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은 위험 Medusa Collection 6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지음, 이진 옮김 / 시작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켄트 주 헤런스포드에 위치한 헤러스파크 야전병원에 일곱통의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 히긴스의 모습으로 작품은 시작된다. 편지를 쓴 그들은 의사인 문, 반스, 저베이스, 간호사 마리온, 간호구급대원에 자원한 제인, 에스더, 프레데리카다. 전쟁 중에 꼼짝할 수 없는 야전 병원을 무대로 그래도 그들은 나름대로 하루하루 즐겁게 살려고 애를 쓴다. 장기자랑도 하고, 파티도 하고, 서로 사랑을 하기도 하고, 삼각관계에 빠지기도 하고, 짝사랑을 하기도 하고. 동료들을 험담하기도 하고 환자들을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것은 폭탄이 날아들고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때론 죽음을 목격하는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방공호를 옆에 두고 생활해야 하는 일상인 것이다. 그런 그들의 일상에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커크릴 경감이 등장한다. 전쟁 중에 살인이라니 무슨 일일까. 

우편배달부로 일하던 히긴스가 부상으로 실려온 뒤 수술을 위한 마취를 하는 순간 갑자기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단순한 사고로 생각했지만 커크릴 경감을 불러 조사를 하는데 히긴스가 사고가 아닌 살인에 의해 사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마침 파티에서 저베이스에게 화가 난 마리온이 살인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직후 수술실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이로써 사건은 연쇄 살인 사건이 된다. 도대체 왜 히긴스는 살해당해야 했던 것일까? 누가 우편배달부를 죽이고 싶었을까를 모두 생각하던 중 용의자는 6명으로 좁혀지고 커크릴은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게 된다.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커크릴 경감 시리즈는 모두 일곱권이다. 그 중 이 작품은 두번째 작품이자 커크릴 경감 시리즈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여기에 의학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선보이고 있다. 야전 병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작가는 단 6명의 용의자를 가지고 피해자를 살해할만한 동기, 어떻게 살해했는가 하는 살해 방법, 마술처럼 독자를 딴 곳을 주시하게 만드는 용의주도함까지 보여주고 있다. 의료 행위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커크릴 경감을 당황하게 만들지만 그것도 잠깐, 트릭을 간파하고 동기를 알아내는 탐문 수사와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어 마지막에 결국 범인이 굴복하게 만드는 데 나는 그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연막 작전에 내가 말려들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웃집 아저씨같고 대부분 같은 지역 사람들이라면 알고 지내는 커크릴 경감의 능구렁이같은 모습과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 놓고 성격 다른 인물들이 모여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게 만들어서 끝까지 눈길을 사로잡고 책을 놓을 수 없게 하는 드라마적 요소가 미스터리와 조화를 잘 이루는 작품이다.  

지금 일본 신본격 소설에 매력을 느끼는 독자들이라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20세기 추리소설 황금기의 작품들은 연극 공연같은 느낌을 준다. 연극에서의 한정된 무대처럼 한정된 공간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한정된 배우들이 나오는 것과 같이 한정된 인물 가운데 범인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연극의 하일라이트처럼 탐정이 범죄가 어떻게 이뤄졌고, 왜 일어났는지, 증거는 무엇인지를 밝히면서 범인을 지목한다. 독자는 무대 바로 앞에서 긴장한 채로 그들 중 누가 범인인지, 내가 생각한 인물이 범인인지를 그때서야 알게 되고 탄성을 지르게 된다. 바로 이것이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이다. 이 작품은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대담하게 런던 대공습때의 야전병원을 무대로 삼은 것이다. 

녹색은 왜 위험할까? 복잡한 매디컬 스릴러가 넘쳐나는 오늘날 복잡하지 않으면서 매디컬 스릴러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를 찌르는 반전같은 것이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 탄탄한 구성을 자랑하는 작품으로 영화같이 휙휙 지나가는 스케일만 크고 보고 난 뒤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작품이 아닌 작품을 보고 싶다면 여운이 남는 연극 공연같은 이 정통 고전 추리소설을 추천한다. 야전 병원에서의 일상이 전쟁이 아닌 살인으로 공포에 휩싸일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백년이 지나도 읽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커크릴 경감 시리즈를 다시 읽을 수 있어 더 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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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2-19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크릴경감시리즈는 읽어본 적이 없는데 구성이 탄탄한 작품이군요.

물만두 2009-02-19 14:03   좋아요 0 | URL
국내에는 제제벨의 죽음이 먼저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