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 명작 동화에 숨은 역사 찾기
박신영 지음 / 페이퍼로드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p 87

블루투스_Bluetooth10세기경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통일한 덴마크 헤럴드 왕의 별명이다. 이 특이한 별명의 유래로는 그가 워낙 블루베리를 좋아해 치아가 늘 파랗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파란색 의치를 해 넣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무선 전송 기술인 블루투스를 개발한 회사는 통일의 위업을 이룬 블루투스 왕처럼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이 통신 장치들을 하나의 무선 기술 규격으로 통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매일 쓰는 블루투스의 이름에 관한 유래를 이 책에서 읽었다. 이 책은 어렸을 때부터 접해 온 세계 명작 동화를 시대적 배경을 통해 해석하여 동화 속 인물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런 이야기들의 의미와 속사정이 무엇인지 밝혀 주는 이야기다. 제목처럼 동화 속의 백마 탄 왕자들이 왜 그렇게 떠돌아다녔는지 알 수 있다. 이유는 대부분 동화에 어울리는 낭만적 이유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권력과 명예, 경제력을 둘러싼 다툼 등의 사회문제적인 이유가 많다. 여기에 풀어낸 소위 세계 명작 동화는 주로 서구 이야기이므로 세계사 지식이 희박한 나로서는 동화의 앞뒤 맥락을 밝히는 역사적 자료와 분석 등의 읽을거리가 무척 풍부하고 재미있었다

 

익숙하게 들어 온 동화 속 이름, 지명, 위인 등의 이야기를 좀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동화 속의 악역, 빨간 모자나 빨간 머리, 영웅이야기의 실체, 민족주의의 옷을 입은 동화, 혁명이나 식민역사 속에서 쓰인 이야기... 사건은 이렇게 입체적이다. 동화로 태어나면 무분별하게 주입이 되기도 쉽다. 의문을 가지는 것,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것, 비판적 사고, 해체, 이런 지점에서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오래 된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롭게 바라보면서 제기하는 문제의식, 그리고 세계사와 문학에 대한 저자의 박식함이 돋보인다. 어떻게 동화나 익숙한 이야기에 이렇게 의문을 갖게 되었을까? 어렸을 때 세계 명작 문학을 접하면서부터 정말 그럴까, 왜 그랬을까가 궁금했다고 한다. 유년기에 품었던 그 질문을 살면서 공부하고 글을 쓰면서 풀어 나간 셈이다. 과연 인상적인 물음표의 기억만큼 많이 탐구하고 글로 정성껏 다듬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작가들은 글에 대한 강렬한 소명과 함께 재능도 부여받은 것 같다. 동화에 얽힌 풀어낸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동화에 이런 의문을 품고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기회가 되면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 특히 <이 언니를 보라>

 

저자의 블로그를 보니 이 책(백마...)은 5년간 7쇄를 찍고 지금은 절판되었다고 하는데 안타깝다. 반드시 개정판으로 출간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로알드 달의 맛이다.

 

유쾌하고 짜릿한 복수극이면서 극적인 반전의 묘미가 있다. 얄미운 누군가의 뒤통수를 세게 갈겨주는 느낌도 있다. 뭔가 얄밉고 억울했던 순간을 로알드 달에게 이야기해준다면 이런 이야기로 처방을 해줄 것 같다.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그중의 한 이야기의 제목이 '맛'이다. 이 이야기도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하늘로 가는 길_The Way Up To Heaven' 이다.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을 일고 로알드 달의 어른을 위한 다른 소설도 읽어 보았는데 가장 가까이에 두고 싶은 책은 이 책이었다. 생활에 가끔 작은 활력이 필요할 대 로알드 달을 맛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리스 레싱은 어떤 사람인가

1919년 이란(당시 페르시아)에서 태어났고 부모는 영국인이다.

1925년 남아프리카 짐바브웨(당시 로디지아)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내며 식민지 원주민의 삶을 목격했다.

두 번의 이혼을 겪고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1949년 영국으로 이주했고 1950년 첫 장편 <풀잎은 노래한다>를 발표했다.

이후 많은 작품을 통해 세계대전의 후유증, 결혼제도와 성의 문제 등 동시대의 사회 문제를 다루었다.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비롯해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2013년 영국에서 별세했다.

