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일격 밀리언셀러 클럽 136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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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블록, 박산호 역, [어둠 속의 일격], 황금가지, 2014.

Lawrence Block, [A STAB IN THE DARK], 1981.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시리즈' 네 번째이다. 스커더는 전직 경찰로 (면허는 없이) 탐정 일을 하고 있다. 책의 중반에 경찰을 그만둔 이유를 언급하는데, 도망가는 범인을 향해 쏜 총알이 튕겨서 지나가던 여섯 살 여자아이를 죽게 했다. 그 뒤로 일을 그만두고, 집을 나와 가족과 떨어져 호텔에서 지낸다. 대부분의 스릴러 소설이 그러하듯 주인공 캐릭터가 눈에 띄는데... 그는 커피에 버번을 넣어 먹고, 알코올 중독자처럼 매일 술을 마신다. 수입이 생기면 성당에 들러 1/10을 구제 헌금함에 넣고, 기도는 하지 않는다. 셜록 홈즈하고는 다르게 직관적으로 움직이고,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1981년에 출간한 소설이기에 CCTV와 DNA 분석 같은 첨단 수사는 나오지 않지만, 발로 뛰는 수사로 복고적인 재미가 있다. 그는 항상 노트에 메모하고, 공중전화를 이용하고, 도서관과 기록보관소에서 자료를 찾는다.

  "그 살인자는 두 달 동안 여덟 명의 여자를 살해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집에 있는 여자들을 백주 대낮에 공격했죠. 피해자의 몸을 송곳으로 수도 없이 찔렀습니다. 그렇게 여덟 명을 죽인 후 그만뒀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9년이 지난 후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때가 언제죠? 2주 전이었나요?"

  "거의 3주가 됐습니다."(p.13)

  "피츠로이 형사가 당신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이건 내 의견이 아니라 그 형사가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겁니다."

  "그리고?"

  "대형 탐정 사무소와 달리 당신은 이 사건에 열정을 쏟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럴 때 당신은 한 번 물면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고요. 승산은 별로 없지만, 바버라의 살인범을 당신이 밝혀낼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p.23)

  얼음송곳이 살해 도구로 쓰인다는 것은 샤론 스톤 주연의 영화 <원초적 본능>(1992.)을 보고 처음 알았다. 여기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9년 전 얼음송곳 연쇄살인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두 달 동안 여덟 명의 여자를 죽이고 범인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전 순찰하는 경찰관에게 한 남자가 붙잡혔는데, 그가 당시의 범행을 자백한다. 문제는, 이 정신병자가 범행을 자랑하듯 하면서도 여섯 번째 바버라 에팅거의 살인은 자기 짓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알리바이 또한 분명하다. 희생자의 아버지는 스커더에게 진짜 범인을 찾아달라고 한다.

  시작은 매우 좋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술집의 풍경, 오래된 사건, 아버지의 원한, 거기에 사연 있는 전직 경찰관까지... 어린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방영하는 수사극을 보는 기분이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전개가 마음에 든다. 분위기가 익숙한데, 클리셰의 범벅이지만... 재미있다.

  "그 여자를 죽인 게 얼음송곳 살인자라고 생각하게 된 확실한 이유는, 뭐, 자네도 알고 있겠지."

  "눈."

  "그렇지." 그는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피해자들이 눈을 찔렸어. 눈동자 하나에 한 번씩. 그 사실은 신문에 나온 적이 없어. 동네 사이코들이 가짜 자백으로 우리를 속이지 않도록 사건 정황의 한두 가지는 항상 비밀에 붙이잖아. 이번 거리 칼부림 사건에 이미 얼마나 많은 광대들이 자수했는지 자네는 못 믿을 거야."

