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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진짜창수다

 

   

프롤로그

 

총공격!”

내 눈앞에서 광선검들이 움직인다. 가느다란 빛을 내뿜고 있는 그 검들은 점점 더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 그 검 뒤로 검은 물체의 사람들이 스르륵 스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 저들은 대체 누구인가? 사람인가? 악마인가? 귀신인가? 사람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저들은 악마? 그들의 검들이 내 배와 다리와 팔을 찔러댄다. 온몸이 쑤시다. 그리고 점점 더 정신이 흐리멍텅해진다. 흐리멍텅해지는 머리. 그리고 가느다랗게 들리는 그들의 말소리.

이 녀석 죽이면 안 되잖아? 어떻게 하지?”

나는 왜 죽이면 안 되는 걸까?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머리 잡아 봐. 이 녀석 기억을 아예 없애면 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쳐 보지만 생각 속에서만 움직일 뿐, 꼼짝도 할 수 없다. 그들이 내 머리를 잡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뽑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엄청난 고통이 머리로 전해져 오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다. 머리카락을 뽑은 그 자리에 뭔가가 찔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절대 기억하지 못하겠지?”

이 녀석이 신이라면 모를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기억 못 하지.”

진짜 신이면 어쩌지? 그럼 우리 다 죽는데.”

진짜 신이 이렇게 쉽게 잡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리고 신이 인간으로 어떻게 태어나?”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신의 능력을 가졌을지도.”

신의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신이 아니면 이건 못 풀어. 신이 직접 풀어야 되는데 그러려면 이 녀석 죽어야 돼. 이 녀석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 안 죽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 그럼 안심해도 되겠네.”

서서히 그들의 말소리가 멀어져간다. 그들이 내게서 멀어져가는 건지 내 기억이 지워지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점점점 잠에 든다. 그들이 내 기억을 지우면 지울수록 나는 오히려 편안해져간다. 내 마음이 온통 평온해져 간다. 편안한 잠이 내게 다가온다.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꿈은 온통 행복한 꿈이다. 내 기억이 지워져가는 건지 내가 행복해져 가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생전 보지도 못한 어느 낯선 곳에서 잠을 깬다.

 

 

 

1. 낯선 곳에서 깨어나다

 

아주 오랫동안의 숙면을 취한 듯하다.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너무 편안한 잠. 몸을 뒤척여 본다. 물컹한 게 손에 잡힌다. 또한 아주 보드라운 느낌이 나를 조금씩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눈을 뜬다. 검은 머릿결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이 나고 있었고 내 손에는 그녀의 우유빛 살결이 그녀의 유두와 함께 겹쳐져 있었다. 이게 뭔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이 여자는 누구인지! 그녀는 깊은 숨을 쉬며, 일정한 간격으로 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하다. 윗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반대편에 또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는 또 누구인가? 갈색머리에 구릿빛 피부가 돋보였고, 그녀 역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이 보였다. 족히 네다섯 명은 누워 있을 만한 크고 푹신한 실크침대가 눈에 들어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녀의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숨을 더 크게 쉴 뿐, 이미 그 손길에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녀들이 알몸이듯, 나 역시 알몸이었다. 욕망의 크기가 나를 현실에서 도피시키는 듯 하고 그 욕망에 짓눌려 나는 그녀들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게슴츠레한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았을 뿐, 나의 몸에 그녀들의 몸을 맡겼다. 한참 동안을 나는 그 욕망에 이끌리다가 퍼뜩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 그녀들을 더듬던 내 손을 거두었다. 자꾸만 커져 가는 내 안의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비로소 해소해나가기 시작했다.

깊은 잠을 자려는 그녀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녀들은 그저 귀찮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고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들의 잠을 방해하는 걸 포기하고 화려하게 덧칠해져 있는 철제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방문 밖에는 어깨가 벌어진 한 건장한 사내가 나에게 인사를 한다.

주인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이라니. 나는 그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의 저택입니다. 주인님은 지난 밤에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셨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나실 것이니, 지금은 절대 안정을 취하시어야 합니다. 곧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우선,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러더니 그 건장한 사내는 손뼉을 쳐서, 누군가를 부른다.

주인님 깨어나셨으니, 요리를 준비하게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왜 주인님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인님, 기억이 나는 것을 돕기 위해 집을 한번 둘러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더니 그 사내는 또 손뼉을 두 번 치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이번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주인님께 집안 구경 좀 시켜드리게.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신 거 같으니, 설명을 많이 해드려야 할 걸세

,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주인님, 따라오시지요." 나는 그의 말대로 기억을 찾을 기대감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2. 진수성찬

 

요리가 준비되었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 한상 가득 차려졌다. 각종 해산물과 가재 요리, 그리고 육질이 부드러워 입에서 살살 녹는 소고기 요리까지. 이렇게 푸짐한 상을 먹어본 적이 있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요리들은 모두 처음 먹어 보는 맛 같았다.

요리를 먹는 것과,리를 대접하는 사람들과 나를 시중해 주는 사람들까지 모두 낯설다. 내가 요리를 하나씩 집어먹을 때마다 그들은 요리에 대한 설명까지도 빠짐없이 추가한다. 배부른 아침을 먹고 나니, 커피가 생각났다. 그래, 커피. 왜 커피가 생각이 났을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나는 하나씩 하나씩 음식과 디저트를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왜 커피가 생각났는지는 몰랐다. 그저, 단순한 습관 때문은 아니었을 것 같다. 내가 마시는 커피에도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그들에게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하자, 그들은 내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만들지는 않고 최고급 원두커피를 갖다 주었다. 나는 그냥 단맛 나는 보통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지만, 그들은 건강을 생각하시라면서, 원두커피에 약간의 시럽을 넣어줄 뿐이었다. 왜 먹는 것도 내 맘대로 못하냐고 화를 내었지만, 주인님은 주인님 혼자만 생각하시냐며, 우리도 주인님 없으면 모두 죽은 목숨이니 제발 건강 생각하시고 몸을 좀 돌보시라는 핀잔이 올 뿐이었다. 그들이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입맛에 맞지 않는 그 커피를 들이켜야만 했다. 나는 또 궁금해졌다. 왜 그들은 내가 마시고 싶은 커피를 못 마시게 하는 것인지.

식사를 마치고 정원에 나와 밝게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정원을 거닐다가, 털이 복스러워 보이는 개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 개는 이름이 뭔가요?”

떨리우스라고 합니다

떨리우스? 이름 한번 재밌네요

사람을 겁내하는 강아지이지요. 그래서 떨리우스라고 지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정말로 그 개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떨리우스. 왜 떨고 그래? 내가 무섭니?”

내가 그렇게 말을 걸자, 떨리우스는 나의 손등에 자신의 코를 갖다 대고는 냄새를 맡더니, 나의 손등을 이내 핥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을 부비며 나를 반가워했다.

? 이 개 주인이 원래 나였나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 집입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원래 주인님 것이었고, 떨리우스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당연히 주인님의 개입니다.

그렇다. 말이 되는 소리였다. 모든 기억을 잃어 낯설기만 한 이 집이 원래 내 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주인 대접을 받는 것이겠지. 나는 떨리우스를 안았다. 떨리우스는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고 나는 그를 안은 채로 조금 더 산책을 즐겼다. 조금 더 걸으니,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멀리 해안가가 보였다.

여기는 바닷가인가요?”

, 그렇습니다. 주인님.”

