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눈을 뜬다. 벽지도, 커튼도, 가구도, 방 모양도 처음 보는 것들이다. 내 방이 아니다.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오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서울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심지어는,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진다. 김승옥 단편소설의 한 장면과 같이, 눈을 떠 보니 내 코는 방 벽에 바싹 닿아 있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살펴보니 과연 낯선 곳이었다. 잠결에서 깨어 '아, 난 여행을 떠나왔지 집에서 아주 먼 곳으로' 하고 깨닫는 순간까지 몇 초가 더 흐른다. 짧지만 막연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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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행지에서 낮에 잠들었다가 눈을 뜬다는 것. 그건 어떤 여행지의 특별한 곳을 찾아가 보고, 감동하는 것만큼 독특한 설렘이 있는 일이다. 그냥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것일 뿐이지만, 그렇게 눈을 뜨면 다시 처음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처음부터 다시 솟는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긴다. 그리고 내가 깨어난 그 곳, 그 나라를 사랑하게 된다. 나만의 시간을 사랑하게 된다. 그동안의 나쁜 기억, 힘든 기억은 모두 잊고 머리속은 텅 비워진다. 그 안에 뭔가 더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낮잠」중에서
휴일의 공원에서 책을 펴놓고 앉아 몇 번이나 '맞아, 맞아'하고 감탄사를 연발했는지 모릅니다. 패키지 여행이라면 어림도 없을 낯선 여행지에서의 낮잠은 물론이고 여행을 일상으로 만드는 작은 카페, 공원, 헌책방, 동물원 가기도 그렇고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추억을 나눌 수 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챙기기까지...개인적으로 꿈꾸는 여행과 가까워 즐겁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획일적이지 않고 보통의 여행과 달리 느릿 느릿한 여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였습니다.
수 년간의 여행 경험을 글과 그림으로 엮어낸 이우일씨의 <좋은 여행>. 단편으로 이뤄진 여행기를 따라가다 보면 에피소드 속에 드러나는 그만의 여행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행자의 특권을 남발하지 않고, 비록 실수로 벌어진 일이긴 하나 아홉 시간의 낡은 기차 여행을 불만없이 받아들인 그의 가족을 보며 여행자가 지녀야할 낙천적인 자세의 미덕을 배워 봅니다.
키득키득 웃다보면 캄보디아 여행기에 이르게 되는데 제3세계 국가를 여행하며 겪는 고민까지 드러납니다. 캄보디아의 소수민족이 문명의 이기에 전통을 내어주고 빈민처럼 사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삶은 내게 무언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그. 그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나도 우리도 행복해져야겠다고 말하는 그에게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새로운 여행 방식을 찾는 날 역시 머지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여행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공정여행 가이드북'이라는 타이틀을 부제로 달고 있는 책, <희망을 여행하라>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비교적 생소한 개념인 '공정여행'은 '여행에서 만나는 이들의 삶과 문화를 존중하고, 내가 여행에서 쓴 돈이 그들의 삶에 보탬이 되고, 그곳의 자연을 지켜주는 여행'이라고 합니다.
만약 세계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여전히 세상을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은 단 14명뿐이다. 그중 8명은 유럽인이고, 2.8명은 아시아와 호주사람이고 나머지 2.2명은 북미(미국, 캐나다)인이며 마지막 남은 1명이 아프리카와 남아케리카, 그리고 중동이라는 거대한 세 지역을 모두 합한 한 사람이다.
만약 한 대륙의 인구가 100명이라면 서유럽인 69명이 여행하는 동안 아프리카 사람은 1~2명이 여행하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지구촌을 살아가는 나머지 86명의 사람에게 여행이란 평생을 두고 갈망하는 이룰 수 없는 소원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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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쓰는 돈이 100만원이라면
그 중 40만 원은 비행기에, 그 중 20만 원은 여행사에 나머지 20만 원은 우리가 머무는 호텔에서 먹고 마시고 쓰는 수입품을 들여오기 위해 다시 1세계로 흘러가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머무는 숙소가 다국적 호텔이나 리조트라면 우리의 여행이 떠나기 전 모든 비용을 여행사에 지불한 패키지여행이라면 현지에 남는 돈은 더욱 작고 미미해지는 것이다.