  "그림이 그려진다."(p.30-31)

  "만나 보면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사의 대부분은 직감이에요. 사소한 점들을 모으고 여러 사람에게서 받은 인상들을 흡수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해답이 마음속에 팍 떠오르죠. 셜록 홈즈와는 달라요. 적어도 나는 그랬어요."(p.112)

  "피넬은 죽은 사람의 눈에 그들이 죽기 전에 본 마지막 이미지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그렇다면 피해자의 망막을 스캔해서 살인자의 사진을 확보할 수 있겠죠. 그자는 여자들의 눈을 망가뜨려서 그 가능성에 대비해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었던 겁니다."

  "맙소사."(p.196-197)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의 기이함, 피해자는 하나같이 눈을 찔렸다. 여섯 번째 희생자도 눈을 찔렸고... 스커더는 의뢰인을 시작으로 단서를 모은다. 경찰 친구의 도움으로 사건 파일을 검토하고, 중앙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신문 기사를 찾는다. 사건 현장에 가서 이웃의 의견을 청취하고, 피해자가 다닌 직장에 간다. 사건 후에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편을 만나고, 피해자 여동생에게 연락한다... 오래전 일이고, 사건 자체의 충격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뉴욕을 중심으로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누비는 주인공의 활약은 아주 생생하다. 열정적이면서 인간적인 매력을 보이고... 사실과 드러나지 않은 진실은 엄연히 다르다. 현대하고는 달리 방문자를 맞이하는 태도, 길거리 범죄, 백인 사회에서 흑인을 보는 시선, 가족에 관한 메시지... 등 전형적인 미국 스릴러의 본모습이다. 그리고 9번 애비뉴 모퉁이 단골 바 암스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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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열 - 제149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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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쿠라기 시노, 양윤옥 역, [호텔 로열], 현대문학, 2014.

Sakuragi Shino, [HOTEL ROYAL], 2013.

제149회 나오키상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려서 야한 책을 읽고 싶었다. 일본의 색채가 물씬 풍기는... 서정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자극적이고 냉담한 이야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눈에 들어온 책이 사쿠라기 시노의 소설 [호텔 로열]이다. 성에 관한 거침없는 묘사라기보다는 적당한 은유가 돋보인다. (여기에서 러브호텔이 어쩌고 하면, 또 네이버에서 유사 문서로 분류해 놓겠지...;;) 인생 사연이 곁들어진 문학적 관능미를 뽐내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최고의 단편을 하나 발견했고... 7개의 연작 단편 모음이다.

  셔터 찬스

  금일 개업

  쎅꾼

  거품 목욕

 

  별을 보고 있었어

  선물

  작가는, 어린 시절에 부친이 동명의 러브호텔을 경영해서 거기서 일하면서 자라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홋카이도 구시로시를 배경으로 하고, 호텔 로열이 등장한다. 각 단편은 호텔을 중심으로 인물의 관계가 얽혀 있다. 시간의 흐름은 역순으로 구성했는데... 첫 번째 단편에서는 문을 닫고 폐허로 변한 호텔이 나오고, 일곱 번째 단편에서는 언덕에서 개업을 준비하는 호텔이 나온다. 남자하고 관련한 여자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매우 정교한데, 누구나 다 처음에는 그럴듯한 이유와 희망을 품고 있다.

  좌절...... 오늘도 또 듣고 말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미유키는 마치 약점을 찌르는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밥을 먹어도, 술을 마셔도, 살을 맞대고 함께 아침을 맞이해도, 결국 남자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 끝에 하는 결정적인 한마디에는 반드시 '좌절'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문득 위(胃)의 뒤쪽 어디쯤에서, 좌절이라는 말에 푹 빠져버린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솟아올랐다. 다카시를 만나기 전까지 아무 기복 없이 살았던 나날을 돌이켜보면, 오랜 시간을 들여 시커먼 구멍 밑바닥으로 빨려 들어간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p.24)

  가가야 미유키는 중학교 동창으로 현재 같은 곳에서 일하는 남자 친구로부터 누드모델을 제안받는다. 다이어트를 하고, 속옷 자국에 신경을 쓰며... 낡은 건물을 찾는다. 카메라 셔터 소리를 들으며 어색함과 불편함을 호소하자, 부상으로 아이스하키 선수의 꿈을 접은 남자는 좌절을 얘기한다. 이번에도 그의 요구를 피할 수 없다.

