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었다






(……)

사람들 위에 그토록 높이 있으면서도 공명심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관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 또 있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에게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공감을 끌어내는 자석과도 같은 매력이 있다. 레닌은 이태리어를 할 줄 몰랐으나 샬랴핀 같은 다른 러시아 거물들을 많이 보아 왔던 카프리 섬의 어부들은 어떤 놀라운 후각 같은 것으로 대번에 레닌을 특별한 자리에 놓았다. 그의 웃음은 매력적이었다. 그 웃음은 어리석은 인간의 아둔함과 이성이 부리는 교묘한 잔꾀를 꿰뚫어 볼 줄 알면서도, ‘단순한 심장’에서 나오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 또한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진실한’ 웃음이었다.

지오반니 스파다로라는 늙은 어부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정직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렇게 웃을 수 없지요.”

하늘처럼 푸르고 맑은 물결 위의 흔들리는 배 안에서 레닌은 낚싯대 없이 손가락으로 낚싯줄을 놓아 낚시하는 법을 배웠다. 어부들은 그에게 손가락에 낚싯줄의 떨림이 느껴질 때 바로 줄을 잡아채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코지, 드린-드린, 까피시”

그는 대번에 물고기를 낚아 끌어올리고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흥분한 사냥꾼의 함성을 질렀다.

“아하, 드린-드린!”

어부들 역시 아이들처럼 기뻐하며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웃으며 낚시꾼에게 별명을 붙여 불렀다.

“씨뇨르 드린-드린.”

그가 떠난 후 어부들이 늘 내게 묻곤 했다.

“씨뇨르 드린-드린은 어떻게 지내나요? 러시아 황제가 그를 잡아가지 않았나요?”





1907년 런던에서 레닌을 처음 본 몇몇 노동자들이 전당대회에서 보인 그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그의 장점을 들어가며 말했다.

“글쎄요, 어쩌면 여기 유럽 노동자들의 지도자 중에도 그런 똑똑한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지요. 베벨110이라든지 다른 누가 있겠죠. 하지만 이 사람처럼 단번에 내 마음에 들 만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또 다른 노동가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저 사람이야말로 정말 우리 사람입니다. 결단력이 있어 보여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대꾸했다.

“플레하노프111도 우리 사람이죠.”

나는 적확한 대답을 들었다.

“플레하노프는 우리한테 선생이나 상전 같은 사람이지만 레닌은 우리 동지죠.”

1918년 가을 소르모보의 노동자 드미트리 파블로프에게 레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단순함이지요. 그는 단순합니다. 진실처럼요.”

이 말을 할 때 그는 오랫동안 심사숙고하여 결론을 내린 듯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의 밑에서 일했던 사람이 누구보다 엄격하다. 그런데 레닌의 운전사로서 많은 일을 겪은 S. K. 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레닌은 특별합니다. 그런 사람이 없지요. 먀스니츠카야 거리를 운전해 모시고 가는데 차가 많아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어요. 혹시 차라도 긁힐까 신경이 쓰여 경적을 울리면서 무척 걱정을 했지요. 그런데 그가 다른 차에 부딪힐 위험이 있는데도 차 문을 열고 나와 차 발디딤대를 타고 앞쪽으로 와서 내게 그러는 거예요. ‘걱정 마세요, 길. 다른 차들처럼 천천히 갑시다.’ 내가 오랫동안 운전을 해서 알지만 누구도 그렇게 하진 않거든요.”

나의 오랜 친구 하나가 있는데, 역시 소르모보 출신으로 온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 그가 체카에서 일하기가 너무 힘겹다고 한탄을 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건 자네 일이 아닌 것 같고, 자네 성격에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

그는 침울하게 동의했다.

“내 성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지. 하지만 일리치 또한 자신의 본마음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나약함이 부끄러울 따름이네.”

나는 자신들이 헌신하는 대의의 승리를 위한 조직적인 사회적 이상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자신의 본마음을 감추려” 했고, 지금도 그래야만 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알고 있었고 또 알고 있다. 







