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나에게 빈틈을 만드는 일이었다. 살면서 빈틈을 만드는 일은 삶을 무언가로 채우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만큼 쉽지 않다. 언제나 그랬다. 중요한 건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련하고 싶은 내 생의 빈틈은 ‘산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때로는 ‘여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산책에 대하여 中 -54쪽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는 있어야 할 것들만,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신뢰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침대, 선풍기, 책상, 거울..... 나에게 침대는 섬이다. 인생이 지칠 때 어딘가 쉴만한 곳으로 상상하는 한적하고 따뜻한 섬처럼 침대는 하룻밤-적어도 그곳을 빠져나오기 전까지- 포근하고 쉴만한 섬이 되어준다. 때로는 둘만의 밀월을 즐길 수 있는, 야자나무 무성한 어딘가의 남쪽 끝 섬이 되기도 한다. 이왕이면 나는 남쪽 끝 섬을 택하고 시다. 선풍기는 2단으로 돌고 있다. 1단은 밋밋하고 3단은 거슬리고 자연풍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선택은 자연스럽게 2단이었다. 책상은 벽을 마주한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 던지는 질문에 벽은 늘 묵묵부답이다. ‘벽창호 같은 사람’에게 반응을 얻어 내는 일은 책상에 앉아 해야 할 일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대답 없음에 답답해지면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은 비교적 수다스러웠다
숨어있기 좋은 방 中-75쪽
여행의 최고의 매력은 이곳이 아닌 그곳에 놓여 있다는 ‘낯설음’이다. 익숙하던 풍경들과 잠시 이별하고 평생의 한번 올법한 풍경들을 대하는 일. 그것은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자극적인 것이기에 이따금씩 배낭을 꾸리는 것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일상적인 여행의 매력 中-79쪽
일상적인 여행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교토까지 와서 고작 하는 일이 빈둥거리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 그것은 여행의 태도인 것이고 나의 여행의 태도는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에 의해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곳에서는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것처럼. 이번 교토 여행에서는 의도적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건드렸고 덕분에 나는 일상적인 여행의 매력에 매료되었다.
일상적인 여행의 매력 中-84쪽
모 대학 사진과 수업 중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사람들은 한 팔을 잃어도 자신을‘나’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다리 하나를 잃어도 여전히 자신을‘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기억을 잃는다면 그때는 과연‘나’하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의 팔이 내 팔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 팔을 내 팔이라고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질문을 듣고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기억’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나온 어느 구절처럼, 인간은 기억이란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것이다.만약 그 연료가 없다면, 그래서 우리 안에 기억의 서랍 같은 것이 없다면 아마도 아득한 옛날에 뚝 하고 두 동강이 나 버리거나 어딘가 낯선 곳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길바닥에 쓰러져 개죽음을 면치 못했을 존재인 것이다. 기억된 사물들 中-160-161쪽
어쩌면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특별하게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기억된 시간들, 기억된 얼굴들, 기억된 사물들, 기억된 감정들이 모여서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면 결국 나는 생을 좀더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카메라는 단순히 사진을 찍는 도구를 넘어서 생을 기록하는 블랙박스인 것이다.
기억된 사물들 中-160-161쪽
거리를 걷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걷다 보면 풍경들이 낯설어진다. 낯설어진 풍경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낯선 생을 읽어나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할아버지의 낡은 운동화를 보며, 욕심 없는 식물을 가꾸는 욕심 없이 살아온 듯한 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유모차와 세발자전거 끌고 산책 나온 네 식구의 고단함을 보며. 적어도 나는 생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다시 뜬금없다고 생각한다.
까닭 없이 적적해지는 오후 네 시의 풍경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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