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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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기미코, 권영주 역, [변호 측 증인], 검은숲, 2011.

Koizumi Kimiko, [BENGO GAWA NO SHONIN], 2009.

고전의 재발견, 일본에서 오래전에 발표한 추리 문학의 의미를 찾아서 재출간한 책이다. 현대의 눈높이에서는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고, 캐릭터 특징이 단조로운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소설 [변호 측 증인]은 (스포일러 주의!) 서술트릭의 개척(?)이라는 의미에서 읽어볼 만하다. 1963년에 처음 발표한 소설을 2009년에 되살렸고, 국내에는 2011년에 번역했으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서 읽게 되었다...;;

'피고를 사형에 처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왜 남편을 보지 않았을까? 물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이 어떤 태도로,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듣는지 나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다.(p.14)

존속살해 혐의로 피고를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 여기에는 어떤 억울함이 있을까? 소설은 영화보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제한된 등장인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일관된 논조로 전개한다. 꼬인 매듭이 마지막 장에서 해결-정리하는 구성, 낭만적인 묘사는 고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네 행운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건 아닌데."

야시마 산업의 유명한 아들이 '클럽 레노'의 미미 로이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로 했을 때, 에다는 이렇게 운을 떼고 말했다.

"시집가서 네가 고생할 건 누가 봐도 뻔해. 아니, 스트리퍼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야. 난 너만큼 좋은 아내가 될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는걸. 문제는 그 사람이야. 이 바닥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방탕한 사람이란 말이야. 일족의 골칫덩이라고 이야기되는 그 사람을 새사람이 되게 한 건 네 힘이란 말을 듣게 해야 해. 지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지면 안 돼. 넌 벌거벗고 춤추는 생활에서 발을 빼는 거야."(p.34)

나미코는 클럽 레노의 스트리퍼이다. 불행한 가정사로 이류 카바레에 흘러들어 미미 로이라는 이름으로 춤을 춘다. 어느 날 클럽에 놀러 온 야시마 스기히코는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야시마 산업의 외동아들, 방탕한 골칫덩이... 하지만 사랑은 진지했고, 집안의 허락 없이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과 불편한 나날... 야시마 나미코는 남편의 생활을 바로잡고, 저택의 안주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말이네, 유기. 경찰이 반드시 진범을 잡는 건 아닌 모양이던데. 내가 저번에 비서 애한테 빌려서 읽은 외국 탐정소설에선 죄도 없는 인간이 감옥에 들어가지 뭔가. 게다가 경찰에서 한번 잡고 나면 얼마 있다가 무죄가 밝혀져도 체면이 손상된다고 그냥 범인으로 꾸미더군. 그게 어느 나라 이야기였더라. 음, 그게 분명히......"(p.125-126)

유산 상속을 둘러싸고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날 밤에 야시마 류노스케 회장이 살해된다. CCTV와 과학수사가 일상화된 현대와는 다르게 경찰은 목격자 진술을 확보하고, 범행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용의자를 검거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이게 그렇게 기적적인 일인가?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관은 자신의 오인 체포를 인정하면 안 되나? 자기가 잡은 용의자의 무고함이 판명되면 그걸 인정하면 안 되나? 다시 진범을 체포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그가 자신의 오인 체포를 공표하기 위해 법정에 서면 세상이 뒤흔들리기라도 하나? 그런 일을 하는 경찰관이 존재하면...... 아니, 그런 경찰관이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런 이야기는 현대에서는 처녀 수태나 루르드의 기적이나 마찬가지로 허황된 이야기인가?(p.233)

작가는 1960년대 당시의 경직된 사회 분위기를 담으려고 했을까? 경찰의 오인 체포와 수사 과정에서의 실수를 말하는 것은 공권력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이고,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기에 좀처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변호 측 증인으로 증언대에 오르는 인물...

서술트릭은 작가와 독자의 두뇌 싸움으로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있다.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경이롭다! 추레한 복장으로 별 볼 일 없는 외모를 지닌 변호사가 등장하는데, 괴짜 변호사의 활약을 첨가하면 어땠을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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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무죄
다이몬 다케아키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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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몬 다케아키, 김은모 역, [완전 무죄], 검은숲, 2022.

Daimon Takeaki, [KANZEN MUZAI], 2019.

  (나는) 잘 쓰지 않는 말인데,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원죄'(원통할 원寃, 허물 죄罪)라고 한다.