레닌이 정말 “자신의 본마음을 감추려” 했을까? 그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에 대해 얘기할 만큼 스스로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거의 없다. 그는 누구도 못할 만큼 자신의 정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내밀한 폭풍에 대해 침묵을 지킬 줄 알았다. 한번은 고리키 시에서 어떤 아이들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이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입니다. 우리가 겪었던 많은 것을 이 아이들은 겪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의 삶은 덜 잔혹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멀리 언덕 위에 굳건하게 자리 잡은 마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덧붙였다.

“그렇다 해도 나는 이 아이들이 부럽지는 않습니다. 우리 세대는 놀라운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과업을 수행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우리 삶에 강요한 잔혹함이 정당했음을 이해해 줄 날이 언젠가 올 것입니다. 모든 게 이해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는 아이들을 각별히 부드럽고 세심한 손길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악마가 교묘한 재주를 부려 놓은 우리 삶에서는 증오할 줄 모르고서는 진실로 사랑할 수도 없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그 본성상 인간을 일그러뜨릴 수밖에 없는 이러한 필연성은 영혼을 분열시키고, 증오를 통하지 않고는 사랑에 이를 수 없는 불가피성은 삶에 파멸이라는 운명을 지운다.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한 보편적인 방법으로서 고통이 필요하다고 설교하는 러시아라는 나라에서, 나는 레닌처럼 사람들의 불행과 슬픔과 고통에 대해 그토록 깊고 강력한 증오와 혐오와 경멸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 같은 감정들, 무엇보다 삶의 드라마와 비극에 대한 이 증오가 러시아의 철인 블라디미르 레닌을 높이 일으켜 세웠다. 러시아는 가장 뛰어난 재능으로 쓰인 복음서들이 고통의 영광과 성스러움을 주제로 하고 있는 나라이며, 본질적으로는 거개가 소소한 일상적 드라마에 관한 그렇고 그런 묘사로 가득 찬 책들을 읽고 따라 하며 젊은이들이 인생을 시작하는 나라이다. 러시아 문학은 유럽에서 가장 염세적인 문학이다.

우리나라 책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주제에 관해 쓰고 있다. 청년기와 성년기에는 이성(理怯)의 결핍으로부터, 전제정치의 폭압으로부터, 여자들과의 연애로부터, 가까운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로부터, 노년에 가서는 살면서 저지른 잘못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이빨이 빠져 없거나 소화가 안 된다거나 곧 죽어야 한다는 따위들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고통 받고 있는지를 그린다.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서 한 달을 지내거나 유형지에서 1년을 보낸 러시아인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겪은 고통에 관해 회상하는 책을 러시아에 바치는 것을 자신들의 성스러운 의무로 여긴다. 이제껏 어느 누구도 자기가 평생을 얼마나 즐겁게 살아왔는지에 관한 책을 생각해 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책을 보고 따라 하는 이 나라에서 그런 작품이 나왔다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대번에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따라 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러시아 사람은 자신을 위한 삶을 생각해 내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그런 삶을 살 줄은 잘 모른다. 따라서 행복한 삶에 대한 책이 나온다면 러시아 사람에게 그런 삶을 어떻게 생각해 내야 하는지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레닌은 일상생활의 복잡한 드라마를 얼마간 단순하게 생각하여, 러시아적 삶의 온갖 외적 추악함과 불결함을 손쉽게 제거하듯 그 복잡한 드라마 또한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여긴 듯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로 하여금 그를 각별히 위대하다 여기도록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불행에 대한 그의 비타협적이고 꺼질 줄 모르는 적대감, 그리고 불행이란 결코 우리 존재의 어쩔 수 없는 토대가 아니며,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몰아낼 수 있고 몰아내야 하는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그의 명료한 신념이다.

그의 성격에서 보이는 이 주요한 특징을 나는 전투적 낙관주의라고 부르려 한다. 이는 러시아적 특징이 아니다. 바로 그의 이 전투적 낙관주의가 내 영혼을 이 위대한 인물에게로 특히 이끌었다.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세기 러시아 대표 지식인 막심 고리키 저널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감, 삶에 대한 고결한 의지를 읽는다!


가난한 사람들












* 1/29(월)부터 격일 업로드됩니다. (총 5회 진행) 

* 2월 9일 출간될 <가난한 사람들> 미리 읽어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4.

