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산하 - 김구, 여운형, 장준하가 말하는 한국 현대사
정경모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오늘 학교에서 들은 수업 중에 '서양문화사'라는 과목이 있었다. 과목명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역사학 교수가 가르치는 과목인데, 그 교수가 오늘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특정 사실(史實)을 역사가 버리면 그 사실은 사라지고 만다."

 맞는 말이고, 나로서는 꽤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개념이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면서 한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여겨지는데, 특히 안타까울 경우는 이를 악용하여 역사를 왜곡시키는 행위를 일삼는 자가 있을 때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자가 바로 나를 국민 중의 한 명으로 소속시키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다. 대한민국 정부하에서의 역사는 '특정 사실'을 매우 많이 버리고 있다. 그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도저히 여운형을 버린 이 나라를 이해할 수가 없다. 여운형이야말로 진정한 리더로서 중국의 손문이나 베트남의 호지명과 같은 인물임에 틀림없는데도 대한민국은 그를 살해한 것도 모자라 6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의 확실한 복권을 주저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은인을 도륙해서 야산에 유기하는 짓거리와 같은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괴현상의 근본 원인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첫단추부터가 잘못 채워진 데에 있으며, 그 괴현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부터 되새겨 보아야 한다며 김구, 여운형, 장준하의 운상정담(雲上鼎談)을 시작하고 있다. 

김구 ...개인의 일이건 민족의 일이건 마찬가지지만, 미로에 빠져들어 벽에 부딪쳤을 때는 맨 처음에 들어섰던 길이 어디였는지를 생각해 내야 하네.」 

 저자는 아주 극단적인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책을 쓰고 있으며, 극렬한 반미, 반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을 옹호하느니 북한을 옹호하고, 이승만을 칭찬하느니 김일성을 칭찬하는 노선을 택하고 있다. 또한 여러 분명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확실한 것으로 해석하여 늘어놓은 부분도 많았다. 예를 들어 김구와 여운형을 살해한 것은 이승만이라고 아주 단정을 지어 버리거나 김구가 남북협상을 하러 평양에 갔을 때 김일성의 할아버지와 만나 깊은 공감을 나누었다거나 하는 유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 역시 누군가에 의해서 폐기되어 버릴 뻔 했던 진짜 사실일 수도 있는 것이고, 이것들을 기록하는 일을 두고 차마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실은 내가 여운형 평전을 읽었을 적에도 확실하게 캐치한 기억이 없는 사건인데, 상당히 나의 흥미를 끌었다. 

여운형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본 국기를 지워버린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 일을 한 것은 우리 <중앙일보> 쪽이 먼저였지만 우리 쪽은 차마 총독부에 매달려 용서를 비는 짓을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스스로 간판을 내리고 신문을 폐간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송진우 쪽은 <동아일보>가 정간 처분을 받자 매국노 이완용의 일족까지 동원해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을 학살하는 데 앞장 선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면서...」

 내가 고향 집에서 살 적에 우리집은 동아일보를 구독했는데, 그 신문은 일장기 말소 사건을 두고 항상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곤 했던 것이다.
 책에 의하면 이승만은 오로지 권력을 잡기 위하여 민족 통일을 팔아먹었으며, 김구를 보고 '영어도 모르는 촌놈'이라고 면전에서 모독하였고 스스로 그렇게 잘난 체 하던 영어 실력도 기실 형편없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이승만의 악행은 수도 없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해방 후 남한의 가장 지랄 맞았던 점은 다름 아닌 친일분자들의 득세라고 할 수 있겠다.

장준하 ...제주도 4 · 3봉기가 그것인데, ...이 무장 항쟁은 1957년까지 1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동안 도민 25만 명 중 3분의 1인 8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서 백범 선생님께서 조병옥더러 참으로 고약한 놈이었노라고 격한 말씀을 하셨는데, 당시 미 군정청 경무국장 자리에 있던 그 자는 "제주 도민은 휘발유를 뿌려 전부 태워 죽여라. 대한민국을 살리는 길이면 제주 도민쯤 말살시켜도 좋다"는 말을 내뱉었다고 합니다」 

 위의 조병옥은 그나마 독립운동가였으나, 당시 대부분의 경찰서에는 왜정 때의 고등경찰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쪽발이 개 노릇 하던 놈들이 그대로 남아 공권력을 행사하고 앉았으니 나라 꼴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참, 그리고 1956년도에 이르러 이승만이 얼마나 인심을 잃었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실려 있었다.

장준하 ...그는 개표 상황을 보는 순간 너무나도 표차가 엄청나서 등골이 오싹하더라는 겁니다. 어디를 보나 모두 조봉암의 표 뿐이었는데, 공무원조차도 대부분 이승만이 아니라 조봉암에게 표를 던졌다니까요. 하는 수 없이 조봉암의 표를 가운데 끼고 아래 위로 이승만의 표를 한 장씩 붙인 샌드위치 표묶음을 만들었지만, 이승만의 표를 위 아래에 붙일 것조차 모자랄 지경이었다더군요.」 

 이승만은 이후 조봉암을 북한과 내통한 스파이라고 모함하여 사형 판결 10여 시간만에 집행을 해 버렸다.
 여기서 이 이야기까지 더해진다면 이승만은 그야말로 개라고 하면 개한테 실례가 되는 놈이 되는데, 그는 김구를 보고 '반역자'라고까지 지칭했다고 한다. 

여운형 ...유엔 조선위원단이 '자신들이 뽑은 존경할만한 시민'의 대표로 백범 선생님과 면담해 가지고, 한국에서의 민주주의의 현황에 대해 의견을 묻고자 했을 때, 조병옥은 '반역자이며 배신자인 김구 같은...' ...이승만은 더욱 솔직하게 '김구는 테러행위에 종사했으니까 반역자로서 처치해야 한다'고 언명했습니다.」 

 자기 밥그릇에 거슬리는 자는 가차없이 죽여버린다는 논리이다.
 책은 후반부에 가서 북한을 적극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하는데, 거기서 김일성, 김정일의 독재를 가지고 '미국에 대항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양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심히 거슬렸다. 이는 저자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 같은데, 그는 민족적 자유를 획득하기 이전에는 개인의 자유 따위는 배제 내지 보류되어도 좋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글쎄, 나는 그렇게 하면서까지 민족을 끌고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는 독재 정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또한 저자는 북한이 대단한 이유로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즉 미국이나 일본 따위의 도움 없이도 나라를 꾸려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꾸려간 것이 과연 제대로 꾸려간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물론 위와 같은 발상 역시 지나치게 폐쇄적인 민족주의로 인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하여 한국 정부의 형성 과정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이다. 반면 앞뒤 가리지 않는 저자의 민족주의가 상당히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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