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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의 언어 - 죽음의 진실을 연구하는 법의인류학자의 시체농장 이야기
윌리엄 배스.존 제퍼슨 지음, 김성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인간의 끝을 연구한 사람, 썩어가는 육체로 정의를 복원한 한 과학자의 경이로운 실험. 윌리엄 배스의 『부패의 언어 Death's Acre』.
미드 본즈 Bones 애청자로서 법의인류학자 템퍼런스 브레넌과 FBI 수사관이 협력해 사망자의 정체, 사망 경위를 밝히는 매 에피소드마다 흠뻑 빠져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법의인류학과 법의학적 증거를 중심으로 플롯이 전개되는 부분은 『부패의 언어』에서 다루는 죽은 자들이 남긴 흔적이 과학적 증거로 치환되는 과정과 맥이 닿습니다. 미드의 픽션과는 다르게 이 책에서는 실제 학문적, 현장적 배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습니다. CSI와 같은 법의학 드라마 마니아라면 그 모든 서사의 현실적 출발점을 확인하게 될 겁니다.
윌리엄 배스 박사가 설립한 시체농장(Body Farm)은 이름 그대로 죽은 이들이 모여 사는 땅입니다. 그곳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죽음을 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연구소입니다.
이곳에서 매일 시신은 흙 속으로 녹아 사라지고 새와 곤충, 포식자들은 그 과정을 돕습니다. 그것은 잔혹한 광경이 아니라 생태적 순환 속에 죽음의 과학을 기록하는 엄숙한 실험입니다.
윌리엄 배스 박사는 원래 상담학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는데, 우연히 들은 교양 인류학 강의가 그의 삶을 바꿔놓습니다. 불에 탄 뼈, 부러진 두개골,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유해를 통해 사람의 마지막 이야기를 읽는 일에 매혹된 그는 인류학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천 구의 시신과 마주했고, 죽음이 들려주는 진실의 언어, 즉 부패의 언어를 읽는 법을 세상에 가르쳤습니다.
시체농장은 실패에서 태어났습니다. 윌리엄 배스 박사는 한 무덤에서 발견된 머리 없는 시신을 감식하며 사망한 지 길어야 몇 달이라 단정했지만, 나중에 그 시신이 남북전쟁 당시의 장교, 샤이 중령의 시신임이 밝혀졌습니다. 그의 오판은 무려 113년의 오차였습니다.
당시 방부처리와 주철 관 덕분에 시신은 놀라울 만큼 보존되어 있었고, 배스 박사는 인간의 부패 과정을 아직 아무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이 사건은 과학자에게는 치명적인 굴욕이었으나, 동시에 새로운 출발점이었습니다.

죽음이 일어나는 이후의 모든 일을 체계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걸 깨달으며, 1980년 테네시 대학교의 언덕 아래,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구역에서 세계 최초의 시체 부패 연구소, 즉 시체농장이 탄생합니다. 이 순간 법의학은 실험실을 떠나 자연 속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죽음을 관찰하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됩니다.
윌리엄 배스 박사가 이끈 연구는 세밀했습니다. 시신을 물웅덩이에 담그고, 얕은 무덤에 묻고, 자동차 트렁크에 두고, 햇빛과 그늘, 더위와 습기 등 모든 조건을 달리하며 시체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부패의 시간표, 즉 사망 후 경과시간 데이터베이스입니다. 어떤 시신의 피부가 미끄러지고, 머리카락이 빠지며, 구더기 번데기가 생기는 시점을 알면, 그 사람의 사망 시각을 수학적으로 역산할 수 있습니다. 이 연구는 전 세계 법의학자들이 지금도 사용하는 핵심 도구가 되었습니다.
과학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썩은 시신, 구더기, 송장벌레의 언어를 읽는 현실적인 기술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것은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인간의 윤리적 책임감입니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미시시피주 살인사건의 법정 장면입니다. 살해당한 어린 손녀의 시신은 이미 매장된 지 오래였고, 남은 것은 사진뿐이었습니다. 윌리엄 배스는 사진 속 피부의 색, 뼈의 노출 정도, 곤충의 흔적을 토대로 사망 시점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용의자의 알리바이와 맞지 않았습니다.
모든 증거가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그는 사진 속 머리카락 사이에서 파리로 변태하며 남긴 구더기의 껍질을 발견합니다. 그 미세한 흔적 하나가 사망 시점을 앞당기며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무너뜨렸고, 결국 배심원단은 그 남자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죽음의 냄새 속에서도 생명과 정의의 손을 맞잡은 윌리엄 배스 박사. 시체를 해부하고 부패를 기록하는 일은 혐오의 행위가 아니라 정의의 회복 과정입니다.
시체농장이 알려지자마자 윤리적 논쟁은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일은 아닌가라고 말이죠. 하지만 윌리엄 배스 박사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합니다.
그는 죽은 이들이 죽음을 통해 생명을 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라고 합니다. 살았을 때도 무시당하고, 죽어서도 잊혀졌던 누군가의 몸이 오늘날 법의학의 교과서가 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인간 존엄의 다른 형태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평범했던 메리 루이스는 죽어서 수천 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수백 명의 법의학자를 훈련시키는 법의학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살인범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지만, 메리 루이스 덕분에 수많은 범인이 잡혔습니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정의의 씨앗이 된 순환의 시작이었습니다.

사건의 뒤에 있는 인간의 삶을 복원하는 이야기꾼과 같은 윌리엄 배스의 삶을 다룬 『부패의 언어』. 뼈를 증거가 아닌 이야기로 바라보며, 뼈는 침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살인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해피엔딩은, 암울하지만 만족스러운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하는 윌리엄 배스. 그는 과학을 통해 인간의 악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의 흔적을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구합니다. 불타버린 시신, 토막 난 뼈, 파리의 껍질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인간의 존엄을 복원해냅니다.
연구한 바로 그 땅에 묻히고 싶은 과학자로서의 마음과 품격 있는 마지막 쉼터를 마련해주고 싶어하는 가족 사이에서의 아릿한 갈등을 품고 있는 노년의 윌리엄 배스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이 책은 죽음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상태를 통해 오히려 삶의 온도를 복원합니다. 죽은 자들이 침묵하지 않도록, 살아 있는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기억하도록 우리에게 양심의 교양을 가르쳐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