나는 바닷가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몇 시간이 순식간에 갈 줄은 몰랐다. 귀여운 떨리우스와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을 몇 번이고 돌아다녔다. 나는 지금 내가 무척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 이런 기분도 처음으로 느껴보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이 좋았지만, 한편에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놓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의 머리 한쪽을 계속 갉아먹고 있었다.

 

 

3. 두려움 속으로

 

철저히 감시해!”

저 쪽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를 주인님이라 모시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을 감시하라는 말인가? 저 바깥에서 들려오라는 <감시>라는 단어가 과연 나한테 하는 소리인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안에는 여전히 낮의 그 여자들이 잠에 취해 있었으며 넓디 넓은 정원과 하늘이 보이는 창, 넓고 넓은 해변. 이 곳은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의 장소란 말인가?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는 지금 만족스런 쾌락에 빠져 있는 듯 하고, 지금 이 순간이 즐겁긴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리는 저들이 결코 편안하지 않다는 것 뿐. 그들은 나를 통해 무언가 얻으려는 듯한데,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이용가치가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방 안에 엎드려 있는 저 여자들은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은 약에 취해 있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귀찮은 듯 했다. 이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어 나는 문 밖으로 다시 나가 보았다. 나가자마자, 또다시 집사인 듯한 사람이 나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주인님, 어디 가시렵니까?”

본능적으로, 그들에게서 위협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나는 저 넓고 넓은 밤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바깥 세상 구경 좀 하고 싶네요

, 주인님,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푹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이 세상을 구경시켜 드리지요. 주인님은 새로 태어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곳을 주인님의 파라다이스라고 부르지요. 아마, 다른 세상을 구경하시면 기분이 더 나아지실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주인님의 행복을 가리키는 시계가 되지요.”

진심으로 말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안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일까? 나는 지금 진짜 행복한 것일까? 쾌락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그저, 오늘은 생각하지 말자. 내일 아침이면 무언가 하나라도 윤곽이 잡히겠지. 나는 잠을 청했으나,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밤이 아주 깊었다. 바깥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린다. , 무슨 소리인가. 궁금증은 더 커져갔으나, 일부러 나가 보지는 않았다. 내가 잠든 것으로 알 터인데,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철저히 해!”

무슨 준비를 하란 말인가. 그리고 명령조로 말하는 저 사람은 내가 본 적이 없다. 그의 존재를 나에게 드러낸 적이 없다. 나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이 방안에도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나는 지금의 이 쾌락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나는 저들이 무섭다. 나의 호기심이, 내가 갖고 있는 이 자그마한 쾌락의 즐거움조차 누비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밤은 지나갔고 비로소 아침햇살이 밝아왔다. 나는 그들이 차려주는 맛있고 푸짐한 아침식사를 하고 비로소 세상구경을 하러 출발했다.

그리고 거기엔 내가 아직 보지 못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었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어디선가 분명 본 듯한, 그러나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나는 그를 대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나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것이었다. 아버지는아버지는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나는 그저 사진만으로 그를 보았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 얼굴이 기억 난 것이 나에겐 또 한 번 신기한 일이었고, 그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는 내가 아들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그저, 내게 주인님 하면서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현상이, 또한 이 세상이 더욱 더 궁금해질 뿐만 아니라, 더욱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의 아버지는 살아계셨던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내가 죽은 것인가? 나는 점점 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리고 있었다.

 

 

4.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운전을 하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마 사이에는 많이 찡그렸을 듯한 인상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내 옆에는 나를 주인님으로 모시는 건장한 사내가 그에게 갈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차는 길고 긴 바닷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검회색을 띤 바다. 바다가 원래 검회색이었던가? 나는 건장한 사내에게 물었다.

바다가 원래 이 색깔이었나요?”

바다 말입니까? 주인님? 기억 안 나십니까?”

원래 이 색깔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주인님이 기억에 없으셔서 그렇습니다. 이 바다는 색깔이 수시로 바뀌는 바다입니다.어느 날은 파란 색이고 어느 날은 빨간 색을 띄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법의 바다로 불리기도 합니다. 주인님 기억이 돌아오신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이 사람은 나를 감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정말 위해 주는 사람인가? 아직 내가 기억이 돌아와서 지금 나는 정말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음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내 기억이 돌아온다면 나는 정말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뭐 하나 불편한 것이 없다. 내가 깨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불편한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주인님. 바다를 건너면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을 건너면 마을이 나옵니다. 주인님. 오늘은 거기에서 식사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식사 예약을 해 두었습니다. 주인님만이 드실 수 있는 식당입니다. 이 모든 게 주인님의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큰 부자였단 말인가?

정말 정말 제가 그렇게 큰 부자인가요?”

주인님, 저희도 주인님의 기억이 빨리 돌아와서 주인님이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저희를 대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만, 너무 서두르지는 마십시오. 기억이란 게 그렇게 쉽게 빨리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바닷가를 지났습니다. 이제, 산을 지나칩니다. 바깥 풍경을 좀 돌아보시죠

저건 무슨 나무인가요?”

소나무입니다. 여기는 모두 소나무만 있습니다.”

소나무요?”

, 그것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 소나무는 어떤 나무인가요?”

주인님, 소나무는 생명력이 강한 나무입니다. 보시는 그대로 느끼시면 됩니다. 저 뾰족하게 생긴 것이 소나무의 잎으로 불리는데, 그 소나무 잎이 생명력을 강하게 합니다. 주인님처럼 소나무는 생명력이 강합니다.”

저처럼요?”

, 주인님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력이 강한 분입니다. 소나무처럼 생명력이 강하신 것입니다.”

차가 소나무로 이어진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양 길가에는 모두 소나무로만 이어져 있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주인님, 여기는 어디서나 화장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참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더니, 그 사내는 차를 세우게 하고는 바로 길가 옆에 텐트 같은 것을 치더니, 나를 불렀다.

이게 뭔가요?”

간이 화장실입니다. 항상 차 트렁크에 휴대하고 다닙니다. 여기서 볼일 보시면 됩니다.”

나는 급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고 급히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변기가 없이 단순히 칸막이만 막아놓고 일을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여기다가 일 처리 하나요?”

일단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나는 일단 급해서 그 사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오줌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어딘가로 증발했다. 이게 무엇인가? 여기는 사람 사는 세상인가? 내가 깨어난 저택의 화장실에서는 오줌이 증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길래 오줌이 증발해 버린단 말인가.

볼 일을 보고 다시 차에 탔다.

시원하십니까?”

, 그런데 왜 증발하나요?”

여기는 신선의 산입니다. 마을에 가면 화장실이 따로 구비되어 있지만, 이 산에서는 화장실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액체로 된 것은 모두 증발해 버립니다. 그런 곳입니다. 이 산의 신비함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산은 잘 오지 않습니다. 증발해 버리는 것이 무섭다고 합니다. 주인님은 이 산을 무서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주인님을 모시는 저희들 말고는 지나다니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5. 마을사람들

 

차는 이제 비로 마을로 들어섰다. 나무와 벽돌로 지어진 주택가가 드문드문 보인다. 길은 마을로 들어서서도 한참 동안을 지나가더니,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고층건물에 선다.

주인님, 다 왔습니다.”

이 창문들은 다 뭔가요?”

태양열을 이용한 창문입니다. 태양이 내리쬐면, 그 시간 동안, 이 건물은 태양열을 안으로 저장해 놓습니다. 그 열을 이용하여 난방도 하고 전기도 쓰는 겁니다. 에너지가 전혀 들지 않는 절약형 구조입니다.”