진리란 믿음으로 충만한 견해









유리창은 짙푸른 빛이 되었고, 나의 말동무의 뼈가 앙상한 얼굴은 더 어두워지며 양 눈 아래 움푹 패인 자리에 특히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멍하게 헤매던 그의 시선이 초점을 찾고 깊어진 것같이 보였다. 장황한 푸념의 말들이 의미심장하게 들리기 시작했고, 거슬리던 탁한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우중충한 색의 성기게 난 턱수염 가닥을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할 정도로 사정없이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그가 말했다.

“자유를 얻고 기뻐하는 인민을 나는 10년 전 꿈속에서 보았지요. 당시 나는 오룔 감옥에 앉아 있었고, 아직도 1905년의 감동이 생생했지요. 오룔 감옥에서 얼마나 지독하게 사람들을 때려죽였는지 아십니까. 아니요. 그 꿈에서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개중에는 내 제자였던 식자공 보리소프도 있었지요.) 너덜너덜해진 누군가의 몸을 몽둥이로 들쑤시고 휘젓는 겁니다. 내가 보리소프에게 물었지요. ‘왜 사람을 고문하는 건가’ ‘이자는 적입니다!’ ‘그렇지만 그도 인간 아닌가’ ‘뭔 소릴 하는 거요’ 보리소프가 소리치면서 나를 향해 몽둥이를 번쩍 들며 그러는 겁니다. ‘이놈 죽여라!’”

“하지만 몽둥이가 손에서 굴러떨어지더니, 그가 손을 뻗어 앞을 가리키며 기쁨에 젖어 속삭였습니다. ‘보세요, 저기. 그들이 가고 있어요. 이제 끝났어요. 그들이 가고 있다고요!’”

“한껏 고무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중이 지나가고 있었고, 뭔가 부자연스러운 별처럼 반짝이는 수천 개의 눈들이 보였습니다. 바로 그 눈들을 보고서 나는 가장 중요한 걸 느꼈습니다. 인민들이 부활했구나! 이해되십니까? 부활하여, 정신적으로도 변화된 것이지요. 그러다가 나는 곧 그들 사이로 사라집니다. 마치 확 불타올라 순식간에 남김없이 타 버리듯이 말입니다.”

나의 손님은 연필로 책상 가장자리를 두드려 그 메마른 소리에 귀 기울이더니 또다시 책상을 두드렸다.

“이제 나는 승리에 기뻐하는 인민을 실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나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집니다. 인민이 승리를 기뻐하고 있건만, 꿈에서 내가 보았고 내가 의미를 두었던 그 새로움을 나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것이 없는 것이지요. 인민이 승리를 기뻐하고 있고, 내가 이 승리를 있게 하느라 내 모든 힘을 바쳤건만, 지금 나는 그 승리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참으로 이상하지요…….”







창밖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고즈넉하게 희미한 저녁기도 소리가 울려왔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기관총이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한 기술을 배우고 있는가 보다.

“어쩌면 제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승리를 기뻐할 줄을 전혀 모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싸움을 위해, 희망을 위해 에너지를 다 써 버려서 즐거움을 누릴 능력이 죽어 버렸을 수도 있지요. 어쩌면 단지 무기력일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실은 내게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들끓는 원한과 보복뿐입니다. 기쁨,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기쁨 같은 것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승리에 대한 믿음 같은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눈먼 사람처럼 눈을 껌뻑이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팔을 뻗어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별로 좋지가 않습니다. 마치 콜럼버스가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했는데 아메리카가 썩 그렇게 그의 맘에 들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떠났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느끼고 있다. 그는 개로서의 생의 마지막 날에 다다른 경비견과 같은 처지인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충직하게 자기가 하는 일의 신성함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으르렁대고 짖어 왔건만 그에 대한 보답이란 고작 발길질뿐. 갑자기 자신이 해 온 일이 별것 아니며 아무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무엇을 위해 ‘책임감’이라는 사슬에 묶여, ‘의무감’이라는 어두컴컴한 경비 초소에 들어앉아 있었던가? 충직한 늙은 개는 이제 제정신을 잃고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 중 또 다른 누군가 혁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낭만주의자처럼 그녀를 숭배했지만, 어떤 파렴치한 놈이 나타나 우리 연인을 처참히 욕보였습니다.”






***

  옆 레일의 열차가 ‘미끄러져’ 들어오며 차축이 거슬리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낸다.

  “리가-이가-이가, 리가-리가-이가…….”

