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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바이러스 - 우리는 왜 적대적 인간이 되는가, 카를 융이 묻고 43명의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저널리스트가 답하다
코니 츠웨이그.제러마이아 에이브럼스 지음, 김현철 옮김 / 용감한까치 / 2025년 10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적대의 시대, 인간의 어둠을 해부한 책 『그림자 바이러스』. 바이러스라는 은유를 통해 인간 내면의 어둠이 어떻게 개인에게서 집단으로, 더 나아가 정치·국가 단위로 확산되는지를 파고듭니다.
카를 융의 그림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융 분석가·심리학자·정신과 의사·저널리스트 등 43명이 각자의 학문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자라는 난제를 해부합니다. 심리학의 거의 모든 영역—가족, 일, 질병, 성, 창조성, 악, 정치, 중년의 위기—을 통과하며 그림자라는 실체를 끝까지 추적하는 방대한 인간 탐구 프로젝트입니다.
카를 융이 1912년 '정신의 그림자 부분'이라는 말로 소개한 이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합니다. 프로이트가 그림자를 '억압된 욕망'의 층위에서 다루었다면, 융은 이 개념을 '열등한 인격'으로 발전시킵니다.

융이 말한 그림자는 단순한 억압된 욕망이나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의식에서 발달되지 못한 모든 잠재력의 총체, 즉 나의 또 다른 인격입니다. 그림자는 부정적 감정의 찌꺼기가 아니라, 의식 속 우월한 인격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인 사고, 사상,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에서 볼 때만 부정적일 뿐, 사실은 우리 인격 구조의 필수적인 한 축이라고 합니다.
로버트 블라이는 그림자를 '평생 끌고 다니는 가방'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성장 과정에서 사회적 환영을 받기 위해 숨긴 모든 것—분노, 자유, 성적 욕망, 야성, 슬픔—이 이 가방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가방은 곧 버림받은 자기의 기록 보관소가 됩니다.
융은 어둠을 의식으로 만들 때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림자 작업을 외면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영원히 차단하는 행위이며, 진정한 '전일성(wholeness)'에 이를 수 있는 통로를 스스로 봉쇄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림자 바이러스』는 그림자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림자 이론은 인간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유아기·아동기·청소년기에 형성된 관계 패턴이 잘못된 자기, 버려진 자기를 만들어냅니다.
책에서는 아이가 느꼈던 공포·수치·슬픔이 부모의 양육 방식에 따라 어떻게 '가방' 속으로 들어갔는지를 다양한 임상 예시로 보여줍니다. 아이의 감정은 배출되지 못하고 근육과 신체의 긴장으로 얼어붙습니다. 이 과정은 성인이 되어서도 버려진 감정 패턴으로 되살아납니다. 자아 형성 과정에서 그림자가 얼마나 구조적으로 자리 잡는지를 드러냅니다.
탄탄한 관계조차 한순간에 뒤틀어지는 이유,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연 적개심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림자 바이러스』는 투사와 복합 감정을 탐구합니다. 특히 형제·자매 관계에서 애착의 양면성, 비교와 경쟁의 흔적, 억눌린 분노가 어떻게 그림자로 전환되는지를 다룹니다.

그림자 투사가 일어나면 우리는 실제 타인의 모습과 자신의 콤플렉스를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타인에 대한 혐오가 사실은 나의 혐오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사소한 단점에 필요 이상으로 격렬하게 분노하고, 비이성적으로 미워하게 될 때, 그 대상은 십중팔구 우리 안의 억압된 그림자를 투사하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쏘아보며 상대가 '악'하다고 맹신합니다. 이때 발생하는 인지적 왜곡을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신체적 긴장이 단지 스트레스의 결과가 아니라, 가방에 갇힌 감정들의 움직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신체적 증상은 종종 그림자의 언어라고 합니다. 『그림자 바이러스』는 심리적 억압이 육체의 아픔으로 변질되는 현상을 다루며, 우리 몸이 보내는 신호들을 그림자의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능력주의 시대에 성공의 압박은 우리 안의 그림자를 끊임없이 확대합니다. 성취 욕망, 경쟁, 실패에 대한 공포, 완벽주의. 이 모든 요소는 그림자를 자라게 합니다.
완벽주의와 과도한 자기 통제는 그림자를 더욱 비대하게 만들어 결국 번아웃이나 치명적인 결점으로 돌아옵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흔히 결점이나 실패라고 여기는 것들 속에 오히려 개발되지 못한 잠재력과 창조적 에너지가 갇혀 있으며, 이것들을 활용하는 법이 진정한 발전을 가져온다는 걸 짚어줍니다.
악의 심리학에 대한 파트도 인상 깊었습니다. 개인의 광기가 국가적 적을 만드는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나오는 개념은 대립하는 자기(opposing self)입니다. 대립하는 자기는 내면의 강탈자가 되어 원래의 자기를 대체한다고 합니다.
악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내면에 또 다른 자기가 있으며, 억압된 그림자가 그것을 먹여 키운다는 사실은 섬뜩하게 만듭니다. 악의 본질은 괴물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개인의 그림자는 집단적 그림자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혐오가 결집되면 적이 만들어지고, 적이 만들어지면 사회는 분열됩니다. 『그림자 바이러스』는 나치 의사들 사례와 현대 정치의 선동 구조를 불러와 시스템적 그림자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설명합니다. 정치적 양극화, 온라인 혐오, 집단 악마화까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림자 바이러스』는 그림자의 위험성을 이해하게 도와준 후, 그림자 작업이라는 구체적인 치유와 회복의 길을 소개합니다. 문제는 이 그림자 가방을 열어보는 행위 자체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오랫동안 밀봉되어 있던 가방 안에는 아름다운 잠재력이 아닌, 야만성을 띠게 된 퇴화된 충동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자 작업은 이 얼어붙은 감정을 녹이고, 퇴화된 에너지를 다시 끌어올려 창조적인 원동력으로 전환하는 일입니다.
그림자를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적대성이 팽창한 시대에는 필수적인 정신적 생존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심리 치료, 꿈 분석, 능동적 상상, 예술적 표현 등을 통해 그림자에 빛을 비추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그림자 바이러스』는 이 시대의 적대감, 혐오, 분열, 극단성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진단하는 정서적 X-ray입니다. 적대적 인간의 탄생은 나쁜 사람 때문이 아니라, 인식되지 않은 그림자 때문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림자를 외면하면 자기를 잃고, 그림자를 수용하면 비로소 온전한 나로 도달한다는 것을 짚어줍니다. 내 안의 어둠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의 그림자 또한 보이고, 그때 비로소 적대는 줄어들게 됩니다.
집단적 혐오, 분열의 시대 흐름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이들, 융 심리학을 좀 더 현실적으로 알고 싶은 이들에게 유용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