  다른 단가의 봉투는 다음 날 아침이면 사라졌지만 사노에게서 받은 봉투만은 한 달이 지나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사이쿄는 이미 세대가 바뀐 단가가 미키코에게 가져다준 쾌락을 알아본 것이다.(p.63)

  시타라 미키코는 관락사 주지의 부인이다. 절에 오기 전에는 간호조무사로 일했고, 용모의 아름다움은 없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단가(사찰에 시주, 후원하는 불교 신자)를 호텔에서 만나 관계를 갖는다. 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가의 후원이 필요했고, 그녀는 이것을 봉사로 여긴다.

  남자든 여자든 몸을 이용해 놀아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그때는 오늘이 아니었다. 이 남자에게는 잠시 잠깐의 감정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미야카와는 띄엄띄엄 말을 끊어가면서 아내가 첫 여자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게 이유가 돼요?"

  마사요는 허리를 숙이고 웃었다. 그의 아내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아서 숨이 막혀왔다. 점점 메말라간다. 점점 가벼워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남기지 않는다.(p.90-91)

  마사요의 아버지는 처자식을 버리고 젊은 여자와 호텔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태어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떠난다. 그 뒤로 십 년 동안 호텔 관리는 그녀가 해왔다. 3호실 커플이 나란히 죽는 사건이 일어나자 손님은 뚝 끊기고, 폐업 마지막 날이다. 쎅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성인용품 판매 회사의 영업 사원에게 재고품을 반납하면 완벽하게 끝이 난다.

  메구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부끄러워해서도 안 된다. 당당하게 유혹할 것이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펀치를 찾아보았다.

  "나도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는 데서 한번 해보고 싶단 말이야."(p.104-105)

  메구미는 좁은 집에서 남편과 두 자녀 그리고 시아버지와 살고 있다. 추석 성묘에서 스님이 오지 않자, 시줏돈으로 준비한 오천 엔을 아끼게 된다. 닷새 치 식비, 얘들에게 새 옷을 사주고 외식할 수 있다. 한 달 치 전기료와 이것저것을 할 수 있는 돈... 그녀는 남편에게 호텔에 가자고 조른다.

  "쌤, 왜 집에 안 갔어요?"

  "귀찮은 질문 자꾸 할 거면 나가줄래?"

  "혹시 귀가 공포증?"(p.146-147)

  고등학교 수학 교사인 노지마 히로유키는 아내가 고등학교 시절의 담임과 이십여 년을 연인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춘분의 날 연휴에 삿포로 집에 있는 아내에게 간다고 말하지 않고 기차에 오른다. 허탈함과 자괴감... 그런데 그가 담임을 맡은 2학년 A반 학생인 마리아가 따라붙는다. 엄마는 도망가고, 아빠는 집을 나가 하루아침에 노숙자 여고생이 되었다고 한다.

  남편의 등에 업혀 숲을 나왔다. 넓은 등판으로 미코에게 조금씩 조금씩 온기를 나눠주며 쇼타로가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 올라선 참에 불쑥 쇼타로가 멈춰 섰다.

  "당신, 그런 데서 뭐 하고 있었어?"

  조용한 물음이었다.

  "별......"

  "별이 어쨌는데."

  "별을 보고 있었어."(p.187)

  환갑의 나이인 미코는 호텔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세 아이는 전부 집을 나갔고, 열 살 어린 남편은 집에만 있다. 평생 일만 하고 살아서 고생이 고생인 줄 모르는 억척스러운 삶이다. 무슨 사건이 있을 때마다 주위의 사람은 착하게 변했고, 그녀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들의 편지를 받는다.