  재판에서 확정된 판결에 중대한 오류나 불공정이 있는 경우 이것을 구제하기 위해 '재심'(再審)을 청구한다.

  다이몬 다케아키는 원죄와 재심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정의와 진실이 맞붙는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소설 [완전 무죄]는 일본의 사법 제도를 파헤치며 개선을 요구하는 사회파 미스터리이다. 복역 중인 무기수와 변호사는 검찰과 경찰을 상대로, 피해 유가족을 상대로, 언론과 세상의 편견을 상대로 대립하는데... 과연 정의란 무엇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아야가와강 사건은 히라야마가 범행을 부정했다고는 하나, 차에 피해자의 머리카락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남아 있었다. 또한 히라야마는 취조를 받다가 한 번은 자백했다. 현장검증 때도 시신이 있었던 장소를 정확히 가리켰으므로, 정황상 일본변호사협회도 원죄일 가능성이 있는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p.32)

  실제로 만나보니 그냥 얌전한 남자라는 인상이었다.

  하기야 달리 흉악한 살인범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으니 비교는 불가능하다. 히라야마에게서 제일 많이 느껴지는 감정은 체념이었다. 히라야마는 근본적으로 체념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정말로 살인을 저질렀는지 저지르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p.48-49)

  마쓰오카 지사는 도쿄의 대형 로펌 페어튼 법률사무소 소속 젊은 변호사이다. 증거주의를 원칙으로 불확실한 증언을 밝혀내고, 경찰의 무리한 정의감으로 인한 억울한 죄를 변론한다. 그녀는 21년 전에 발생한 소녀 유괴 살해사건, 아야가와강 사건의 재심 청구를 맡게 되는데... 여기에는 뜻밖의 사연이 있다.

  지금까지 매일 악몽에 시달리는 기억... 당시 가가와현의 만노정, 마루가메, 아야가와에서 연이어 세 명의 소녀가 납치되었다. 다카기 유카는 실종이고, 이케무라 아키호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그 사이에서 마쓰오카는 겨우 탈출했다. 어린 시절에 잊을 수 없는 참혹한 경험이다. 원죄를 주장하는 그때의 범인을 변호해야 한다. 그의 범행이 아니라면, 진범을 찾아야 한다... 자신을 괴롭혀온 괴물과 맞서 싸울 기회이다.

  형사로서는 복 받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점이라 불러야 할 일이 딱 하나 있다. 아야가와강 사건 당시의 수사 방법이다.

  하지만 아리모리는 확신한다. 히라야마가 이케무라 아키호를 죽였다고. 설령 수사에 문제가 있었을지언정 진실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제 와서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져 만에 하나라도 히라야마가 무죄판결을 얻어낸들 누가 기뻐한다는 말인가.(p.62-63)

  "경찰의 정의는 범인을 체포하는 것, 검찰의 정의는 재판에서 지지 않는 것, 내가 있던 법원의 정의는 법적 안정성. 딱 잘라 말해 전부 그 하나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변호인의 정의도 마찬가지야. 그런 건 통하지 않는데도 뻔하디뻔한 변호를 해놓고, 부당한 판결이니 뭐니 부르짖을 뿐 현실에는 눈길을 주지 않지. 모두가 정의에 매몰되는 바람에 무고하고 약한 사람만 눈물을 흘려......"(p.91)

  피해자를 위해, 사회정의를 위해, 목숨 걸고 이 거짓말을 관철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는 것이리라.

  "정의라는 놈이 제일 큰 악이야."(p.133)

  아리모리 요시오는 강력반 형사로 복무하다 경감으로 퇴직했고,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민간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피해자 유족을 위로하며 살고 있는데, 21년 전 사건의 재심 청구 소식을 듣는다. 경찰 생활의 유일한 오점으로 생각하는 당시의 수사 방식... 그러나 그가 잡아넣은 자는 정황상 진범이 확실하다.

  저자는 각자의 처지에서 매몰된 정의를 비판한다. 경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범인을 체포하는 것, 검찰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재판에서 이기는 것... 불의를 범할지라도 피해자를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악인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정의가 통용되던 과거의 수사 방식을 정면으로 꼬집는다.

