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조명 아래 빈 술잔이 반짝 빛났다. 재즈 음악이 흘렀다. 바스툴에 걸터 앉은 나는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받친 자세로 오른손을 움직여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바 너머에서 바텐더가 다가와 지포 라이터를 열고 불을 켜서 내 입을 향해 내밀었다. 담배를 물고 그가 켜준 불을 빨아당겼다. 어두운 조명 아래 담배 연기 한 줄기가 위로 솟아올랐다.


"나 한 잔 더 해도 되죠?" 지포 라이터를 닫아 내려놓은 그는 내 귀에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이번에는 목소리 톤을 높여 묻는다. "오빠도 잔 비었네. 한 잔 더 드려야죠?" 그러나 답은 기다리지 않고, 내 잔을 먼저 삼분의 일쯤 채운다. 이어 자신의 잔에도 같은 양을 따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얼음 통을 꺼내고 내 잔에 얼음 세알을, 자신의 잔에도 얼음 세 알을 넣었다. 익숙한 솜씨다.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그가 하루에 몇 잔이나 술을 따를까? 몇 개의 스트레이트와 몇 개의 온더락스 잔을 채울까? 그는 자신도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아까 내려놓은 지포 라이터를 열어 불을 붙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로 두 가닥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가 깊이 들이마셨다가 훅 내뱉은 연기와 그가 길게 내뱉은 연기가 만나 섞였다.


"그래서 오빠, 그 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머리 위에서 들린 질문에 머리를 괴고 있던 왼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단정하게 빗어 뒤로 묶은 머리칼이, 반듯하게 다림질이 된 검은 셔츠자락이, 그 셔츠 가슴 주머니에 달린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세련된 글씨체로 적힌 글씨를 읽었다. 류민. 그리고 가게 이름 대신 작게 그려진 검은 고양이 그림 실루엣을 보았다. 그는 내 눈을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잠시 기다린다. 난 대답 대신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쥔 손으로 잔을 들어올려 두어차례 흔들었다. 짤랑짤랑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술 한 모금을 넘기자,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아, 미안.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짜릿한 감각이 뇌를 때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 후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도 멍한 말투, 어디 나사 하나가 빠져 동작이 부자연스런 장난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 오빠. 벌써 취했나봐." 그가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눈을 흘긴다. 입을 삐쭉 내밀었다가 손에 든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후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떨어뜨렸다. 물에 젖은 티슈 위에서 담뱃불이 취이익 소리를 내며 꺼졌다. 빨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삐죽 내민 빨간 입술이 화면을 가득 채운 영화관 스크린처럼 내 마음에 들어왔다.


"경찰에 쫓겨 골목으로 도망쳤다면서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어요?" 그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잠시 머금었다가 마치 약을 털어넣고 삼키듯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입에 머금은 술을 단번에 삼켰다. 그 동작이 재밌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를 빤히 보는 시선을 느끼고 살짝 고개를 떨구며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재떨이에 던졌다. 길게 내뱉는 담배 연기 사이로 문득 소음이 들렸다. 시위대가 저마다 지리는 외침과 비명들, 전경들의 구령과 군화발 소리 그리고 방패를 땅에 부딪히는 소리.