그의 설명은 명확했지만, 나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신선의 산과 태양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곳인데, 도무지 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답답해 미치겠어요.”

주인님. 지금은 조금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십시오. 천천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주인님이 누구신지, 주인님이 사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 사내의 말은 점점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인님, 올라가십시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여기는 몇 층이나 되죠? 마을에는 이런 곳이 없는데, 유일하게 높은 건물이네요?”

네 맞습니다. 마을에서 유일한 고층건물입니다. 44층입니다. 주인님을 모시게 될 곳도 44층입니다. 이곳에서 보시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이시니, 만족하실 겁니다.”

“44? 44층까지 걸어서 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주인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실 겁니다.”

, 엘리베이터. 그런 게 있었지. 기억나요.”

나는 그 사내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주인님, 총개라고 부르셨습니다. 전에 총개라고 하면 제가 언제나 주인님 곁에 있었습니다.”

총개요?”

, 주인님.”

총개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종입니다. 님자는 빼시고 총개라고만 부르시면 됩니다.”

, 알았어요. 총개님. 익숙해지면 총개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44층에 도착했다. 그 넓은 홀에 원탁 테이블이 달랑 하나. 그리고 창가를 보니, 내가 왔던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에는 갈지자로 길이 뻗어 있었고 형형색색의 마을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검회색이었던 바다가 푸른 바다로 변해 있는 것도 보였다.

식사를 대령하게.”

,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종업원인 듯한 사람에게 총개가 명령하고 있었다. 저 얼굴,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총개님. 어찌하여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나요?”

주인님, 곧 보시게 될 것입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십시오.”

뭔가를 감추듯, 총개는 얼른 말을 가로채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전사는 안 오나요?”

운전사는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할 것입니다.”

왜 같이 안 오나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 전용 식당입니다. 주인님만 식사하실 수 있습니다.”

총개님은 안 드시나요?”

저는 미리 먹습니다. 주인님의 시중을 들 때는 식사하지 않습니다.”

또 혼자 먹게 되는 밥이다. 점점 밥맛을 잃어가고 있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 어제랑은 완전히 다르네요?”

주인님, 기억 안 나십니까?”

, 어제 먹었던 것은 뭐였는지 대충 알겠는데 이건 도무지 뭔지?”

이것은 된장찌개이고, 이것은 김치전, 이것은 갈치구이, 이것은 탕수육이란 것입니다

총개는 하나하나 음식을 가리키면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김치고 이것은 깍두기, 이것은 깻잎이라는 것입니다. 주인님은 한국이란 곳에서 태어나셨으며 한국에서 난 음식을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한국이요? 아 제가 태어난 곳이 한국이군요. 그럼, 여기는 어딘가요? 여기는 한국이 아닌가요?”

주인님,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인님 스스로 기억해내지 않으면 주인님은 또 기억을 잃게 되실 것입니다. 주인님, 꼭 기억해내실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건 또. 알고 있으면서 말씀드릴 수가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물어보면 안 될 것만 같은 긴박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본다. 저쪽에서 아까의 그 종업원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것이 영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주인님, 어서 식사를

그런데, 이건 뭔가요? 색깔이?”

그것은 잡곡밥으로 주인님의 주식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나는 잡곡밥이라 불리는 것을 먹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그가 설명해준 된장찌개와 반찬들을 아주 맛있게 먹어치웠다.

주인님, 어떠십니까? 이 모든 게 주인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은 왜 이리 우울하게만 들리는 것일까.

내것이라구요? 맛있게 먹고 즐겁게 구경하고 하는데 왜 마음 한구석은 허전한 걸까요? 마을 사람들은 언제 보나요?”

총개가 잠시 고개를 숙여 딴 곳을 바라보다가, 몇 초 되지 않아 다시 나를 보며 대답했다. 나는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인님, 이제 마을 사람들을 만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1층에 모여서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주인님의 기업에서 주인님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 그들도 모두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은 허전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기나긴 시간이었다.

 

저기 온다

1층으로 내려간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지막하게 수근거렸으나, 그들의 말들이 내 귓가로 들려오고 있었다.

절대 거기에 대해선 얘기하면 안 되네. 그러면 큰일 나니까

알아. 절대. 우리를 위해서 하지 말아야 돼

그저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네, 알았지?’

걱정하지 마.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총개는 나를 마을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여러분, 우리 주인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비록 기억의 많은 부분을 잃으셔서 여러분을 기억하지는 못하시긴 하지만, 우리 주인님을 위해 박수 부탁드립니다.”

나는 당황해서 총개에게 물었다.

제가 박수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주인님. 지금은 그냥 묻지 말고 즐기세요.즐기다 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

더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맞아요. 우리의 주인님이세요.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는 주인님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러니, 박수 받을 만 합니다.”

그와 동시에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왔고, 길게 이어졌다.

, 마을분들이 몇 명이나 되죠?”

여기 오신 분은 각 마을의 대표로 100명입니다. 그리고, 각 마을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죠. 하지만, 주인님은 그 고장으로 가실 수가 없습니다.”

아니, 왜요?”

마을 사람들이 주인님의 수고하여 오시는 걸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약 주인님이 어느 마을은 가고 어느 마을은 가지 않는다면 섭섭해 할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인님은 즐겨야 하실 분이지, 고장을 방문하는 수고를 해야 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저는 여기를 벗어나면 안 되나요?”

주인님. 그편이 저희를 위하는 길입니다. 주인님이 편안하셔야 하고 저희로서는 주인님의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마을로 가시다가 사고라도 나신다면 저희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니, 저희를 위해서라도 마을로 나가시겠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여기에서 필요한 모든 걸 해드리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주인님이 살아있는 걸 확인하셔야겠다고 하셔서 이리로 부른 것입니다. 이분들과 만나는 날도 1년에 한번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법칙은 누가 정하는 건가요? 주인이 나라면서요? 그런데 왜 주인 맘대로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까? , 주인 맞아요?”

총개가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주인님. 거기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주인님인 것은 확실합니다. 주인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총개는 그러더니,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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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 두 리

 

 

 

 

1

 

- 네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물은?"

- 아버지입니다.

- 왜지?

- 말할 수 없습니다.

- 없는 이유는?

- 그것 역시 말할 수 없습니다.

- 그렇다면, 너의 죄는 무엇인가?

- 머리가 나쁘고 못 생긴 죄밖에 없습니다.

- , 그거 아주 큰 죄로군. 그래서 너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았나?

- 모르겠습니다.

- , 도대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 적어도, 제가 지옥에 와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지옥에 보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 이유를 몰라? 너의 죄는 머리가 나쁘고 못 생긴 죄야?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 모른다고 거짓말을 해?

- 그게 어떻게 죄가 됩니까?

- , 너는 보기보단 정직하군. 좋아! 이유를 설명해주지. 너는 일단 못 생겼기 때문에, 만인들이 너를 보는 데에 거부감을 느끼지. 그 흉악한 얼굴을 보며, 두려움도 느끼곤 했지.

- 하지만 그건, 당신이 나를 만들 때 그렇게 만들었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 어허,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너는 또 머리가 나빠서 네가 금방 뭘 했는지조차 까먹곤 했어. 그게 사람들한테 얼마나 피해를 주는지 아나?

- 그것 역시, 당신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 네가 어떤지, 너 스스로 판단을 해 보란 말이야.

- 저는 스스로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 그건 또 무슨 소린가?

- 저는 누군가의 판단에 의해 움직였고, 누군가의 판단에 의해 말을 했고, 누군가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 누군가란 누구지?

