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 상·청춘편 - 한 줄기 빛처럼 강렬한 가부키의 세계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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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국보: 상·청춘편』은 요시다 슈이치가 작가 생활 20주년을 기념해 발표된 장편소설로 가부키 세계를 무대로 한 인물의 일생을 담고 있습니다. 11월 한국에서도 개봉을 앞둔 영화 <국보>의 원작소설입니다. 이미 일본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킨 화제작입니다.


요시다 슈이치 작가는 1968년생으로 24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설 활동을 시작해 제84회 문학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습니다. 이어 아쿠타가와 상과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잇달아 수상하며,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미 다수의 작품이 영화화되며 스크린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그가 이번에는 가부키라는 고전적이면서도 화려한 세계를 배경으로 청춘의 찬란하고도 잔혹한 서사를 펼쳐냅니다.





『국보: 상·청춘편』은 키쿠오와 슌스케를 중심으로 일본 가부키 세계의 명문과 이방에서 온 인재가 만나고, 경쟁하고, 서로 다른 궤적을 그려나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일본 전통예술이라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인간 군상의 욕망과 상처, 빛과 그림자를 담은 거대한 서사가 펼쳐집니다.


이 소설은 상, 하 두 권으로 구성되었고, '청춘'이라는 키워드가 붙은 첫 권에서는 젊음, 성장, 타고난 재능이 발현되는 과정이 집중적으로 다뤄집니다.


주인공 키쿠오의 과거, 그리고 그가 감당해야 할 폭력과 생존의 현실이 소설 초반 아버지의 사건을 통해 드러납니다. 입문기의 서사는 출발선에 선 존재의 불안정함과 동시에 재능이 열리는 순간의 찰나적 충격을 오롯이 담고 있습니다.


키쿠오보다 먼저 빛나는 인물인 슌스케의 존재가 구조적으로 대비됩니다. 그는 명문가 출신으로 혈통과 전통이 무대 위에 뿌리내려 있는 인물입니다. 이 둘의 대비는 단지 라이벌 구도만이 아니라 재능 대 혈통, 선택된 존재 대 선택된 자가 되기 위한 고군분투라는 테마로까지 확장됩니다.


몸으로 배우는 예술이라는 가부키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단순히 뛰어난 배우 한 명이 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재능이 권력을 갖는 구조, 혈통이 재능을 평가하는 프레임, 그리고 무엇보다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제목 국보가 시사하듯 이 소설에서 예술가로서의 승계는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문제로 다뤄집니다. 연기를 잘하는 것을 넘어 무대를 온전히 살아내는 존재여야만 합니다. 그 과정에서 혈통, 재능, 선택, 고난, 승부, 이별이 교차합니다. 


혈통으로 물려받은 가문과 명가, 외부인으로 들어온 키쿠오의 이질성과 도전, 무대 위에서 체득한 기술이 몸에 새겨지는 순간, 무대를 떠날 수 없음으로써 얽히는 인간관계, 예술가로서의 자각과 자기 이해의 변화 등을 세심하게 만나는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가부키라는 세계의 흥미로만 읽기 시작했는데, 무대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어 깊은 여운을 안겨주는 소설입니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소설 문체가 무대 해설자 혹은 내레이터식 어조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읽는 내내 무대의 객석에 앉은 듯한 느낌입니다.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보는 존재이자, 내레이션을 듣는 존재로서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독특한 경험을 했습니다.


가부키라는 낯선 세계에 자연스럽게 입문되면서도, 그 세계를 예술가의 성장 이야기로 재구성한 서사에 몰입할 수 있었던 시간입니다. 청춘이란 금방 지나가 버리는 것이고, 그 뒤에 다가오는 책임과 고립, 예술가로서의 고독이 훨씬 더 깊이 따라옵니다. 젊은 날의 에너지뿐 아니라, 그 에너지가 어떻게 흘러가고 어떤 형태로 남는지 만나보세요.


무대 위에 서 있는 것. 한 사람의 존재가 예술과 맞닿고, 그 예술이 다시 한 사람을 만들고, 그 존재가 역으로 예술을 완성하는 순환이 담겨 있습니다. 국보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는 존재이자, 보는 이로 하여금 삶이 예술이 될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남기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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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 - 차별은 어떻게 생겨나고 왜 반복되는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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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차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젓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하면서 말이죠. 홍성수 교수의 신작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은 바로 그 말이야말로 차별의 시작점이라고 짚어줍니다. 법학자이자 인권 연구자인 저자는 혐오와 차별을 연구해온 지난 20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견고한 차별의 구조를 만든다는 사실을 꿰뚫어 봅니다.


