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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평점 :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
신상목 저
뿌리와이파이 간
2017.08.07 간
8월에 읽은 ‘코리아 생존전략’과 9월에 읽은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를 읽으면서 일본은 어떻게 그렇게 우리와 다른 모습으로 개항을 맞이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마침 이 책이 지난 8월에 출간이 되면서 화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16년의 경험을 가진 외교관이라 합니다. 외교관으로서 해당 국가의 역사와 사회, 문화를 이해해야 제대로된 외교 정책이 입안될 수 있다고 하며, 평소에 연구해 온 일본의 근세사를 ‘생활문화사’의 관점에서 소개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저자가 전문 역사학자가 아님에도 내용 구성이 무척이나 풍성하게 느껴지며, 각 장은 읽는 재미가 느껴지게끔 쉬운 문체로 흥미롭게 쓰여 있어서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토요토미 가문과 토쿠가와 가문의 일대 격전을 벌였고 토쿠가와 가문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토쿠가와 가문은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 (현재의 토쿄)에 막부를 설립하였습니다.
에도시가 위치한 간토오 지방은 원래 얕은 늪지대여서 경작이 쉽지 않았으나, 토쿠가와 가문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이 지방으로 밀려온 뒤에 절치부심의 심정으로 그 지방을 개간하였고, 오랜 노력 끝에 일본 최대의 곡창지대로 탈바꿈하였다 합니다.
기존의 권력의 중심이었던 교토/오사카와 떨어진 곳에 또다른 정치/경제의 중심이 생겼고, 이러한 분립 구조가 일본의 역사를 바꾼 행운이 됩니다.
에도에 위치한 토쿠가와 막부는 전국의 지방영주들인 다이묘들에게 ‘천하보청’이라는 공공 사업의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또한 에도에 주기적으로 와서 일정 기간 머물게 하는 ‘참근교대제’를 실시했습니다. 이 두가지 의무를 이행하느라 다이묘들의 재정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세수를 자신의 부를 위해 축적할 여유가 없게된 각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 산업을 장려하고, 어떻게든 세수를 늘리기 위한 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게 되었고, 이론 보다 실제가 위주가 되는 학문 경향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공공 사업에 의한 경제 부양 정책이라고나 할까요.
이러한 배경에서 저자는 중요한 항목들을 통해 그 시대를 얘기합니다.
제 4장. 일본의 된장이라고 할 미소가 원래는 전투식량이었고,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기술의 경쟁이 치열했다고 합니다. 에도 시대의 평화 가운데에서 민간의 미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시장에서의 경쟁이 치열했고, 보다 값싸게 공급이 되기시작했다고 합니다.
제5장. 참근교대제로 인해 에도로 향하는 도로가 발달하고, 도로 주변의 여행 관련 시설들도 제대로 갖춰지게 됩니다. 참근 교대제로 인한 공적인 여행의 일상화되고, 인프라도 갖춰지다 보니, 개인적인 여행 또한 증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쿄토와 오사카, 에도 등에는 전국에서부터 관광객이 몰려왔고, 그시대로부터 불과 백여년 전인 전국 시대에는 일반 평민들은 여행이 불가했고, 무사 계급들도 여행은 목숨을 걸어야 가능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에도 시대의 평화 가운데에서 전국적인 여행의 붐이 일었다 하니,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지요. 경제적 기반과 더불어 전국적인 치안의 확립이라는 기반이 잡히지 않고서는 안될 일이겠습니다. 이 때 부터 전국 시대의 지방 중심의 가치관에서 일본인들에게 일본 전국을 하나로 보는 가치관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6장. 뜻밖에도 출판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독서 문화는 중국은 물론 조선에 비해서도 크게 뒤졌으나,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지적재산권으로서의 판권의 확립, 서적 유통업으로서의 대본업의 발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출판 강국 일본의 현재 모습의 근원을 짐작하게 합니다. 유명한 작가의 연재 소설은 그 소설의 다음 회차가 출판되기를 전 일본 열도가 기다리고, 출판되면 그 이야기로 전 열도가 이야기 꽃을 피웠다 합니다. 이러한 출판 문화의 발달 역시, 민간의 소비 성향에 따라 시장이 발전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제7장. 일본 파나소닉의 창설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예전에 마쓰시다 정경숙이란 것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에 관련된 책이 우리나라에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그 ‘숙’이란 것이 교육에 관련된 기관을 의미했는데 그 형태가 우리나라의 어떤 것과도 조금은 달랐던 것 같아서 신기했습니다. 숙 일본말로는 주쿠는 개방형 사설 교육기관으로 전문 지식인이 지식의 창출과 전수 활동 만으로도 소득을 얻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합니다. 조선시대의 서원과 비교하자면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테라코야라는 사설 교육기관도 있어서 읽기/쓰기와 함께 주산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의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교육 체제 역시 민간, 시장 주도의 현상이었다 합니다.
