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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ㅣ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이란 단어..웬지 피하고 싶은 단어이긴 합니다. 맞닥드리는 순간이 언젠간 오겠지만, 미리 앞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분입니다. 4자는 '死'와 동음어라는 인식때문에 비호감 숫자가 되었지요. 언제부턴가 새로 짓는 건물엔 4자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분위기로 가고 있습니다만..여전히 4는 F로 표시되어 있는 엘리베이터. 4층은 건너뛰고 5층으로 월반해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병원은 병실 호수조차도 아예 4자를 없앤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이젠 우리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요즈음입니다. 시계를 10년 전으로 돌려볼 때 어르신들을 양로원이나 요양원으로 보낸다는 이야기가 자식들 입에서 나오면..'천하에 없는 불효자식들'이라는 원성이 여기저기서 나왔지요. 좀 더 레알한 표현으로 '후O 자식들' 소리를 들어야했지요. 이젠 어르신들을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일이 자연스럽다는 표현을 하긴 좀 그렇지만, 아뭏든 인식의 변화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저자인 셀리 케이건 예일대 교수는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강의 때마다 가부좌를 틀고 교탁 위에 올라 앉아 있기 매문에 '책상 교수님'이라 불리우기도 한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셀리 케이건 교수도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들지만, 그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더 기특하게 느껴집니다. '죽음'을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청년들은 그 만큼 '삶'역시 치열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남긴 말입니다.
저자는 이 책이 죽음에 관한 책이자 삶에 관한 책이며 동시에 철학에 관한 책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죽음에 관한 기존 책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소망은 청자 또는 독자가 스스로 죽음을 직시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며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저자가 이 책에서 어떤 최종 결론을 내릴 의도는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머리말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책은 총 14장으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계속되는가? 를 시작으로 현 사회의 가장 큰 근심거리인 '자살'까지 이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삶의 끝'을 의미합니다. 삶의 끝을 죽음으로만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 뒤의 삶(영혼의 삶)이 이어지리라 믿을 것인가?는 전혀 주관적인 사항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후자 쪽에 기대를 하며 살아가겠지요.
저자는 "육체적 죽음 이후에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물음을 던져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육체와 영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몸이 제대로 기능을 하는 한 영혼은 육체에 머무른다는 생각은 일반적이기도 합니다만, 저자는 영혼과 육체를 설명하는 이원론자들의 주장에 맞장구를 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죽음을 뛰어넘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놓은 셈이다. 그러나 정말로 영혼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육체적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같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저자는 '영혼'을 '정신'이란 단어로 바꿔쓰고 싶다고 합니다. 정신 또는 영혼이 육체에 영향을 준다고 말할 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정신적 기능을 담당하는 육체의 특정 부위가 다른 부분들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 들이겠다고 합니다.
책이 무겁군요..주제인 '죽음'의 무게가 '삶'의 무게보다도 몇 배 더 근수가 나갑니다. 죽음을 생각하기 위해서 육체와 영혼으로 이뤄진 인간이라는 이원론, 육체만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물리주의, 데카르트, 소크라테스, 플라톤도 강의에 초대되어 한 마디 하곤 열마디를 듣고 강의실을 떠납니다. 문득 드는 생각은 이 강의를 들으며 예일대 학부생들이 제대로 이해를 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한 번 들어서 이해가 안가니, 재수강..재재수강까지 하며 17년 동안 연속으로 강의를 하게 만든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요?
좀 건너 뛰어서 11장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죽음'이야기 보단 '삶'이야기가 부드럽겠지요? "삶에서 계속 좋은 것들을 얻고 있다면, 죽음이 그런 축복 모두를 앗아가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전체적인 차원에서 삶이 좋은 것들을 전혀 제공해주지 않고 있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라면, 그때 죽음은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것이라 하겠다. 좋은것으로 가득한 삶을 앗아갈 때라야만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어두운 미래만을 빼앗아간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이쯤되면 '자살'을 옹호는 못하더라도 이해는 하게 되지 않을까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접하는 대사입니다.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한 순간에 끝난다면 모르지만, 고통속에 죽어감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내공이 상당한 사람은 짐짓 두렵지 않다는 반응을 보일 수 있겠지요. 실제로 그렇게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 들일 수도 있겠구요. 그러나 대부분 죽음앞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어떤 위기 상황이 아닌 일상의 삶 속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은 아마도 내가 이 땅에 두고 갈 것이 많은 사람이 그러하겠지요. 재물,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유형적인 존재들입니다. 재물 이야기를 좀 더 드리면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다 쓰지도 못하고..' 가면 억울하겠지요. 재물이 많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빈곤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은 이유이겠습니다.
저자와 함께 '죽음'을 생각하며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다른 많은 책들 속에 소스처럼 얹혀져 있는 삶과 죽음을 맛 볼 때마다 이 책에 나온 주장과 논지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에필로그에 남긴 말을 옮기며 리뷰를 마무리 하렵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이제 이 책을 덮고 나거든 부디 삶과 죽음에 관한 다양한 사실들에 대해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아가 두려움과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접 대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다시 사는 것이다."
잘 사는 삶. 이 또한 무박삼일동안 생각해봐도 쉽게 풀리지 않을 과제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 모두 각자 '잘 살다' 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