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학기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인지 알 수 없는 한 아이의 엄청난 유괴사건 속의 이야기와 그 사건을 평생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었던 작가가 자신을 유괴했던 남자가 출소해서 보낸 한 장의 편지를 받고 쓴 <잔학기>라는 소설은 역시 기리노 나츠오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열 살 때 한 남자에게 유괴되어 1년 이상 감금되었다가 풀려나게 된 게이코는 그 사건으로 자신이 이제는 결코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을 느낀다. 그것은 현실과 분리되어버린 주변 사람들의 상상과 자신의 치유될 수 없는 상상 때문이다.

 

한 아이가 겪은 사건을 보면서 인간의 잔학성은 어디까지 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비단 이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매스컴에 나오는 사건들을 때로는 그 이면까지 집요하게 파헤치는 모습 속에서, 그것을 궁금해 하는 시청자인 내 모습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쯧쯧쯧 거렸던 것 속에 잔인한 엿보기 습성이 숨어 도사리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을 이미 알아버렸기에 게이코는 어린 나이에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부모와 의사, 경찰, 검사, 그 누구도. 그래도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가해자인 겐지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자신과 겐지 사이에서 둘을 가장 잘 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집요하게 캐물으며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검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갑옷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함을 알고 누군가에게, 그가 가해자이든, 자신을 모욕한 염탐꾼이든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닐까. 현실이 붕괴되고 밤의 꿈만으로 살아가게 되어버린 한 인간의 고통을 너무도 침착하게 보여주고 있어 그것이 더 슬프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기리노 나츠오의 기존의 작품들과는 형식적인 면에서 약간 다르게 한 명의 여성과 네 명의 남성이 등장하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피해자이면서 주인공인 게이코, 게이코의 일상 속에서 언제나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심약한 아버지, 그녀를 납치 감금한 겐지, 겐지에게서 자신을 구해줄 거라고 믿고 신처럼 기도를 했던 야타베, 잔인하게 게이코의 내면을 알아내려고 접근하는 검사 미야사카... 이들 네 명은 게이코의 인생에 현실을 없애고 상상만 남기는 커다란 역할 하나씩을 맡아 스스로 사라지기를 결심하게 될 때까지 그녀의 인생을 좌지우지한다. 그녀의 사라짐은 이제 현실에 발을 디디고 싶다는 바람은 아니었을까. 그동안 살았던 세계는 하나의 허구였으니까.

 

20쪽에 이런 말이 나온다.

25전 사건. 나는 어째서 그 사건을 은폐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 더 큰 의문이 있다. 나는 어째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인가 하는 것. 그리고 겐지는 대체 어떤 인간이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게이코는 왜 그 사건을 사실 그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사실 그대로 전달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로 또 한 번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라고 모든 것에 솔직하고 순진한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더 벗어나고 싶은 생각과 그곳에서 1년 넘게 살았다는 것에 스스로 자책했을 것이다. 그것을 누가 이해해줄 수 있겠는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현실에 발을 디디지 못한 그녀만의 상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살아가야 할 의미가 필요했을 테니까. 또한 그녀의 마음속에 빗장이 걸려 있던 그 사건에 대한 그녀만이 아는 사실, 혹은 진실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인지 모른다. 처음에는 현실 도피의 수단이었지만 픽션을 통해서라도 아니 마지막 작품은 가장 솔직하게 쓸 수밖에 없는 것을 써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피의 맹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겐지는 어쩌면 또 다른 게이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자이지만 자꾸만 그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 그리고 상상의 상상이 이어지면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이 가장 잔혹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십오년 동안 그녀를 따라다닌 존재의 실체를 그녀는 정말 깨닫지 못한 것일까, 아님 깨닫고 만 것일까...

 

상상은 현실을 멀리하게 만든다. 상상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상상은 자신이 가장 괴로울 때 더 발휘된다. 현실이 고통스럽지 않고 안락한 이가 상상의 방이 필요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상상을 하고라도 살게 만들어버린 가정과 이웃,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크다. 이 책 속 어디엔가 우리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잔학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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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7-07-26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훈훈한 리뷰에 댓글이 없다니...
'숙명' 말고 이 책을 먼저 읽기로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서늘한 즐거움을 줄런지... 왠지 슬플 것 같은...

물만두 2007-10-10 09:48   좋아요 1 | URL
이제 보고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