전작 『말이 칼이 될 때』로 혐오 표현의 사회적 메커니즘을 분석하며 깊은 울림을 남겼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칼의 말을 넘어, 차별이 일상과 제도에 스며드는 방식을 낱낱이 해부합니다.


저자는 "위기가 위기인 이유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엉뚱한 희생양을 찾아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이 바로 혐오와 차별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군가를 비난함으로써 안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자각을 요구합니다.


홍성수 교수는 차별을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권력의 문제로 정의합니다.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식당에서 거절당하는 것은 불운일 수 있지만, 히잡을 쓴 사람이 거절당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전자는 단순한 개인의 경험이지만, 후자는 정체성에 대한 부정, 즉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는 폭력입니다.


저자는 차별이 단순히 상처받는 기분이 아니라 삶 전체를 위협하는 불안의 구조임을 일깨워 줍니다. 차별의 피해자들은 세상의 모든 곳에서 자신을 환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고 합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차별이 반복될수록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홍성수 교수는 차별을 합리적 이유 없이 특정한 속성을 근거로 불리한 대우를 하는 행위로 규정합니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차별뿐 아니라, 제도와 문화 속에 숨어 있는 간접적 차별 그리고 괴롭힘, 조롱 같은 사회적 모멸까지 포함됩니다.


저자가 든 대표적 사례는 노키즈존입니다. 아이를 거부할 수 있다면 다른 사유로도 누군가를 거부할 수 있다는 걸 짚어줍니다. 노키즈존이 영업의 자유라면 흑인 출입 금지, 무슬림 출입 금지, 동성애자 출입 금지도 다 용인되어야 하는 논리입니다.


이 문제의 본질은 아이들에 대한 예절 교육이 아니라, 배제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문화적 습관입니다. 저자는 노키즈존이 노시니어존, 노아재존으로 확장된 현상을 지적하며 우리가 언제부터 자유를 타인의 배제 권리로 착각하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이제는 노차이니즈존까지 생겼습니다.





불편한 타자를 제거함으로써 쾌적함을 얻는 사회. 그것은 결국 서로를 견딜 수 없는 사회로 이어집니다. 홍성수 교수의 관점은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사회학적 구조 분석에 가깝습니다. 노키즈존은 소비자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시장 논리가 공동체의 윤리를 대체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차별이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우리의 편의가 만든 배제의 언어임을 깨닫게 됩니다.


홍성수 교수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진 이유를 구조적 차별의 부정에서 찾습니다. 윤석열 대선후보 시절 발언 중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고 말한 것을 사례로 들며,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차별을 더욱 은폐한다고 비판합니다. 구조적 차별의 현실을 부정하면, 각자도생하며 개인적으로 해결하면 되니 국가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아들과 딸〉의 후남이와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을 비교하며, 노골적 차별이 사라진 대신 자발적 포기의 형태로 진화한 비가시적 차별을 분석합니다. 구조적 차별이 없다고 믿는 태도는 사실상 사회의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퇴행일 뿐입니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은 구체적 해법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시합니다. 차별금지법이 단지 소수자를 위한 법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존엄을 지키는 사회적 최소 장치라고 말합니다.


회사에서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해고할 자유, 대학에서 동성애자 학생을 차별할 자유, 사회복지시설에서 성소수자를 괴롭힐 자유를 금지하는 겁니다. 괴롭힐 자유를 인정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요? 홍성수 교수는 법적 정의가 인간의 일상 속 존엄을 회복하는 데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짚어냅니다.


음모론과 함께 혐중 정서가 폭발한 오늘날의 사태는 한국 사회가 혐오와 차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라고 합니다. 극우 세력은 혐오를 연료 삼아 힘을 키웠습니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의 극우화를 걱정한다면 우리는 혐오와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에서는 누구든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어디에서 살아가든 차별받지 않을 환경을 만드는 것은 나의 현재가 어떠하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의 미래를 위한 투자이고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단지 인권 담론의 언어가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시민의 언어입니다. 차별을 막는 것은 우리 공동의 미래뿐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걸 일깨워 줍니다. 차별의 종착지는 언제나 자기 자신입니다. 오늘 다른 누군가를 향한 배제가 내일은 나를 향한 부메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차별이 없다거나 역차별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시각이 얼마나 구조적 특권에 기대어 있는지 발견하게 될 겁니다.


