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그것은 나의 부동항이다. 일 년 중 절반이 항구가 얼어붙어 출항하지 못하는 배의 심정을 아는가? 나는 모른다. 아마 외교사 가르치시는 전홍찬 교수님도 모르시겠지. 하여튼 답답했을 거다. 그래서 그 옛날 바닷길이 모두 얼어붙어 욕구불만의 세월을 겪었던 러시아 제국의 짜르는 약소민족을 두들겨 패면서 역사적 히스토리, 아니 히스테리를 부렸다고 한다. , 나는 히스테리가 없어서 다행이다. 더 옛날 창세기의 모세는 에굽에서 유민들을 탈출시키며 홍해를 갈랐다고 한다. 나는 스물여섯 먹고 꼴랑 일본에 가는 거라서, 그런 멋은 나지 않는다. 이건 조금 아쉽네. 폼 나게 살고 싶은 게 내 꿈인데.

 


물리학의 관성의 법칙은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때를 놓치면 늘 힘이 든다. 남들 갈 때 대학을 가고, 남들 입대할 때 따라가는 편이 여러모로 안전하며, 하다못해 중박은 치는 평탄한 선택지인 것이다. 사회적 시계는 늘 어설프게 철저하다. 어쩌겠는가. 나는 삼수를 했고, 군대를 미뤘다. 애초부터 직선도로가 없었기에 돌아갔다. 지나간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달리기가 빨라서 다행이다. 뭐 하여간, 이십대 초반의 두근거리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덜컥 여행권을 샀다면, 지금쯤 심리적 빙벽 같은 건 없었을 것인데, 기껏 현해탄 너머 일본 가면서 살짝 쿵 쫄리는 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역시 사람은 세월이 겹쳐질수록 보수적으로 변한다더니, 놓쳐버린 때가 사람을 더 큰 겁쟁이로 만든다. 일본 온천에서 묵은 때를 잔뜩 밀고 올 것이다. 



나는 여행이 초래하는 인생의 우발사태를 좋아한다. 두 번째 수능이 끝나고 부산에 놀러 갔고, 그것이 아예 부산에 터를 잡고 살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산대를 졸업했고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들어갔다. 틈틈이 여기저기를 싸고 경제적으로 다녀왔다. 강원도 산간 오지에서 차를 놓쳐 친구들과 덜덜 떨며 노숙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제주도가 부지런한 나의 한계였다. 제주는 정말 맛있고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나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철옹성처럼 굳게 지켰던 곳이었다. 할아버지 세대가 경주로, 어머니 세대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듯이, 그 시대의 한계치 같은 그런 곳이 있지 않는가. 나의 급발진은 여기서 멈춘 듯 했다. 그래서 속이 답답했다.

 


부산에 있으면서도 국경을 넘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이와 체중과 함께 덩달아 늘어가는 생활비와 소비습관의 맹렬한 공세에 방어전을 치르던 나는 번번이 공항 문턱에서 돌아서야 했다. 내가 진 장남의 등짐은 매번 공항 수하물의 무게 한도를 초과해버린 것이다. 없을 땐 없어서 못 갔고, 있을 땐 무서워서 못 갔다. ‘아 이 돈이면 6개월을 놀면서 학교 다닐 수 있는데.’ 유물론의 벽을 넘으면, 관념론의 덫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일본에 간다. 이곳에 가기 위해 대학원을 그냥 쉬어버렸다. 휴학하면 장학금 하나가 끊기는데, 그 출혈을 인생의 수업료라 생각해야지 별수 있나. 참고로 이건 깨알 틈새 자랑인데, 나는 지난 학기에 장학금을 다섯 개를 받아서 학교 한도를 초과했다. 하하하.

 


나는 분명 느리고 더디지만 성장하고 있다. 내 성장판은 아직도 많이 열려있다. 나는 이 주문을 내 마음속에 주입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때를 놓쳐 복잡해진 여권을 만들고, 항공권과 숙박을 구했다. 사실 하마터면 이것도 어영부영 기다리다 생활비로 다 까먹어 못 갈 뻔했다. 원래 돈이라는 게 두루마리 휴지 같아서, 처음엔 막 써도 닳지 않다가 어느 순간 심에 힘겹게 엉겨 붙은 빈약한 쪼가리만 보이기 마련이다. 지갑사정의 휴지심이 보이기 전에 남은 돈을 다 털어버렸다. 모조리 탕진하고 새로 출발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록 밴드의 이름처럼, 나는 부활할 것이다.

 


새내기 때 서른이 되기 전엔 꼭 이루고 싶은 숙원사업을 세 가지 정했더랬다. 하나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스물두 살에 고강도 육체노동으로 이뤘는데, 유지하지 못해 초기화의 아픔을 겪고 있다. 사진이나 찍어둘걸. 두 번째는 책을 내는 것이다. 일상 에세이 한 권, 또 고전에서 찾은 정직한 생각들을 추려낸 교양 인문학 도서 한 권을 쓰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자력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남자인생은 서른부터다. 뒤는 나도 모르겠다. 원래 사람은 자기의 하찮은 선택에 늘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며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다. 바다는 얼어도 하늘은 얼지 않는다. 4일 남았다. 굿바이.

 

 

-2017.12.07

@PrismMaker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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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unsun09 2017-12-07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쓴이의 심적 변화와 상황들이 잘 들어옵니다. 제 30년 넘는 독서이력??
으로 평한다는 오만속에 님 글이 좋아요.
더불어 일본여행 잘다녀오세요^^

프리즘메이커 2017-12-07 22:16   좋아요 1 | URL
제 글을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일본도 잘 다녀오겠습니다 ㅎㅎ

syo 2017-12-07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프메님의 글을 볼 수 없는 건가요? 아니겠죠?

다녀오시면 더 멋진 글들을 만날 수 있겠군요. 기대합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2-07 22:16   좋아요 0 | URL
잠깐 재충전 좀 하고 다시 필봉을 빛내보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