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츠이치라는 작가에게는 두 종류의 작품이 있다고 한다. 안타까움과 섬세함을 기조로 한 퓨어계열의 작품과 잔혹함과 처참함을 기조로 하고 있는 다크계열의 작품이. 퓨어계열에 속하는 작품 중에 <쓸쓸함의 주파수>라는 작품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가 컸다. 표제작인 <ZOO>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잔혹함을 풍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편들을 읽다보니 이 단편집은 퓨어와 다크가 혼합된 오츠이치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오츠이치를 소개하는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의 작품들은 분명 다크계열이지만 점차 퓨어계열과 그 혼합된 작품까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SEVEN ROOMS>가 가장 잔혹하고 처참하면서 슬픈 작품이었다. 어느 날 함께 나갔던 오누이가 납치를 당한다. 남동생은 이제 열 살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감금된 곳이 어딘지 모르고 왜 납치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도랑 같은 물이 흐르는 하수구가 있다는 걸 알고 남동생이 그 물 속으로 들어가 탈출 길을 모색한다. 하지만 아이가 만난 것은 자신들과 같은 방이 7개가 있다는 것과 그들이 일주일 간격으로 사라지고 또 그 방이 다른 여자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이제 이들도 일주일이 되면 살해되어 그 하수구에 버려질 것이다.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다. 자신들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릴 수 없다는 것. 공포와 후회와 슬픔이 교차하며 그들은 삶을 체념한다. 너무 처음 작품이 강렬해서 놀랐다. 잔인한 정도가 아니라 끔찍한 공포다. 오츠이치의 다크란 이런 것이라니 어떻게 같은 작가가 이렇게 다른 분위기의 작품을 쓸 수 있는 지 놀랍기만 하다.

<SO - far>는 부모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엄마와 아빠와 즐겁게 살던 한 남자 아이에게 어느 날부터 부모가 서로 보이지 않는 듯이 행동을 한다. 아이는 그 이유를 물었더니 엄마는 아빠가 죽었다고 하고 아빠는 엄마가 죽었다고 한다. 아이의 눈에는 두 사람 모두 보이는데. 아이는 텔레비전에서 본 죽음을 자각 못하는 유령에 대해 떠올리고 엄마와 아빠 중에 누군가 자신의 죽음을 모르는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모두 자신에게는 보였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이보다 더 아이들에게 잔인하고 상처를 주는 일은 없다. 죽음보다 더 큰 상처는 엄마와 아빠 중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다. 그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게 자리를 잡을지 알고 싶다면 이 작품을 보시길.

<ZOO>는 생각만큼 그다지 잔인한 작품은 아니었다. 언제나 애인의 사체의 사진이 우편함에 들어 있고 남자는 그 사진을 컴퓨터에 저장하고 범인을 찾으러 다닌다. 직장도 그만 두고 여자의 사진을 들고 길거리를 헤맨다. 제목이 동물원인 것은 남자가 여자와 마지막 본 영화가 <ZOO>였고 그 영화를 본 후 동물원에 갔기 때문이다. 누가 남자에게 사진을 보내는 것일까? 남자는 범인을 찾을 것인가? 생명이 있는 것이 죽어서 썩는다는 것은 죽음의 축복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썩는다는 것은 인간실격을 의미한다.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동물원에 갇힌 동물보다 못한 끔찍한 감옥에 자신을 가두는 것과 같다. 물론 그것을 아는 이에게만 통하는 말이겠지만.

<양지의 시>는 퓨어계열의 작품이다. 죽음을 앞 둔 남자가 자신을 묻어줄 로봇을 만든다. 인간과 같은 그 로봇은 남자가 죽을 때까지 그의 곁에서 가사 일을 한다. 처음 로봇은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죽음에 대해서도 몰랐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원망하게 된다. 자신을 만든 그 남자를.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부모님께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왜 나를 낳았어요?” 힘들고 지쳐 삶이 고단할 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하고 무심코 내 뱉는다. 그 말은 아마 부모가 되면 받아야 하는 업일 것이다. 그 말은 다르게 말하자면 “낳아줘서 고마워요.”와 같다. 알면서도 아이들은 늘 부모에게 말을 하고 부모가 되면 또 자식에게 그 말을 듣고 그렇게 세상은 이어진다. 어쩌면 그것이 마르지 않는 샘의 원천인지 모르겠다.

