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냇물아
최성각 지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어쩌자고 이 책을 잡았을까? 아파트에서 아침마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들과 베란다의 화초들과 대화하는 게 고작인 내게 이런 책은 과하게 처방된 약 같은데. 이 책을 읽으면 갑갑한 도시의 아파트 생활이 미칠 듯이 싫어질 줄 뻔히 알면서, 그러나 여러 까닭들 때문에 당분간은 도시 생활을 접지 못하는 걸 알면서 왜 이런 책을 읽어 스스로 가슴에 염장 지르는 짓을 할까? 나도 참 딱하다.

 

 글쓴이의 환경운동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이 참으로 진솔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환경에 대한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오롯이 드러나는 글들이 나를 일깨우기도 하고 뭉클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글쓴이가 시골 생활을 하면서 있었던 일상을 적은 몇 편의 글이었다.

 

 난 실제로는 거위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거위들이 너무도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 책을 통해서 워낙에 자주 접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리라. 내 기억 속 거위는 ‘닐스의 이상한 모험’에서 닐스와 함께 기러기 떼를 쫓아서 날아가는 거위였다. 그러나 실제로 거위를 보기까지 당분간은 ‘맞다’와 ‘무답이’가 떠오를 것 같다. 글쓴이가 거위들 덕에 자기 등판의 쓸모를 찾게 되었다고 얘기할 때 나는 어릴 적 집 마당에 뛰어놀던 내 동물 친구들이 떠올랐다. 

 

 대구의 변두리에서 무허가 판잣집을 지어놓고 살던 시절, 우리 집 마당에는 개, 닭, 토끼들이 있었다. 벽에 붙은 파리가 무서워서 울 정도로 겁이 많던 나는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오는 일을 가장 어려워했다. 어느 날은 닭들이 홰를 치는 서슬에 놀래서 달걀 그릇을 떨어뜨려 엉엉 울기도 했다. 어머니는 혀를 차시며 ‘저래 겁이 많아서 어데 쓰겠노?’ 하셨지만, 저녁 찬거리를 몽땅 깨먹은 겁 많은 막내딸은 나무라지 않으셨다.

 

 언니 오빠들이 모두 학교를 가고 나면 닭 모이를 주거나 토끼풀을 넣어주는 일, 백구 밥 주는 일이 모두 내 차지였다.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종종종 따라다니는 다리 짓, 새끼 토끼들이 풀을 오물거리는 입매, 살살 쓰다듬으면 털 아래 따뜻한 살의 온기가 전해지던 백구의 등...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보기 위해 한 일들이지만 열 살 즈음 도시의 달동네로 진입하기까지 과수원 귀퉁이에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던 그 시절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감자나 고구마를 캐고 나면 오빠와 언니를 따라서 미처 다 캐 가지 못한 감자나 고구마를 뒤지며 주우러 다녔다. 집으로 돌아와 아궁이 앞에서 꼬박꼬박 졸면서 기다리면 어머니는 고구마를 아궁이에서 꺼내 껍질을 까 주셨다. 그 붉고 실하던 고구마의 포실한 속살이 혀 끝에 아슴아슴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텃밭에 깻잎들로 전을 부치기도 했는데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양철 지붕에서 똑똑 떨어지던 빗물 소리와 함께 고소한 깻잎 전 내음이 아련하다.

 

 그러나 그 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 때의 추억이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시절 내 동물 친구들과의 관계는 내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심어주었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놀다가 돌아와 보니, 닭장이 텅 비어 있었다. 닭 장수에게 팔고 남은 닭은 저녁 밥상에 올라왔다. 나는 밥도 먹지 않고 울었다. 언니 오빠들이 닭백숙을 맛있게 먹는 걸 보면서 어제의 친구가 오늘 내 먹을 거리가 되는 이 삶의 아이러니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 토끼장이 비는 날, 개집이 비는 날도 나는 또 울고 울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죽음을 오래도록 기억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새로 병아리들을 사 오면 좋아라 다시 모이를 줬고, 아버지가 어린 강아지를 안고 오는 날은 또 걔 이름을 짓느라고 신나게 끙끙댔다. 며칠은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그 억척스러움이 우리 육남매를 먹여 살리고 공부시킨다는 것을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들을 떠올리면 나는 머리와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가 그들을 내 어린시절의 친구라고 기억하는데, 그들도 나를 그렇게 기억할까? 내가 인간이라는 이유가, 우리도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한 존재라는 당위가 그들 앞에 떳떳할 자격을 부여하는 걸까? 확신할 수가 없다.

 

 나의 이러한 사유를 어떤 이는 배부른 고민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내게는 배가 고파도, 혹은 굶어죽어도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다.