- 제 머리 속에 숨어 사는 바이러스입니다.

- 바이러스?

- , 바이러스의 판단에 의해 저는 움직여집니다.

- 좋아, 그럼 그 바이러스의 판단에 맡겨 보도록 하지. 너 스스로 그 바이러스에게 물어 봐. 너 스스로 너를 판단해도 좋은지.

- 안 된답니다.

- 왜 안 되지?

- 왜냐하면말할 수 없습니다.

- 여기는 지옥이야. 너는 심하게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후회하게 될 거다. 네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던 걸. 어허, 그렇게 떨 필요는 없어.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 오늘은 그만하고 내일 또 하기로 하지. 여봐라, 저 분을 바늘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들도록 하라.

 

그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는 일어선다. 여기서 넘어질 수는 없다. 나는 일어선다. 일어선다. 일어선다.

사람들이 그를 침대에 눕혔다. 온몸이 따가웠다. 끝가지 버텨야 한다. 찬란한 햇볕을 위해

 

2

 

- 너는 이제 곧 사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네 스스로 말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또 할 말이 남아 있다면 오늘 다 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너의 죄는 무엇인가?

-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곧 죽는다면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저는 지조를 지키다가 이 세상 하직하겠습니다.

- 너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로군. 너는 이미 한 번 죽은 목숨이다. 만약, 네가 또 죽는다면, 너는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한다. 그래도, 너는 말하지 않겠는가?

-

- 묻는 말에 대답 안 하나?

- 뭘 물었죠?

- 너는 지금 나한테까지 피해를 주고 있어. 한 말을 또 하게 만들고, 그렇게 생각 안 하나?

-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쉽게 얘기해 주시죠.

- 넌 역시 머리가 나빠서 대화가 안 통하는구나. 다시 한 번 묻겠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물은?

- 어머니입니다.

- 왜지?

- 모릅니다.

- 확실히 대답해! 말할 수 없는 거야, 정말 모르는 거야?

- 정말 모릅니다. 그냥 싫습니다.

- 그렇다면, 네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를 아나?

- 모르겠습니다.

- 다시 한 번 설명하겠다. 너는 머리가 나쁘고 못 생긴 죄로 여기에 왔다. 알겠나?

-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 머리가 나쁘고 못 생긴 잘못

- 그게 무슨 죄가 됩니까?

- 너는 머리가 나쁘니까 설명해줘도 몰라. 다시 한 번 묻겠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 저입니다.

- ? 너라구?

- , 저는 제 자신을 가장 존경합니다.

- 왜지? 그것도 설명할 수 없나?

- 아닙니다.

- 그럼, 그 이유는 아나?

- 압니다.

- 그럼, 그것 좀 설명해 줄 수 있나?

- , 있습니다.

- 그럼, 설명해보게

- 저는 제 자신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 글쎄, 왜 존경하냐니까?

- 저는 아버지처럼 세상물정을 똑바로 알지 못하고, 이것저것 간섭하지 않습니다. , 어머니처럼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 너는 지금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쓰고 있군. 그렇다면, 너 자신에 대해서 설명 좀 해 보게나?

- 더러운 한 세상 살아오면서, 저는 저를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어떠한 말을 하여도 제 넋두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한 넋두리는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저의 마음에 위선을 넣어줄 뿐입니다.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이대로 죽게 해 주십시오.

- 너는 그렇게 세상을 쉽게만 살려고 하는군. 나는 되도록 너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다. 그것이 또한 나의 임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너를 쉽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네가 죽을 때까지 나는 끝까지 너를 괴롭힐 것이다.

- ……

- 묻는 말에 대답하라! 너희 어머니는 무얼 하셨지?

- 막노동입니다.

- 너희 아버지는 무얼 하셨지?

- 사업을 하셨습니다.

- 납득이 안 가는군. 그럼, 가정 형편은 좋았나?

- 전 모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 네가 모른다고? 숨기려 들지 마! 나는 너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을 뿐이니까. 고통 받고 싶나?

- , 고통 받고 싶습니다!

- 그렇다면, 어서 대답해!

- 싫습니다.

- 왜지?

- 모르겠습니다.

- 왜 모르나?

- 저는 여전히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 바이러스 말인가?

- , 바이러스입니다. 아니,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 그럼, 누구지?

- 저 자신에 의해서입니다.

- 넌 로보토인가, 사람인가?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 보기보다 끈질기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지?

- ……

- 이젠, 침묵으로 일관하겠다는 자세군. 너는 침묵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군. 여봐라, 저놈을 한 달 동안 말 못하는 방에 가두도록 하여라.

 

 

3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웃는다. 그가 존재한 후 처음으로 그는 웃었다. 그가 어렸을 때는 울었다. 그가 조금 컸을 때, 그는 매일 화를 냈고, 그가 늙었을 때는 항상 화를 냈다.

그는 계약결혼을 했다. 아들을 낳아주면, 평생 먹고 살만한 돈을 준다는 계약이었다. 그는 그의 부인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아이를 낳은 건 의무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첫 아이를 아들로 낳았다. 그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가 아이를 바라보는 눈은 저주와 동정이었다. 뭐하러 태어났을까. 그 아이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오로지, 그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아이가 젖을 뗄 무렵, 그는 그녀와 이혼했다.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의 새어머니가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새어머니가 죽자, 그의 배다른 동생이 또다시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의 이복동생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구자였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도 못 낳는 병신. 그리고 그는 죽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식사를 했고, 아무 생각 없이 결혼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이혼을 했다. 지금쯤, 그의 아들이 사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은 그를 닮아서 사업을 모두 망칠 것이고, 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웃었다. 곧 아들도 그를 따라 올 것이다. 하하하.

그는 그의 새어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웃는다. 하하하. 그의 새어머니는 그를 구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머리가 나쁘고 못 생겼다는 이유로. 그가 그를 낳아준 어머니를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쩌면 아직도 살아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한 건, 아들이 병신이라는 것 때문이다. 아니, 병신은 아니었다. 다만, 머리가 나쁘고 못 생긴 것 밖에는. 하하하.

 

그는 또 생각한다. 그리고 웃는다. 그는 그의 아내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또 웃는다. 그의 아내는 미스코리아 출신이었다. 머리도 좋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녀를 구슬렸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그는 아버지 말에 복종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는 당장 살 길이 없었다. 그는 다시 생각한다. 나는 죽었는데, 어차피 죽을 목숨.

 

그는 그가 존재한 후,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는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 후회했고, 그의 뜻대로 살지 못한 걸, 후회했다. 그도 어릴 때는 희망이 있었다. 아침마다 거리를 쓸고 나면, 새록새록 솟아나는 기운 넘치는 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청소부란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차라리, 집에서 놀고먹어라. 아버지는 그렇게 호통을 쳤다. 그 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공부도 하지 않았고, 운동도 하지 않았다. 매일 술을 마셨다. 매일 여자와 놀았다.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되든 아버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만 잘 되면 그만이었고, 체면만 유지시키면 그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청소부 외에는 어떤 직업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 웃었다. 그는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꼈기에.

 

그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호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하지 못했다. 침묵의 방은 그만큼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다시 생각한다. 침묵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그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한다. 바로 그거다. 그는 그가 죽을 때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들, 그의 아들이었다. 그를 죽인 건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그가 죽기 전에 그의 이복동생도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되었지만,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복동생과 그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되었다. 그는 아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외삼촌이 저희 할아버지 회사를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할아버지의 재산을 지켜야 합니다. 할아버지와의 약속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의 아들과 할아버지와의 약속은 뻔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마라. 너를 믿는다.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만큼 치밀했고, 도덕성은 치밀한 만큼 무시되었다. 그는 웃었다. 그의 아들은 그를 닮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연극을 했었다. 마지막 순간, 그에게 약을 먹이는 순간, 그가 마신 건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다. 그는 기뻐서 웃었다. 그의 아들은 자기 뜻대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기뻐서 웃었다.