  "나는 사업이라는 건 반드시 꿈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이 세상이란 게 남자와 여자밖에 더 있느냐고. 다들 원하는 건 똑같다는 얘기야. 꿈이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장사라면 나도 뭔가 꿈이 보일 것 같더라고."(p.194)

  다나카 다이키치는 간판 일을 하면서 젊은 루리코와 바람을 피운다. 그는 러브호텔을 경영하고 싶어 하는데, 동갑내기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며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린다. 장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임신한 루리코와 새로운 출발을 한다.

  사연제조기(?) 사쿠라기 시노의 소설은 [유리 갈대](비채, 2016.)에 이어서 두 번째이다. 우울한 현실에서 몸부림치는 여자의 삶이 기억나는데, 이 책에서도 여자의 삶은 지독하고 투쟁적이다. 독립적이지 못해서 하나같이 남자(애인, 남편, 아버지, 선생님)에게 종속되어 있다. 다른 삶을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현실은 우울하고 막막하다. 자의든 타의든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셔터 찬스'를 읽으며 누드 촬영은 나의 로망이고, '금일 개업'은 고결함과 불결함을 동시에 느끼는 특이한 경험을 했다. '쎅꾼'은 뭔가 답답함이 있고, '거품 목욕'은 현실적이다. '쌤'은 블랙코미디이고, '별을 보고 있었어'는 인생의 회한이 있다. '선물'은 호텔 로열의 시작이다.

  '금일 개업'은 지금까지 읽은 단편 중에서 최고로... 나의 인생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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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변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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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권일영 역, [사소한 변화], 비채, 2019.

Higashino Keigo, [HENSHIN], 1994.

  지난번 인생 이야기에 이어서 이번에는 복수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코로나19로 집콕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성장이나 화해의 메시지보다 자극적이고 통쾌한 복수극을 원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소한 변화]는 여기에 살짝 못 미치는 아쉬움이 있다...;; 원서의 제목은 [변신](變身)이다. 뇌 이식 수술을 소재로 한 인간의 인격이 변해가는 과정을 스릴 있게 묘사한다. 작가 특유의 가독성과 흡입력 있는 글솜씨는 당연하고... 그런데 복수가 없다!

  "뇌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선 안 돼. 심장이나 간장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에 걸쳐 단순한 세포에서 진화한 것이지. 기독교 신자라면 모두 신이 만들어주신 거라고 하려나?"

  "그렇지만...... 뇌는 특별하죠."

  "기계로 비유하면 컴퓨터지. 그래서 고장 난 부분은 수리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품 교환도 할 수 있네. 자네도 망가진 기계를 수리하는 전문가잖아. 심장부가 망가졌다고 해도 냉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니, 심장부라는 표현은 좀 헷갈리겠군. 중추부라고 해야 하려나?"(p.57-58)

  사람의 몸은 뇌의 지배를 받는 것인가? 아니면 뇌는 장기처럼 하나의 기관에 불과한 것인가? (인터넷에 떠도는 사연으로 근거는 불분명한데) 간혹 장기를 이식받은 사람의 성격이나 취향이 바뀐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뇌는 이식이 가능할까? 기억력과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이식한 뇌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까? 나루세 준이치는 부동산 회사에서 무장 강도를 만나 머리에 총상을 입는다. 모두 살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지만, 도와 대학 의학부 뇌신경외과에서 세계 최초로 성인 뇌 이식 수술에 성공한다. 다른 사람의 뇌 일부를 사고로 손상된 곳에 부분 이식한 것이다. 마치 기계 부품을 교체하듯이...

  "네 머리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뇌가 조금 들어 있는 거지?"

  "맞아."

  "그렇지만 넌 역시 너겠지......?"

  "무슨 소리야. 난 나지. 다른 누구도 아니야."

  "그럼 만약 뇌를 전부 교체하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역시 넌 너일까?"(p.102)

  내 안의 무언가가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분명히 예전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p.139)

  그는 회복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소한 변화를 감지한다. 성격과 취향이 바뀐다. 회사 선배와 주먹다짐을 하고, 여친과의 데이트가 지루하다. 폭력성과 살인 충동... 예전하고 아주 다르다.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의 혼란이 시작된다. 나루세 준이치는 변신하는 중이다.

