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희미하게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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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타인이었다. 그랬던 우리가 어느 순간 지인이 되고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된다. 그 순간은 어떻게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을까. 내가 몰랐던 당신이, 나와 단단하게 결속된다고 확신하는 순간 말이다. 그런가 하면 연인이었던 사이가, 친구였던 사이가 타인으로 전락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내 아픔을 전해도 괜찮다고 믿어 모든 걸 내어주고 싶었던 상대가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척 그냥 지내는 것, 그게 냉혹한 인생이라고 故 정미경의 유고 소설집『새벽까지 희미하게』속 인물들은 말하는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과 함께 보낸 순간의 기억으로 냉혹한 인생을 견디고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내내 아프면서도 따뜻하게 남는다. 유작 소설이라는 걸 알아서 그렇기도 하고 고통과 불행 속에서 버티며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안타까워서도 그렇다. ​세상 어디에도 속을 털어놓을 수 없는 쓸쓸하고 고독한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 그래서 우연하게 마주한 타인에게 마음을 기대고 위로받는다. 금융사에서 잘 나갔지만 실직한 남자 공과 마트에서 가전을 판매하는 금희의 짧은 연애를 다룬 「못」, 잘못 도착한 메시지로 인해 연락을 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말하며 소통하는 같은 성씨를 가진 두 남녀의 이야기 「목 놓아 우네」, 우연하게 동행한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이 보낸 하루를 담담하게 그려낸 「장마」는 타인이었던 이들이 서로의 삶 속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잘 보여준다.

 

 「못」에서 공과 금희는 그들의 연애가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만남을 지속하는 동안 금희는 행복함을 표현하지만 공은 내내 속내를 감춘다. 금희는 공의 삶에서 정착지도 도착지도 아니라는 걸 잊을까 두려운 듯 말이다. 다시 일을 하자는 연락을 받고 공은 금희가 아닌 별거하는 아내에게 전화한다. 금희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 게 이별하는 가장 정확한 방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공은 알고 있었다. 금희와 보낸 소소하고 보잘 것 없는 순간이 얼마나 눈부시고 얼마나 환했는지.

 

 좋아하는 감정을 이용해 실적을 가로챈 여자에게 고통을 받은 남자, 어린 시절 가족을 잃고 힘겹고 외롭게 살아온 여자가 말이 아닌 문자로 아픈 마음을 달래고 감정을 고유하는「목 놓아 우네」는 익명성이 주는 안도감 혹은 처절한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알고 지내는 동료나 가족에게 할 수 없는 말들을 온라인 게시판에 쏟아내고 낯선 타인의 댓글로 위로받는 우리의 모습. 그러나 때때로 자신을 위장하고 진짜 이야기는 감출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고통의 감각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심을 고통스럽게 했다. 한가지 사실만 빼곤 그에게 놀랍도록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다고 생각했으나 진짜 자신은 그에게 말했던 것들과 말하지 못했던 것들 사이에 있다는 생각을 내내 하고 지냈다.” (「목 놓아 우네」, 158쪽)

 

 설령 감추고 있다 해도 함께 보낸 시간은 아름답고 따뜻하다는 걸 우리는 놓칠 수 없다. 「장마」에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딸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윤이 출장길에 나선 남자에게서 느낀 ​감정 같은 게 그러하다. 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며 재미없는 농담을 건네며 웃고 있는 남자. 타인이었던 남자가 아는 사이가 되는 순간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내가 여기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마음이 전달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은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나온 삶에서, 우연히 다가온 따뜻하고 빛나는 시간들은 언제나 너무 짧았고 그뒤에 스미는 한기는 한층 견디기 어려웠다. 그랬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다.” (「장마」, 189)

 

 그 모든 순간은 시간이 지나서 늦게 도달하기도 한다. 불행한 삶 속에서 언제나 긍정적이었던 송이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단정했던 「새벽까지 희미하게」​의 유석이 송이가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그 시간의 소중함을 알아차리고 정신과 의사로 환자를 상담하면서도 가족에 대해서는 무심해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못하는「엄마, 나는 바보예요」에서 조는 불안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 후에야 어떤 순간을 돌아본다.

 

 우리는 소설 속 누구와 같을까, 아니 누구와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온라인에서 글과 사진으로 타인의 삶을 보며 때로는 속상한 마음을 위로하며 기쁜 일을 공유한다. 타인인 듯 타인이 아닌 이들에게 온기를 전하기를 전하고 반기를 원한다. 내게 정미경의 소설은 그런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녀를 애도하는 정지아, 정이현, 그리고 남편 김병종 화가의 산문을 읽는 동안 그런 확신은 커졌다. 소설을 읽는 일은 타인의 삶을 읽는 것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타인이었던 나와 당신의 사이가 이제는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언젠가 다시 타인이 될지라도 당신의 소설을 읽고 사랑한 나는 당신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 두렵고 불안했던 시절 당신의 소설을 만나 위로받았다는 걸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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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2-03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가 되었던 뭇타인들과 현재의 타인들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정미경 소설가의 소식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 그녀의 책 두 권을 사두고 이제 읽으려 해요. 김병종 화백의 글이 실린 책도 같이요. 그가 정미경 소설가 의 동반자라는 사실은 얼마 전에 알았아요. 그의 강연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사람 참 순하게 보이는 그런 분이었어요. 목소리도 너무 순하고 부드러워 노곤해지는 부작용이 있었지만요. 라틴기행화첩 좋아합니다

자목련 2018-02-05 13:57   좋아요 1 | URL
타인과 타인사이에서 살아오는 시간, 그리고 타인이 되는 순간을 생각했어요. 김병종 화백도 대학교 시절에 소설을 썼다고 해요, 그 인연으로 아내 정미경을 만났다고 해요.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글은 뜨겁고 애절했어요.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하겠지요. 환한 햇살을 질투하듯 차가운 바람이 부네요. 다정한 공기가 가득하길 바라요.

서니데이 2018-02-04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좋은 일들 가득한 한 해 되세요.
날씨 조금 많이 춥지만, 따뜻한 일요일 보내세요.^^

자목련 2018-02-05 13:54   좋아요 0 | URL
입춘이 지났는데 맹렬한 추위가 몰려오네요. 서니데이 님, 포근한 오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