 

 나는 육식을 하지 못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육식을 해 본 적이 없다. 고기가 먹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커서는 베지테리아니즘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 의식적으로 거부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식성이 먹을 거리에 대한 다양한 선택의 한 가지를 보여줄 수 는 있지만 그것이 옳다고,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아니, 얘기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우리 집 백구가 팔려가던 그날을. 닭장이 텅 비던 그 날을. 개고기도, 닭고기도 먹지 않지만 나는 그들을 판 돈으로 산 옷을 입었고, 운동화를 신었고, 그 돈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들의 죽음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이란 게 어떤 건지 나는 아직도 정답을 찾지 못했다. 어디까지가 생명으로서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당연한 본능인지, 어디부터가 인간의 무자비한 욕망인지, 나는 날마다 갈등의 과정에 있다. 그런 내가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바람직한 생명관 따위를 운운한다는 것은 정말 내 친구 백구가 웃을 일 아닌가.   

 

 이 책이 더없이 감동스럽게 다가왔던 것은 바로 ‘바람직한 삶이란 이런 것이다.’는 정답은 쓴 게 아니라 ‘바람직한 삶이란 게 도대체 뭐지?’라고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세상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환경운동도 정답을 찾는 운동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대해 익숙한 시선을 거두고 끊임없이 낯설게 만들고,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내는 운동이리라.

 

 그러나 딱 한 가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환경운동을 하는 남성들의 시선이 지렁이와 풀꽃처럼 낮은 것, 소외된 것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운 여성들의 삶을 놓치는 때가 많다는 것이다.

 글쓴이가 코기족의 한 샤먼의 말을 옮기면서 냉전시대를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힘센 사내가 이스라엘이라는 매춘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하던 시대’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어찌나 가슴이 아팠는지... ‘매춘부’라니...

 

 ‘개만도 못한 인간’이란 표현이 개를 비하하는 표현이듯이 ‘매춘부’라는 표현은 약자의 성을 지닌 여성 모두를 비하하는 욕설이다. 그런데 책 속에 있는 ‘미국에 의해 유린당하는 민족의 순결한 누이들’과 ‘자연의 어머니’들은 진한 감동으로 다가와도 함께 살아가는 내 눈 앞의 여성들에 대한 폭력은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민족과 개혁을 얘기하는 ‘좌파’들과, 박근혜 지지를 얘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다 참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환경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 아닌 것들의 권리를 얘기하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여성,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들 앞에서 낮추고 또 낮추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들이 친구라 부르는 지렁이와, 도롱뇽과, 나무들과, 거위들, 돌멩이 그 모두가 함께 욕을 먹는 것이니. 안 그래도 인간의 존재 때문에 괴롭고 괴로운 그들을 환경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또 힘들게 해서야 되겠는가.

 

 이 좋은 책을 그 단어 하나로 꼬투리 잡아서 책망하자는 게 아니다. 그 단어를 걸러내지 못한 글쓴이가 지금의 우리 모습이고, 지금 우리 환경운동의 현실이란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환경운동이 환경만을 이야기하는 운동이 될 때, 환경운동은 더 이상 운동이 아니게 되는 걸 기억해야 한다. 환경운동은 환경까지 생각하는 운동이고, 환경까지 생각하게 되는 그 길에 만난 숱한 질문들, 소수자와, 계급과, 생명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운동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삶의 진실이 그득한 이 성실한 글에 이렇게 까탈스러운 서평을 쓰기까지 나는 참으로 부끄럽고 조심스러웠다. 너무도 주제넘은 짓 같아서.

 그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환경운동 단체에 회원가입을 했다.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찾아보기 위해서. 가장 쉬운 그 첫 걸음조차 떼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었단 말을 감히 어떻게 할까 싶어서 말이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기어이 움직이게 만든 ‘달려라 냇물아’는 한 마디로 참 좋은 책이다. 일상을 낯설게 만들고, 익숙함을 부끄럽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다. 그것은 글쓴이의 진심이, 그 진심을 실어서 살아온 그의 삶이 삿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내게는 멀지 않은 훗날, 마당 있는 시골 집에 어린 시절 친구들과 다시 더불어 사는 꿈이 있다. 백구와, 닭들과 토끼들. 그 꿈에 한 가지가 더해졌다. 거위들도 같이 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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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1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하게, 어렸을 적에(지금도) 개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개가 충직하지요. 사람이 그랬으면 하는 성품을 개는 지니고 있지요.
어른이 되어서 개고기를 먹으러 가면(단체회식은 졸병이 피할 수 없었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맛있다 먹는데,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더군요.

다른 고기는 잘 먹으므로 일종의 이율배반일 것입니다.
개는 꼭 친구같아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습니다. 산딸나무님


산딸나무 2007-11-1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이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은 이율배반이 아니라
님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뿐인데,
사람들은 기계적 해명을 요구하죠?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데
우리 사회는 그 문제를 공론화하기 힘들만큼
너무도 폭력적이죠.

luckybaby83 2008-02-10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산딸나무님^^ 처음 인사드려요. 산딸나무님이 쓰신 글을 읽다가 넘 감탄해서 결국 이렇게 댓글 남기고 가요. < 개를 기르다 > 라는 만화의 감상문 읽고 완전 감동받았어요. 요 글도 공감 200프로 하고 가요. 살짝 눈물도...^^ 개를 비롯해서 모든 동물을 좋아하는데 사실상 저의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몇 지인을 제외하면 이렇게 동물에 대해 애틋하고 진지한 생각을 해보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안타까웠거든요. 어쩜 글을 이렇게도 잘 쓰시는지 넘 부러워용~~

