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오늘날 과학계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문제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문제를 꼽지 않을까 싶다. 인간 존재의 정수인 마음에 대한 호기심은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주로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계인 우주와 자연을 탐구하던 과학이, 신화와 종교, 철학과 문학의 영역에 속했던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달려든 것은 최근의 일이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대중에게 열린 무대의 중앙에서 집중 조명을 받으며 지능, 의식, 자아, 자유의지 등의 흥미로운 주제들을 놓고 설전을 벌이고, 나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기꺼이 그 공연의 티켓을 산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자신만만한 제목을 붙인 이 책은 스티븐 핑커라는 스타 과학저술가의 연출에 컴퓨터과학, 인지과학, 진화심리학, 언어학, 인류학, 철학 등 매력적인 배우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있어 흥행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주제는 실로 방대해서 인간의 거의 모든 역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읽다 지쳐 베고 자기에 딱 좋은 1000쪽에 가까운 부담스러운 분량임에도, 저자는 지면이 모자랄까 두려운 듯 쉴 새 없이 밀도 높은 정보를 나열한다. (핑커의 글에서 아쉬운 것이 바로 여백의 미, 강약과 완급의 리듬이다. 저자로서 그는 분명 훌륭한 선생님이지만 굴드나 도킨스처럼 멋진 글쟁이, 마음을 사로잡는 웅변가는 못된다고 생각한다.) 빽빽한 정보의 숲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잃지 않으려면 중심 문제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핑커는 마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문제를 '지능'의 문제와 '의식'의 문제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지능의 정체는 더는 신비가 아니며, 인지과학으로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았다. 그런데 재킨도프와 블록은 의식의 의미를 다시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자아' 개념 또는 자기인식 능력이다. 둘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대비되는, 접근 가능한 정보 또는 단기기억의 내용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의식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각력'이라는 의미의 의식이 있다. 핑커는 의식의 이 세 측면 가운데 처음 두 가지는 역시 오늘날의 과학 연구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한다. 결국 마지막 '감각력'의 문제가 남는다. 색조, 소리, 냄새에 대한 느낌, 통증과 같이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없는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은 왜, 어떻게 생겨났을까? 기계나 동물에게도 감각력이 있을까? 물리적인 뇌에서 어떻게 이런 신비스러운 현상이 빚어지는 걸까? 이는 생각할수록 심오하고 사람을 목마르게 하는 문제다. 토마스 헉슬리는 이 현상을 램프를 문지르면 거인이 나타나는 것만큼 신비스러운 일이라고 불렀고, 철학자 맥긴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에 비유했다.
핑커는 영리하게도 그 답을 책의 맨 마지막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마음을 역설계해 온 과학의 성과를 차례로 소개한다. 그는 계산주의 마음이론과 진화생물학을 결합시킨 진화심리학을 마음 설명의 기본적인 틀로 삼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결국 "마음이란 연산 기관들로 구성된 하나의 체계이며, 그 연산 기관들은 식량채집 단계에서 인류의 조상이 부딪혔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연선택이 설계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계산주의 마음이론을 다루는 2장은 비록 다른 부분에 비해 어렵고 참을성을 요구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가치에 큰 무게를 더한다. 그 동안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 힘들었던 인공지능의 기초가 되는 이론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지각을 다루는 4장과 사고 과정을 다루는 5장에 소개된 실험과 연구들은 인간의 인지 과정이라는 거대한 퍼즐을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나가는 노력이 얼마나 참을성을 요구하는 작업인지 실감케 한다.
감정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6장 '다혈질'에서는 섬뜩하게도 얼마 전 우리를 경악시킨 버지니아텍 사건과 같은 총기 난사범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꺼낸다.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인 행동도 자세히 보면 수없이 반복되어 온 보편적인 현상이고, 비합리적이지만 나름대로 냉철한 논리가 감추어져 있으며, 진화적 근거를 지닌다고 한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빌려온 '둠스데이 머신' 이론이다. 협상, 경쟁, 대치의 상황에서 상대방을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설득 또는 협박할 수 있는 방법은 갈 데까지 갈 수밖에 없는 장치를 스스로 장착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인간의 한 속성으로 진화되어 왔다. 그리고 광분하여 이성을 잃은 사람은 작동에 들어간 둠스데이 머신과 같다. 이 장에서는 그 밖에도 다양한 감정의 진화적 맥락을 소개한다. 7장은 친족선택과 호혜적 이타주의에 기초한 인간의 다양한 관계들에 대하여 고찰하고, 마지막으로 8장은 단순한 생물학적 목표를 뛰어넘는 인간의 독특한 특성인 예술과 유머감각, 종교 등을 다룬다.
저자는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줄곧 진화심리학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방어적인 자세를 보인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기존의 지배적 견해인 표준사회과학모델(SSSM)에 대항하여 혁명적이고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는 진화심리학이 마치 골리앗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다윗과 같은 처지라는 인상을 심어 준다. 그런데 6-7장에 걸쳐 소개되는 진화심리학은 상당 부분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본 친숙한 내용들이다. 그 이유는 원서와 번역서 사이에 10년이라는 세월의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에서 핑커의 이름을 널리 알린 『빈 서판』보다 이 책이 몇 년 앞서 태어났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화심리학은 우리의 마음을 설명하는 주류 이론으로 자리 잡았고,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주장들로 가득한 이 이론은 과학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 빠르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편 그 세월 동안 이 책에서 다루는 분야들에도 적잖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대한 현대 과학 이론의 종합인 이 책은 독자들에게 유용한 지침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을 손에 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 책의 맨 마지막 부분까지 꽁꽁 감추어놓았던 감각력 문제에 대해 핑커는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그걸 밝힌다면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말하지 않겠다. 개인적으로 핑커의 결론과 그에 이른 논리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상관없다. 비록 의식의 주관성 문제가 일종의 미끼와 같은 역할을 했더라도, 그 미끼에 낚여 방대한 이 책을 읽어낸 경험은 즐겁고 유익하고 뿌듯한 것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