  긴 의자에 드러누워 이중인격에 대해 생각했다. 어렸을 때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이브의 세 얼굴>이란 영화도 있었다. 두 이야기를 돌이켜보면 나는 이중인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중인격자란 전혀 다른 인격을 지니며 대개 다른 인격이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갑자기 다른 인격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모든 행동은 내 의지에 따른 것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지금 증상은 이중인격보다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걸까. 하지만 이중인격보다 나쁜 점도 있다. 원래 인격이 차츰 사라진다는 사실이다.(p.203-204)

  시간이 갈수록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 수술의 부작용? 뇌 제공자는 누구? 변신을 멈추는 방법은 있을까? 자기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러면서 밝혀지는 뇌 이식 수술의 비밀...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큰 손이 있다. 그래서 부작용도 실패도 용납할 수 없다. 인간의 고뇌와 탐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신은 몰라. 뇌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지껄이는 당신은 말이야. 뇌는 특별한 거야. 당신이 상상이나 할 수 있어?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달라. 내일 눈을 뜨면 거기 있는 건 오늘의 내가 아니지. 먼 과거의 추억은 전혀 다른 사람 것이 되고 말지.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아. 오랜 시간을 들여 남겨온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그게 어떤 건지 아나? 가르쳐줄까? 그건......" 나는 도겐의 코 바로 앞에 검지를 들이댔다. "그건 죽음이야. 살아 있다는 건 그저 숨이나 쉬고 심장이 뛰는 게 아니야. 뇌파가 나온다고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산다는 건 발자국을 남기는 거지. 뒤에 남은 발자국을 보며 저건 분명히 내가 낸 거라고 알 수 있어야 살아 있는 거야. 하지만 지금 나는 예전에 남긴 발자국을 봐도 내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이십 년 이상 살아온 나루세 준이치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p.270)

  문득 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의 존재는 무엇으로 결정하는가? 내가 하는 생각이다. 내가 하는 생각이 사라지면, 그 순간 나도 없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사소한 변화로 시작해서 조금씩 변신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눈빛, 성격, 취향, 그림, 음악, 충동적인 복수심... 결국 폭주한다. 그런데 복수는 없다! 엄한 희생자만 있을 뿐...

  뇌 이식이라는 소재가 지금은 아무런 감흥이 없지만, 원서를 처음 출간한 1994년에는 어떤 충격이었을까? 당시의 뇌과학에 관한 논리가 인상적이다. 언젠가는 뇌의 비밀도 밝혀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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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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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 김선영 역, [야경], 문학동네, 2015.

Yonezawa Honobu, [MANGAN], 2014.

2015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2015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

2014 주간 분슌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제27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원서의 제목은 [만원](滿願)인데, 국내 번역은 [야경](夜警)으로 출간했다. 책에 수록한 여섯 번째와 첫 번째 단편의 제목이다. 만원이란? 정한 기한이 차서 신이나 부처에게 기원하는 일이 끝나는 것을 말한다. 야경은? 밤의 경치가 아니라 밤의 경계이다. 가장 궁금하게 여기던 미스터리 소설이다. 일본에서 이런저런 타이틀을 가지고 있어서 기대감이 있었고, 다소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보아서 더 읽고 싶었다. 문화의 차이? 미묘한 정서의 간극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었을까? 책을 다 읽어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야경(夜警)

  사인숙(死人宿)

  석류

  만등(萬燈)

  문지기

  만원(滿願)

  제6회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받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하고 동시에 읽었다. [화차]가 장편으로 사회파 미스터리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6개의 단편 모음으로 다양한 재미를 준다. 개인적인 취향은 짧은 호흡의 단편보다 긴 숨결의 장편을 좋아한다.