 

작가의 일생과 2019년 한국은 동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소설에서는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 결혼 제도 하에서 여성의 삶은 얼마나 폭넓고 오래도록 억압되어 있었던 것인가. 여성이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는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이야기해야 받아들여질 것인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회 재생산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달라지지 않으면 정말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다. 아니 심각한 위기가 초래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급추락하는 출산율처럼.

 

이 책에는 단편 11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중의 마지막 단편이 책의 제목과 같은 ‘19호실로 가다이다. 다른 이야기들보다 마지막 이 이야기가 주는 인상이 강렬하다. 책의 제목이어서도 그렇고 표지에 있는 그림이 19호실에 있는 그녀, 수잔 롤링스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그렇기도 하다.

19호실에서 수잔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인생에서의 막다른 선택을 한다. 나는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을 수 있다는 것도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동물이나 식물이 인간처럼 사회적인 맥락에서 생의 의미 없음을 이유로 자살을 할까? 랭던 길키는 <산둥수용소>에서 세상의 일부가 되지 못하면 삶은 끝나버린다고 했다. 강남순은 <배움에 대하여>에서 자살은 언제나 이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의미 물음과 연결이 된다. 또한 그러한 의미 물음은 이 삶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의미 물음을 하는 인간이 충분히 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을 때, 그리고 이 삶의 부조리, 절망감, 지독한 고독을 넘어설 기쁨이나 행복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 이 살아감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짐으로 다가오고, 그 견디기 어려운 짐을 자살로서 내려놓고 싶어 한다.‘고 했다.

 

수잔의 결정은 이해가 된다. 아이가 있는 사람이기에 그 결정이 더 신중하고 무거웠을 것 같다. 그 방법이란 것이 가스를 틀어 놓는 것 같은 손쉬운 방법이었다니.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끔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 내 목숨을 앗아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고속도로 같은 데서 맞은편의 덤프트럭이 내 차를 덮쳐 순식간에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 상상도 해 본다. 그런 면에서는 이 당시의 가스 난방시설이라는 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수잔의 삶은 여자의 인생에서 혼자만의 독립된 공간과 시간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 연결된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하게 해 주었다. 혼자만의 공간이나 시간이 아무리 많이 확보되면 뭐하겠는가. 그 많은 공간과 시간을 통해 세상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 지금도 같다. 결혼이나 육아로 삶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때, 자신만의 시간이 절실하다. 또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사회적 역할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관리해 나갈 것인가. 안타깝게도 이 부분에 방법이 많지 않고 뜻을 이어 나가기가 어렵다. 여성만의 문제가 아님에도 사회가 이를 여성들의 문제라고 보는 인식도 문제다. 그래서 그 출구로 자녀의 학습매니저가 되는 많은 엄마들을 그들이 문제라고 탓할 수 없다. 적어도 학습매니저 역할이 삶의 의미를 찾는 게 되면 되었지 혼자서 풀 수 없는 문제를 붙들고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건 아니니까. 물론 자녀의 학습관리를 통해 자신의 성취감을 느끼는 것 대신 대안적인 방법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 대중이 선택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다. 가족과 사회의 지지가 필요한데 구체적으로 생각이 진전될수록 꽉 막힌 우리 사회의 답답함이 느껴지기만 할 뿐이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씩이지만 달라지는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의 삶의 방식은 좀더 다양해 보인다. 어르신들과 젊은이들을 비교해보면 격차를 크게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계속 이야기되어야 한다. 계속 이야기하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움에 관하여 -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낭중지추_囊中之錐라는 말이 떠오른다. 저자 강남순 교수는 감신대 초빙교수를 거쳐 2006년부터 미국의 신학교에서 교수로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서 점점 더 유명해지는 것 같다. 2006년 우리나라의 감신대에서 억지스런 이유를 내세워 교수 임용이 되지 않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일이 화제가 되었다.

남편 교수 이유로 부인 재임용 탈락은 부당차별’(프레시안 2005.03.07.)

감신대가 버린 강남순, 미국 대학이 모셔간다’(뉴스앤조이 2006.10.18.)