산딸나무 2008-02-1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제 글 속에서 '애틋하고 진지한 생각'을 읽어주시다니,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최성각 2009-06-08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산딸나무님의 좋은 글을 접하게 되어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남깁니다. 산딸나무님의 어린 시절 백구 이야기는 제게 거의 50여년 전, 어렸을 적에 경험했던 것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우리는 그 개를 '도꾸;라 불렀는데 늙어 개장사들에게 끌려가던 도꾸는 어린 제가 자는 방을 바라보며 그렇게도 구슬프게 울었다고 하지요. 저는 깨어나서 도꾸가 사라진 것을 알고 많이 슬퍼했답니다. 그후로 성인이 된 뒤에도 사람보다 수명이 짧은 동물과는 정을 나누지 않으리라, 그렇게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나이 들어 어쩌다 거위를 키우게 되었지요.

최성각 2009-06-0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거위를 키울 때에도 그 녀석들의 수명이 40년이라 해서 안심한 면도 있었답니다. 당시 제 나이가 오십대 초반이었니, 이 녀석들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뜨지는 않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만 제가 키우던 거위 맞다와 무답이는 2년쯤 지나 수리부엉이에게 기습을 당해 한 녀석은 깃털만 남기고 사자지고, 다른 녀석은 슬퍼 울다가 절명했답니다.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다시 새로운 거위새끼들을 만나 이름을 짓기를 다시는 부엉이에게 채여가지 못하도록, 철근이, 구리라는 쇠붙이 이름을 붙여주었지요.

최성각 2009-06-08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세상에는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보다 애완견을 더 애지중지해서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분들고 있는 것 같지만, 생명에 대한 감수성, 고통을 같이 느끼는 감수성, 그런 점에서 저도 부족하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축에 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라도 천천히 나누지요. 문득, 댓글을 이렇게 달고 있는 것은 제 졸작, <달려라 냇물이>에서 코기족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용한 '매춘부'라는 표현은 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표현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 그들이 세계를 상대로 펼치고 있는 폭력행위에 대한 아마존의 코기족들이 비유로써 사용한 표현을 제가 재인용한 것이지요.

최성각 2009-06-08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역시 산딸나무님과 같이 그런 표현을 못된 표현, 극복해야 할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얼마 전에 저는 한 매체에 독서잡설이라는 이름으로 책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이성숙이라는 분이 쓴, 『여성, 섹슈얼리티, 국가』(책세상, 2009)라는 책에 대해 서평을 쓰면서 그 제목을 그 제목을 <매춘여성이 아니라 ‘성노동자’라 불러다오>라고 붙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선 이상 생각을 전개시키기 어려워하는 성노동자 문제를 이 책은 명쾌하게 그 해결책과 방향까지 제시해준다. 성노동자들의 소망과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외면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야말로 범죄자다."라고 글을 마친 적이 있습니다. 제 서평은 참여사회 2009년 3월호 <최성각의 독서잡설>에서 찾아보실 수 있고, 제가 운영하고 있는 풀꽃평화연구소 사이트애 있는 <저혈압헌책방-최성각의 독서잡설>을 통해서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누군가를 '매춘부'라고 쉽게 멸칭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제가 인용한 것이 곧 제 생각은 아니라는 것을 아무래도 말씀드려야겠기에 댓글을 답니다. 오해가 풀리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최성각 2009-06-0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환경운동은 세상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변화시키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의 약자들, 강자들에 의해 유린되고 모욕당하고, 착취당하는 힘에 저항하는 구실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성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역사에서 약자는 누구일까? 여성이었지요. 말 못하는 동물이었고요. 그리고 자원으로만 간주되고 있는 자연이 지금은 약자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 역시 여성을 비하하고, 업신여기는 힘이나 세력들에 대해서는 심한 반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지요. <똥파리>라는 영화를 보고 제가 발행했던 풀꽃평화목소리(저희 연구소 웹진판에 있지요)에도 폭력에 대한 저의 태도가 드러나 있지요....제 이야기만 드려 미안합니다. 산딸나무님께서 제 졸작 <달려나 냇물아>를 잘 봐주신 데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남깁니다. 그 이야기를 이 댓글을 달면서 제일 처음 드렸어야 했는데, 빠뜨렸군요.

최성각 2009-06-08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거위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시는데, 거위는 참으로 매력적인 동물이랍니다. 마당에 거위들이 조용히 거닐면 주변의 풍경이 모두 평화로워집니다. 그것은 닭이나 개나 고양이가 주는 것과 또 다르지요. 산딸나무님도 언젠가 공간이 허락되시면 이 아름다운 동물들을 키워보시기 바랍니다.

산딸나무 2009-06-0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성각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님의 진솔한 댓글에 마음이 더없이 따뜻해졌습니다.
정말 이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댓글 사이 사이 자신의 삶과 생명에 대한 님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느껴지네요.
앞으로도 뭇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한 삶과, 그 삶을 고스란히 부려놓은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