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은 책이 아니다. 그림이다. 그림을 글로 옮겨 적은 것이다. 그래서 읽기가 어렵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이슬람 세계와 먼 거리를 유지했는지도 느끼게 되어 더 어렵다. 한 작품을 편견 없는 눈으로 작가가 쓴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 작품을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이 작품의 가장 독특한 점은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다. 화자가 따로 없고 각 단락마다 그 단락의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하나의 작품이 이어진다.

하나의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은 어느 시대의 풍경화다. 그림 안에는 사람이 있고 개가 있고 나무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숨결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세밀하게 본다고 치자. 한 남자를 살펴보고, 그 옆의 여자를 살펴보고, 앉아 있는 개와 달리는 말과 나무를 살펴본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 화가를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평가한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슬람 국가가 쇄락하기 바로 전 그들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과 전통을 벗어나려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러면서 그런 시대를 평범하게 살아간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이고 그 시대에 묵묵히 서 있던 나무와 함께 살았던 개와 말과 그림에 칠해지던 색의 이야기이다.

아주 세밀하게 읽지 않으면 쉽게 지치게 되는 작품이지만 다 읽고 나면 뿌듯함을 느끼게 해 주는 작품이다. 공들여 읽으면 보상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기회에 다시 한번 읽어야 할 것이다. 책 한 권을 이렇게 오래 읽은 적도 없었고 한 권의 책으로 이렇게 좌절한 적도 없었다. 나의 무지가 이 작품을 읽는 동안처럼 슬펐던 적도 없었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앞장부터 다시 읽고 싶은 욕망을 느낀 적도 없었다. 이 작품의 진정한 진가는 읽는 사람 개개인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책이다. 차라리 한 장의 그림이 있다면 보여주고 싶을 뿐...

더 할 수 없는 글은 책 내용으로 대신하고 싶다. 1권 320쪽의 내용이다. 

색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색은 눈길의 스침, 귀머거리의 음악, 어둠 속의 한 개 단어다. 수천년 동안 책에서 책으로, 물건에서 물건으로 바람처럼 옮겨 다니며 영혼의 말소리를 들은 나는, 내가 스쳐 지나간 모양이 천사들의 스침과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들의 눈에 말을 걸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신중함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동시에 나는 공중에서 당신의 시선을 통해 날아오른다. 이것이 나의 가벼움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시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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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웨이 2004-05-09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들여 읽으면 보상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기회라...
섬뜻해지는구만요 ^^
빨강의 외침이 정말 거부할 수 없게 흥미를 돋우는데요?

책읽는나무 2005-05-05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찬찬히 님의 리뷰를 읽었습니다..^^
역시 바람구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한 마디말로 표현하고 싶군요!
역시 지존이십니다..^^

물만두 2005-05-0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책나무님 무슨 말씀을... 제가 얼마나 글을 제 맘대로 못쓰는데요. 쑥쓰럽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