차별 앞에서 침묵은 공범입니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은 차별을 남의 문제로 외면하지 않도록 하는 시민 교양서이자 감정의 리터러시 교본입니다. 평등은 시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합리적 선택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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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 - 이론물리학자가 말하는 마음껏 실패할 자유
김현철 지음 / 갈매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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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이론물리학 현역으로 살아온 과학자가 쓴 책이라고 하면, 아마 양자역학이니 상대성이론이니 하는 복잡한 공식을 풀어내는 책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은 예상을 뒤집습니다. 이 책은 과학자의 뇌와 심장으로 써 내려간 삶의 철학서에 가깝습니다.


김현철 교수는 독일 본대학교에서 핵자 구조와 쿼크를 연구하고, 미국과 일본 등에서 30여 년간 연구를 지속해온 이론물리학자입니다.


이 책에서는 어려운 이야기 대신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정말 당신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얼마나 길들여진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진짜 나로 살 수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론물리학자의 날카로운 통찰과 따뜻한 휴머니즘이 교차하며 우리 내부의 잠재된 주인의식을 일깨우는 따뜻한 사고실험입니다.





먼저 세상의 '길들임'에 저항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획일화된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는지 짚어줍니다.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해 날개가 꺾인 학생들, 원하는 학과가 아니라 더 나은 학교를 위해 재수하는 학생들을 보며 저자는 "길든다는 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뤄진다. 모두가 당연시한다고 그것이 옳은 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저자가 인용하는 프리먼 다이슨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과학은 반역이다." 과학의 역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전복하며 발전해 왔듯, 우리 삶도 사회가 정해놓은 틀을 의심하고 저항할 때 비로소 진짜 나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저자 자신도 이 '길들임'의 피해자였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그는 실력으로 이겨내겠다는 미몽에 빠져 있던 자신을 돌아봅니다.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실력으로 증명하려 했던 젊은 날의 모습은 결국 학벌주의라는 틀 안에서 싸우고 있었던 겁니다.


저자는 자신이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세상은 변하지 않아도 나는 변할 수 있다.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라고 말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시인을 꿈꿨지만 물리학자가 된 그에게 시는 실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저자는 시가 인생에 신의 한 수였음을 고백합니다. 헤겔의 말을 빌려 "가장 위대한 성공은 실패할 수 있는 자유에 달려있다"라고 말합니다.


시에 몰입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저자는 물리학에 뛰어들었을 때도 그 깊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핵물리학이라는 자연의 가장 깊숙한 곳을 탐구해 온 저자 자신의 학문적 여정과 그 과정에서 얻은 태도론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삶이라는 우주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리학에서 실패한 실험은 무의미한 결과가 아니라 다음 실험의 초기 조건을 정의하는 과정입니다. 그는 이 과학적 사고를 삶에 적용합니다. 한때 곁길로 갔다고 인생이 끝장나지 않는다며, 오히려 그것은 한 개인의 인생에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입니다.


그가 들려주는 제자들의 사례는 흥미롭습니다. 물리학을 포기하고 유튜버로 전향한 학생, 취업을 선택한 연구자, 전공을 완전히 바꾼 이들까지 이들의 선택은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실패일지 모르나, 저자는 그것이야말로 각자의 궤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말합니다.


그는 혼돈을 품은 자만이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끌어오며, 실패를 혼돈이 아닌 별의 씨앗으로 해석합니다. 혼돈은 결국 창발을 일으키는 조건이며, 실패는 인생의 엔트로피를 늘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후반부에서 저자는 물리학의 다차원적 사고를 인간 이해로 확장합니다. N차원에서 한 사람을 바라보면 내가 보지 못한 놀라운 능력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사회는 사람을 1차원적 성적표로 서열화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은 벡터적이라고 합니다. 물리학의 벡터가 방향과 크기를 모두 가지듯, 한 사람의 잠재력 또한 여러 차원에서 확장되는 겁니다.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성적만으로 한 줄로 세울 수 있겠냐고 반문합니다. 제자들을 가르친 경험을 통해, 성적이 아닌 가능을 보게 되었던 순간들을 회상합니다. 교육자로서의 고백이자 과학자가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찰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학자가 세상에 남기는 것은 논문보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말하며 교육자로서의 소명을 재확인합니다.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넘어, 나는 왜 세상의 기준으로 나를 재단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이론물리학자가 전하는 이 따뜻한 사고실험은 우리 모두에게 N차원의 스스로를 찾아낼 의무가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저자가 말하는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삶이란, 바로 이 N차원의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삶입니다. 이 책은 각자가 자기 삶의 우주의 중심으로 당당하게 서도록 격려하는 찬란한 응원가입니다. 