 

그는 침묵의 방에서 한 달 동안 웃기만 했다. 그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며

 

 

4

 

- 너를 지배하는 바이러스는 누구지?

- 저를 지배하는 바이러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이제야, 입을 여는군. 그래, 침묵의 고통이 얼마나 큰 가 이제 깨달았겠지?

- 그 고통은 크지 않습니다. 저는 한 달 동안 웃기만 했습니다.

- ,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저는 제 자신을 찾고 싶습니다.

- 그건 또 무슨 소리지?

-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 너는 지금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군.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니?

- 다시 살고 싶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이 세상에 가서 다시 하고 싶습니다.

- 다시 하고 싶은 일? 그게 무엇이지?

- 거리를 청소하는 일입니다.

- , 다시 태어날 수 없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너희 어머니는 무얼 하셨지?

- 사업을 하셨습니다.

- 아니, 무슨 소리야? 저번에는 막노동을 한다고 해 놓고

- 그것은 저를 낳아준 어머니였습니다.

- 이제야 고백을 하는군. 어떤 사업이었지?

-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었습니다.

- 아버진 어떤 사업을 했나?

- 전 모릅니다. 진짜로 어떤 사업을 했는지 전 모릅니다.

- 그래? 그렇담, 내가 가르쳐 주지.

- 알고 싶지 않습니다.

- 그래도, 알아야 돼. 너희 아버지는 마약 밀매를 했다.

- ……

- 놀라지도 않는군. 마찬가지로 너희 가족 모두는 마약과 관련이 되어있지. 이제 알겠나? 네 아들이 너를 죽인 이유를? 너를 낳아준 어머니가 이혼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너희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의 사업을 자꾸 말리자 이혼해 버렸고 그 후 그녀는 너희 아버지에 의해 살해되었지. 이제 알겠나? 너는 너를 찾아야 돼.

- 그렇담, 나는 누구죠?

-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너희 가족을 대표해서 이 지옥에 와 있는 것이고, 네가 너희 가족을 대표해 죗값을 치르는 것이지

- , 제가 죗값을 대신 받아야 합니까? 저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요?

- 왜냐하면, 너희 가족은 이미 구제받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야. 그들을 구제할 의향이 있나?

- 전혀 없습니다.

- 왜지?

- 그들은 저의 자아를 빼앗았고, 저를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구박했고, 저를 죽였습니다.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구제하고 싶지 않습니다.

- 너의 아들을 생각해 봤나? 너의 아들은 아직 살아서 마약밀매를 계속하고 있다. 그것을 생각해 봤나?

-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 그래도, 생각해야 돼!

- 왜죠? 이유가 뭐죠? 그런 건 뭐 하러 생각해야 되죠?

- 그건 너 자신의 문제다. 네 스스로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 무엇을 생각해 봐야 되죠?

- 더 이상 질문 따위는 하지 않겠다. 너 스스로 생각을 해 보란 말이야.

- 도대체, 무슨 생각을 말입니까?

- 너 스스로 생각을 해 보란 말이야.

- 무슨 생각을 말입니까?

 

그들의 말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고, 그의 생각도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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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안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1.

상수는 그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아주 쪼끄만 녀석들이었는데,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도롱뇽을 닮은 갈색얼굴인데, 귀는 또 개구리처럼 연두색이었다. 세 마리나 있었다. 그 녀석들이 상수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상수가 그들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상수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 녀석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 세 녀석은 다시 아까 바라보던 그곳을 바라보았다. 상수는 그 녀석들이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들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그 녀석들은 그 핸드폰만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고, 움직이지 않았다. 상수는 그들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상수는 조금씩 그들에게 다가가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그때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렸다. 띠리리리리리. 그러자, 그 세 녀석들은 서로에게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놀란 상수는 잠시 뒷걸음질을 쳐,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짧은 팔과 짧은 다리. 색깔은 파란색. 상수는 그제서야 그들의 전체 몸이 눈에 들어왔다. 기괴했다. 파란색과 연두색과 갈색의 기묘한 조화였다. 그들은 짧은 팔과 다리를 이용해 서로를 공격했다. 한 녀석이 다른 녀석에게 공격을 가하면, 또 다른 녀석이 그 공격을 가하고 있는 녀석을 공격하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공격의 방향이 앞으로 나란히 하는 것처럼 원으로 둘러서, 자신에게 공격을 가하는 녀석이 아니라, 다른 녀석을 공격하고 있는 녀석을 서로 공격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상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핸드폰은 한참을 그렇게 띠리리리리 울리다가 이내 꺼졌다. 그러자 그 녀석들도 싸우기를 멈췄다. 다시 그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상수는 다시 앞으로 다가가 보았다. 역시 그 녀석들은 상수를 한번 쳐다보긴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상수는 그 녀석들과 핸드폰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함부로 그들에게 끼어들기엔 아직 그녀석들이 어떤 녀석들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상수는 그들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자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 . 이번엔 문자가 온 것 같았다. 핸드폰은 계속 삑삑 울렸다. 그러자, 그 녀석들이 서로의 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마치 씨름을 하는 줄 알았는데, 한 녀석이 다른 녀셕의 꼭 껴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녀석이 그 녀석의 품에 안기면서 그들은 서로를 보듬어 주고 있었다. 상수는 이 희한한 광경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핸드폰의 삑삑 소리가 멈추자 그 녀석들은 또 다시 정지모드였다. 상수는 과감히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 녀석들은 여전히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핸드폰이 또 울릴까? 상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녀석의 옆에 자리를 잡아보았다.

조금 후, 또 다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카톡 소리 같았다. 그러자 그 녀석들이 상수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손들을 내밀어 상수가 앉아있는 곳의 무릎을 공격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낙 조그마한 손이라 그런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마치, 상수에게 장난을 거는 모양 같았다. 상수는 그들이 정말 자기를 공격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장난을 치려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상수는 손을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상수의 손위로 올라와 아예 자리를 잡았다. 워낙에 작은 녀석들이라 상수의 손 위로 세 녀석 모두가 올라와도 자리가 충분했다. 상수는 점점 더 그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상수의 손 위로 올라온 녀석들은 상수를 바라보면서 가만히 있었다. 상수는 그들을 손 위에 올려놓은 채로 핸드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손바닥 위의 그 녀셕들은 상수의 그런 행동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핸드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그 녀석들이 갑자기 손바닥 위에서 뛰면서 난리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안해 보였다. 상수는 손바닥을 핸드폰에서 먼 곳으로 옮겨보았다. 그러자 그 녀석들이 잠잠해졌다. 상수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액정화면이 커져있었다. 거기에는 부재중 전화 표시가 있었다. 상수는 문자버튼을 터치해 보았다. 그러자 공격! 공격! 공격! 이라는 문자가 수십통 와 있었다. 상수는 이게 뭔가 싶었다. 카톡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파고들기! 라는 카톡이 와 있었다. 누군가 장난치는 거 같았다. 이 녀석들을 데리고 장난을 치는 듯 했다.