"즉시 자리를 벗어나 해산하십시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여러분은 현재 불법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해산하십시오!" 그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담긴 내용이 꽤나 우습다고 여겼다. 문득 저 방송차량에 탄 여성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드는 생각은 저 목소리 제법 매력적이라는 생각. 언제나 독특한 목소리에 끌렸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너무나 섹시했던 누군가와 독특한 발음과 울림에 끌렸던 누군가와 톤이 높은 목소리가 설레게 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뒤로 빠져!", "왼쪽으로 들어온다!", "조심해!" 빠르게 울리는 군화발 소리가 가까워지며, 여기저기서 소리가 들렸고,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쪽에서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며 전경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마치 바퀴벌레 떼를 보는 것 같았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흩어져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뒷걸음질을 치다가 전경 하나가 날선 방패를 휘둘러 손을 올려 막으려는 자세를 취한 사람의 손을 튕겨내고 그대로 머리를 때리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순간 피가 튄 장면이 머리속에 각인되었다. 한참을 뛰었다. 뒤에서 울리는 군화발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갑자기 앞에서 뛰던 여성이 넘어졌다. 옆에서 뛰던 다른 여성이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바로 일어나진 못했다. 나도 다가가 일으키려 했다. 두 명이 양쪽에서 부축해 간신히 일으키긴 했지만, 이대로는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가까워지는 군화발 울림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맨 앞에서 달려오던 전경의 곤봉을 든 오른손이 위로 올라갔다. 반사적으로 부축을 풀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곤봉을 휘두르려는 그 전경의 방패를 어깨로 부딪혀 뒤로 밀어내고, 곧바로 몸을 틀었다. 왼쪽에서 누군가 뭔가를 휘두르는 것을 깨닫고 뒤로 펄쩍 뛰며 피했다. 곤봉이 아슬아슬하게 내 눈앞을 지나쳤다. 다음 순간 내가 어깨로 밀어냈던 그 전경이 다시 곤봉을 휘둘렀고, 그 다음엔 왼쪽 전경이 또 곤봉을 휘둘렀다. 동작이 큰 두 명의 곤봉을 연속으로 피하며 뒷걸음질 치면서 슬쩍 아까 넘어진 여성을 봤다. 시간을 버는 동안 어딘가 구석으로 숨어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어느새 다른 방향에서 온 전경들에게 잡혀 연행되고 있었다.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이번엔 오른쪽에서 뭔가가 휙 튀어나왔다. 순간 배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몸의 균형을 잃었다. 배를 감싸쥐고 앞으로 넘어지려는 찰나 목과 등에 통증을 느꼈다. 아까 두 명이 격렬하게 곤봉을 내리쳤다. 눈앞에서 번개가 치는 것처럼 순간 시력을 잃은 느낌이었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치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둥글고 만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모르겠으나 팔다리가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온 몸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소리를 들으니 군화발들의 뜀박질은 이제 제법 멀어져있었다. 비명 소리와 무언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들이 멀리서 들렸다.


계속 몸을 움직여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움직이려 집중했다. 간신히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곧 몸 여기저기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 고개를 들어보니, 가까이에 전경 하나가 쓰러진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 다리 근육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잠시 더 누운 상태로 팔 다리의 각 근육 상태를 살폈다. 소리를 잘 들어보니 근처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한쪽으로 모으는 전경들이 한 둘이 아닌 듯했다.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몸을 일으켜 뛰기 시작했다. 전력질주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다리가 무척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에서 전경이 하나 따라오는 듯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뛰었다. 


한참을 뛰어 어느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는데, 갑자기 진압복을 입고 헬멧을 쓴 경찰을 만났다. 복장이 달랐다. 전경이 아닌 경찰이었다. 헬멧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제법 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뒤에서도 전경이 쫓아오고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달리던 탄력 그대로 그 경찰을 향해 돌진했다. 경찰은 방패를 앞세웠고, 나는 그대로 방패를 발로 밀어차고 멈췄다. 살짝 뒤로 밀렸던 그는 곤봉을 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선택해야했다. 어떤 동작을 취할 것인가? 어디로 피할 것인가? 다음 순간 반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경찰이 휘두른 곤봉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피하고 반사적으로 원투 펀치를 옆구리와 가슴에 꽂아넣고 연결동작으로 어퍼컷을 턱에 꽂았다. 하지만 진압복과 헬멧 덕분에 주먹질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내 손에서 통증만 느껴졌다.


다음 순간 경찰은 다시 곤봉을 휘둘렀고, 내 오른쪽 어깨에 맞았으나, 내가 몸쪽에 바짝 붙어있었으므로 위력은 별로 없었다. 주먹으로 타격을 주지 못하니 발을 쓰꺼나 쓰러뜨려야 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빗당겨치기와 비슷한 동작으로 경찰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발로 헬멧을 걷어찼다. 헬멧 덕에 머리에 충격은 없었어도 목뼈에는 충격이 갔으리라. 곤봉을 뺏어서 도망가려 했으나, 넘어져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곤봉을 놓기 않았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곤봉을 포기하고 다시 한번 헬멧에 발길질을 해주고, 뜀박질을 시작했다.