  그 녀석은 애초에 경찰에 맞지 않는 남자였어.(p.12)

  "그날은...... 아침부터 이상한 일이 연이었습니다."(p.51)

  미도리1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신입 경찰관이 한밤중에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에서 칼에 찔려 사망한다. 경찰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지고, 언론은 용감한 순경이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어 흉악범을 무찌른 것으로 기사화된다. 파출소장 야나오카는 유가족을 만나러 가는데, 경찰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그날 밤의 비밀은 따로 있다.

  "여기에서 강변으로 내려가면 화산가스가 잘 쌓이는 움푹한 땅이 있어. 거기서 해마다 한두 명은 죽어."

  나는 숨을 삼켰다.

  "어째서 그런 위험한 곳에."

  "그래서 좋은 거야. 소문난 온천이라고 했잖아."(p.86-87)

  어느 날 사라진 사와코는 도치기 야미조 산 첩첩산중에 있는 온천 여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2년 만의 재회... 그곳은 매년 한두 명씩 찾아와 자살하는 여관, 사인숙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녀와 새 출발 하기를 원하는데... 유서를 발견한다. 그날 자살을 막기 위해 유서의 주인을 찾아야 한다.

  독서는 좋다. 뭐니뭐니 해도 영화나 음악보다 저렴하다. 아무래도 반에서는 "유코는 예쁘니까 집도 부자일 거야"라는, 아무 맥락도 없는 추측이 나도는 듯했다.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다. 도서관 책을 빌리는 것도, 독서가라서 그렇다기보다 돈이 없다는 이유가 더 크다. 하지만 책상 위의 이 책은 내 책이다. 벌써 몇 번이나 읽어서 단면이 앍았다.(p.153)

  "그 후로 귀자모신은 육아와 출산의 신이 되었고, 석류를 든 모습으로 그려지게 되었어. 석류는 씨가 많아서 다산을 의미한단다."

  "씨가 많아?"(p.156)

  미인인 사오리는 대학교 논문 수업에서 만난 사하라 나루미와 결혼한다. 유코와 쓰키코 두 딸을 낳고, 매력적이기는 하나 생활력 없는 남편 때문에 하루하루가 힘들고 지친다. 그래서 이혼을 결심하는데, 문제는 자녀의 양육권을 두고 재판을 해야 한다. 부모의 이혼과 친권 재판은 두 딸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석류 신화는...

  하지만 지금, 나는 심판을 받고 있다. 생각도 못 한 존재에게.(p.188)

  만등 앞에서, 나는 지금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p.297)

  이게타 상사에서 근무한 지 십오 년, 주로 해외 자원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인도네시아와 방글라데시 그리고 일본을 오가며 천연가스를 개발하고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고, 외국 회사와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다가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래도 이즈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즈난 정에 가쓰라다니 고개는 생명선 같은 길이다. 간신히 명맥을 이어온 그 길에서 최근 기묘한 사건이 다발했다고 한다.

  전부 사망 하고. 운전자들은 고갯길에서 절벽 밑으로 굴러떨어져 죽었다. 파일에 담긴 사고는 지난 사 년 사이에 네 건. 사망자는 다섯 명......(p.313-314)

  괴담을 모아서 글을 쓰는 라이터, 선배에게 얻은 정보를 가지고 가쓰라다니 고개를 찾아간다. 낡아빠진 중고차로 오랜 시간 운전하다가 드디어 목적지 근처 휴게소에 잠시 들린다. 할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그곳에서 있었던 네 건의 교통사고에 관해서 묻는다. 오랜 세월 휴게소를 지켜온 할머니는 사고 당시의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는데...

