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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나무
아야세 마루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2월
평점 :
아야세 마루, 최고은 역, [치자나무], 현대문학, 2021.
Ayase Maru, [KUCHINASHI], 2017.
사랑, 이별, 그리움... 남녀 관계에 관한 7개의 단편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대단한데, 과감한 은유와 상징으로 판타지? 기담? 이세계물(異世界物)? 등을 보는 것 같다. 해석과 취향의 문제겠지만, 기발하면서 난해하다. 누군가는 숨은 의미 찾기를 즐길 수 있고, 나는 불명확성의 함정에서 허우적거렸다. 장편보다는 단편이 까다롭고, 단편보다는 시가 어렵다. 읽을 때는 흥미로운데, 읽은 후에는 미궁에 빠지는 이상한(?) 소설이다. 두 번을 읽었다.
치자나무
꽃벌레
사랑의 스커트
짐승들
얇은 천
가지와 여주
산의 동창회
일본식 정서와 감정은 충분한데, 색다른 분위기이다.
"좌우지간 뭐라도 받아줘. 뭐든 좋으니까."
"그럼 팔을 줘요."
"팔? 내 팔?"
"응. 잘 때 날 쓰다듬는 손길이 좋았거든."(p.11-12)
팔을 돌려받은 부인은 미친 듯 피어난 치자꽃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랑이란 말이 없었으면 좋았을걸. 그랬으면 분명 용서할 수 있었을 텐데."(p.36-37)
'치자나무'는, 배우 지망생과 스폰서로 만나 10년을 불륜으로 이어온 관계에서 남자는 이별을 통보한다. 그동안의 신세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한쪽 팔을 달라고 한다. 따뜻한 손길을 간직하고 싶었을까? 남자는 거리낌 없이 팔을 떼어 주고 떠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부인이 팔을 찾으러 온다. 마음의 상처도 아픈 곳을 이렇게 쉽게 떼어낼 수 있다면... 공원 나무 사이에서 치자나무를 발견한다.
나처럼 남자를 응시하는 주변 학생들은 여전히 인격을 지닌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과제의 대상으로서 관찰하는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복사뼈에 피어난 꽃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담담하게 목탄을 움직이고 있다. 나 혼자만 고요히 타오르며, 인간의 몸에서 피어난 기괴한 꽃에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초조해하며 남자의 뒷모습을 그려나갔다. 손끝을, 목덜미를, 복사뼈의 꽃을.(p.44-45)
"너희는 가짜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들이 잠든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유진이 가여웠다.
"너희를 만날 때까지는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어. 분명 운명이다, 신이다, 그런 존재의 축복이라 마음 한구석에서 믿고 있었지."
"나는 진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해."
"유진, 제발......"(p.68)
꽃벌레는,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의 복사뼈에 핀 꽃과 여자의 눈꼬리에 핀 꽃으로 운명적 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행복한 결혼생활... 그런데 그들의 눈에 보인 꽃의 정체는, 기생하는 벌레가 뇌를 조종하는 것이라는 연구가 발표된다. 여자는 현실에 만족하지만, 남자는 실체를 알기 위해 구충제를 복용한다. 조작된 세상에서의 행복인가? 진실한 세상에서의 외로움인가? 사랑의 부조리...
그곳에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 서 있었다. 나이는 30대 중반쯤 될까. 살짝 눌린 반 단발머리에, 한눈에도 저렴하다는 걸 알 수 있는 펑퍼짐한 하얀 티셔츠와 린넨 바지, 눈썹만 그린 화장기 없는 둥근 얼굴, 굳이 칭찬하자면 토이푸들이나 포메라니안이 연상되는, 눈동자가 큰 눈은 귀여웠다. 하지만 미인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치에는 아마 두 살도 안 된 듯한, 연회색의 고급스러운 원피스와 분홍색 샌들 차림의 작은 여자아이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여성은 나를 보고 안녕하세요, 하고 환하게 웃었다.(p.99)
엄청난 사랑이었다. 강 건너에서 타오르는 해바라기밭, 건드려서는 안 되는 미술관의 명화. 나는 그저 한 관객으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공기에 축축한 냄새가 섞이나 싶더니 이내 내리치듯 소나기가 쏟아졌다.(p.106-107)
"어느 봄날 저녁에, 저기 공원 벤치에서 마치야 씨가 잠든 나나코를 안고 작은 소리로 노래하는 걸 보고, 아, 좋다, 생각했어요. 그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했고요. 여유롭고, 안심할 수 있고, 살짝 반짝이면서 시간이 멈춘 듯한, 그런 이미지를 쫓는 동안 완성된 옷이에요. 그러니까 감사의 표시로 받아주세요."(p.114)
"......이 일을 하길 잘했어."