  한 번이라도 경찰의 의심을 받으면 진범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계속 위험인물로 여겨진다. 그건 경찰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내면에는 강한 힘을 따르고 싶은 굳은 의식이 존재하므로, 강한 힘으로 한번 사회에서 배제된 인간이 복귀하기는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

  무죄판결을 받았으니까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보통 사람에게는 힘든 일이나 누명을 벗고 풀려난 '흉악한 살인범'과 단둘이 하룻밤을 보내라고 하면 분명 대다수는 겁을 먹을 것이다.(p.175-176)

  또한 사람의 변하지 않는 인식을 지적한다. 한번 경찰과 검찰의 지목을 받으면, 죄가 없더라도 세상의 편견에 부딪혀야 한다.

  마쓰오카는 재심 청구심에서 당시 경찰의 강압 수사와 증거 조작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녀의 논리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낙타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진범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경찰과 검찰이 주장하는 정의와 무기수와 변호사가 주장하는 진실의 대결은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 언론의 태도와 바뀌지 않는 세상의 이목은 우리의 현실을 잘 반영한다. 어쩌면 과거에 나를 유괴했을지 모르는 수감자를 변호하는 변호사의 심리 상태, 범인을 꼭 잡고자 하는 경찰의 막중한 책임, 원죄를 주장하는 무기수의 억울함... 등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한다. 오랜만에 사회파 미스터리의 교과서 같은 작품을 만났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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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나무
아야세 마루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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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세 마루, 최고은 역, [치자나무], 현대문학, 2021.

Ayase Maru, [KUCHINASHI], 2017.

  사랑, 이별, 그리움... 남녀 관계에 관한 7개의 단편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대단한데, 과감한 은유와 상징으로 판타지? 기담? 이세계물(異世界物)? 등을 보는 것 같다. 해석과 취향의 문제겠지만, 기발하면서 난해하다. 누군가는 숨은 의미 찾기를 즐길 수 있고, 나는 불명확성의 함정에서 허우적거렸다. 장편보다는 단편이 까다롭고, 단편보다는 시가 어렵다. 읽을 때는 흥미로운데, 읽은 후에는 미궁에 빠지는 이상한(?) 소설이다. 두 번을 읽었다.

  치자나무

  꽃벌레

  사랑의 스커트

  짐승들

  얇은 천

  가지와 여주

  산의 동창회

  일본식 정서와 감정은 충분한데, 색다른 분위기이다.

  "좌우지간 뭐라도 받아줘. 뭐든 좋으니까."

  "그럼 팔을 줘요."

  "팔? 내 팔?"

  "응. 잘 때 날 쓰다듬는 손길이 좋았거든."(p.11-12)

  팔을 돌려받은 부인은 미친 듯 피어난 치자꽃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랑이란 말이 없었으면 좋았을걸. 그랬으면 분명 용서할 수 있었을 텐데."(p.36-37)

  '치자나무'는, 배우 지망생과 스폰서로 만나 10년을 불륜으로 이어온 관계에서 남자는 이별을 통보한다. 그동안의 신세로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한쪽 팔을 달라고 한다. 따뜻한 손길을 간직하고 싶었을까? 남자는 거리낌 없이 팔을 떼어 주고 떠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부인이 팔을 찾으러 온다. 마음의 상처도 아픈 곳을 이렇게 쉽게 떼어낼 수 있다면... 공원 나무 사이에서 치자나무를 발견한다.

  나처럼 남자를 응시하는 주변 학생들은 여전히 인격을 지닌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과제의 대상으로서 관찰하는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복사뼈에 피어난 꽃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담담하게 목탄을 움직이고 있다. 나 혼자만 고요히 타오르며, 인간의 몸에서 피어난 기괴한 꽃에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초조해하며 남자의 뒷모습을 그려나갔다. 손끝을, 목덜미를, 복사뼈의 꽃을.(p.44-45)

  "너희는 가짜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들이 잠든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유진이 가여웠다.

  "너희를 만날 때까지는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어. 분명 운명이다, 신이다, 그런 존재의 축복이라 마음 한구석에서 믿고 있었지."

  "나는 진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해."

  "유진, 제발......"(p.68)

  꽃벌레는,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의 복사뼈에 핀 꽃과 여자의 눈꼬리에 핀 꽃으로 운명적 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행복한 결혼생활... 그런데 그들의 눈에 보인 꽃의 정체는, 기생하는 벌레가 뇌를 조종하는 것이라는 연구가 발표된다. 여자는 현실에 만족하지만, 남자는 실체를 알기 위해 구충제를 복용한다. 조작된 세상에서의 행복인가? 진실한 세상에서의 외로움인가? 사랑의 부조리...