상수는 분개했다. 아니, 이 녀석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 녀석들도 생명체인데, 이렇게 마구 가지고 놀아도 되는 거야? 이 녀석들도 감정이 있는데. 상수는 이 핸드폰의 주인이 이 녀석들의 정체를 알고 가지고 노는 것이라 짐작했다. 이 녀셕들이 핸드폰 문자와 소리에 반응하는 걸 보고, 가지고 노는 것이다. 상수는 이 핸드폰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해 보았다. 딱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보다 상수는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더 컸다.

상수가 찾은 방법은 이 녀석들과 핸드폰을 분리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핸드폰을 그대로 두고 이 녀석들을 데리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수는 그 녀석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로 그 건물의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녀석들에게서 생기가 사라졌다. 거의 죽어가려고 했다. 아니, 이게 아닌데. 녀석들은 상수의 손바닥 위에서 축 늘어져 있었으며 숨을 헐떡였다. 핸드폰 때문인지, 바깥의 찬 공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상수는 다시 건물 안으로 그 녀석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헐떡이던 그 녀석들은 다시 정신이 들었는지 다시 상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상수가 자신도 핸드폰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상수는 아까의 그 핸드폰으로 다가가 그 핸드폰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뭔가 난리를 칠 줄 알았던 그 조그만 녀석들은 핸드폰 소리가 나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상수는 다시 궁금증이 들었다. 이번에는 상수의 핸드폰으로 거기에 놓여진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봤다. 핸드폰 소리가 들렸지만, 역시 그 녀석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인가? 상수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어떤 조직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상수는 그들을 손바닥에서 내려놓았다. 그 녀석들은 상수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벼려 두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지? 상수는 그 녀석들을 놓아두고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리기를 기다려 보았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상수는 끈질기게 기다려 보았다.

드디어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리리리리. 그러자 이번에 그 녀석들은 핸드폰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핸드폰의 액정화면 속으로 뛰어들었고, 그 속으로 사라졌다. 상수는 무슨 일인가 싶어 핸드폰으로 다가갔다. 그 조그맣고 귀여운 괴물들은 사라졌고, 핸드폰의 액정은 깨져 있었다.

 

상수는 얼른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서 그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려 했다. 그런데 놀라운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핸드폰 배경 안에서 그 녀석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상수는 핸드폰의 앱들을 터치해 보았다. 작동하는 데에는 이상이 없었다. 상수는 배경화면이 있는 어플로 들어가 보았다. 거기에는 온통 그 녀석들만 있었다. 모든 배경화면 속에 그 녀석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 녀석들은 어디에서 온 녀석들일까. 이 녀석들은 무엇일까.

 

 

2.

상수는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학생활이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핸드폰 속의 그 녀석들이 함께 한다는 것. 상수는 핸드폰을 꺼내서 그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들이 무표정한 듯 하면서도 해맑은 표정으로 핸드폰 속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누군가 상수를 불렀다. 미희였다. 상수는 그 녀석들을 들킬까 싶어 얼른 핸드폰을 집어놓고 미희의 부름에 대답했다. 미희는 상수에게 오늘 조별과제가 있는데, 같이 할 생각 있느냐고 물었다. 상수는 특별하게 거절할 이유를 못 찾아서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과제가 뭐냐고, 아직 상수는 듣지도 못한 과제가 있느냐고 미희에게 물었다. 교수님 블로그에 오늘 내줄 숙제에 대해 미리 올라왔다고 했다. 블로그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다고 하자, 미희는 그건 학교 홈페이지게시판에 올라와 있다고 했다. 블로그 이웃추가는 자율이나, 블로그에 와서 교수님의 글들을 보면, 전반적인 학사일정이 잡혀 있을 거고, 과제에 대한 팁도 주니, 나름 편할 거라고 했다. 상수는 미희에게 블로그 주소 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미희가 상수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상수는 미희의 전화에 손을 대고 자신의 전화번호를 콕콕 눌러주었고, 미희는 상수에게 전화를 했다. 핸드폰 소리가 울렸다. 그 녀석들이 핸드폰으로 침입한 후 처음으로 울린 전화였다. 핸드폰 소리가 울리자 상수는 깜짝 놀랐다. 히히히히히히. 그 녀석들의 목소리 같았다. 상수는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미희의 전화번호가 찍힌 그 양 사이드로 그 녀석들이 웃는 모습이 보였다. 미희는 전화소리도 참 희한하다며 웃었다. 머쓱해진 상수는 얼른 미희의 전화가 오는 것을 끊고 미희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오늘 과제는 개구리와 도롱뇽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분석하는 거다. 팀은 최소 21, 최대 41조다. 2주의 기간을 줄 테니, 모두 빠짐없이 제출하도록. 오늘은 첫 개강 날이니, 수업을 간단히 마치고, 질문이 있는 학생은 지금부터 개인적으로 내게 오도록!”

어려운 과제다. 상수는 그저 미희와 어떻게 이 과제에 대해 얘기해야 할지 머리를 짜냈다. 미희가 개구리는 낮은 온도의 물에서는 자기가 죽어가는지도 모르고 서서히 죽어간다는 얘기를 했다. 도롱뇽도 그러냐고 상수가 묻자, 도롱뇽은 조금 민감해서 아마 조금만 물이 뜨거운 느낌이 들면 당장 도망칠 거라고도 말했다. 상수는 그러냐고 그럼 도롱뇽과 개구리의 차이점은 그걸로 해도 되냐고 묻자, 미희는 자료조사는 해봐야 아는 거 아니냐고 재차 물었다. 상수는 알았다고 하고, 자료조사는 각자 하는 거냐고 미희에게 묻자, 우선 각자 조사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부족한 자료는 같이 조사하자고 했다. 상수는 알았다고 하고 미희와 헤어졌다.

 

3.

상수는 핸드폰 속의 그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상수는 딱히 자료를 조사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미희가 다 해 오길 바랐다. 아니면, 같이 조사하기를 바랐다. 상수는 이 과목을 딱히 좋아서 신청한 것은 아니었다. 비교학. 과목 이름 자체가 모호했다. 학점을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점수를 잘 준다기에 그냥 신청한 것일 뿐이다. 비교학은 정해진 수업의 틀이 없다. 무엇을 비교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어떤 때는 부모님과 나를 비교해 보라기도 한단다. 또 어떤 날은 개와 고양이, 그리고 어떤 날은 곤충과 나를 비교해 보라기도 한다는 데, 그래서 상수는 비교적 쉽겠거니 생각했다. 남과의 비교라면 지겹게 해 오던 상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구리와 도롱뇽의 비교라. 딱히 흥미가 당가지 않았다. 그런데, 상수는 그때까지 잊고 있었던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핸드폰 속의 그 녀석들이다. 그 녀석들은 도롱뇽과 개구를 섞어놓은 듯한 형상. 어쩌면, 이 녀석들에게서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상수는 핸드폰 속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녀석들이 즐겁게 뛰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녀석들은 상수의 핸드폰 속에서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어떻게 이 녀석들이 핸드폰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가시지 않았지만, 상수는 그저 그 녀석들을 바라보는 게 즐거웠다. 상수가 그 녀석들을 바라보면, 그 녀석들은 늘 즐거워했고 상수는 그게 좋았다. 상수는 이번에도 오래도록 그 녀석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한번 걸어보았다.

너희들, 개구리와 도롱뇽의 차이점을 아니?”

녀석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대화가 되네? 상수는 이 녀석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 녀석들에게 얻을 거라곤 없는 듯 했다. 상수는 그 녀석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 또 다시 물어 보았다.

