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짧아서 음식을 가리는 편인데, 특히 생선을 싫어한다. 어려서 어쩌다 어머니가 고등어라도 구우시면 한가운데 흰 살만 싹 발라 먹고 더는 손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남은 고등어를 다시 데워서 다음 끼니에 드시고는 했는데, 그렇게 다시 데운 고등어는 비린내가 심해서 타박을 해댔다. 그래서 언제나 남은 생선은 따로 혼자서 드셨다. 드물게 상에 오르는 생선 찌개는 아예 국물에 숟가락도 담그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 생선이 밥상에 오르는 일은 일 년에 몇 번 손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처음으로 어머니와 단둘이 외식을 한 것은 서른이 넘어서였다. 갑자기 쓰러져 입원하신 아버지를 뵙고 돌아가려는데, 어머니가 저녁을 안 드셨다며 같이 먹자고 하셨다. 어머니를 따라 병원 구내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앉자마자 어머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생태찌개를 주문하셨다. 생선이라면 질색을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데 생태찌개를 시키다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생전 처음 겪는 어머니 모습에 당황했다.

어머니는 생태찌개를 정말 맛있게 드셨다. 그때까지 그저 아까워서 비린내 나는 고등어를 두세 번씩 데워 드시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정말 생선을 좋아하신다는 걸 그 날 처음 알게 되었다. 다시 한번 당황했다. 그렇게 좋아하는데 마음껏 드시기는커녕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평생 참으셨다니. 왜 그러셨을까, 죄송하면서도 궁금했다. 궁금증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이미 곁에 계시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입맛도 바꾸는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을 예찬만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다. 희생과 헌신으로 포장된 '모성'이라는 개념을 이제라도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할 것 같다. 자식을 낳아 길러보니 가끔 어머니를 향한 동료의식 같은 것이 생겨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를 덜어내어 자식의 존재를 채워야 하는 줄로만 알았던 시대를 사셨던 어머니. 시대의 한계였을 것이고, 비난받을 일은 결코 아니지만, 바뀌어야 할 의식임은 분명할 것이다.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백소영, 대한기독교서회)는 바로 그 '모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오늘 여기에서 '모성'은 한 사람을, 한 가족을, 한 사회를 죽일 수도 있고 치유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인지도 모르겠다. 킬링이 아닌 힐링하는 '모성'을 지닌 엄마, 아빠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도움이 될 듯하다. 사서 읽고 싶다. 곁에 있는 엄마, 아빠들과 함께라면 더 좋겠다.


그러나 내가 전하려 하는 ‘엄마 되기‘는 생물학적으로 엄마인 사람만의 과제가 아니다. 여성이어야만 가능한 ‘엄마 되기‘도 아니다. 그래서 ‘엄마 되기‘는 차라리 은유이다. 나보다 약하고 어리고 늦은 생명을 돌보고 지키고 기다리는 마음을 기르고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를 실천하는 이는 모두 ‘은유로서의 엄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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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진서의 《공부가 되는 글쓰기》 제9장 '수학 글쓰기'에 나오는 조앤 컨트리먼은 글쓰기로 수학을 가르치는 수학교사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조앤 컨트리먼은 학생들에게서 이런저런 정보를 이끌어 내며 그 정보들이 모여 올바른 답을 이룰 때까지 기다려 주는 역할을 했다. 그녀는 결코 정답의 유일한 관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문제의 답을 모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답은 교사에 의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교실의 모든 아이가 합심해 밝혀내야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매우 탁월한 교사라는 사실이었다."(《공부가 되는 글쓰기》, 219.)

윌리엄 진서가 조앤 컨트리먼을 탁월하다고 한 이유는 "정답의 유일한 관리자"라서가 아니라 "올바른 답을 이룰 때까지 기다려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교사의 역할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는 목사의 역할도 "성도들에게서 이런저런 정보를 이끌어 내며 그 정보들이 모여 올바른 답을 이룰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에는 "정답의 유일한 관리자"처럼 행동하는 목사가 더러 눈에 띈다. 그들은 가르침과 배움이 위계질서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가르치는 자에게는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배우는 자에게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중세 교회도 부럽지 않을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었을 테니 그들의 선생 노릇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 노릇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 여러분, 너도 나도 선생이 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다 아는 일이지만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서 3:1, 현대인의 성경)

그 심판은 '합리적 이성'으로 계산기만 두드려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도 다 아는 일"이라고 했지만, 계산기 숫자만 들여다보고 있는 자에게는 심판이 보일 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목사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도 아니다. 매사에 아는 척하고 가르치려 드는 습성이 내 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그러나 너희는 선생이라는 말을 듣지 말아라. 너희 선생은 한 분뿐이시며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복음 23:8)

앞서 인용한 수학교사 조앤 컨트리먼은 이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다 아는 일이지만, 교회에도 이렇게 탁월한 목사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성도들이 합심해서 답을 이루도록 기다려주는 목사가 조금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을 가진 한 사람의 형제로서 교회가 올바른 답을 이루는 일에 미미하게나마 마음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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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고전 강의》는 "고대 자연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의식과 "데카르트와 헤겔"의 문제의식이 서로 대응하고, 고대 자연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헤겔 사이의 "칸트"가 서로 대응하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철학자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전개되었던 철학적 사유가 근대의 '데카르트–칸트–헤겔'에서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나의 원리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 이것은 고대의 자연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두드러집니다. 인간이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서서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알고자 하는 시도는 데카르트와 헤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유한자일 뿐이고, 무한자가 되려는 욕구는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플라톤은 괴로운 처지에 있는 듯합니다. 인간은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좋음을 찾아 방황하고 있으며 어느 한 쪽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중간자이기 때문입니다.

_《철학 고전 강의》 첫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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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고독 속에서 노력하던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1517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분열되고 불안했던 독일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간다. 그러나 이상주의자 루터는 끝내 어느 세력과도 타협하지 않고 자기 세계로 더 깊이 틀어박힌다. 저자는 이러한 "단순하지만 비극적이었던 한 운명곡선을 (…) 다시 말해 그 상승곡선이 어떻게 하강곡선으로 바뀌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1517년부터 1525년까지 시간을 한정해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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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의 이 어려운 수동태 동사 "의롭게 된다"가 더 깊은 차원에서 의미하는 바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다."(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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