  기차 바퀴들이 신호를 보내듯 규칙적으로 레일을 두드린다.

  “길-동-무, 길-동-무…….”

  길동무. 여기까지 나의 기차 여행을 함께해 준 이 사람에겐 색이라고는 없어 밝은 태양 아래서는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안개와 그림자로 빚어진 듯 그의 빈약한 얼굴 윤곽은 분간하기 어려웠고, 눈은 무거운 눈꺼풀로 덮여 있었으며, 주름진 헝겊 같은 뺨과 헝클어진 턱수염은 거친 삼베로 서둘러 만들어 놓은 듯 보였다. 그의 머리에 얹힌 구겨진 회색 모자 역시 그런 느낌을 더해 주고 있다. 그에게서는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 그는 다리를 웅크려 올리고 객실 의자 구석에 앉아 성냥개비로 손톱 밑을 파면서 감기에 걸린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린다.

  “진리란 믿음으로 충만한 견해라 할 수 있지요.”

  “모든 견해가 그렇다는 말인가요?”

  “그럼요, 모든 견해가…….”

  “이가-이가-리가…….”

  차창 밖으로 가을 아침의 어스름 속에서 검은 나뭇가지들이 팔락거리고, 나뭇잎과 불꽃이 날리고 있다.






“「예레미야서」에 이런 말이 있지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 이 말이 우리 자식들을 생각하면 진리인 듯합니다. 지금 이 아이들 입이 아주 시거든요. 우리가 모든 것을 따지고 분석하는 태도라는 신 포도를 먹었는데, 그 결과 우리 아이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부인하는 태도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는 범포 외투 자락을 당겨 뾰쪽 세운 무릎을 덮어 감싸며 성냥개비로 정성스레 손톱 밑을 쑤시며 말을 이었다.

“적군(赤軍)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아들이 그러더군요.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눈을 좀 뜨고 똑바로 보세요. 이론적으로 보자면 우리 삶의 모든 기반이 아버지 같은 사람과 아버지 세대의 다년간에 걸친 무분별한 비판 때문에 진작 깡그리 파괴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지키려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우리 아들이 그리 똑똑하지는 못합니다. 책에서 주워듣고 어쭙잖게 자기 생각을 갖긴 했지만 정직한 녀석이었지요. 그 아이는 레닌의 테제가 발표되자마자 볼셰비키가 되었습니다. 아들놈이 옳았지요. 녀석은 부정과 파괴의 힘을 믿었거든요. 나도 이성으로는 볼셰비즘에 찬성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반혁명 분자로 체포되었을 때 체카66의 조사관한테도 그렇게 말했지요. 조사관은 젊은 사람으로 꽤나 멋쟁이였는데, 틀림없이 법률가였을 거예요. 나를 심문하는 솜씨가 아주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우리 아이가 유데니치67군과의 전선에서 죽었다는 걸 알고 나를 꽤 우호적으로 대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그냥 쏘아 버리면 좋겠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내 가슴과 이성 사이의 모순에 대해 암시하는 말을 했더니, 자기 앞의 종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그가 넌지시 말하더군요. ‘당신 아들한테 보낸 편지를 보고 우리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게 당신 형편에 도움이 되지는 않아요.’ 내가 물었지요. ‘그럼 총살인가요’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그렇게 되기가 아주 쉽지요. 우리가 이 지루한 일을 정리하도록 당신이 좀 도와주지 않는다면 말이오.’ 거리낌 없이 이렇게 대답하면서 오히려 뭔가 미안하다는 듯 쓴웃음을 짓더군요. 나도 따라 웃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의무를 다하려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한층 호의를 베푸는 듯한 태도로 나를 대하며 이러는 겁니다. 그 이상 당연한 게 없다는 듯 딱 잘라서 말이에요. ‘아마 당신에겐 죽는 게 더 낫겠지요? 그런 것 아닙니까? 살면서 자기 안에 그런 분열을 안고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 아닙니까?’ 그러고 나서 사과하더군요. ‘죄송합니다. 일과 상관없는 질문을 드려서요.’”

“이가-리가-리가, 이가-이가.” 차축이 삐걱거린다.

하품을 하고 몸을 움츠리며 남자는 창밖을 내다본다. 빗줄기가 창유리 위로 흐르고 있다.