제 8장. ‘요미우리’라는 뉴스 전달 매체가 당시 인구 백만의 도시 에도를 배경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면, 이는 당시 발달하고 있던 상업과 더불어 소비자들에 대한 광고 매체로까지 활용이 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역시 민간 주도의 자생적 인쇄매체 입니다.
제 9장. ‘동아시아~’ 책에서 김시덕 교수도 상세히 다루었던 ‘해체신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제대로 된 사전도 없이 3년에 걸쳐서 일본어로 번역을 했다합니다. 1700년대의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804년 세계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의 실용주의적 사고 방식으로 기존의 틀을 깨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의학 분야에서 나타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역시 민간 주도의 결과 입니다.
제 10장. 한국에 대동여지도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이노 다다타가라는 지도 제작자가 있었습니다. 이노는 원래 천문학에 관심이 있었고, 어쩌다 막부가 후원하는 지도 제작 업무를 맡게되어, 자신의 천문지식을 활용해서 상세한 지도를 작성합니다. 에도 시대의 평화를 배경으로 한 여러 개간 사업, 간척 사업, 건물 건축 사업 등을 통해 당시 일본의 측량 기술은 매우 발전해 있었고, 장비와 도구를 구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합니다. 이런 물적 기반에 자신의 천문지식을 결합시킨 이노는 놀라운 열정으로 5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3만 킬로가 넘는 일본 전국의 해안을 직접 실측하였다 합니다. 이노 다다타카의 업적은 지금 봐도 놀랐습니다. 당시의 막부도 이노 다다타카의 업적을 잊지 않습니다. 비록 군사 기밀유출의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민간 배포는 금했지만, 막부는 이노 다다타가의 자손 대에 이르기까지 후원을 지속합니다. 이노 다다타가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합니다. 조선에서의 김정호의 운명과는 사뭇 비교가 됩니다.
제 11장은 사전 편찬의 이야기입니다. 최초의 네덜란드어 사전(난일 사전)은 민간이 주도했지만, 더 상세한 난일 사전은 막부가 주도했습니다. 민간이 주도한 것을 막부가 주도하여 완성한 모습입니다. 사전 편찬은 어찌보면 지식 인프라 사업일 수 있습니다. 필요할 때에 필요한 역할을 하는 막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12장은 섬유 산업의 얘기입니다. 목면을 중심으로 한 섬유 혁명이 섬유 자체의 제조 뿐 아니라, 염색을 통한 디자인 고급화, 유통에 이르기까지의 밸류체인이 인구 백만이라는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 에도를 배경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당대 최고의 전문가가 다른 전문가들을 모아 상업적 카탈로그 까지 만들어 배포했다고 하니 그 배경이 되는 상업적 인프라가 어느 정도였을지요,.
제 13장은 염색된 섬유가 유통하게 되면서 이것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한 막부가 ‘사치금지령’ 을 내려 옷의 색깔을 쥐색, 차색, 남색의 세가지로 제한했다고 합니다. 막부가 항상 도와주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색의 제한이 도리어 허용된 색을 중심으로 한 색의 세분화 및 표준화를 낳았다고 합니다. 중간색, 혼합색 등의 미묘한 색변화가 일본의 전통문화의 중심이 되어 ‘이키’, ‘야나세’라고 하는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를 형성했다고 합니다. 역시 민간 주도의 섬유 산업이 어떻게 당시의 문화를 형성해서 오늘까지 내려오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 14장은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임진왜란 때,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갔는데, 일본에서의 상황은 마침 그들의 기술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삼평이란 도공이 끌려간 곳은 일본의 사가 번의 아리타라는 지역. 사가 번의 번주는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서 새로운 산업이 필요했었고 도자기는 그에 알맞은 제품이었다 합니다. 번주의 지지와 후원을 등에 입고 아리타 도자기는 일본 전국으로 유명해집니다.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면서 일본의 주요 수출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럽에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합니다. 중국의 도자기가 중국 내부 사정으로 유럽으로의 공급이 줄어들면서 일본의 도자기가 그 대안으로 인식되었고, 아리타 도자기는 중국산을 대체할 만큼의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합니다. 일본은 그 무렵에 유럽에 대한 수출산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15장에서는 19세기 일본 도자기 산업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해외로 소개되었던 일본 도자기 산업이 개항기를 맞이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서게 됩니다. 1873년 오스트리아 빈의 만국 박람회는 오늘날의 그 어떤 행사보다 컸다고 합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가 많이 없던 시대에 박람회는 그러한 정보가 모이는 장소였기에 수백만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그 박람회에 일본에서는 당시의 기술로는 어렵다고 생각했던 2미터짜리 초대형 도자기를 출품하여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고, 박람회 이후 수출물량이 거의 2배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 박람회는 민간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민간 주도로 참가하였고, 1877년에는 뉴욕 브로드웨이에 도자기 전문 상점을 내기도 하였다 합니다.