  그곳에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 서 있었다. 나이는 30대 중반쯤 될까. 살짝 눌린 반 단발머리에, 한눈에도 저렴하다는 걸 알 수 있는 펑퍼짐한 하얀 티셔츠와 린넨 바지, 눈썹만 그린 화장기 없는 둥근 얼굴, 굳이 칭찬하자면 토이푸들이나 포메라니안이 연상되는, 눈동자가 큰 눈은 귀여웠다. 하지만 미인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치에는 아마 두 살도 안 된 듯한, 연회색의 고급스러운 원피스와 분홍색 샌들 차림의 작은 여자아이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여성은 나를 보고 안녕하세요, 하고 환하게 웃었다.(p.99)

  엄청난 사랑이었다. 강 건너에서 타오르는 해바라기밭, 건드려서는 안 되는 미술관의 명화. 나는 그저 한 관객으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공기에 축축한 냄새가 섞이나 싶더니 이내 내리치듯 소나기가 쏟아졌다.(p.106-107)

  "어느 봄날 저녁에, 저기 공원 벤치에서 마치야 씨가 잠든 나나코를 안고 작은 소리로 노래하는 걸 보고, 아, 좋다, 생각했어요. 그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했고요. 여유롭고, 안심할 수 있고, 살짝 반짝이면서 시간이 멈춘 듯한, 그런 이미지를 쫓는 동안 완성된 옷이에요. 그러니까 감사의 표시로 받아주세요."(p.114)

  "......이 일을 하길 잘했어."

  "어?"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꽃밭처럼, 닿을 수 없는 것만 좋아하게 되는 나는 평생 이렇게 살 줄 알았어.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닿지 않고도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더 많겠지."(p.115-116)

  '사랑의 스커트'는, 출장 미용을 하러 간 곳에서 우연히 학창 시절에 짝사랑했던 남자를 만난다. 그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집주인 여자에게 빠져 있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를 바라보는... 그녀를 위해 스커트를 만들어 주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달라진 표정과 집중력... 집주인 여자는 옷을 받고 아주 기뻐한다.

  불륜을 벌이고, 처자식을 외면하고, 유부녀를 스토킹하는 것에서 일본식 정서와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헤어지는 연인에게 한쪽 팔을 떼어주고, 한눈에 반한 사랑은 뇌를 지배하는 기생충의 영향이라는 설정은 아주 놀라웠다. 짝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를 짝사랑하는 것은 살면서 수없이 경험했고, 또 그이의 짝사랑을 돕는 것은 나의 이야기였다...ㅜㅜ 사랑 아닌 사랑, 이별 아닌 이별, 그리움 아닌 그리움은 어지럽고 복잡하다!

  비교적 얇은 책이라서 가볍게 한 번, 미궁에 빠진 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또 한 번을 읽었다. 연이어 두 번을 읽은 책은 거의 없는데, 그만큼 답답함(?)이 있었나 보다. 제158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쿠타가와상이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과감한 은유와 상징은 미스터리라기보다 순문학에 가까운 느낌이다. 읽을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살면서 많이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리워했다면... 이해의 폭은 더 넓었겠지...;;

  뱀이 되는 여자가 그리 드문 건 아니다. 그 밖에도 뱀보다 수는 적지만, 큰 개, 호랑이, 지네나 거미 등 여자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했다. 변화한 여자들은 동이 트기 전, 아직 움직임이 둔한 남자들을 찾아가, 사랑하는 이를 붙잡아 머리부터 와그작와그작 잡아먹는다. 그런 짓을 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스구리처럼 감정 기복이 심하고 공격적이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는 타입의 여자가 많다. 나는 그런 맹렬한 욕구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p.125-126)

  우리는 세상의 절반밖에 못 보는 거네. 작은딸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세상의 절반밖에 못 보더라도,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모든 걸 알려고 드는 건, 꼭 사랑하는 사람을 못 믿는 것 같으니까.(p.140)

  '짐승들'은, 여자는 온몸에 비늘이 돋아 하얀 뱀으로 변해서 바람나 헤어진 연인을 잡아먹으러 간다. 멈출 수 없는 충동, 다른 여자를 만나 다정하게 구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한다. 일찍 남편하고 결혼해서 두 딸을 키우며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다. 그런데 작은딸이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잡아먹고 울면서 돌아온다. 동이 트면 남자들이 활동하고, 해가 저물면 여자들이 움직이는 세상이다.

