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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스 - 선의 인류학
팀 잉골드 지음, 김지혜 옮김 / 포도밭출판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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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론인가요, 은유인가요?” ‘선의 비교 인류학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를 제출한 인류학자 팀 잉골드에게 심사위원들이 던진 질문이다. 그는 둘 다 아니라고 말한다. “선은 그 자체로 현상이, “선들은 정말로 거기에, 우리 안에, 우리 주위에 있다.”*고 단언한다. 만약 그의 말이 타당하다면, 어긋남사이에서 선의 인류학의 근본 질문이 시작된다. ‘선들이 실제로 우리 곁에 그토록 널렸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이 연구 주제가 낯선 것일까?’


인간은 걷고, 말하고, 손짓하는 생명체로서 어디에 가나 선을 만들어낸다. 걷기, 직조하기, 관찰하기, 이야기하기, 노래하기, 그리기, 쓰기, 이 모든 것들은 이러저러한 선을 따라 진행하는 것이다. 조금만 찬찬히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선 투성이다. 털실뭉치, 목걸이, 해먹, 그물, 빨래줄, 다림줄, 전기회로, 전화선, 바이올린 현, 철조망 울타리, 현수교.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자연의 수많은 선형 조직들인 뿌리, 구근, 버섯 균사들, 그리고 동물들의 몸털이나 날개, 더듬이나 수염, 내부의 관과 신경 체계에서도 선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선에 대립하는 블록을 대표하는 건축의 기원에도 선은 존재한다. “고트프리트 젬퍼는 섬유를 꿰고, 꼬고, 묶는 행위가 가장 오래된 인간 예술 중 하나였고, 이로부터 건물과 직물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예술들이 파생됐다고 논의했다. 또한 젬퍼는 인간이 벽 있는 집을 짓기 전부터 막대기나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울타리(담장과 우리)를 지어왔고, 옷감을 짜기 전부터 그물과 갑옷을 깁고 꿰매왔다고 주장했다.”(103)


유령같은 환영적인 선들도 있다. 몸도, 색도, 질감도, 어떠한 다른 유형(有形)의 질도 지니지 않는 선들. 이를테면, 유클리트 기하학의 선들, 위도와 경도의 격자, 적도, 열대, 극권의 선과 같은 측지선들. 한편 이것들은 실재하는환영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공(領空)을 허락없이 침입하면 미사일의 표적이 되고 생사의 기로에 놓인다. 별자리를 형성하는 보이지 않은 유령선들 없이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지혜, 신화는 태어날 수 없었다. 서양의학의 눈에는 환영이지만, 경락선은 노련한 침술사에게는 실재한다.

이처럼 선들로 세계가 꽉 차 있다면, 어째서 그토록 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탐구가 철저하게 부재했을까? 우선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에게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실이 유기물질이라서, 유물이 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고인류의 흔적들이 온통 석기인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돌성애자들이라서가 아니다. 나무도 실도 쉽게 부패하지만, 돌은 잘 썩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을 다루는 것을 여성의 작업으로 여기는 남성 선사학자들의 편견도 이 주제가 주목받지 못한 이유에 한몫했을 것이다.


지적 담론의 차원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 한번 선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라. 대개는 직선의 이미지를 연상할 것이다. 선 자체에는 선이 곧아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어쩌다 일직선이 선의 전형이 되었을까? “사실 직선은 근대성의 가상적인 도상, 즉 자연 세계의 우여곡절에 대한 이성적이고 목적의식이 있는 설계의 승리를 나타내는 지표로 출현했다.”(304) 일직선은 감각에 반하는 이성, 전통 관습에 반하는 합리성, 여성에 반하는 남성, 원시성에 반하는 문명, 자연에 반하는 문화를 표상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자연의 세계는 모든 종류의 규칙적인 선과 모양으로 바글거린다. 게다가 이것들 중 많은 경우는 인간 건축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프랙탈(fractal)을 보라. 번개, 구름, 나무, 강줄기, 산호의 구조가 얼마나 규칙적인지. 이와 달리 인간 거주자가 삶을 나아갈 때 만드는 선들 중 소수만이 조금이라도 규칙적이다. 직선의 헤게모니는 근대성의 현상이지 문화 일반의 것이 아니다.”(308)


직선의 헤게모니는 도덕성마저 독점해왔다. 곱추같이 구부정한 네안데르탈인에서 곧게우뚝 선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인류 문명의 대서사시, 무릎 꿇기보다 서서 죽겠다는 열혈지사의 대나무 같은 곧은절개. 반면 곧지 않은 것들은 부도덕하거나 무능력하다. 변태의 뒤틀린 성의식, 범죄자의 비뚤어진 적개심사기꾼의 왜곡된 탐욕, 저능아의 오락가락하는 정신들. 특히 (팀 잉골드가 세계의 존재 방식으로 긍정한 바로 그) ‘뒤엉킨 매듭은 흔히 난제를 대표하는 은유다. 고르디우스의 뒤엉킨 매듭을 끊어버린 것도 알렉산드로스 왕의 곧은칼날이다.