한참을 뛰어 어느 대형서점에 들어갔고, 화장실에서 확인한 몰골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왼쪽 소매가 찢어졌고, 복부도 날카로운 방패에 옷과 피부가 찢겨있었다. 게다가 뒷 목쪽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옷은 완전히 먼지 투성이였다. 


"오빠, 잠은 집에가서 주무셔야죠. 아깐 멀쩡하더니 언제 취하셨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고 왼손으로 이마를 짚자, "정신 차리셔요. 오늘 그만 드셔야겠네." 라고 말하며 잔에 남은 술을 비웠다. 빈 잔에는 녹다 말은 얼음 한 조각이 남아있었다. 난 여전히 왼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로 오른손으로 내 잔을 가져다 입에 털어넣었다. 타는 듯이 뜨거운 느낌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짜릿한 쾌감이 뇌를 자극했다. 내 잔에도 이젠 녹다남은 얼음 조각 하나가 남았다.


그가 고개를 내 귓가에 대고 "사실 난 오늘 좀 더 땡기는데" 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난 이마를 짚은 손을 떼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보려고 애썼지만, 맘처럼 잘 되진 않았다. 이번엔 그가 내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 눈을 마주쳤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살피며 입은 웃고 있었다. "응? 오빠 한 잔 더해도 돼?" 눈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린 그는 술병을 꺼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이번에도 정확히 삼분의 일을 채우고 얼음 세 알을 넣었다. "오빠는 여기 술 깨는 약을 드셔요." 라고 하더니 허리를 숙여 작은 플라스틱 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내밀었다.


그가 내민 병을 받아들고 잘 세워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바로 세우고 그의 눈을 보았다. 생글생글 눈웃음을 짓는 눈이 나를 마주 보았다. "바텐더 류민씨, 마지막으로 노 노래 하나 듣고 갑시.......다.", "네, 무슨 노래 들려드릴까요? 말씀하세요." 그는 무슨 곡인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다시 눈을 둥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음 그게 무슨 노래였더라. 분명 방금전까지만 해도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막상 말하려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있잖아 저기 사막에서 음 작은 가게에...... 어, 그 영화 주제곡이 진짜 유명한데." 여기까지 말하고 머리가 아파 양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다. 모르겠다. 그냥 담배 한 대 피우고 갈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줬다. 그리고 내가 물고 있던 담배는 자신의 입에 물고, 또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내 입에 물리며, 다시 불을 붙였다. 조용한 실내에 담배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나는 동시에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길게 내뿜은 연기는 서로 섞였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몇 발짝 걸어갔다. 난 그제서야 그가 건넨 술 깨는 음료를 마셨다. 음료를 다 마시고 내려놓을 때쯤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A desert road from vegas to nowhere

some place better than where you're been

A coffee machine that needs some fixing

In a little cafe just around the bend

I am calling you

Can't you hear me

I am calling you


눈을 감고 음악을 듣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그가 내 눈앞에 담배 연기를 훅 내뿜고 꽁초를 재떨이에 던졌다. 꽁초에는 빨갛게 립스틱 자국이 남아있었다. 내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자 그는 빨간 입술을 모아 내밀었다. 그리고 입으로 쪽 하고 소리를 냈다. 카드를 받아들고 몸을 돌려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가게 안 곳곳에 그려진 검은 고양이 실루엣을 본다.


그날 밤 꿈 속에 검은 고양이가 조용이 눈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이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이 빨간 아름다운 여성이 나타났다가 허스키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귓가에 "불법 시위 중이니 나가줄래?" 라고 물었다가, 가늘고 흰 손이 담배를 내 입에 물리고 불을 붙여줬고, 이어서 차분하고 딱딱한 말투의 여경이 방송차에서 "오빠, 한 잔 더 해도 되지?" 라고 방송했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빨간 입술이 입술을 모아 쪽 하고 소리를 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