  "북쪽 아이들하고 같이 놀 수 있는 곳이 있어. 좋아하는 옷을 맘껏 갈아입힐 수도 있고. 요즘에는 뭘 만들어도 아이들은 입기 싫다고 하잖아. 옷을 갈아입히거나 화장을 시키면서 놀 수 있어. 시간 안에는 뭘 해도 되고. 안고 같이 잘 수도 있어."

  "어머, 좋은데?"

  "그렇게 천사 같은 아이들을 안아볼 수 있다고?"(p.161)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단다."

  돌아간다는 건 그 생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숨죽인 인형의 생활. 아들은 내가 거부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지 황망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문득 소나기가 퍼부은 듯 마음이 젖어들었다.

  가엽기도 하지, 이 아이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제 무구한 소원이 어째서 거부당하는 것인지. 자신이 당연하다 여기는 생활이, 나를 학대하는 일이라는 걸 모른다.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정상적인 이 아이는 분명 평생 이해하지 못하리라.(p.186)

  '얇은 천'은, 어느 순간 남편과 아들로부터 무시와 외면을 당한 여자는 살아있는 인형 놀이를 하러 간다. 전쟁을 피해 북쪽에서 온 난민들 사이에는 천사 같은 아이가 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약속된 시간, 비밀의 방에 들어가면 눈을 가린 소년이 있다. 간식을 먹이고, 옷을 만들어 입히고, 끌어안고 잠을 잔다... 여자는 그곳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를 만난다.

  "사랑하니까, 내가 가진 건 다 줬어요. 남편뿐 아니라 노아에게도, 하루카에게도 다 줬죠. 날마다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도 하고, 도시락도 쌌어요. 쌀을 씻어야 하니까 네일아트는 엄두도 못 냈어요. 고기도, 생선도 30년 동안 찌꺼기만 먹었어요. 잠자리도 피하지 않았죠.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려고 했어요. 다 줬어요. 정말로, 다."(p.208)

  젖어 있는 동안에는 염색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드라이어로 뿌리부터 말리는 동안에 어머, 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다르다. 머리끝이 희미하게 보랏빛으로 변한 것뿐인데, 거울 속 여자는 여느 때보다 경박해 보였다. 밝고 차가운, 새로운 여자다.

  ...

  오우미 씨가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안 들렸다. 느닷없이 새 귀걸이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머리카락 빛깔에 잘 어울리는 진주와 골드 이어링. 옷도 새로 사야지.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로.(p.216)

  '가지와 여주'는, 남편이 외도 상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었다. 여자는 장례를 치르고, 시청으로 가서 혼인 관계를 정리한다. 지난 30년 동안 남편과 자식에게 해온 헌신의 끝이었다. 거울을 보니 뭔가 달라진 얼굴... 단골 미용실의 폐업으로 이발소에 가서 가지색으로 염색을 한다. 얻어온 여주로 요리를 하고... 새로운 여자로 홀로 선다.

  그래도 바로 거절하지 않은 건, 동창 중 절반 가까이 되는 여자아이들이 벌써 세 번째 임신을 맞이해 배에 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범생 무리에는 가장 친했던 고토도 끼어 있었다. 세 번의 산란을 끝낸 여자는 대부분 기운이 다해서 숨이 끊어진다. 이번이 친구들과 작별할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p.227-228)

  "알을 품는 건 즐거웠어?"

  내 물음에 고토는 큼지막한 꽃봉오리가 활짝 피듯 웃었다.

  "당연하지. 즐겁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어. 지금도 행복해."

  "알을 품는 것도 낳는 것도 내 눈에는 무척 힘들어 보이던데. 그렇지는 않았어?"

  남의 일이지만 오랫동안 의문으로 여겼던 일이다. 과격하게 반응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한테는 물어볼 수 없었다. 지금 고토라면 아무 함의도 없는 단순한 질문으로, 적당한 무게로 되받아칠 것 같았다.

  "몸은 힘들고 괴롭지만, 그만큼 즐거웠어. 봐, 힘들지만 즐거운 일도 있잖아. 그런 느낌이야."(p.251-252)

  '산의 동창회'는, 세 번의 산란을 끝내면 대부분의 여자는 기운이 다해 숨이 끊어진다. 가장 친했던 친구와 마지막 작별이 될 수 있기에 동창회에 참가한다. 사고를 당하고, 해수로 변하고, 수명을 다해 쇠약해진 소식... 산란을 경험하지 못한 여자는 친구의 마지막을 기록으로 남긴다. 임종을 지키고, 기록하고, 자고, 일어나고...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그리고 동창들은 모두 죽었다.