  작은 달마에는 한쪽에만 눈동자가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카와 다에코가 나와 함께 산 달마일지도 모른다. 내가 산 달마는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만원성취(滿願成就)의 의미로 두 눈을 그려서 절에 바쳤다(각주, 일본에는 두 눈이 없는 달마 조각상을 사서 소원을 빌 때 한쪽 눈을 그려 넣고 소원이 성취되면 나머지 눈을 그려 넣어 사찰에 바치는 관습이 있다.). 하지만 우카와 다에코의 달마가 어찌되었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p.399-400)

  하숙집에 불이 나서 다다미 가게를 운영하는 다에코 씨의 집 2층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법률을 공부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다에코 씨의 이런저런 도움은 큰 힘이 되었다. 시험에 합격하고, 하숙집을 나오고, 법률회사에 취업하고... 그러다가 살인사건에 연루된 다에코 씨의 소식을 듣는다. 삼 년에 걸친 재판은 항소를 포기하고 징역 8년이라는 일심 판결로 형이 확정된다. 다에코 씨는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야경'은 파출소를 배경으로 하는 경찰소설이고, '사인숙'은 하룻밤 새 일어나는 기묘한 이야기이다. '석류'는 신화를 바탕으로 엘렉트라 콤플렉스(?)이고, '만등'은 기업소설과 추리 문학의 결합이다. '문지기'는 잔혹한 호러를 연상하게 하고, '만원'은 소원성취에 관한 드라마이다. 각각의 단편은 개성을 뽐내며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제목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의미가 불분명하다기보다는 일본의 신화나 문화를 잘 모르기에 생기는 의문이리라. 책의 후반에 짧은 해설을 덧붙이면 어땠을까...

  만등, 문지기, 야경이 재미있었고... 석류, 사인숙, 만원은 난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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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신부 홍성남의 웃음처방전
홍성남 지음 / 아니무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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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꼰대 신부 홍성남의 웃음처방전], 아니무스, 2020.

  성탄절에는 아무래도 종교적인 책을 한 권 읽어야 제대로 된 독서 블로그가 아니겠는가... ㅎㅎ 기독교 신앙인이 아니면서 왜 우리 주님의 탄생일에 속세의 청춘 남녀가 난리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좋은 날, 어디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코로나19 국가방역정책에 적극 협조할 뿐이다. '꼰대'라는 말이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은어로 '늙은이'를, 학생들이 은어로 '선생님'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ggondae는 한국에서 유래한 말, 자기 생각이나 방식이 항상 옳다고 여기는 권위적인 사람이라고 등재되어 있다. 꼰대 홍성남 신부의 [웃음처방전]은 유행병 시대에 우울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작은 웃음을 주기 위해 썼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회사 사장님이 하면 안 웃기는데, 성당 신부님이 하니 참 웃기다...ㅋㅋ 반어, 해학과 풍자, 유쾌함과 발칙함이 있고, 현대인의 종교 병을 진단한다.

  진상 신부 넋두리 3

  난 옆 본당 신부가 싫다.

  사제관을 딱 한 번 들어갔는데 청년들이 득실댄다.

  시장판처럼 책꽂이에 꽂힌 책들도

  나처럼 수준 높은 것이 아니라, 맨 소설, 유머집 따위이다.

  원서가 가득한 내 방과는 천양지차.

  당연히 지적 수준도 다를 거로 생각한다.

  난 옆 본당 신부가 싫다.

  본당 신부란 자가 채신머리없이

  주머니에 사탕을 불룩이 넣고 다니면서 애들과 나누어 먹는다.

  그래서 수도원처럼 정갈한 나의 성당과는 달리

  도떼기시장이다.

  ...

  그런데 교구에서 설문조사 했더니

  가장 인기 좋은 사제 1번이 옆 본당 놈이란다.

  헐.

  근데 더 기가 막힌 건 내가 최악의 사제란다.

  우이씨...(p.14-15)

  종교적 권위, 어떤 기대감을 깨는 파격적인 글이다. 진상 신부, 소통을 중시하는 신부, 자부심 있는 신부, 착한 신부, 정직한 신부, 우직한 신부, 영적인 신부, 깔끔한 신부, 이상한 신부, 자랑스러운 신부, 성질 급한 신부, 영성스러운 신부, 고상한 신부, 가난한 신부, 고지식한 신부, 앞날을 보는 신부, 정의로운 신부, 깔끔한 신부, 귀족 같은 신부, 영험한 신부, 복음적 신부, 신비를 추구하는 신부, 온유한 신부, 똑똑한 신부, 유머스러운 신부, 운전을 즐기는 신부, 충직한 신부, 법대로 사는 신부, 거룩한 신부, 겸손한 신부, 기품 있는 신부, 경건한 신부, 젊음을 자랑하는 신부, 열심히 하는 신부, 성인 신부가 되고픈 신부... 읽고 즐기기 위한 신부 시리즈는 아주 많다.