이론물리학자들의 가장 위대한 도구가 휴지통이라는 농담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지 보여줍니다. 수많은 계산과 가설이 휴지통으로 들어가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진부한 격언이 아니라, 실패 그 자체가 하나의 성과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검증하고, 때로는 기존 이론을 뒤집는 과정. 이 과학적 방법론은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저자가 평생 물리학을 하며 체득한 가장 큰 자산입니다.


소심심고(素心深考), 잘게 쪼갠 뒤에 해결하라는 원칙도 물리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복잡한 문제를 작은 단위로 나누어 하나씩 풀어가는 이 방법은 인생의 큰 문제들을 마주할 때도 유용합니다. 거대한 목표에 압도되어 포기하는 대신, 작은 단계들로 나누어 차근차근 나아가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책 곳곳에 실용적인 지혜들이 박혀 있습니다. 구체적인 공부 방법이나 연구 태도에 대해서도 조언합니다. 모두 삶의 태도와 연결됩니다. 문제를 작게 쪼개서 푸는 법,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 동료와 협업하는 법 등은 모두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입니다.


실패를 자산으로 바꾸는 이론물리학자의 인생 강의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스토리텔링에 흠뻑 빠져들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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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의 언어 - 죽음의 진실을 연구하는 법의인류학자의 시체농장 이야기
윌리엄 배스.존 제퍼슨 지음, 김성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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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끝을 연구한 사람, 썩어가는 육체로 정의를 복원한 한 과학자의 경이로운 실험. 윌리엄 배스의 『부패의 언어 Death's Acre』.


미드 본즈 Bones 애청자로서 법의인류학자 템퍼런스 브레넌과 FBI 수사관이 협력해 사망자의 정체, 사망 경위를 밝히는 매 에피소드마다 흠뻑 빠져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법의인류학과 법의학적 증거를 중심으로 플롯이 전개되는 부분은 『부패의 언어』에서 다루는 죽은 자들이 남긴 흔적이 과학적 증거로 치환되는 과정과 맥이 닿습니다. 미드의 픽션과는 다르게 이 책에서는 실제 학문적, 현장적 배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습니다. CSI와 같은 법의학 드라마 마니아라면 그 모든 서사의 현실적 출발점을 확인하게 될 겁니다.


윌리엄 배스 박사가 설립한 시체농장(Body Farm)은 이름 그대로 죽은 이들이 모여 사는 땅입니다. 그곳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죽음을 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연구소입니다.


이곳에서 매일 시신은 흙 속으로 녹아 사라지고 새와 곤충, 포식자들은 그 과정을 돕습니다. 그것은 잔혹한 광경이 아니라 생태적 순환 속에 죽음의 과학을 기록하는 엄숙한 실험입니다.


윌리엄 배스 박사는 원래 상담학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는데, 우연히 들은 교양 인류학 강의가 그의 삶을 바꿔놓습니다. 불에 탄 뼈, 부러진 두개골,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유해를 통해 사람의 마지막 이야기를 읽는 일에 매혹된 그는 인류학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천 구의 시신과 마주했고, 죽음이 들려주는 진실의 언어, 즉 부패의 언어를 읽는 법을 세상에 가르쳤습니다.


시체농장은 실패에서 태어났습니다. 윌리엄 배스 박사는 한 무덤에서 발견된 머리 없는 시신을 감식하며 사망한 지 길어야 몇 달이라 단정했지만, 나중에 그 시신이 남북전쟁 당시의 장교, 샤이 중령의 시신임이 밝혀졌습니다. 그의 오판은 무려 113년의 오차였습니다.


당시 방부처리와 주철 관 덕분에 시신은 놀라울 만큼 보존되어 있었고, 배스 박사는 인간의 부패 과정을 아직 아무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이 사건은 과학자에게는 치명적인 굴욕이었으나, 동시에 새로운 출발점이었습니다.