그에게 묻는다.

“그래도 그 사람이 당신을 풀어 줬네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말입니다.”

자신의 삼베 얼굴을 내게로 돌리더니 남자는 약간 비꼬며 대드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조사하고 있던 몇 가지 문제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좀 주었지요…….”

“길-동-무, 길-동-무.” 기차 바퀴가 레일 이음새마다 덜컹거린다. 비는 드세어지고, 차축은 한층 더 날카롭게 삐걱거린다.

“이-구이-구이구-이구이…….”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세기 러시아 대표 지식인 막심 고리키 저널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감, 삶에 대한 고결한 의지를 읽는다!


가난한 사람들












* 1/29(월)부터 격일 업로드됩니다. (총 5회 진행) 

* 2월 9일 출간될 <가난한 사람들> 미리 읽어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3.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목소리








뭉개진 코에 원숭이 얼굴을 한 털북숭이의 키 작은 남자가 거의 달리듯 빠르게 종종걸음을 치며 가고 있다. 그의 눈의 짙푸른 눈동자는 초초한 듯 부풀어 있고, 그 주위를 가느다란 오팔색의 둥그런 흰자위가 에워싸고 있다. 범포로 만든 외투는 그의 키에 맞지 않고, 가장자리가 불규칙하게 찢겨 나가 술 장식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 마치 개가 물어뜯어 놓은 것 같다. 발에는 볼품없이 구겨진 펠트 장화를 신고 있다. 모자를 쓰지 않은 머리에는 잿빛 머리카락이 솟아 있고, 백발이 잔뜩 섞인 무성한 수염이 눈 밑과 광대뼈 아래, 귀에서부터 헝클어져 자라나 있다. 빠르게 움직이며 무언가 초초하게 중얼거리며 팔을 휘두르기도 하고 이따금 양손가락을 꽉 마주잡기도 한다.

인민의 집 근처 대로에서 그가 병사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다.

“그걸 알아야 돼요. 특히 당신들이 알아야 해요! 사람은 자기가 아주 잠시 동안만 사람으로 산다는 걸 기억하고 그걸 받아들일 때만 행복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낮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 그의 겉모습을 보면 꼭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 다리를 휘청거리며 한 손으로는 가슴을 누르고 다른 한 손은 지휘하듯 휘젓고 있는데, 그 손에도 털이 잔뜩 나 있고, 손가락에도 시커먼 덤불이 자라 있다. 그의 앞 벤치의 병사 셋은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껍질을 그의 배며 다리를 향해 내뱉고 있고, 뺨에 빨갛게 패인 자국이 있는 네 번째 병사는 담배를 피우면서 말하고 있는 남자의 입과 코를 향해 연기를 뿜어 맞추려 애쓰고 있다.

“내 확실히 말하는데, 우리 사람들에게 뭔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려 해봤자 소용없어요. 그건 비인간적이고 범죄적이기까지 한 짓입니다. 사람들을 불로 지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병사가 피우던 담배꽁초에 침을 뱉어 손가락으로 튕겨 허공으로 날려 버리고는 다리를 쭉 뻗으며 물었다.

“누구한테 고용된 거요”

“뭐? 나요”

“아저씨 말이야. 누구한테 고용된 거냐고”

“무슨 말이오? 고용됐다니”

“말 그대로지 뭐긴 뭐야. 부르주아한테 고용됐나, 유대인한테 고용된 건가”

남자는 당혹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문이 막혔고, 해바라기씨를 까먹던 셋 중의 하나가 질문을 하고 있던 병사에게 느릿한 말투로 한마디 보탰다.

“배때기나 한 대 차 버려.”

또 다른 병사가 끼어들었다.

“찰 만한 배도 없구먼.”







키 작은 남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양손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가 다시 손을 잡아 빼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내가 할 말을 하는 겁니다. 누구한테 고용된 게 아니라니까요. 생각도 많이 해봤고, 책도 읽고, 신앙도 가져 봤소. 하지만 이제 알았어요. 사람은 아주 잠깐 동안 살 뿐이고, 모든 것이 스러져 사라진다는 걸. 그리고 사람은…….”

볼에 패인 자국이 있는 병사가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저리 안 가!”