너희들, 내 말을 알아들어?”

그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나 그 녀석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거나 저을 뿐. 상수는 궁금했다. 이 녀석들이 과여 말을 할 수 있는지. 상수는 또 다시 물었다.

너희들, 말은 할 줄 아니?”

그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상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그 녀석들에게 물었다. 그 녀석들이 아버버버버 하면서 뭔가를 말하려는 목소리가 핸드폰의 스피커 소리로 들려왔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말은 못하는구나. 그것이 말인 줄 아는구나. 하지만, 조금 후에, 핸드폰의 화면에서 풍선모양이 그려지면서 그 안에 글자가 들어있었다.

우리는 말로는 표현 못하지만, 말은 알아듣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구. 우리는 너랑 있으면서 말을 다 습득했어. 이 이상한 거 속에 들어와서 글자라는 것도 다 배웠어. 우리는 네가 우리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것도 알아. 우리는 외계에서 온 사람이 아니야. 우리는 사람이 만든 존재야. 그래서, 우리는우리는

상수는 깜짝 놀랐다. 이 녀석들이 글자를 안다는 것에 놀랐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데에 대해서도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그럴까? 상수는 그것이 더 궁금했다. 이들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상수는 더 물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

그러나 그 녀석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화면 속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 어디로 갔지? 그때 갑자기 미희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미희의 손 안에는 작고 귀여운 그 녀석들이 얌전히 서 있었다. 상수야 상수야,를 연발 외치며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은 놀랐다기보다는 무척 흥미가 당긴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상수가 당황했다.

상수야, 너 나한테 전화했어? 네가 나한테 전화오는 걸 받았는데, 이 녀셕들이 튀어나왔어.”

, 내가 전화한 게 아니라

, 신기하다. 이 녀석들은 어디서 나온 녀석들이야?”

글쎄, 어디서 나왔을까?”

상수는 미희에게 그간의 사정들을 자세히 미희에게 설명했다. 미희는 점점 더 흥미가 당긴다는 듯이, 상수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들이 너의 핸드폰 화면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거란 말이지?”

그럼, 원래 그 핸드폰은 어디에 있는데?”

집에 그냥 뒀어. 혹시 몰라서

그럼 거기에 가 보자. 뭔가 비밀이 숨어 있을지 모르잖아.”

미희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런데 비밀을 발견하는게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상수는 미희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냥, 이 녀석들고 이렇게 어울리는 걸로 만족하면 안 돼? 꼭 비밀을 파헤쳐야 돼?”

궁금하지 않아? 이 녀석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만들었는지?”

그 녀석들은 누군가에 의해 분명 만들어졌겠지. 그런데 지금은 나의 친구가 되었어. 나는 이 녀석들하고 친구가 되어서 좋았어. 그런데 그 녀석들을 만든 사람을 찾아내서 뭐하려고? 비밀을 밝힌다 한들, 그게 이 녀석들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데?”

미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 조그맣고 귀여운 괴물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상수의 말에 수긍을 하는 건지, 아니면, 반발을 하려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저, 상수는 이 작고 귀여운 괴물들이 자기에게로 다시 와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녀석들은 미희의 손 안에서 눈웃음을 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장난을 걸고 있을 뿐이었다. 어딘가로 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또 다시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려는 걸까. 미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미희가 이번에는 모르는 번호라며, 받지 않으려고 하자, 그 녀석들이 미희의 핸드폰을 그 작은 손으로 가리켰다. 얼른 받으라고 재촉을 하는 것 같았다. 미희는 그 녀석들의 강요에 못 이겨 핸드폰의 받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그 녀석들이 또 핸드폰 속으로 들어갔다. 미희가 깜짝 놀라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상수도 깜짝 놀라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미희의 핸드폰을 보았으나 그 인에도 그 녀셕들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있던 핸드폰, 거기에 가 봐야 할 거 같아!”

미희가 상수에게 재촉했다. 상수도 이번에는 그럴 수밖에 없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미희와 상수는 상수의 집으로 갔다. 핸드폰 속에, 혹은 핸드폰이 있는 장소에 그 녀석들이 있기를 바라면서.

 

4.

그 녀석들은 상수의 방에 없었다. 깨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지만, 거기에도 그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미희는 깨진 핸드폰 화면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미희가 뭔가를 발견한 듯 했다.

이 밑에 좀 봐, 뭐라고 써 있어.”

상수는 한번도 핸드폰을 자세히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핸드폰을 습득하신 분은 02-1234-1234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충분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상수는 반대했지만, 미희는 이미 핸드폰에 손이 가 있었다. 핸드폰의 띠리리릭.누군가 받는 소리. 미희는 핸드폰을 습득해서 연락드린다고 건너편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넸다. 상수는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미희가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미희가 곧 가자, 고 말했다.

어디로?”

오래, 자세한 건 와서 얘기하자는데.”

꼭 가야 돼?”

그 녀석들이 있을지 모르잖아.”

상수는 미희와 함께 전화 속의 사람이 존재하는 조그마한 까페로 갔다. 거기에는, 40대 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있었다.

카페 운영하시나요?”

미희가 발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운영은 하지만, 장사는 잘 안 되지요. 그래도 단골 몇 분이 계시니까, 그분들 덕에 먹고는 살아요.”

, 여기 아저씨 핸드폰이요.”

감사합니다.”

액정 깨졌는데, 괜찮아요?”

흔히 있는 일이죠. 금방 고쳐요.”

미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녀셕들은 보이지 않았다. 40대 중반의 아저씨는 핸드폰을 들고 들어가더니, 곧 새 핸드폰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두 분이 오셨으니, 두 개를 준비했습니다.”

,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상수가 잠시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40대 중반의 아저씨는 개통까지는 못 드리지만, 어느 통신사에서 쓰든 쓸모가 있을 거라며, 기존의 핸드폰 유심칩을 옮겨서 심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면서, 아주 좋은 핸드폰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직접 만드신 건가요?”

미희가 물었다.

, 맞아요. 직접 만들었습니다.”

기술이 뛰어나시네요?”

제가 핸드폰 제조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제품의 모든 기술을 다 섭렵했죠.”

그러시구나.”

미희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전히 그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오셨네요. 제가 바쁠 것 같아서 오늘은 이만. 차 드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세요. 제가 대접해 드리지요. 핸드폰 찾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미희와 상수는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하면서, 카페를 나왔다.

 

가만 있어봐, 이 녀석들 이 안에 들어있을지도 몰라. 핸드폰 켜보자.”

미희가 핸드폰을 켰으나, 켜지지 않았다. 배터리가 부족한가 보다.

상수야, 네것도 한번 켜봐.”

안 켜지는데?”

유심칩이 없어서 그러나? 아님, 배터리?”

잠깐, 아 저기가 좋겠다. 저 카페 들어가서 배터리 충전 좀!”

미희와 상수가 카페에 들러서 두 개의 핸드폰 배터리를 모두 충전해 보았고, 유심칩도 갈아서 껴보았다. 그러나 핸드폰은 켜지지 않았다.

, 안 되겠다. 아저씨한테 다시 가보자.”

상수는 별 말없이 미희의 뒤를 따랐다.

다시 간 카페에는 아까와는 달리,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그 녀석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마시고 있는 찻잔에 커피잔에, 그 녀석들의 그림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그림이었다는 건가?

40대 중반의 아까 그 아저씨가 다시 미희와 상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미희는 아저씨에게 성급하게 말했다.

아저씨, 핸드폰이 안 켜져서요.”