3년간 감신대와 부당해고를 문제삼아 싸웠지만 감신대의 실체를 드러내 보인 것으로 만족하고 미국 신학교에 전임교수로 가면서 소모적인 논쟁을 그치기로 했다. 저자의 학문이 깊어진 면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 안타까운 사건들이 많아서 기고나 칼럼으로 점점 이분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는 것 같다. 집필도 꾸준히 하신다. 이 책 <배움에 관하여> 뿐만 아니라 <용서에 대하여>, <정의를 위하여>3종 세트고 그 외에도 페미니즘, 젠더, 종교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내시는데 한국에 있지 않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지적이 돋보인다. 방학마다 한국에 오시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12월 중순부터 강연이 있다고 어떤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글을 봤다. 이렇게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알려지는 주머니 속의 송곳을 뜻하는 말이 떠올랐다.

 

비판적 성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사회는 학교 교육을 받을수록 사고력이 깊어지는 게 아니라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지는 상황이다. 요즘 학생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공교육, 사교육을 받고 있는데 그 엄청나게 많은 시간동안 하는 공부가 진정한 배움과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다. 공부의 내용이 그러할 뿐 아니라 내신관리라는 명목으로 학교제도나 교사에 순응적인 태도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 이것도 갑갑한 상황이다.

 

다른 책이나 강연을 통해서 이분을 좀 더 만나고 싶다. 이 책 한권으로 비판적 성찰이 일상화되기는 어려우니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 읽고 들어보려고 한다.

98

제도적 구조 속에서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다양한 전통들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교육철학을 배반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 지독한 딜레마가 내 마음을 괴롭혔다. 막강한 제도와 전통에 대한 한두 개별인들의 비판적 문제 제기는 끈질긴 설득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설득 과정이 반드시 성공을 가져다주면서 변혁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제도적 삶의 의미성과 무의미성의 경계에서, 의지와 무력감의 경계에서, 나는 뒤척이며 씨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랴.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하나일 뿐이다. '사소한 것'이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것, 배재, 차별, 불의, 불공평에 대한 예민성을 지니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쓰고 말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실천이고 운동이며,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일 뿐이다.

 

110

자살은 언제나 '이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걸일까'라는 의미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러한 의미 물음은 이 삶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의미 물음을 하는 인간이 충분히 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을 때, 그리고 이 삶의 부조리, 절망감, 지독한 고독을 넘어설 기쁨이나 행복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깨 이 살아감은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짐으로 다가오고, 그 견디지 어려운 짐을 자살로서 내려놓고 싶어한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다른 말로 하면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는 것, 끌어안을 수 없는 것을 끌어안는 것, 희망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인지 모른다.

 

126

한 사람이 씨름하고 있는 물음들, 타자에게 건네는 질문들을 통해서 나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내면세계의 내음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물음들, 자신이나 이 세계에 던지는 질문들이 그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는 ''을 가져오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물음'을 묻는 이들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 그래서 배운다는 것은 '해답'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좋은 물음 묻기'를 배우는 것이라는 점,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며 늘 강조하는 것이다.

 

137

''는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존재 fixed being'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형성 중의 존재 becoming being'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정원'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키우는 작업을 끈기있게 하겠다는 각오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모든 여타의 사적, 공적 관계망 속에서 소중한 밑거름이 된다고 나는 본다.

 

170

그 누구도 지금의 모습으로 절대화되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비결정성'이 인간이 지닌 가능성이며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특히 데리다 수업을 할 때마다 절감한다.

 

233

예수는 인간 섹슈얼리티의 다양한 양태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무조건적 환대, 연민, 사랑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나와 다른 타자를 향한 혐오를 단호히 넘어서야 할 것이다. ...... 정작 예수는 혐오가 아닌 포용과 사랑을 가르쳤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282

소위 인문학적 소양이란 치열한 ''로부터 출발한다. 왜를 묻는다는 것은 비판적 사유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현대 인문학의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질문은 해답보다 심오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적 사유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간결함과 명쾌함'이 아닌 '불확실성과 모호성'이다. 인문학적 사유는 이전의 익숙한 이해 세계를 뒤흔드는 내면적 불편함을 경험하게 한다.