제16장에서는 에도 시대 지식의 흐름 세가지로서 오규 소라이의 유학, 이시다 바이간의 심학, 그리고 난학을 얘기합니다. 오규 소라이는 공자의 ‘원전’을 기반으로 주자학을 비판하였다 합니다. 이시다 바이간은 심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상업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 이라는 것을 가르쳤고, 이러한 심학 사상은 당시 세력을 키워가던 상인 세력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제 17장과 18장은 에도 시대의 화폐 경제 현황과 그 문제점을 짚습니다. 에도 시대의 일본에는 금, 은, 동 세가지 화폐가 있었다 합니다. 금화는 동부의 에도 지역을 중심으로, 은화는 서부의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쓰였으며, 동화는 자디잔 잔돈의 역할을 했습니다. 서부에서 동부로, 동부에서 서부로 관광여행을 하거나, 참근교대제 때문에 이동을 한다 했을 때, 금화를 은화로, 은화를 금화로 환전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 환전을 담당한 상인들이 ‘료가에쇼’였으며, 이들이 커지면서 미쓰이, 스미토모 등의 재벌의 기원이 되었다 합니다. 당시 아직 전세계적으로 화폐 경제에 대한 경제학적 지식이 전무했던 상황이다 보니, 막부가 정책적 실수를 여러번 저질렀다 합니다. 금의 비중을 줄여서 화폐를 내놓는 바람에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합니다. 각 지방 번은 ‘한쓰’라는 번 지역내 화폐를 사용했다 하는데, 이들 지역 화폐는 금화나 은화와 같이 자체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않은 그야말로 불태환화폐, 신용화폐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도를 활용해 각 번은 상업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합니다. 향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는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이런 상업활동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였기에 독자적인 사절단을 유럽에 보낼 수도 있었다 합니다.
에도 시대 민간 경제는 화폐 중심으로 발전을 했음에도, 막부에서 무사계급에 지급하는 녹봉은 미곡 본위였다고 합니다. 쌀 생산의 생산성 향상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미곡의 가격이 하락하여 무사 계급의 지위가 상인 계급 대비 하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합니다. 마치 유럽에서 신흥 부르조아 계급이 귀족 계급 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과 유사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에도 시대라는 기간 동안 일본은 안정된 정치를 배경으로, 경제, 사회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기에 19세기에 밀어닥친 개항의 물결에 대응할 수 있었다 합니다. 그러한 발전이 중앙 정부가 아닌 민간의 수요 증가에 따른 시장의 힘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저자의 기조입니다.
저자의 의도가 ‘생활문화사’를 통해 그러한 부분을 조명해 보자는 것이었지만, 독자로서는 몇가지 추가적으로 궁금한 점들이 생기기는 합니다.
첫째로는 수요의 증가에 상응하는 공급의 증가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물론 책에 단편적으로 소개되는 바로는 쌀 생산의 생산성 향상이 있었다는 점, 도자기 등 다양한 상품이 제조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이 있긴 합니다만, 그러한 내용이 종합적으로 다루어진 챕터가 하나 더 있었더라면 아쉬움은 덜했을 것 같습니다.
둘째로는 민간에 축적된 부가 증가하면서 일본 전체가 발전했다는 것인데, 그렇게 축적된 부는 어떻게 분배가 되었을지, 빈부격차는 어땠는지 등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1800년대의 유럽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극심한 빈부 격차는 결국 사회주의 운동을 낳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산업혁명 이전이었기에 유럽의 산업 자본주의에서와는 상황이 달랐겠지만, 부의 축적은 언제나 불균등할 수 밖에 없었을 테고, 이로 인한 사회불안은 없었던 것인지, 있었다면 어떻게 해결을 하고 넘어왔는지 등이 궁금해 졌습니다.
세째로는 당시의 일본의 상황이 유럽에서의 부르조아 혁명기의 상황과 어떻게 매칭이 될까 하는 점입니다. 어차피 사회문화적 배경이 다르기에 비교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비교를 통해 조금 더 알게 되는 점도 있을 듯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메이지 유신에 대한 다른 책들을 찾아보는게 맞을 것 같기는 합니다.
지금도 강력한 관료제의 나라라고 인식되어 있는 일본인데, 그 발전의 원동력은 민간 주도의 시장 경제였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어떤 부문은 정부의 방임이 필요하고 어떤 부문은 정부가 주도하는게 필요할 텐데, 일본 에도 시대는 그러한 역할 배분이 잘 맞아들어갔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