"어?"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꽃밭처럼, 닿을 수 없는 것만 좋아하게 되는 나는 평생 이렇게 살 줄 알았어.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닿지 않고도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더 많겠지."(p.115-116)
'사랑의 스커트'는, 출장 미용을 하러 간 곳에서 우연히 학창 시절에 짝사랑했던 남자를 만난다. 그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집주인 여자에게 빠져 있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를 바라보는... 그녀를 위해 스커트를 만들어 주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달라진 표정과 집중력... 집주인 여자는 옷을 받고 아주 기뻐한다.
불륜을 벌이고, 처자식을 외면하고, 유부녀를 스토킹하는 것에서 일본식 정서와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헤어지는 연인에게 한쪽 팔을 떼어주고, 한눈에 반한 사랑은 뇌를 지배하는 기생충의 영향이라는 설정은 아주 놀라웠다. 짝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를 짝사랑하는 것은 살면서 수없이 경험했고, 또 그이의 짝사랑을 돕는 것은 나의 이야기였다...ㅜㅜ 사랑 아닌 사랑, 이별 아닌 이별, 그리움 아닌 그리움은 어지럽고 복잡하다!
비교적 얇은 책이라서 가볍게 한 번, 미궁에 빠진 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또 한 번을 읽었다. 연이어 두 번을 읽은 책은 거의 없는데, 그만큼 답답함(?)이 있었나 보다. 제158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쿠타가와상이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과감한 은유와 상징은 미스터리라기보다 순문학에 가까운 느낌이다. 읽을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살면서 많이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리워했다면... 이해의 폭은 더 넓었겠지...;;
뱀이 되는 여자가 그리 드문 건 아니다. 그 밖에도 뱀보다 수는 적지만, 큰 개, 호랑이, 지네나 거미 등 여자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변화한 여자들은 동이 트기 전, 아직 움직임이 둔한 남자들을 찾아가, 사랑하는 이를 붙잡아 머리부터 와그작와그작 잡아먹는다. 그런 짓을 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스구리처럼 감정 기복이 심하고 공격적이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는 타입의 여자가 많다. 나는 그런 맹렬한 욕구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p.125-126)
우리는 세상의 절반밖에 못 보는 거네. 작은딸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세상의 절반밖에 못 보더라도,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모든 걸 알려고 드는 건, 꼭 사랑하는 사람을 못 믿는 것 같으니까.(p.140)
'짐승들'은, 여자는 온몸에 비늘이 돋아 하얀 뱀으로 변해서 바람나 헤어진 연인을 잡아먹으러 간다. 멈출 수 없는 충동, 다른 여자를 만나 다정하게 구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한다. 일찍 남편하고 결혼해서 두 딸을 키우며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다. 그런데 작은딸이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잡아먹고 울면서 돌아온다. 동이 트면 남자들이 활동하고, 해가 저물면 여자들이 움직이는 세상이다.
"북쪽 아이들하고 같이 놀 수 있는 곳이 있어. 좋아하는 옷을 맘껏 갈아입힐 수도 있고. 요즘에는 뭘 만들어도 아이들은 입기 싫다고 하잖아. 옷을 갈아입히거나 화장을 시키면서 놀 수 있어. 시간 안에는 뭘 해도 되고. 안고 같이 잘 수도 있어."
"어머, 좋은데?"
"그렇게 천사 같은 아이들을 안아볼 수 있다고?"(p.161)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단다."
돌아간다는 건 그 생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숨죽인 인형의 생활. 아들은 내가 거부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황망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문득 소나기가 퍼부은 듯 마음이 젖어들었다.