키 작은 남자가 흠칫하며 펠트 장화 주위로 먼지가 일도록 황급히 저만치 내빼자, 병사는 자기 동료들에게 말했다.

“감히 우릴 겁주려 해? 쓰레기 같은 새끼. 우리가 지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는 줄 아나 봐. 훤히 다 알고 있는데 말이야…….”

같은 날 저녁 남자는 트로이츠키 다리 부근 벤치에 앉아서 다시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걸 알아야 해요. 실은, 대부분의 인간이나 우리 자신이 바보라고 여기는 단순한 인간이야말로 삶의 참된 건설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바보거든요…….”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얼굴이 얽고 다리가 휜 수병, 육중한 체격의 경찰관, 푸른 원피스를 입은 뚱뚱한 여자, 노동자로 보이는 잿빛 머리의 세 사람, 검은 가죽옷을 걸친 유대인 젊은이. 발끈한 젊은이가 이죽거리며 물었다.

“그럼 프롤레타리아트도 바보겠네요, 어?”

“나는 아주 최소한의 것을 바라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요. 무엇보다도 그런 사람들이 자기에게 익숙한 대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요.”

“그러니까 부르주아지를 말하는 거지, 응”

“잠깐만, 동무!” 수병이 근엄하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들어 봅시다…….”

말을 하던 키 작은 남자가 수병 쪽을 향해 고개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인간이 바보 같다는 것은 우리가 책에서나 말하는 관점일 뿐이지 그 자신은 자연이 준 지혜만으로도 전혀 모자람이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단 말입니다…….”

“옳은 말씀이네요!” 수병이 말했다. “계속하세요!”

“인간은 잠시 살다 가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얼마 안 있어서 무덤에 드러누워야만 한다는 것 때문에 불안해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요. 거 맞는 말씀입니다!”

수병은 거듭 맞장구를 치더니, 가죽옷의 젊은이에게 눈을 찡긋하며 정작 그 자신은 자기 불멸을 굳게 확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죽거리는 미소를 씨익 지었다.







털북숭이 남자는 변함없이 낮은 목소리로, 마치 자신의 말을 믿어 달라 부탁하고 간청하는 듯한 무척 야릇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인간은 희망으로 들뜬 불안한 삶을 원치 않습니다. 밤하늘의 별 아래 느릿느릿 흘러가는 조용한 삶이면 족합니다. 제가 확실히 말하지만, 잠시 살다 갈 뿐인 사람들에게 실현 불가능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들의 게임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가 뭘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아하!” 수병이 외치며 양손바닥을 무릎 위에 받치고 몸을 앞으로 굽히더니 벌떡 일어섰다.

“자— 갑시다!”

“어디로 가자는 겁니까?” 털북숭이 남자가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고. 동무, 당신도 나를 따라와 주시오…….”

“아이, 그냥 내버려 둡시다.” 젊은이가 손사래를 치며 경멸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따라오시오!” 수병이 거듭 말했다.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얽은 낯은 흙빛으로 변했고 눈은 사납게 깜빡였다.

“난 무서울 게 없소.” 털북숭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낙네는 성호를 그으며 저쪽으로 가 버렸고, 경찰관도 메고 있던 소총의 걸쇠를 만지작거리며 물러갔으나, 남은 세 사람은 마치 한마음이 된 듯 기계처럼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병과 가죽옷을 입은 젊은이는 자기들이 붙잡은 남자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로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행인 두 사람이 다리 위에서 그들을 잡아 세워 수병에게 철학자를 놓아 주라고 타이르기 시작했다.

“안 돼요, 안 돼!” 수병이 반발했다. “이 푸들 같은 놈한테는 인간이 얼마 못 산다는 게 뭔지 똑똑히 보여 줘야 해요.”

“난 무서울 게 없소.” 푸들이 자기 발끝을 바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되풀이해 말했다. “하지만 당신들이 그리도 뭘 모르다니 놀랍소…….”

그는 갑자기 홱 몸을 돌리더니 원래 있었던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저거 봐 도망간다!” 수병이 놀라서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가 버리잖아! 어이, 어디 가는 거야?”

“아이, 그냥 내버려 둡시다, 동무. 보시다시피 제정신이 아니잖아요…….”

