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거닐다 - 교토, 오사카... 일상과 여행 사이의 기록
전소연 지음 / 북노마드 / 2009년 1월
절판


그것은 나에게 빈틈을 만드는 일이었다. 살면서 빈틈을 만드는 일은 삶을 무언가로 채우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만큼 쉽지 않다. 언제나 그랬다. 중요한 건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련하고 싶은 내 생의 빈틈은 ‘산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때로는 ‘여행’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산책에 대하여 中
-54쪽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는 있어야 할 것들만,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신뢰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침대, 선풍기, 책상, 거울.....
나에게 침대는 섬이다. 인생이 지칠 때 어딘가 쉴만한 곳으로 상상하는 한적하고 따뜻한 섬처럼 침대는 하룻밤-적어도 그곳을 빠져나오기 전까지- 포근하고 쉴만한 섬이 되어준다. 때로는 둘만의 밀월을 즐길 수 있는, 야자나무 무성한 어딘가의 남쪽 끝 섬이 되기도 한다. 이왕이면 나는 남쪽 끝 섬을 택하고 시다. 선풍기는 2단으로 돌고 있다. 1단은 밋밋하고 3단은 거슬리고 자연풍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선택은 자연스럽게 2단이었다. 책상은 벽을 마주한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 던지는 질문에 벽은 늘 묵묵부답이다. ‘벽창호 같은 사람’에게 반응을 얻어 내는 일은 책상에 앉아 해야 할 일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대답 없음에 답답해지면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은 비교적 수다스러웠다

숨어있기 좋은 방 中-75쪽

여행의 최고의 매력은 이곳이 아닌 그곳에 놓여 있다는 ‘낯설음’이다. 익숙하던 풍경들과 잠시 이별하고 평생의 한번 올법한 풍경들을 대하는 일. 그것은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자극적인 것이기에 이따금씩 배낭을 꾸리는 것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일상적인 여행의 매력 中-79쪽

일상적인 여행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교토까지 와서 고작 하는 일이 빈둥거리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 그것은 여행의 태도인 것이고 나의 여행의 태도는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에 의해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곳에서는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것처럼. 이번 교토 여행에서는 의도적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건드렸고 덕분에 나는 일상적인 여행의 매력에 매료되었다.

일상적인 여행의 매력 中-84쪽

모 대학 사진과 수업 중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사람들은 한 팔을 잃어도 자신을‘나’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다리 하나를 잃어도 여전히 자신을‘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기억을 잃는다면 그때는 과연‘나’하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의 팔이 내 팔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 팔을 내 팔이라고 기억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질문을 듣고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기억’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나온 어느 구절처럼, 인간은 기억이란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것이다.만약 그 연료가 없다면, 그래서 우리 안에 기억의 서랍 같은 것이 없다면 아마도 아득한 옛날에 뚝 하고 두 동강이 나 버리거나 어딘가 낯선 곳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길바닥에 쓰러져 개죽음을 면치 못했을 존재인 것이다.

기억된 사물들 中-160-161쪽

어쩌면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특별하게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기억된 시간들, 기억된 얼굴들, 기억된 사물들, 기억된 감정들이 모여서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면 결국 나는 생을 좀더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카메라는 단순히 사진을 찍는 도구를 넘어서 생을 기록하는 블랙박스인 것이다.

기억된 사물들 中-160-161쪽

거리를 걷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걷다 보면 풍경들이 낯설어진다. 낯설어진 풍경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낯선 생을 읽어나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할아버지의 낡은 운동화를 보며, 욕심 없는 식물을 가꾸는 욕심 없이 살아온 듯한 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유모차와 세발자전거 끌고 산책 나온 네 식구의 고단함을 보며. 적어도 나는 생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다시 뜬금없다고 생각한다.

까닭 없이 적적해지는 오후 네 시의 풍경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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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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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하라!"

요즘 신문 칼럼이나 잘 팔리는 책마다 예외 없이 하는 말이다. 나 역시 책과 강의 등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엇이 가슴을 뛰게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주문을 하곤 한다. 그러나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지를.


한창 자기 인생의 밑그림을 그려야 할 중고등학교 때는 학교와 학원이라는 가마솥에 넣어놓고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만 해라, 공부만 잘하면 다른 것은 다 따라온다.’며 푹푹 삶아대던 어른들이, 아이가 고등학교 문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 딴생각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몰아붙이니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자신의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나 시간이 없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가.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이 아니라 엄마의 꿈, 선생님의 꿈, 사회적으로 성공한 다른 이의 꿈을 꿀 수밖에 없는 거다. 남의 꿈이 자신의 꿈이라고 착각하며 살 수밖에 없는 거다.