 

290

많은 이들의 삶의 해답을 원한다. 그런데 '절대적 해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해답은 부정적이고 잠정적이며 특정한 정황 속에서만 작동될 뿐이다. 그래서 삶이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잠정적 답을 모샙하는 '여정'인 것이다. 어떤 종류의 해답을 찾고자 하든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삶의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씨름하며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질문들'과 만나는 것이다. 자신만의 질문이 없을 때, 이 유행의 물결에서 만나는 사상가, 이론들은 오히려 '무엇인가 얻었다'는 환상만을 심어줄 뿐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한다. 자신만의 물음, 질문이 없는 이가 자신에게 의미가 되는 해답부터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 보면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책이다.

수용소라니, 그것도 중국에 있는.

절대 반갑지 않을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좋다고 권하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만나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첫 장의 이런 문구와 함께 권한다면 한결 부담없이 읽을 것 같다. 부담없이 안심하고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의 말대로 정말 재미있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p7

이 책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당시 중국 북부에 있던 민간인 포로수용소에서의 삶의 이야기다.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끔찍하거나 무시무시한 내용은 없다. 우리가 수감된 위현(현재는 산둥) 수용소에는 육체적인 고문이나 굶주림, 정신적인 고통은 없었다. 뒤에 인용해놓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문장*이 암시하듯, 우리의 문제는 우리를 억류한 일본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초래된 것들이 더 많았다. 따라서 아시아와 유럽에 있던 다른 포로수용소와 비교하면, 우리가 수용되었던 곳의 삶은 거의 일상에 가까웠다. 이 이야기가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 “아무리 성자 같은 사람도 식사다운 식사를 못하면 죄인처럼 행동할 것이다.”_베르톨트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2차 대전 중 중국에 장기 체류하던 서양인들이 일시에 수용소로 보내지는 일이 일어났다. 19433월부터 19459월까지 약 2천 여 명의 미국,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적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산둥수용소에 수감된 것이었다. 원래는 중학교, 병원, 교회가 함께 있던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로 쓰였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수용소치고 억압과 고문이 없고 인간적인 환경이었다고는 하지만 기약이 없이 이처럼 수용된다는 것은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2차 대전이 1945년에 끝날 지 아무도 몰랐고 따라서 이들의 신변도 어떻게 될 지 앞날을 보장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그마한 괴로움이라도 기약이 없다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저자인 랭던 길키는 이 수용소에 수용된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시카고가 고향인 그는 미국의 대학 부속 예배당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중상류층 전문직 가정에서 태어나 전쟁 전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당시 20대로 북경에 살면서 근처 연경 대학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료들과 이곳 수용소로 옮겨진 후 그는 일기를 쓰면서 이 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상세히 기록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일기를 마무리 지었고 20년 쯤 뒤에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원본 출간년도는 1966년이다. 상세하고 성실한 기록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끝을 알 수 없는 수용소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먹고 자는 일 같은 자잘한 사건들을 통해 인간 본성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서구인들이라 대부분 가톨릭이나 개신교 등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데 평소 안락하던 상황에서 종교에 대해 했던 말과 행동과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많이 다르다. 앞서 인용한 브레히트의 대사처럼 자신의 생존의 문제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상상 이상으로 욕심과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의 자연스런 모습, 그중에서도 종교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보며 저자는 인간의 본능에 긍정할 만한 것이 있는가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문명과 기술은 무엇을 근거로 발전하고 있는지, 도덕과 윤리는 무엇을 토대로 삼고 있는지 질문한다.

 

인간은 본능에 충실한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나도 이렇게 착한 척을 하긴 하지만 나도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까, 자신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혼자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처럼 마치 새로운 인물로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성품을 드러내며 살고 싶어 할까. 지금까지 때로는 약간 포장하기도 했던 내 역할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긴 했지만 내가 속한 곳에서 인정받고 보여주던 내 모습은 약한 포장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가톨릭인과 개신교인들의 양태가 지금 우리나라의 두 종교인들의 그것과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인들은 겉과 속이 많이 다르지 않아 보이고 특히 수도자들은 공동생활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크게 놀랄만한 것이 없었는데 개신교인들은 우리나라의 많은 개신교인들이 그렇듯 위선적이고 율법주의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북미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비슷한 모습으로 닮아가고 있다니 놀라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종교인들의 어떤 모습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나 자신의 위선적인 모습도 그렇게 발견할 수 있을까? 자신의 위선적인 행동은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많은 질문을 던져주는 책이다.

살면서 이 책에서 등장했던 어떤 사람과 같은 인품의 사람을 만난다면 또 생각이 날 것 같다.