수병이 털북숭이 키 작은 남자의 등 뒤를 향해 휙 휘파람을 불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소리도 없이 가 버렸네! 개자식이 용감하네 정말. 완전히 맛이 가서는…….”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세기 러시아 대표 지식인 막심 고리키 저널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감, 삶에 대한 고결한 의지를 읽는다!


가난한 사람들












* 1/29(월)부터 격일 업로드됩니다. (총 5회 진행) 

* 2월 9일 출간될 <가난한 사람들> 미리 읽어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2.

사람들이 혼자 있을 때







오늘 소녀처럼 앳된 얼굴의 크림색 스타킹을 신은 금발의 자그마한 여인이 트로이츠키 다리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회색 장갑을 낀 손으로 다리 난간을 붙잡고 있었는데 마치 당장이라도 네바 강으로 뛰어들려는 듯 보였고, 달은 그녀가 내민 뾰족한 빨간 혀를 비춰 드러내고 있었다. 하늘에는 늙고 교활한 여우가 짙은 회색 연기구름을 뚫고 하늘을 향해 살금살금 기어가고 있었는데, 그 몸집이 아주 거대하고 술에 취한 것처럼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인은 하늘의 여우를 희롱하는 데 완전히 정신이 팔려 여우에게 뭔가 앙갚음할 일이 있는 듯마저도 보였다.








그 여인 때문에 오래전부터 나를 늘 당혹스럽게 해 왔던 몇 조각의 ‘기이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 하는 짓을 지켜보노라면 그들이 제정신을 잃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처음 그런 모습을 본 것은 소년 시절이었다. 론달이라는 이름의 영국인 광대가 서커스극장 안의 인적 없는 복도에 걸린 거울 곁을 지나가다 실크해트를 벗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대고 정중하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론달의 머리 위에 있는 물탱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볼 수 없었고, 나도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우연히 물탱크 밖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 광대가 자기 자신에게 깍듯이 절을 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나를 어둡고 불쾌한 놀라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광대, 게다가 영국인이라는 사람은 기묘한 짓을 그의 직업 또는 재주로 삼고 있구나…….’

그런데 안톤 체호프가 자기 집 정원에 앉아 모자로 햇볕을 잡아 모자와 함께 머리 위에 써 보려고 부질없는 헛수고를 하는 것을 보았다. 하릴없는 실패가 햇볕 사냥꾼의 짜증을 돋우어 그의 얼굴은 갈수록 약이 올라갔다. 그는 그 짓을 그만두며 낙담한 듯 모자로 무릎을 내리치고는, 격한 동작으로 모자를 머리 위에 팩 눌러 썼다. 그러고는 짜증스럽게 자기 개 투지크를 발로 밀치고,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더니 집안으로 향했다. 그는 현관 앞 계단에서 나를 만나자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 주무셨소! 발몬트의 ‘태양은 풀 냄새가 난다.’라는 시구 읽어 보셨소? 바보 같은 표현이죠. 러시아의 태양은 카잔 비누 냄새가 나고, 이 동네에선 타타르인 땀 냄새가 나거든요…….”

그는 또 굵은 빨간 연필을 작은 약병 주둥이로 밀어 넣으려 한참 동안 갖은 애를 썼다. 이는 명백히 모종의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시도였다. 체호프는 실험자의 집요한 끈기를 갖고 이 시도에 꼼짝 않고 몰두했다. 







톨스토이는 도마뱀을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행복하냐, 응?”

도마뱀은 뒬베르 궁으로 가는 길가 덤불 사이의 돌 위에서 몸을 덥히고 있었고, 톨스토이는 양손을 가죽 허리띠에 찔러 넣은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 세계 최고의 위대한 이 인물은 도마뱀에게 고백했다. 

“난, 불행하단다.”







화학자 M. M. 티흐빈스키 교수는 우리 집 식탁에 앉아 놋쇠쟁반에 비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사는 게 좀 어떻소, 형제?”

쟁반 속의 형제는 답이 없다. 교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손바닥으로 쟁반 속 자기 모습을 지우려는 듯 꼼꼼히 문지르더니,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언짢게 코를 실룩거렸는데 그 꼴이 갓 태어난 코끼리 코를 닮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세기 러시아 대표 지식인 막심 고리키 저널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감, 삶에 대한 고결한 의지를 읽는다!