길을 묻는 젊은이에게 144-145 -14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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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절판


옛이야기에서와 달리 지금 사람들이 마법의 과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건 당장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보다는 대체로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문제 때문. 과열된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소를 가득 담은 풍선만큼이나 끝없이 상승할 수 있다. 감정과 풍선의 공통점은 비가시권의 높이에서 제풀에 폭발해버린다는 것.
그에 비하면 현실이란 그네줄이나 위로 튀어 오르는 공과 같이 얼마나 건조하고 절망적인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곳까지밖에 오르지 못하며, 땅이 잡아당기는 힘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내려오니까.

체인 월넛 프레첼과 마지팬 부두 인형 중-139쪽

머릿속에서 이성의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건넨다. 추억은 그래도 상자 속에 박제된 채 남겨두는 편이 좋아. 그 상자는 곰팡이나 먼지와 함께, 습기를 가득 머금고서 뚜껑도 열지 않은 채 언젠가는 버려져야만 하지. 환상은 환상으로 끝났을 때 가지 있는 법이야. 한때의 상처를 의탁했던 장소를 굳이 되짚어가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아.
아직도 어린 시절의 마법 따위를 믿는 녀석은 어른이 될 수 없다고.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더욱 빨리 달린다. 추억이라니. 환상이라니. 그 모든 것은 내게 있어서는 줄곤 현재였으며 현실이었다. 마법이라는 것 또한 언제나 선택의 문제였을뿐 꿈속의 망중한이 아니었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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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슬픈 아시안
이시이 코타 지음, 노희운 옮김 / 도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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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는 붐베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인도 최고의 경제도시다. 세계 곳곳에서 기업이 모여들고, 화려한 영화배우의 집이 이곳에 있다. 고급 쇼핑가를 걷다 보면 메르세데스 벤츠나 샤넬, 그리고 최신 컴퓨터가 진열되어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ㅇ예전의 시내 풍경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딜 가나 오래 되고 더러운 옛 흔적을 볼 수 있다. 도시의 상징은 식민지 시절 만든 인디아게이트다. 그 주변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오간다. 거지가 손을 내밀고, 장애인 간이 열차를 타고 손으로 땅바닥을 밀면서 돌아다닌다. 조금 떨어진 장소에는 거대한 빈민가가 끝없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뭄바이는 매춘의 도시다. 북인도나 네팔에서 끌려운 여자 아이들이 지저분한 여인숙에서 아랍의 부호들에게 처녀를 빼앗긴다. 울며 소리쳐 보아야 누구 하나 귀 기울이지 않는다. 에이즈에 걸려 버려질 때까지 참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 도시의 이름을 아직도 ‘봄베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이곳은 옛날 그대로 지저분한 도시인 것이다.

8장 신이 사라져버린 하늘 인도의 스트리트 칠드런 -263-264쪽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 봄베이’의 붐베이다운 모습이다. 굳이 알고 싶다거나 알고 싶지 않다거나 따지지 않겠다. 다만 이 취재를 할 때 나는 몇 차례 정신적인 공황이 찾아와 머리는 싸매야 했다. 눈물을 흘리며 신이 사라져버린 하늘을 향해 손을 모은 일도 있었다. 그래도 길거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증언을 요청했다. 왜냐하면 믿지 않으려야 믿지 않을 수 없고,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8장 신이 사라져버린 하늘 인도의 스트리트 칠드런 -263-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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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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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명동촌에서 태어났소. 망명한 자산 계급 민족주의자들이 일군 동네라 늘 나라를 위해 살아야만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소. 이등박문을 죽이기 위해 근처 선바위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는 안중근이나 이상설을 따라 헤이그까지 갔다가 국제 대표들 앞에서 창자를 꺼내 보이며 죽었다는 이준 얘기 같은 것 말이오. 그때만 해도 나는 얼른 커서 독립군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용정으로 나가 살아가면서 차츰 나라가 없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됐소. 태어난 나라가 없으니 우리에게는 당도 없소. 나라도 없고 당도 없는 자에게는 민족도 없는 것이오. 중공당에 가입한 뒤부터 나는 내 혈관에는 국제주의의 피만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냈소. 국제당만이 우리의 당이고 나라고 정부요. 내가 알기로 지금 간도 땅에서 진정으로 항일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 중에 국제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소. 나는 일본놈들만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증오하오. 지난 시기, 그들은 가짜 정부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애국자들을 학살했소. 그런 내가 민생단 감투를 쓰게 될 줄을 정말 생각지도 못했소."

[1933년 7월 어랑촌] 중 박도만의 이야기 -231-232쪽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소망하고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면 자신이 누군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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