  짐승으로 변하고, 산란해서 알을 품는 기묘한 이야기보다 은밀한 취미를 즐기고, 염색하고 요리하는 현실의 이야기가 더 와닿았다. 여기에서도 충동적 욕구, 은밀한 사생활, 가족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일본식 정서와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상대를 잡아먹고, 살아있는 인형 놀이를 하고, 목숨 건 산란을 한다는 설정은 매우 놀라웠다. 가지색으로 염색으로 하고, 새로운 요리를 익히며 다시 삶을 시작하는 중년 여자에게서는 희망을, 홀로 남아 모두가 떠나간 자리를 지키며 회상하는 여자에게서는 연민이 느껴진다. 나도 점점 나이들어 이런 때가 오겠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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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나무 아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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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미조 세이시, 정명원 역, [백일홍 나무 아래], 시공사, 2013.

Yokomizo Seichi, [SATSUJINKI], 1976.

  요코미조 세이시는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으로 국민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시리즈로 유명하다. 이것을 오마주한 것일까? [소년탐정 김전일](긴다이치 소년의 사건부)은 긴다이치 코스케의 외손자이고, 할아버지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사건을 해결한다. 수많은 작품 중에서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백일홍 나무 아래]를 읽었다. 제목은 낭만적이지만, 태평양 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전후문학으로 폐허가 된 도시의 황폐함을 반영하고 있다. 4개의 단편 모음이다.

  살인귀

  흑난초 아가씨

  향수 동반자살

  백일홍 나무 아래

  현대의 소설하고 비교하면 여러 가지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이런 글이 모이고 쌓여서 오늘의 미스터리 왕국을 이룬 게 아닐까. 추리 작가의 등장, 괴짜 탐정의 활약, 허구와 현실을 오가는 구성, 깜짝 반전과 숨은 이야기... 등 현대 작가의 집필 방식은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전쟁 전부터였는데 작가로서 아직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전쟁이 일어나 바로 전장에 소집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는 조선 남쪽에 있어서 외지파견군 중에서는 가장 먼저 본토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와 보니 양친도 형제도 죽고 집도 불타 없어져버렸다. 즉 나는 완전히 혼자, 그것도 무일푼으로 세상에 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이전부터 내가 쓰는 작품에는 일종의 강렬한 색채가 있다는 평을 들었는데, 전쟁 후에는 특히나 그 색채가 선명해졌다. 일단 전보다 나를 둘러싼 제약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고, 내가 전쟁을 통해 신경이 단련되는 걸 넘어서 거의 마비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전후의 나는 피투성이 시체를 봐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죽음에 무딘 사람이 되었기에, 소설 속에서 점점 피를 많이 쏟아냈고 여기저기 굴러다닐 정도의 시체를 장기 말을 움직이듯 갖고 놀았다.(p.21-22)

  일본인은 전쟁에 가는 것을 죽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처럼 남자로 태어나서는 인간 세상의 즐거움도 모르고...... 라는 것이 미혼인 아들을 전장에 보내는 부모의 탄식이었다. 가메이의 양친도 그러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가나코의 부모를 설득해 갑작스럽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다음 날 준키치는 '환호성을 뒤로한 채' 떠났다.(p.29)

  '살인귀'는... 전장에서 돌아온 추리 작가는 모든 것을 잃고 글의 색채마저 바뀌었다. 전쟁터로 나가는 남자를 위해 결혼해서 하룻밤 사랑을 나눈 여자는 언제 올지 모르는 남자를 기다리다 지친다. 오백 명에 한 명꼴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살인범이 있다는... 전쟁의 상흔이 남은 도시에서 살인귀가 활동한다.

  이곳에는 '흑난초 아가씨'라는 별명을 가진, 두꺼운 베일을 쓴 여성이 이따금 나타났는데, 베일을 썼으니 아무도 얼굴을 본 적은 없고 또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청초한 용모든 사치스런 옷이든 상당한 가문의, 그것도 젊은 영양처럼 보여서 점원들은 흑난초 아가씨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하더군. 그런데 이 여성은 항상 물건을 훔쳐가고, 게다가 신기하게도 그런 도둑질을 막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이 백화점에는 있는 것 같더만...(p.112-113)

  아무튼 더없이 볼품없는 이 일류 빌딩의, 역시 특별히 볼품없는 5층, 즉 최상층에 최근 묘한 사무실이 생겼다.