죽음이 일어나는 이후의 모든 일을 체계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걸 깨달으며, 1980년 테네시 대학교의 언덕 아래,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구역에서 세계 최초의 시체 부패 연구소, 즉 시체농장이 탄생합니다. 이 순간 법의학은 실험실을 떠나 자연 속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죽음을 관찰하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됩니다.


윌리엄 배스 박사가 이끈 연구는 세밀했습니다. 시신을 물웅덩이에 담그고, 얕은 무덤에 묻고, 자동차 트렁크에 두고, 햇빛과 그늘, 더위와 습기 등 모든 조건을 달리하며 시체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부패의 시간표, 즉 사망 후 경과시간 데이터베이스입니다. 어떤 시신의 피부가 미끄러지고, 머리카락이 빠지며, 구더기 번데기가 생기는 시점을 알면, 그 사람의 사망 시각을 수학적으로 역산할 수 있습니다. 이 연구는 전 세계 법의학자들이 지금도 사용하는 핵심 도구가 되었습니다.


과학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썩은 시신, 구더기, 송장벌레의 언어를 읽는 현실적인 기술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것은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인간의 윤리적 책임감입니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미시시피주 살인사건의 법정 장면입니다. 살해당한 어린 손녀의 시신은 이미 매장된 지 오래였고, 남은 것은 사진뿐이었습니다. 윌리엄 배스는 사진 속 피부의 색, 뼈의 노출 정도, 곤충의 흔적을 토대로 사망 시점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용의자의 알리바이와 맞지 않았습니다.


모든 증거가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그는 사진 속 머리카락 사이에서 파리로 변태하며 남긴 구더기의 껍질을 발견합니다. 그 미세한 흔적 하나가 사망 시점을 앞당기며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무너뜨렸고, 결국 배심원단은 그 남자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죽음의 냄새 속에서도 생명과 정의의 손을 맞잡은 윌리엄 배스 박사. 시체를 해부하고 부패를 기록하는 일은 혐오의 행위가 아니라 정의의 회복 과정입니다.


시체농장이 알려지자마자 윤리적 논쟁은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일은 아닌가라고 말이죠. 하지만 윌리엄 배스 박사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합니다.


그는 죽은 이들이 죽음을 통해 생명을 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라고 합니다. 살았을 때도 무시당하고, 죽어서도 잊혀졌던 누군가의 몸이 오늘날 법의학의 교과서가 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인간 존엄의 다른 형태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평범했던 메리 루이스는 죽어서 수천 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수백 명의 법의학자를 훈련시키는 법의학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살인범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지만, 메리 루이스 덕분에 수많은 범인이 잡혔습니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정의의 씨앗이 된 순환의 시작이었습니다.





사건의 뒤에 있는 인간의 삶을 복원하는 이야기꾼과 같은 윌리엄 배스의 삶을 다룬 『부패의 언어』. 뼈를 증거가 아닌 이야기로 바라보며, 뼈는 침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살인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해피엔딩은, 암울하지만 만족스러운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하는 윌리엄 배스. 그는 과학을 통해 인간의 악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의 흔적을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구합니다. 불타버린 시신, 토막 난 뼈, 파리의 껍질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을 복원해냅니다.


연구한 바로 그 땅에 묻히고 싶은 과학자로서의 마음과 품격 있는 마지막 쉼터를 마련해주고 싶어하는 가족 사이에서의 아릿한 갈등을 품고 있는 노년의 윌리엄 배스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이 책은 죽음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상태를 통해 오히려 삶의 온도를 복원합니다. 죽은 자들이 침묵하지 않도록, 살아 있는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기억하도록 우리에게 양심의 교양을 가르쳐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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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바나나 - 매일매일 쓰는 제미나이 AI 매일매일 AI 시리즈 2
문수민 외 지음 / 생능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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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바나나: 매일매일 쓰는 제미나이 AI』 디자인의 새 언어를 배우는 교과서입니다.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나노 바나나(NANO BANANA) 를 통해 창작의 세계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진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제주대학교 융합디자인과 전임교수로 재직 중인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문수민 저자, 게임업계 메이저 기업들을 거쳐온 3D 캐릭터 전문가 박범희 저자, IT 실무 관련 교재와 멀티미디어 콘텐츠 개발로 이미 검증된 기획 팀 앤미디어의 협업으로 탄생한 책입니다. AI를 예술의 협업자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을 담은 동시에 창작자의 자율성과 기획력이 여전히 핵심임을 강조합니다.