가난한 사람들


















* 1/29(월)부터 격일 업로드됩니다. (총 5회 진행) 

* 2월 9일 출간될 <가난한 사람들> 미리 읽어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1.

'푸른색' 생각들








저 마을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산다. 펠트 공장을 갖고 있는, 건실하고 영리한 한 남자는 카람진의 『러시아 국가의 역사』를 4년째 읽고 있는데, 지금 9권을 읽고 있다.

“굉장한 작품입니다!” 그가 책의 가죽 장정을 존경을 가득 담아 쓰다듬으며 말한다. “차르가 보던 책이지요. 대번에 거장이 썼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지요. 겨울밤에 읽기 시작하면 일상의 잡다한 일들을 모두 잊게 됩니다. 기분이 좋아지죠. 한 권의 책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고상한 정신으로 쓰인 것이라면 말입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의 덥수룩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친근한 미소를 보내며 내게 물었다. 

“재미있는 구경 좀 하렵니까? 우리 집 뒷마당 맞은편에 의사가 사는데, 우리 마을 사람은 아닌 어떤 여자가 데이트를 하러 이자 집에 들리곤 한답니다. 다락에 올라가면 지붕창으로 이들이 즐기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 집 창문은 아래쪽 반만 커튼을 쳐 놓아서 위쪽 창문으로 이 사람들 재미 보는 게 아주 자세히 보입니다. 어쩌다 타타르인한테서 쌍안경까지 하나 사 두고 가끔 재미 좀 보라고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합니다. 아주 재미난 방탕이지요…….”






마을 목욕탕을 빌려 운영하고 있는 애꾸눈 사내가 있다. 낡은 바지로 모자를 만드는 ‘모자 제조공’이기도 한 그는 온 마을 사람들이 싫어한다. 사람들은 길에서 그를 만나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스쳐 지나가며 늑대라도 되듯 그를 돌아다본다. 어떤 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마치 들이받기라도 하려는 듯 모자 제조공을 향해 곧바로 돌진해 간다. 그럴 때면 모자 제조공은 비켜서서 길을 터 주고는 그 대담한 사람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씨익 웃는다.

“왜 그렇게들 당신을 싫어하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내가 무자비하기 때문이지요.” 그가 뽐내듯 말했다. “내 습관이, 누가 하나라도 잘못하면 그 사람을 법정으로 끌고 가거든요!”

그의 눈의 흰자위는 벌겋게 실핏줄이 가득 차 있고, 불그스레한 둥근 눈동자가 그 붉은 그물 안에서 오만하게 번득인다. 모자 제조공은 땅딸막하고 다부진 체격에 팔이 길고, 다리는 바퀴마냥 둥그렇게 휘어져 있다. 거미처럼 보인다.







“사실 말이지, 내가 법을 좀 안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날 좋게 생각하지 않지요.” 그가 담배를 말면서 말한다. “낯선 참새가 내 텃밭에 날아들면 말하죠. 법정에 온 걸 환영합니다! 수탉 한 마리 때문에 넉 달 동안 소송을 치렀지요. 심지어 판사라는 사람도 내게 이럽디다. ‘당신은 쓸모없이 인간으로 태어났소. 본성을 보면 당신은 등에라고!’ 인정머리 없다며 나를 두들겨 패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날 때리는 것은 별로 득이 되질 않지요. 나를 때리는 건 달구어진 쇠를 손으로 쥐는 것과 같아요. 자기 손만 델 테니까. 나를 쳤다 하면 그 순간부터 내가…….”

그가 날카롭게 휘파람을 분다. 과연 그가 걸핏하면 소송을 거는 통에 지방판사는 그가 낸 숱한 고발장과 진정서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자 제조공은 경찰과는 사이가 아주 돈독했다. 사람들 말로는, 그가 밀고장 쓰기를 즐겨서 마을 사람들이 저지른 갖가지 죄를 적어 둔 모종의 장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 짓을 합니까?”

그가 대답한다.

“내 권리를 존중하기 때문이지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세기 러시아 대표 지식인 막심 고리키 저널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감, 삶에 대한 고결한 의지를 읽는다!


가난한 사람들

















* 1/29(월)부터 격일 업로드됩니다. (총 5회 진행) 

* 2월 9일 출간될 <가난한 사람들> 미리 읽어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