  입구 종이 위에는-이라는 말은 유리가 없으니 종이가 붙어 있기 때문에-영화 타이틀 같은 글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긴다이치 코스케 탐정사무소(p.132)

  '흑난초 아가씨'는... 에비스야 백화점 3층 15호 매장은 귀금속과 보석을 판매하는 곳이다. 검은 외투와 두꺼운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 흑난초 아가씨가 물건을 훔치는데 직원은 이것을 막아서는 안 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신임 주임은 이것을 모르고 살해당하는데, 백화점 지배인은 쓰러져가는 허름한 건물에 입주한 긴다이치 코스케 탐정사무소에 조사를 의뢰한다.

  인생 초기에 남편의 죽음이라는 비극에 직면한 그녀는 평생 혈육의 불행에 시달려야만 했다. 장남인 마쓰타로도 차남인 마쓰지로도 잇달아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외동딸 마쓰에의 남편인 가와사키 겐타마저 전쟁 말기에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그 배우자들도 차례차례 남편 뒤를 따라 죽었기 때문에 올해 일흔이 된 마쓰요에게는 자식도, 며느리나 사위도 남아 있지 않았다.(p.176)

  "아하하, 이건 한 방 먹었구려. 그런 말을 들으면 바로 여기가 가루이자와란 사실을 잊어먹는다오. 헌데 긴다이치 씨, 생각해보니 여기, 동반자살의 명소였소."

  도도로키 경부가 말하는 것은 오래전 여기서 고명한 문사가 동반자살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일 것이다. 그 비석이 바로 근처에 세워져 있는데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부러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p.200)

  '향수 동반자살'은, 긴다이치 코스케는 유명 화장품 회사 도키와 상회의 요청으로 출장 조사를 떠난다. 가루이자와 아사마산은 동반자살 명소로 알려진 곳인데,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미래 도키와 상회의 총수가 될 후계자가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래서 가와지 군의 전언은 뭡니까?"

  "가와지는 어떤 사건에 대해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가와지는 죽기 직전까지 그 사건으로 괴로워했죠. 혹시 네가 살아서 돌아가면...... 하고 가와지는 자주 저한테 말하곤 했습니다. 사에키 이치로 씨를 찾아가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수수께끼를 풀어주게. 그러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죽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제가 무슨 얘길 하는지 당신은 아실 거라 싶은데요?"(p.270)

  "앗, 잠깐. 당신의 이름은...... 당신의 이름은......?"

  "제 이름 말입니까? 제 이름은 긴다이치 코스케, 변변찮은 남잡니다."(p.306)

  '백일홍 나무 아래'는, 지팡이를 쥐고 한쪽 의족을 끌면서 가파른 언덕에 오르던 남자는 불에 탄 나무 사이에서 백일홍을 발견한다.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며 누군가를 추모하는데, 귀환병 차림의 남자가 다가온다. 내면의 상처가 채 가시기 전에, 낯선 남자는 죽은 동료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전후 일본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커다란 후유증을 남기고, 상황은 참담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사건은 시대의 아픔을 매우 잘 반영한다.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은 피해자이기 전에 가해자이다. 패전국의 음울함 속에서 빛나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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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비극 노리즈키 린타로 탐정 시리즈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포레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노리즈키 린타로, 이기웅 역, [1의 비극], 포레, 2013.

Norizuki Rintaro, [ICHI NO HIGEKI], 1991.

  오래전에 출간했는데, 최근에 tvN 드라마 <더 로드 : 1의 비극>(2021.)으로 제작되어 다시 주목받는 책이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못했는데, 입소문으로 늘 관심 두는 작가이다. 그만의 매력은, 작품 안에 자신의 이름을 가진 캐릭터(노리즈키 린타로라는 탐정)를 등장시켜 독자로 하여금 허구와 현실을 헷갈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한 남자가 과거에 벌인 잘못은 현재에 올무가 되어 가족을 불행에 빠뜨린다. 제목으로 비극인 것을 알겠는데, 왜 '1의' 비극일까?