투어리즘 컨선은 우리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를 여행할 때 여행에서 쓰는 돈 중 70~85%는 외국인 소유 호텔이나 관광 관련 회사들에 의해 해외로 빠져나가고 현지의 공동체에 돌아가는 것은 단지 1~2% 뿐이라 했다.
-「여는 글」중에서
쉽게 풀이하자면 여행으로 얻는 혜택을 그 지역에 다시 환원하고 나보다 남을 위한 배려를 우선한다는 개념이 아닐까요. 지금도 지구상 곳곳에서는 관광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원주민의 거주지와 생업을 뺏고 리조트와 사파리 여행지로 변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개발된 관광지는 여행자들로 붐비겠지만 정작 관광으로 인해 쏟아져 들어오는 수입은 다국적 호텔이나 여행사로 향하게 됩니다. 원주민들에게 돌아가는 역할은 일용직 노동자, 객실 청소부, 단순 노무직 또는 수공예품 생산자가 고작입니다. 실제로 히말라야에서는 빈곤한 이들이 고산병에 시달리며 하루 300루피(약 5천원)의 돈을 벌기 위해 때로 목숨을 걸고 트레킹의 포터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행지에서 사용하거나 보는 것, 얻는 것 등 많은 일들을 현지인에게 빚지고 있지만 여행자가 관광산업의 구조를 훤하게 알지 못하는 한, 현지인에게 도움을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은 그간 볼 수 없었던 관광산업의 부조리한 이면을 알려주는 한편 '인권, 경제, 환경, 정치, 문화, 배움'이라는 측면에서 여행의 새로운 면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여행자가 다양한 여행 방법을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공정여행의 방법으로 1년에 네 차례 바다를 가르며 지구의 환경, 인권, 빈곤문제 등을 배우는 피스보트라는 일본의 NGO를 소개하고, 국경을 넘는 배움을 가르치는 제천 간디학교를 예로 들기도 합니다. 여행서이면서 인문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네요.
'공정여행'이 너무 어려워 보인다구요? 부족함은 제 소개의 모자람으로 생각하시고, 책에 실린 아주 쉬운 방법들을 소개합니다.
*공정여행자가 되는 10가지 방법
1. 지구를 돌보는 여행 - 비행기 이용 줄이기, 1회용품 쓰지 않기, 물을 낭비하지 않기
2. 다른 이의 인권을 존중하는 여행 - 직원에게 적정한 근로조건을 지키는 숙소, 여행사를 선택하기
3. 성매매를 하지 않는 여행 - 아동 성매매, 섹스관광, 성매매 골프관광 등을 거부하기
4. 지역에 도움이 되는 여행 -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 음식점, 가이드, 교통시설 이용하기
5. 윤리적으로 소비하는 여행 - 과도한 쇼핑 하지 않기, 공정무역 제품 이용하기, 지나치게 깎지 않기
6. 친구가 되는 여행 - 현지 인사말을 배우고 노래와 춤 배우기, 작은 선물 준비하기
7.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여행 - 생활 방식, 종교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기
8. 상대를 존중하고 약속을 지키는 여행 - 사진을 찍을 땐 허락을 구하고, 약속한 것을 지키는 여행
9. 기부하는 여행 - 적선이 아니라 나눔을 준비하자. 여행 경비의 1%는 현지의 단체에!
10. 행동하는 여행 - 세상을 변화시키는 여행
출판사에서 마련한 도움의 기회도 있습니다. 이벤트를 통해 공정여행의 첫 발을 내딛어 보세요.
여전히 '좋은 여행'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확실한 답을 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휴식과 재충전' 같은 답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에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하나 분명한 것은 '공정여행'이 보다 보편적인 여행 방식이 되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좋은 여행'을 찾기 위한 여정을 지속하다 보면 세계 곳곳에서 지금보다 훨씬 자주 희망을 보게 되리라는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