먼저 나노 바나나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한 기본기를 차근차근 알려줍니다. 나노 바나나는 구글의 이미지 AI 시스템 제미나이(Gemini) 와 연결된 모델로 기존 생성형 AI가 갖고 있던 불안정한 캐릭터 일관성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합니다.





나노 바나나는 사용자의 의도를 정밀하게 이해하고, 창작자가 원하는 결과를 찰떡같이 구현한다는 말처럼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같은 인물의 이미지를 여러 번 생성할 때마다 얼굴이 조금씩 달라져 답답했던 디자이너들에게 일관성 유지는 가장 해결이 절실했던 난제였는데, 나노 바나나는 데이터 기반으로 학습한 정밀 맥락 인식 기술로 해결했습니다.


같은 캐릭터를 다른 계절의 배경에서 그리거나, 한 인물의 표정을 유지한 채 조명을 바꾸는 등의 작업이 가능합니다. 기존에는 포토샵의 마스크 편집이나 레이어 합성으로 몇 시간을 들여야 가능했던 일을 이제는 한 줄의 프롬프트로 끝낼 수 있습니다.


문장을 이미지로 바꾸는 데에는 역시 프롬프트의 힘이 자리합니다. 이 책은 프롬프트 작성 노하우 10가지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여기서 핵심은 덜어내기입니다. 프롬프트의 기본 뼈대를 주체, 행동, 배경을 명확히 구성한 다음, 방해되는 키워드를 제거하라고 합니다.


카메라 구도, 조명, 색감, 분위기 등 사진적 언어를 텍스트로 변환하는 구체적 방법을 알려줍니다. 보조광을 활용해 입체감을 살리라는 조언부터, 하이앵글 샷으로 감정의 위축을 표현하라는 프롬프트 응용법까지 마치 AI 시대의 디지털 촬영 교본을 읽는 듯합니다.


포토샵을 대체하는 프롬프트 디자인 스킬도 놀랍습니다. 포토샵의 수십 가지 기능을 AI 프롬프트로 대체하는 법을 소개합니다. ​저는 두 사진을 조합하는 간단한 이미지를 생성해보고, 팬시 캐릭터로도 생성해봤습니다. 기대한 바의 50% 정도로 1차 결과물이 나왔고 세밀하고 정확한 프롬프트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어요.


사진을 추출해 일러스트 로고 만들기 실습에서는 전통적인 펜툴 추출 대신 나노 바나나에 로고화 스타일 명령을 입력합니다. 그러면 AI는 피사체의 특징선을 자동으로 인식해 로고 스타일로 변환합니다. 이제 우리는 손기술 대신 언어 감각을 연마해야겠구나 싶더라고요.


반려동물 캐릭터화 프로젝트로 재미있습니다. 한 장의 반려동물 사진을 AI에 입력하면 다양한 표정과 동작의 캐릭터 시트로 확장됩니다. 이모티콘, 굿즈, 게임 캐릭터 제작이 모두 한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겁니다.





AI가 영상 제작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과정도 다룹니다. 이미지 생성을 넘어 카메라 샷의 문법을 프롬프트로 학습시켜 애니메이션과 광고 영상의 장면 연출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이앵글 클로즈업으로 시작해, 드론 샷으로 전환 명령을 입력하면 AI는 자동으로 시점 전환과 피사체 움직임을 구현합니다.


위스크(Wisk)와 캡컷(CapCut) 등 영상 편집 도구와의 연계를 통해 AI 이미지가 움직이는 스토리로 확장되는 과정도 실습합니다. AI와 인간이 함께 편집하는 새로운 스토리텔링 시대가 된 겁니다.


『나노 바나나』는 기술 매뉴얼이면서 동시에 감각의 윤리학을 제시합니다. AI가 아무리 정밀해도 최종 결정은 여전히 인간의 미감에 달려 있습니다. 게다가 창작자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프롬프트에 담느냐에 결과물이 달려 있습니다.


AI는 인간의 언어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어의 감각을 더 세밀히 요구합니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문학적 창작입니다. 툴(tool)의 시대에서 프로토콜(protocol)의 시대. 디자이너뿐 아니라 창작이 일상인 모든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나노 바나나』는 디자인의 노동에서 해방된 창작의 전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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