  정직한 신부 2

  난 정직한 신부이다.

  그래서 받은 만큼만 일한다.

  근데 신자들은 왜 불만일까?

  나의 정직함을 왜 왜곡하는 것일까?

  왜 애들까지 나를 개무시하는 것일까?

  ...(p.36)

  홍성남 신부는 현재 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 소장이다. 가톨릭평화방송에서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주요 일간지에 상담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유튜버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세상과 소통하며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한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책날개에 있는 내용을 요약한 것이고... 1954년생, 사제복을 입고, 점잖게 뒷짐을 지고, 남의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기 딱 좋은 자리에 있지만, 본인의 꼰대력을 유머로 승화했다. 절대 꼰대가 아니라고 하면서...

  고지식한 신부

  난 고지식한 신부이다.

  신자들이 날 보고 "신부님은 한 여인을 구하셨다"라고 하는데

  기분이 별로다.

  왜 한 여인이라고 했을까?

  ...(p.69)

  예수님 시대에 유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겠지... 율법을 내밀어 정죄하고, 타인의 인생에 간섭하고, 왜곡된 거룩함과 잘못된 경건을 외치며...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입으로만 외치는 거룩, 모양으로만 자리 잡은 경건... 이러한 시대에 꼰대 신부의 영험한(?) 글은 파격적이다. 신 앞에서 너와 나는 똑같은 인간이다. 나이 들어 꼰대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차이일 뿐...

  종교적 가학증

  가학증(psycho sadism)이란 성적 자극과 흥분, 만족을 얻기 위해 상대방에게 정신적 고통이나 수치감을 가하는 경향으로 성도착증 중의 하나이다.

  흔히 군대 같은 조직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독재 국가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인데 때로는 종교 안에서도 번번이 나타난다.

  일전에 어떤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전투적 신앙을 갖기 위한 극기 훈련으로 변을 먹이는 등의 행위를 한 것도 바로 그 실행자가 종교적 가학증자였기 때문이다.

  신도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권력 욕구가 주는 쾌감을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하여 반발도 하지 못하고 복종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피학증(masochism) 때문이다.

  학대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가학증자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피지에서 여목사에게 학대를 당했던 교인들이 항의는커녕, 그 여목사에게 매달렸던 모습은 전형적인 가학증자와 피학증자의 병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사이비 종교에서 나오지 못하거나 독재 정부 시절을 그리워하는 심리들은 피학증자들이 갖는 공통된 증상이다.

  신앙인들은 존중받고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 어떤 명분이라도 존중에서 벗어난다면, 허울만 종교이지 내면은 사이비인 것이다.(p.172-173)

  이런저런 우스갯소리로만 끝내면 그저 그런 유머집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홍성남 신부는 '나의 작은 전쟁'이라는 파트에서 현대인의 종교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잘못된 종교적 신념, 사이비 이단에 빠지는 이유, 종교적 망상과 잘못된 신앙생활, 삶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게 아니라 피폐하게 만드는 무지... 신은 우리를 노예로 부른 게 아니라 자녀로 부르셨다. 신의 자녀로 살아가는 방법... 어느 종교를 떠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홍성남 신부는 지금 전쟁 중이다.

  종교적 가학증과 피학증을 읽으며 한때 나는 가해자였고, 동시에 피해자였다. 그동안 만난 존중 없는 지도자들... 역겹다! 신은 우리에게 평화와 자유로움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삶에서 종교의 바른 의미를 묵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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