가엽기도 하지, 이 아이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제 무구한 소원이 어째서 거부당하는 것인지. 자신이 당연하다 여기는 생활이, 나를 학대하는 일이라는 걸 모른다.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정상적인 이 아이는 분명 평생 이해하지 못하리라.(p.186)
'얇은 천'은, 어느 순간 남편과 아들로부터 무시와 외면을 당한 여자는 살아있는 인형 놀이를 하러 간다. 전쟁을 피해 북쪽에서 온 난민들 사이에는 천사 같은 아이가 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약속된 시간, 비밀의 방에 들어가면 눈을 가린 소년이 있다. 간식을 먹이고, 옷을 만들어 입히고, 끌어안고 잠을 잔다... 여자는 그곳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를 만난다.
"사랑하니까, 내가 가진 건 다 줬어요. 남편뿐 아니라 노아에게도, 하루카에게도 다 줬죠. 날마다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도 하고, 도시락도 쌌어요. 쌀을 씻어야 하니까 네일아트는 엄두도 못 냈어요. 고기도, 생선도 30년 동안 찌꺼기만 먹었어요. 잠자리도 피하지 않았죠.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려고 했어요. 다 줬어요. 정말로, 다."(p.208)
젖어 있는 동안에는 염색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드라이어로 뿌리부터 말리는 동안에 어머, 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다르다. 머리끝이 희미하게 보랏빛으로 변한 것뿐인데, 거울 속 여자는 여느 때보다 경박해 보였다. 밝고 차가운, 새로운 여자다.
...
오우미 씨가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안 들렸다. 느닷없이 새 귀걸이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머리카락 빛깔에 잘 어울리는 진주와 골드 이어링. 옷도 새로 사야지.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로.(p.216)
'가지와 여주'는, 남편이 외도 상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었다. 여자는 장례를 치르고, 시청으로 가서 혼인 관계를 정리한다. 지난 30년 동안 남편과 자식에게 해온 헌신의 끝이었다. 거울을 보니 뭔가 달라진 얼굴... 단골 미용실의 폐업으로 이발소에 가서 가지색으로 염색을 한다. 얻어온 여주로 요리를 하고... 새로운 여자로 홀로 선다.
그래도 바로 거절하지 않은 건, 동창 중 절반 가까이 되는 여자아이들이 벌써 세 번째 임신을 맞이해 배에 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범생 무리에는 가장 친했던 고토도 끼어 있었다. 세 번의 산란을 끝낸 여자는 대부분 기운이 다해서 숨이 끊어진다. 이번이 친구들과 작별할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p.227-228)
"알을 품는 건 즐거웠어?"
내 물음에 고토는 큼지막한 꽃봉오리가 활짝 피듯 웃었다.
"당연하지. 즐겁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어. 지금도 행복해."
"알을 품는 것도 낳는 것도 내 눈에는 무척 힘들어 보이던데. 그렇지는 않았어?"
남의 일이지만 오랫동안 의문으로 여겼던 일이다. 과격하게 반응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한테는 물어볼 수 없었다. 지금 고토라면 아무 함의도 없는 단순한 질문으로, 적당한 무게로 되받아칠 것 같았다.
"몸은 힘들고 괴롭지만, 그만큼 즐거웠어. 봐, 힘들지만 즐거운 일도 있잖아. 그런 느낌이야."(p.251-252)
'산의 동창회'는, 세 번의 산란을 끝내면 대부분의 여자는 기운이 다해 숨이 끊어진다. 가장 친했던 친구와 마지막 작별이 될 수 있기에 동창회에 참가한다. 사고를 당하고, 해수로 변하고, 수명을 다해 쇠약해진 소식... 산란을 경험하지 못한 여자는 친구의 마지막을 기록으로 남긴다. 임종을 지키고, 기록하고, 자고, 일어나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그리고 동창들은 모두 죽었다.
짐승으로 변하고, 산란해서 알을 품는 기묘한 이야기보다 은밀한 취미를 즐기고, 염색하고 요리하는 현실의 이야기가 더 와닿았다. 여기에서도 충동적 욕구, 은밀한 사생활, 가족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일본식 정서와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상대를 잡아먹고, 살아있는 인형 놀이를 하고, 목숨 건 산란을 한다는 설정은 매우 놀라웠다. 가지색으로 염색으로 하고, 새로운 요리를 익히며 다시 삶을 시작하는 중년 여자에게서는 희망을, 홀로 남아 모두가 떠나간 자리를 지키며 회상하는 여자에게서는 연민이 느껴진다. 나도 점점 나이들어 이런 때가 오겠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