 

p175

서구 사회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탐구자와 지식인으로 여긴 것은,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시대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 문화는 최근에 이루어진 과학 기술적 발견이 주는 경이로움에 취해 있었고, 이런 발전으로 가능해진 공간, 시간, 무게, 추위, , 병의 정복에 매료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회는 이런 업적을 가장 깊은 차원의 인간 문제의 해결로 오해했으며, ‘지적인간을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 바르게 사고하는 존재로 오해했다. 이런 이미지를 통해 현대 문명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완전함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인간은 합리성과 객관성을 바탕으로(인간은 과학자요 기술자로서 이런 가치들을 보여왔으므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종교 신앙마저 쇠퇴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런 낙관적 이미지가 함축하는 미덕에 우리 미래의 소망을 걸 수 있다는 유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과학 기술이 인류의 진보를 이끌 수 있으려면, 인간은 정말로 선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악하고 비열한 편견과 열정에 사로잡히는 존재이며,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으면 쉽게 타인을 해하거나 죽일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은 결코 확고한 믿음을 가진 과학자가 아니다. 이런 존재의 손에 들린 과학적 무기는 인류에게 있어, 극단적으로 인류의 전멸은 아니라 할지라도 장애물을 의미할 수 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어둡게 조명해보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더 새롭고 깊은 불안인 듯 하다. .. 따라서 인간을 바르게 인식하면 과학기술이 스스로 진보한다는 믿음도 흔들리게 된다. ... 내가 수용소에서 경험한 바처럼, 이런 이상은 거짓된 꿈이었다.

 

p347

스미스필드는 지적인 사람이었음에도, 자신의 행위에서 모순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확신을 가진 어조로 말했다. “흡연은 분명히 죄이기 때문에 나는 내 카드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없었어. 내가 오둘 수 없는 최라면, 그 죄에 대해 관여하지 않기라도 해야 하지. 그리고 담배를 판 일에 대해서는, 우리 애들이 우유를 원하니까 팔았을 뿐이야. 그 정도면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나?”

 

p417

삶이란 일부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세상의 일부가 되지 못하면 삶은 끝나버린다. 반면에 세상에 다시 동참하게 되면 삶은 다시 시작된다.

 

p428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자들은 지성을 가진 기독교인이 증명 불가능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 대해 종종 놀라워한다. 적어도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본주의자들의 주된 신념인 인간의 선함, 그리고 거기에서 자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인 인간의 도덕성은 어떠한가? 사실 조금만 연구해보면 인간의 선함이나 도덕성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증명 불가능한 종교적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 비이성적이라면, 반대되는 증거가 널려있는데도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인본주의자의 태도 또한 비합리적임에 분명하다.

 

p434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유일한 소망은, 인간의 종교성이 수많은 우상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중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 나누고,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도 정직하며, 공동체를 세울 만큼 충분히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반드시 인간은 의미와 안정성을 제공하고 자신의 충성과 헌신을 바칠 수 있는 영적 중심, 자신의 복지를 초월하는 영적 중심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가족, 나라, 전통, 인종, 교회 같은 중심은 물론 개인보다는 위대하지만 여전히 유한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래서 ... 하나님만이 진정한 영적 중심이 될 수 있다.

... 각 사람의 궁극적 관심은 이웃과의 싸움을 더 심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대신 이런 싸움에서 인간을 구해야 한다.

... 그렇기 때문이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처음으로 이기심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복지를 잊고 이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는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어떨지 알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신앙인은 의미와 안정성의 중심을 자신의 생명에 두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 둔다.

... 이런 신앙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고 자기 중심성을 포기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향한 이 자기 포기의 원리는 전통적으로 구원이라 불리는 것의 기반이기도 하다.

... 즉 구원은 내적인 평안이고 다른 사람과 건강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며 주위 세상과 이웃을 향한 창조적인 관심으로 정의될 수 있다.

... 이런 의미의 믿음은 흔히 사람들이 종교적 신념이라고 일컫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믿음이란 일련의 신조나 성경적 원리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경건의 규칙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것과, 앞에서 이야기했던 자아에 대한 염려에서 해방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생각과 입술로는 위대한 진리에 동의하고 행위로는 경건과 거룩의 규칙을 지키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관심의 중심은 자아의 육체적이거나 영적인 복지에 이기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