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판결 1
스콧 터로 지음, 신연후 옮김 / 창해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사람 목숨은 이제 흥정거리가 되었다. 누구나 사람 목숨을 가지고 이해득실을 계산한다. 정의? 용서? 진실? 사실? 그 어떤 것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 그리고 또 나와 관계된 나뿐이다.
이 작품은 십년 전 한 남자가 사형수가 되어 사형을 당하기 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자 마지막 입증할 기회를 얻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사이의 십년을 넘나들며 그 당시 그 남자가 사형수가 된 상황과 지금 무죄를 입증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존 그리샴의 작품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존 그리샴이 마치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방식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단 하나의 진실, 아니 사실은 그것이다. 추악한 인간... 인간들...
자신의 이익에서만 모든 것을 저울질하는 인간들, 타인은 그것으로 인해 어떤 상황이 되던  상관하지 않는 자들, 그들이 법복을 입고 있든, 경찰 제복을 입고 있든, 멋진 변호사 옷을 두르고 있든 간에 그들은 똑같다. 그들에게 사형수에 대한 또 한 번의 재판은 귀찮은 것, 아니면 기회일 뿐이다. 그의 목숨, 그의 삶과 죽음은 그들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사형제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사형수가 진짜 범인인데 쇼를 하는 거고 그래서 그가 무죄 방면된 뒤 다시 누군가 그의 손에 살해된다면? 이라고 가정해보면 우리는 그를 방면한 것을 비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진범이 아닌데 누군가의 모함에 의해 사형된 거라는 사실을 그가 사형 당한 뒤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를 방면하지 않은 자들을 비난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스콧 터로가 자신의 다른 작품 <극단의 형벌>에서 제시한 것처럼 경제적인 측면을 따져서라도 종신형만을 극형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가석방 없는... 물론 우리 현실에 맞느냐, 안 맞느냐의 따질 점, 고칠 점은 많겠지만...
스콧 터로의 <무죄추정>에 비해 더 나은 작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존 그리샴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괜찮게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세상은 말 그대로 낙원이 아니고 인간은 이미 자신의 본성이 어떤 지 망각한지 오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살리려고 애를 쓰고,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용서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이 부질없는 짓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 아닌가 싶다. 이기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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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head 2005-09-3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정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점차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요.
그 끝이 어떻게 귀결될지는 모르지만서도...

물만두 2005-09-3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걱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