서구 근대를 반성적으로 성찰한 지식인들마저 선을 직선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서구 근대의 역사 인식을 선형적인 것에 놓고, 그 반대편 비서구 문명을 비선형적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팀 잉골드에게 이런 식의 상투적인 대립은 생명이 움직임이고 성장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는 식민주의가 비선형적인 세계에 선형성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종류의 선을 다른 선에 도입하는 것에 있다. 식민주의는 먼저 삶이 살아가는 경로를 삶을 억누르는 경계로 바꾸고, 이내 각각 하나의 지점에 억눌려 폐쇄된 공동체를 수직적이고 통합적인 조립체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선을 따라 사는 것과 선을 결합하는 것은 꽤나 다른 일이다.”(25-26)


여기서 선을 따라 사는 것이 행려이고, ‘선을 결합하는 것’, 즉 점대점(point-to-point) 연결이 운송이다. “산책하러 나가는 선과 같이 행려의 길은 이리저리 천천히 이동하고, 심지어 다음 곳으로 가기 전에 여기저기에서 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 거주하는 세계는 이러한 길들로 이루어진 얽힌 그물망이며, 삶이 그것들을 따라 나아가면서 지속적으로 직조된다. 대조적으로 운송은 특정한 위치에 묶여 있다. 한 위치에서 출발하여 다른 위치로 도착하는 여행자는 그 사이에 어디에도 없다. 종합하자면 운송의 선은 점대점 연결의 연결망을 형성한다.”(174) 방랑자의 자취는 관광객의 노선 계획표로 바뀌고, 스토리텔링은 미리 구성된 플롯으로 대체된다. 근대의 생활세계 전반은 얽힌 선들의 그물망에서 이어진 점들의 연결망’(171)으로 전환되었다.


이와 함께 인류 진화에 대한 패러다임도 점대점 연결망 속에 갇힌다. 20세기 전반까지는 그것을 하나의 계통에서 다른 계통으로 바뀌면서 진행되었다고 여겼다. ‘계단식 진화. 그 후로는 하나의 계통에서 두 개의 계통으로 갈라지면서 진행되었다는 생각이 20세기 후반에 자리 잡았다. 다윈의 생명의 나무가 이를 대표한다. 고인류학의 최신 연구들에 따르면, 이 모두 실상과 다르다. 수백만 년의 인류 진화 역사를 거치면서 여러 인류 계통이 동시에존재했던 적이 많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가 아프리카 남부에서 살고 있을 때 아프리카 동부에서는 파란트로푸스 에티오피쿠스가 살고 있었다. 그 뒤 호모 에렉투스가 아시아에서 존재할 때 유럽에서는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숨 쉬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 아시아에서는 데니소바인이 동시에 살았다. “인류의 진화는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앞으로 행진하는 모습도, 곁가지와 본가지로 갈라져서 울창한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뻗어가는 모습도 아니다. 차라리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고 다시 갈라지는 강줄기의 모습에 가깝다. 그리고 많은 물줄기를 이루었던 인류 계통의 다양성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작은 물줄기에서 큰 물줄기로 모여 지구 전체를 덮고 있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기원이 만들어낸 모습이다.”** (팀 잉골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생 인류의 탄생은 얽힌 선들의 그물망이었다.


그렇게 얽힌 선들의 후예로 태어났지만, 우리는 점대점 연결망 안에서 살아간다. 삶의 시간은 선을 따라서 흐르지 못한다. 점에 가둬져 연결될 뿐이다. 자기 노동력을 팔기 위해 이력서를 쓸 때마다 삶이 납작해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쉼보르스카의 시 이력서 쓰기는 점선 같은 삶에 대한 탁월한 예시다. “풍경은 주소로 대체하고, / 불완전한 기억은 확고한 날짜로 탈바꿈시킬 것.이렇게 쓰는 거야. 마치 자기 자신과 단 한 번도 대화한 적 없고, / 언제나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해왔던 것처럼. // 개와 고양이, , 추억의 기념품들, 친구, / 그리고 꿈에 대해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지. // 가치보다는 가격이, /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중요하고, / 네가 행세하는 라는 사람이 /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 네 신발의 치수가 더 중요한 법이야. ()” 그렇게 얻은 직장과 집, 양 점 사이를 가로질러 우리 모두 매일매일 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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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 잉골드, 라인스, 김지혜 옮김, 포도밭출판사, 2024, 15(이하 본문에 쪽수로 표기함).

** 이상희, 인류의 진화, 동아시아, 202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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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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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고 아름다운지, 흥미진진하게 온 몸으로 체감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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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중심에서 읽어내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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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은유 2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삶에 깃든 은유의 놀라운 힘을 느끼고 있습니다. ~~ 3권도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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