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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 시드니 ㅣ 걸어본다 7
박연준.장석주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평점 :
박연준과 장석주. 두 저자 가운데 눈에 익은 이름을 먼저 찾았다. <철학자의 사물들>을 통해 알고 있던 장석주의 글부터 읽고 난 후 다시 박연준의 글로 돌아왔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놀랐다. 두 작가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몰랐고 장석주의 글에 등장하는 동반자 ‘P’를 무심코 넘겼기 때문이다. 이 책이 왜 이런 구성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책의 반을 읽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가능하다면 이렇게 읽기를 추천한다. 장석주 그리고 박연준.
1. 그 남자가 걸어본다
그리하여 공항은 출발의 흥분과 설렘, 도착의 안도뿐만 아니라 공간들의 배치를 통해 사치와 쾌락과 기다림의 무기력을 뒤섞는다.
사물들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탐구하던 시인의 여행은 공항이라는 공간이 갖는 속성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장석주는 <걸어본다> 연작의 기획의도대로 임무를 최대한 충실하게 이행하려는 듯이 정말 열심히 걷는다. 발이 -정확하게는 발바닥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는 말과 함께 ‘걷기란 몸이 아닌, 자아가 움직이는 것’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말이다. 그가 이 ‘걷기’에 관하여, 특히 ‘느리게 걷기’에 관하여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는지는 글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일어나라, 그리고 걸어라!
시드니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아니 어느 곳이라도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 싶다. 많은 곳을,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떠나봤지만 장석주의 시드니처럼 내게도 그 순간, 그 빛과 어둠, 물과 바람이 그런 감동을 주었었는지 백 번 다시 생각해 봐도 그렇지가 않다. 늘 내 어떤 감각들보다 발이 빠르게 앞서갔던 것만 같다.
아름다움에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
욕망을 좇는 여행을 수없이 해 봤다. ‘가성비’를 따지는 것부터가 실은 욕망의 시작이기도 했다. 웅장하고 반짝이는 랜드마크와 좋은 숙소, 유명한 음식점, 꽉 짜인 일정대로 쉬지 않고 움직이겠다는 욕망을 실현하는 길. 릴케는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이라고 하며 아름다운 것을 보며 내내 침울해 했다고 한다. 나는 바쁜 여정 가운데 간혹 ‘아름다운 것’을 만나면 항상 불안했다. 이 아름다운 것이 내게 영원히 남을 수 없다는 사실은 슬픔보다 불안을 먼저 불러일으키곤 했다. 어느덧, 나는 여행이 욕망과 불안의 씨앗이 될까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섣불리 짐을 싸지 못했다.
실은 어디가 되었든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바로 그 장소가 가장 아름다운 장소이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아니면 다른 어떤 세상에서라도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라. (존뮤어) - 다비드 르 브르통 <느리게 걷는 즐거움> 중에서
그러나 내게는 언제나 처음인 오늘, 그리고 끝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일 나의 삶이 학습과 성찰의 연속이듯 여행도 그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성급하게 욕망하지 않는 것, 아름다운 것을 즐겁게 슬퍼할 줄 아는 것. 나태함과 심심함의 길 위에 의연하게 짐을 싸고 온 힘을 다해 걷고 춤추려고 하는 것.
추신. 이 책의 또 다른 수확은 #{시드니, 여행, 걷기, 시간, 우주, 자연, 철학}에 대한 소중한 책들을 함께 추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주의 위치가 탁월하고 너무도 친절해서 얼른 이 책을 접고 그 책들을 읽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장석주의 ‘걸어본다’는 사실 시드니가 아니어도 무방했다. 그는 어디에서도 ‘걸어봄’으로 인해 이와 같은 이야기 보따리를 수도 없이 풀어냈으리라. 그의 발바닥은 시드니를 걸었지만 그의 자아는 사실 그 모든 ‘책’의 숲들을 걷다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그 여자가 걸어본다.
장석주의 걷기와 사색에 관한 이야기는 꽤 훌륭했지만 그의 ‘시드니 퍼즐’을 완성하는 데에는 몇 개의 빈 곳이 있었다. 그런데 박연준의 퍼즐 조각이 그곳을 가만히 채워 넣었다. 신기하게도 빈 공간에 꼭 들어맞는다.
장석주의 걸음은 거칠고 다소 불친절했다. ‘직진 본능’으로 앞서 나갈 것만 같은 걸음이다. 박연준의 그것은 조금 달랐다. 한 걸음을 내딛는 보폭이 좁고 가볍다. 따뜻하고 때로 명랑하다. 어린아이가 자유로운 공간에 놓인다면 꼭 그런 걸음을 걸을 것만 같다.
심심함은 옛날을 눈앞에 불러내기도 하고, 잊고 지냈던 어떤 ‘능력’을 되살려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뭔가를 만들어내게 한다. 결국 심심하다는 것은 쓸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심심함이야말로 인생을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감정이다.
그녀는 생애 첫 ‘시드니’에 대해 드디어 여행자다운 설렘과 기대를 보여준다. 친숙하고 친절하다. 나는 장석주가 탄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박연준의 글을 읽고서야 그들이 탄 비행기에 함께 타고 날아가는 상상을 해 보았다.
3. 그 남자와 그 여자가 걸어본다.
풍경의 본질은 시각적 골조가 아닌 분위기다.
그들은 정말 시드니에서 그들 자아와 제대로 인사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여유롭고 넉넉해서 심심하기까지 한 시간 속에서 잊었던 것들을 부활시키고 한국의 일상에서는 하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 한다. 본질적으로 함께였지만 함께라는 점을 활용해서 그들 스스로 최대한 혼자였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장석주의 차가움과 고집스러움 때문에 박연준의 따뜻하고 명랑한 자유로움이 돋보이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