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품절


"1982년에 자네 부친이 일본에 왔을 때, 이런 얘기를 했다네. 한국전쟁 때 부상을 당해 부산까지 후송됐는데, 거기서 부산 앞바다를 보면서 '내 고향은 저 바다 건너인데......'라고 생각하면서 눈물만 흘렸다고. 그때부터 삼십년 동안, 그런 얘기 남한테는 한번도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 일본에 와서 우리한테 한다면서 엉엉 울더라니까."
이번에는 귀를 막지도 욕지기를 느끼지도 않았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중공군이 쏜 총알에 부상당해 후송된 부산에서 바다를 보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 글을 쓰느냐면 바로 이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의 리얼리티는 이 현실에서 약간 비껴서 있는 셈이다.-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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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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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내,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토오꾜오로 가겠다고 호언하고 어느 친구에게는 전기기술에 관한 공부를 하러 간다는 둥, 학교선생님을 만나서는 고급단식인쇄술을 연구하겠다는 둥 친한 친구에게는 내 5개 국어를 능통할 작정일세 어쩌고 심하면 법률을 배우겠소라고 헛소리를 탕탕 내뱉은 이상이 왜 하필이면 1937년 토오꾜오에 가서 죽음을 맞이했느냐는 것이다. 이 죽음에는 비밀의 냄새가 잔뜩 풍긴다. 이상이 '종생기'에서 말한바, "천하에 형안(炯眼)이 없지 않으니까 너무 금칠을 아니했다가는 서툴리 들킬 염려가 있다"는 문장 그 자체가 바로 이 이해할 수 없는 시간에 이해할 수 없는 장소에서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한 방편이 될 것이다. 나의 토오꾜오행이란 그러니까 이상이 남긴 그 비밀을 알고 싶은 욕망의 소산이기도 했다.-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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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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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리얼리티는 민족주의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아스트리드나 겐게쯔의 리얼리티를 닮았다. 핏줄로 구성되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핏줄을 얘기할 때, 그건 그들과 나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핏줄은 한 집의 경계를 만들고 일가를 구성하고 촌락을 형성하며 민족국가를 건설해 그 너머를 향해 완강한 경계선을 긋는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이 경계선을 넘어간 자들을 핏줄은 거부한다. 아스트리드처럼 입양됐든, 겐게쯔의 아버지처럼 밀항했든.-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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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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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뽕은 필로폰(Philopon), 즉 '일을 사랑한다'라는 희랍어에서 유래한 상표명을 붙이고 대일본제약이 1940년부터 시판한 각성제로, 약물로서의 이름은 메스암페타민이다. 이 합성약물의 역사는 1892년 일본 도쿄대 의학부에 있던 나가이 나가요시 교수가 오래 전부터 한방에서 천식약으로 사용되던 마황(麻黃)에서 에페드린이라는 물질을 분리해내면서 시작된다. 이듬해 나가이 교수는 이 에페드린을 환원해서 메스암페타민을 만들어낸다. 각성제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시피 메스암페타민은 중후신경을 흥분시켜 잠이 오는 것을 억제하고 피로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약물이다.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당시 이 히로뽕을 대량 생산해 군인들과 군수공장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다. 특공임무를 맡은 군인들에게 공포를 없애주고 밤군무를 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에게 졸음을 쫓기 위해서였다.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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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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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은 고립된 섬이었잖아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여권을 구하든지, 아니면 밀항하든지 둘 중 하나였죠.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인이나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아쉬워하죠. 이번 생에는 글렀으니까 혹시 다음 생에라도? 그런 게 저녁 여섯시에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태극기가 있는 시청 쪽을 향해서 몸을 돌리고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던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에요. 그런데 정민의 삼촌은 '왜 이런 체제뿐일까?'라고 질문한 거죠. 바로 그 무렵에 중앙전신국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것을 직접 봤고, 청원경찰에게 폭행을 당하죠. 문제는 그게 우연한 폭행이었다는 점이었어요. 폭력에 관한 한 제비뽑기를 하는 사회인 거죠. 단군의 자손으로 태어난 한민족으로서 태극기를 향해서 애국가를 목청껏 부르던 사람도 그 다음 순간 아무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게 되고, 심지어는 사형까지 당해요. 놀라운 반전이죠. 그런 일을 당하면 한민족이니 대한민국이니 유신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런 걸 깨닫고 나면 단 하루도 버틸 수가...-329-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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