<신의 말>은 다크계열의 작품이다. 진정한 어둠이란 이런 음습한 자기 안의 것을 토해내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말이 되어 무심코 나올 때의 두려움, 자신을 포장해야 하는 압박감, 해방되고 싶은 갈증, 책상의 깊은 홈이 새겨질 때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하지만 마지막이 더 오싹한 어둠속에서 슬프고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어느 정도까지 구석으로 몰리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되는 것일까. 그 끝이 바로 이 끝이 아닐까 싶다. 비슷한 설정인데도 <양지의 시>와 <신의 말>은 퓨어와 다크의 전형을 보여주듯 그렇게 다르다.

<카자리와 요코>는 쌍둥이다. 일란성 쌍둥이지만 엄마는 카자리만 예뻐하고 요코는 학대한다. 카자리는 요코에게 잘 대해준다고 요코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안 순간, 요코는 이미 낯선 할머니에게서 따뜻함이 어떤 것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잔혹함과 슬픔이 동시에 들어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다. 그런데 요코가 진짜 신데렐라가 될 수 있을까?

<Closet>은 시동생이 자신의 과거를 알아버리고 그 시동생이 죽자 올케와 시누이가 신경전을 벌이며 범인을 찾는 내용이다. 추리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혈액을 찾아라>는 약간 코믹한 미스터리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코믹하다는 말이 그렇지만 아픔을 못 느끼는 아버지의 비상 혈액을 찾는 가족과 죽어가면서 범인을 깨닫고 오히려 마음 편하게 죽는 설정이 퓨어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차가운 숲의 하얀 집>은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다크계열 작품 가운데 <SEVEN ROOMS>와 더불어 가장 어두운 작품이다. 백부 댁 마구간에 얹혀살면서 모진 학대를 당하고 사촌들의 장난으로 얼굴마저 잃게 된 아이가 그곳에서마저 쫓겨나 숲속에 자신만의 집을 짓는다. 하얀 집을... 그리고 그때 자신에게 그나마 따뜻하게 대해주던 사촌 여자아이를 만나서 다시 그 집의 마구간에서 살게 된다. 끔찍한 잔혹함과 찐한 슬픔을 함께 느끼게 되는 작품이다. 다크계열의 작품 속에도 슬픔은 숨길 수 없었던 것 같다.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는 비행기가 공중 납치당한 상황에서 죽어도 그만인 세일즈를 못해 친정으로 간 아내를 찾아가 그 집 앞에서 자살하려는 남자와 고등학교 때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자신에게 그런 일을 저지른 남자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걸 알고 그 남자의 아이를 죽이러 가려는 여자가 만나 안락사 약을 놓고 흥정을 벌이는 이야기다. 황당하지만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고 앞에 있는 아름다움만 생각하자는 마지막에 퓨어계열의 작품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다크도 있고 퓨어도 있다. 그 두 계열에는 공통점이 있다. 슬픔과 쓸쓸함이다. 아마도 오츠이치가 버리지 못할 감정이 바로 이 두 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오츠이치의 다크계열 작품이 계속 나온다니 기대된다. 어둠도 어떤 때는 따뜻하고 슬프고 서글프다. 잔혹함의 이면에는 이런 것들의 갈망이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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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2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습니다만, 저는 어릴 때부터 ZOO 라는 발음을 좋아했습니다. (웃음)
그러나, 어느 날, 나체의 사람이 철창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의 사진 위에 ZOO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재미있는 단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물만두 2007-07-02 16:04   좋아요 0 | URL
저는 어렸을때부터 동물원을 싫어했어요^^;;;

비로그인 2007-07-02 18:31   좋아요 0 | URL
아니...왜,...?? 원래, 동물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하시는다는...?

물만두 2007-07-02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원이 음습하고 안좋았거든요.

비로그인 2007-07-02 22:17   좋아요 0 | URL
음........음습하고..어둡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