  "운이 좋았군. 범인이 엉뚱한 실수를 안 했으면 저기에 당신 자식이 있었을 텐데."(p.16)

  도미사와 시게루는 내 아들이다.(p.18)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범인은 아이를 오인 유괴한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다카시와 시게루를. 다카시가 무사한 대가라고 하지만 이런 잔인한 착각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어떤 의미에서 최악의 궁지에 몰린 셈이었다. 등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p.43)

  종합광고대행사 신토 애드에서 SF(세일즈 프로모션) 국장으로 있는 야마쿠라 시로는 아들이 유괴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괴범은 오인해서 아들 다카시가 아니라 같은 반 친구인 도미사와 시게루를 데려갔다. 표면적으로 범인은 야마쿠라 가가 아닌 도미사와 가의 아이를 잘못 납치한 것이지만, 실상은 시게루 또한 시로의 아들이다. 7년 전에 아내 모르게 외도로 낳은 아들... 일인칭 시점의 전개는 급박한 심리를 잘 묘사한다.

  미치코가 자책하는 데는 말 못 할 이유가 있다. 두 아이는 자연스럽게 사이가 가까워진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미치코의 의지가 있었다. 미치코는 나를 압박하기 위해 다카시와 시게루를 친구 사이로 만들었다. 복수극의 1막이었다. 그런데 얄궃게도 그 공작이 오늘의 오인을 초래했다. 애당초 친구는커녕 서로 알 일조차 없던 아이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치코 본인이 아이를 궁지로 몰아넣은 셈이다. 이런 결과를 자초한 스스로를 지독히 원망하고 있으리라.(p.63)

  책임이란 결국 주관적인 것이다. 객관론이란 책임 회피의 한 편법에 불과하다.

  ...

  "당신이 시게루를 죽였어!"(p.107)

  시게루에게는 아무 죄도 책임도 없다. 시게루는 자신이 바라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와 미치코의 도리에 어긋난 관계가 시게루라는 존재를 탄생시켰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 증오는 미치코가 아니라 그 결과로 탄생한 시게루에게 향해 있었다. 미치코를 증오할 수는 없었다. 미치코를 증오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증오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때 일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식했다. 나와 미치코는 불우한 길동무였을 뿐이다. 시게루만 없었으면 그 일은 과거의 신기루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죄는 모두 시게루라는 존재에 응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시게루가 다카시와 같은 반이 되어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견디기 힘든 공포감을 줬다.(p.146)

  아들을 대신해서 납치된 아이를 구해야 하는 도의적 책임과 현재의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이기심... 아이를 구하되 그 아이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이(아내가) 알아서는 안 된다. 시로는 유괴범이 요구하는 돈을 들고 약속 장소에 나가지만, 치명적인 실수로 몸값 전달에 실패한다. 곧이어 시게루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고... 범인을 찾기 위한 노력은 남모르게 과거의 아픔을 하나씩 들추어야 한다. 가족사의 비밀, 원한, 복수...

  "알아냈습니다. 노리즈키 린타로, 이름이 특이하지만 본명입니다. 직업은 추리작가."

  "그랬군." 그래서 경찰과 아는 사이겠지. "잘 팔리는 작가인가?"

  "책을 몇 권 냈지만 베스트셀러라 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직 상과도 인연이 없고요. 서평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군요. 꽤 통렬한 서평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노리즈키는 순전한 백치거나, 번드르르한 모방자거나, 혹은 둘 다다.'" 구로다가 인용하며 폭소를 터뜨린다.

  "대단한 작가는 아닌 모양이군. 아직 젊은가?"

  "예, 서른이 안 됐습니다. 아직 미혼이고, 홀아비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이른바 부자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다름 아닌 경시청 수사 1과 경사네요."(p.153-154)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의 등장... 경시청 수사 1과 경사의 아들로, 아마추어 범죄연구자로, 추리 작가로, 기괴한 사건의 해결사로, 엘러리 퀸 이후 최고의 명탐정으로 활약한다. 그는 함정에 빠진 시로를 도우며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는데...

  지금은 익숙하지만, 초반부터 몰아치는 연속된 반전은 아주 신선하다. 사연 많은 인생과 그릇된 행동으로 일어난 사건은 일본 미스터리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책임감과 이기심 사이에서 가정을 지키기 위한 내적 고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범인의 유추는 실패했다.

  일인칭으로 서술하는 '1의 비극'외에 삼인칭으로 서술하는 '3의 비극'이 있고, [요리코를 위해](포레, 2012. 모모, 2020.)하고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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