽을 만들었다. 일부러 만든 건 아닌데, 선생님께서 주신 “동화책 만들기” 숙제 덕에 어느새 우리는 교내 새로 만들어진 도서관을 위해 우리만의 책을 직접 만들고 있었다. 책 내용을 준비하고, 파트를 나눠서 글을 완성하고, 크기 맞춰 종이를 정성스럽게 기요틴/길로틴 (guillotine)으로 자른 후 페이지마다 넣을 연관성 있고 멋진 그림을 정해 그려서 붙인 후 그 밑에 이야기를 손으로 예쁘게 적어 그림동화책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뛰어 놀고, 먹기 싫은 점심시간 샌드위치 몰래 버리는 것 밖에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스스로 글을 잘 쓴다 느낀 건 가족끼리 단골 타이 레스토랑에 앉아 그날 한국학교를 위해 썼던 단편 이야기를 아빠에게 보여줄 기회가 있었을 때다. 그 순간을 왜 꼭 기억하느냐 하면 한국어를 거의 몰랐던 시절이라 말이 지금보다도 훨씬 짧았는데 (상상이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무척 엄하고 완고한 아빠의 진지한 “어른의 인정”을 받은 몇 안 되는 경우라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날은 그림을 그렸었다. 구름에 있는 나라에 대한 글이었는데, 구름의 나라로 가는 다리는 사람들의 꿈으로 만들어진 그런 이야기였다. 글과 함께 구름의 나라, 구름의 다리의 일러스트를 정성껏 그려 그 아래에 이야기를 적었다.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하니 그리 놀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평소에도 무척 현실주의적인 아빠는 글 솜씨에 꽤 놀랐던 거 같다. 그제서야 이 아이는 글을 참 잘 쓴다. 짧은 한국어로도 이렇게 할 수 있음에 놀랐던 거 같다. 물론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1899-1961)의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 1952)'만 보아도 문장력은 단어와 무관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지만 여태껏 딸의 특기를 이어 생각하지 못하다 완성된 계기가 그림 때문이란 생각도 해본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망상 같은 무시무시한 상상의 나날과 존재가 독자에게 일러스트를 통해 더 가까이 다가선다.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주 눈 앞에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가끔 이 사람들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무언가에 빠져있다. 대다수는 꽤 자기중심적인데, 나쁜 느낌 보다는 그냥 아이같이 유치한 자기중심의 모습이다. 이들은 글을 쓰고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아름다운 무언가를 자기 손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 애니, '개와 가위는 쓰기 나름 (犬とハサミは使いよう, 2013)' 1화 캡처

 

 

꿈꾸는 사람의 세상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세이집 ‘책으로 가는 문’을 읽으면 어린 모습의 그가 상상이 된다. 여기저기 상처 투성으로 탐험을 다녀 온 어린 그와 대화를 하는 느낌이다. 물론 그의 탐험은 평범한 소년같이 들판을 뛰어 노는 것이 아닌 애니,‘개와 가위는 쓰기 나름’의 남주 하루미 카즈히토의 대사를 생각나게 한다. 대략… “2D 아니면 안 된다”는 입체거부의 자세. 글로 적힌 것 아니면 어떠한 자극도 열정도 느껴지지 않는 주인공은 엄청난 책벌레인 것. 상상력이란 그렇게 묘하다. 그 어떠한 손에 잡히는 것보다 위대해서 요즘은 비주얼에 치우치는 시대가 된 탓에 눈에 보여야 하고 그 이상은 기운을 투자하기 귀찮다는 게 참 괴로운 현실이다.

 

 

 

                                                             ▲ 천계영, 'DVD (2003)' 1권 中

 


한국 만화가 천계영의 ‘DVD (부제: 땀과 비누와 디디의 이야기)(2003)’라는 작품을 보았다면 여주인공 심땀이 남들에게는 안 보이는 망상 같은 것이 보이는 캐릭터임을 기억할 테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남자친구 머리 위로 포도넝쿨이 자라 포도가 열리고, 지하철은 정거장이 아닌 인도로 향한다. 작가의 상상력이 멋지고 사랑스러워서 몇 번이고 다시 읽고 그림을 관찰하며 구하기도 어려운 책 소년에게 완결까지 구해달라 하여 소장 중이다 (참고로 ‘DVD’ 정도면 꽤 이상적인 모방 아닌 영감 아닌가?). 꿈꾸는 사람들의 세상은 꼭 땀의 것처럼 환상적이다.

 

 

 

 

 

 

 

물론 이상하게 그리면 시시 해져버리는 면도 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한눈에 들어오므로, 그림 작가의 역량에 따라 상상의 폭이 제한되니까요.

이야기만 있을 때 오히려 이미지가 뭉게뭉게 부풀어 오르기도 합니다.

 

123쪽, 그려야 하는 것, 그렇지 않은 것

 

 

 


그는 일러스트의 한정적인 면도 일러스트에 대한 극찬 중에 해낸다. 지금에 와서는 일러스트도 상상도 날개를 펼치기만 할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중 Char도 좋아하는 작가 어슐러 K. 르 귄 (Ursula K. Le Guin, 1929-)의 '어스시의 마법사 (A Wizard of Earthsea, 1968)'를 예로 든다.

그렇다. 그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 감독을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한 '게드전기 - 어스시의 전설 (ゲド戰記: Tales From Earthsea, 2006)'. 무슨 난리.

이 경우 책에서 이야기 하는 용과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용의 느낌이 많이 다름을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124쪽에 이야기 하듯이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의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1943)'에 일러스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conculsion 

 

 ‘책으로 가는 문’을 읽기 전에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왜 뛰어난 스토리텔러임에도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욕심보다 남의 이야기만 빌려 작품을 만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상상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원작자의 바람을 빌려 돌리는 바람개비 같았다. 이 책을 읽고 이것이 왜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이와나미 소년문고 50권과 그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입사 후 소년문고 빼곡히 찬 책장을 만난 일화까지... 그의 열정과 영감은 이 글에서 왔고 비행을 꿈꾸는 그의 독서목록만큼 자신의 세상 보다 멋진 작가들의 옆집 나라로 몰래 타임리프 하길 즐기는 소년 같은 그라는 것을 배웠다. 비록 상당수를 어린 시절 보다 성인이 된 후 만났지만 그의 순수함은 어린아이 못지 않고 어쩌면 열정은 지금도 스무 살 청년 보다 훨씬 큰 것 같다. 에세이를 통해 수시로 언급된다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감독으로, 애니메이터로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건 분명 자신의 작품을 만들 때 보다 자신이 동경하고 사랑하는 작품을 재탄생 시키는데 있다. 훌륭한 문학을 알아보고 그것을 꽃피우는 출판사 에디터처럼, 본래의 글쟁이임에도 그 이전 남의 글을 찾아나서 갈고 닦는 것은 진정한 예술인이자 창조의 자세인 것이다. 고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를 단단히 오해했었구나 스스로 알고 나름대로 큰 위안을 받았다. 이 꽃이 마음에 들어! 하고 디즈니에서 하듯 애니메이터와 작가의 창의력 낭비하며 꺾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위대한 작품들에 오마주 (hommage)를 그린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의 에세이집을 통해 느껴진 것은 작품에서 미처 놓쳤던 아동문학에 대한 막대한 사랑이었다.

 

 

△ '마녀 배달부 키키 (魔女の宅急便: Kiki's Delivery Service, 1989)' 일러스트

 

 

 이 글의 원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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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신간평가단 13기 (Essay)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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