아참, 깜빡했네요. 이 스티커 붙여야 켜져요. 특수 배터리가 연결되어 있죠.”

그 조그맣고 귀여운 녀석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스티커였다.

아저씨, 이 녀석들

제가 개발한 캐릭터에요. 이 녀석들이 실제로 살아서 뛰어다닌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죠. 그리고 삶에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래서 이 캐릭터를 제가 대접하는 모든 컵과 받침에 새겨넣었어요. 그리고, 특수배터리도 이 녀석들의 캐릭터를 개발하면서 개발할 수 있었구요. 마음에 드시면 좋겠는데요! , 핸드폰 켜시면 배경화면에도 그 녀석들이 있을 겁니다. 마음에 드시면 얼마든지 복사해서 나눠주셔도 돼요. 저는 커피와 차를 파는 사람이지, 그림을 파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상수의 마음은 무거웠다. 그러나 미희는 오히려 밝아보였다. 그 녀석들이 진짜로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는 느낌에 상수는 자신이 지금까지 본 것이 헛것일 뿐이었다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미희는 상수의 표정을 보더니, 왜 그러냐고 뭐가 문제냐고 물었다. 상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미희에게 얘기했다.

사실, 우리가 보게 되는 모든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사실은 개구리로 알고 있는 게 사실은 도롱뇽이었고, 도롱뇽이라고 알고 있던 게 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잖아. 진짜 내가 알고 있는 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잖아.”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상수는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미희가 아저씨가 준 핸드폰에 스티커를 붙이고 전원을 켰다.

, 진짜 켜진다. 신기해라.”

미희가 감탄하면서 핸드폰의 전원을 키자, 그 조그맣고 귀여운 녀석들이 배경화면을 설정되어 있었다. 미희는 미적거리고 있는 상수의 핸드폰을 빼앗아, 거기에 스티커를 붙이고 전원을 켰다. 핸드폰이 켜졌다.

상수야, 이것 봐!”

?”

핸드폰에 있는 배경화면에서 그 녀석들이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

이거, 움직이는 그림인가 봐!”

상수는 미희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과 자신의 것을 비교해 보았다. 둘 다 그 녀석들이 있었고, 그 녀석들이 신나게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 상수는 무심코 그 녀석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너희들, 내 말 알아들어?”

그러자 그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희는 상수를 쳐다보며, 약간의 미소를 띄었다.

, 신기해라! 이 녀석들, 진짜로 살아 있나 봐.”

상수와 미희는 이 녀석들이 있는 화면을 계속 바라보았고, 그 녀석들과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그 녀석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은 고개를 가로젓거나, 아니면 말풍선으로 대답을 했다. 상수는 이 순간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랐고, 미희는 이 상황을 보면서 계속해서 웃었다. 너무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4.

상수와 미희는 결국 교수님께서 내주신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교수님께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미희가 대답했다.

저희들은 과제 대신 더 소중한 걸 얻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얘네들이요!”

그러면서 미희가 핸드폰에 있는 그 녀석들의 괴물사진을 교수님께 보인다.

그 녀석들은 어디서 났나?”

핸드폰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어서, 주인을 찾아줬는데, 그 주인이 찾아줘서 고맙다며 이걸 주셨어요.”

핸드폰 주인은 뭐하는 사람인데?”

카페 주인이요.”

그래, 거기가 어딘가?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자네 둘에게 A플러스를 주지. 하지만, 거짓말이라면, 자네들은 F일세.”

, 수업 끝나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미희가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자신들도 같이 가보고 싶다며 아우성을 친다.

좋아, 좋아!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내고, 지금 다 같이 미희양이 말한 그곳을 방문하도록 한다. 안내하도록!”

학생들을 모두 데리고, 미희는 그 카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걸어서 1시간은 걸리는 거리였지만, 아이들은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 괴물사진이 신기했었나 보다.

저기에요. 저기 보여요! 근데, 차는 교수님께서 사 주시는 거죠?”
미희가 애교를 떨었다.

좋다. 미희양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사마. 하지만, 거짓이라면 사지 않겠다.”

미희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면서 가게 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카페에서 서빙하고 있는 아가씨가 있었다.

혹시, 여기 사장님께서는 지금 자리를 비우신 건가요?”

, 그분이요. 얼마 전에 떠나셨습니다.”

, 어디로요?”

자기가 여기서 할 일은 더 이상 없다면서, 이 가게 저한테 넘기시고 그냥 어디로 가신단 말씀도 없이 떠나셨어요. 저보고 이 카페 운영하면서 돈 좀 모아놓으면, 나중에 돈 떨어져서 찾아오면 약간만 주면 된다 하시고는, 막무가내로 맡기고 떠나셨어요

, 그럼 사장님은 그 아저씨랑 관계가?”

, 여기서 가끔 일 도와주던 알바생이에요.”

그럼, 혹시 이 녀석들의 정체를 아세요?”

미희는 핸드폰 배경화면 속에 있는 그 녀석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 이 녀석들! 여기 있었구나.”

그 아가씨는 드디어 발견했다는 듯이,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혹시, 찾고 있었나요?”

, 이 녀석들은 어디든 가죠. 그래서, 통제가 불가해요. 어느 날은, 어떤 할아버지가 와서는 이 녀석들이 왜 내 핸드폰 속에 들어 있느냐는 거에요. 그래서, 할아버지, 이 녀석들은 자기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요, 했더니,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시면서 그러는 거에요. 내 살다가 별 녀석들을 다 봤네. 그 녀석들은 그 할아버지 곁에 오래도록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또 다른 곳을 찾기 시작했죠.”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교수님께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이 살아 있는 녀석들인가요?”

사장님께서는 그냥 그렸을 뿐이라고 해서 잘 모르세요. 그런데 그 그림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건, 조금 역사가 되었죠. 어느 날, 어떤 꼬맹이가 오더니, ‘엄마, 얘네 나랑 말을 해하고부터였어요. 진짜로 그 그림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장님만 그 그림을 쳐다보면, 얼음 상태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사장님은 전혀 모르시죠. 그 그림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걸요. 그러더니, 제 핸드폰 속에서도 며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사장님께 저 여기서 알바 하고 싶다고 얘기했죠.”

잠깐만요, 그럼 아가씨께서는 그냥 여기에서 손님으로 오셨던 거였어요?”

미희가 적극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 처음엔 그냥 손님이었죠. 그런데, 이 녀석들 덕분에 알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러라고 하신 거에요.”

혹시 그럼 그 깨진 핸드폰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 사장님께서 그거 가지고 가셨어요. 그거 자주 깨져요. 이 녀석들이 핸드폰 너머의 공간으로 이동할 때, 어쩌다 한번씩 깨지는 데요. 그건 이 녀석들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을 의미하는 거에요. 사장님께서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깨진 핸드폰을 가지고 오시는 분들에게는 자신이 만든 핸드폰을 내어주고, 그리고 그 깨진 핸드폰은 수리해 놓곤 하시죠.”

혹시 이 녀석들에 대해서 사장님께 얘기해 보셨어요?”

, 사장님께서는 그게 진짜 사실이라면, 내가 할 일은 이걸 매번 고쳐놓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가 보지 못했으니까 모르겠다. 그냥, 나는 그림을 더 열심히 그리고 싶고, 발명을 더 열심히 하고 싶다, 라고만 말씀하셨어요.”

상수는 사장님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왜 사라졌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상수의 그 생각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미희는 질문을 멈추고 교수님께 이제 우리 말이 사실인 걸 알았으니, 차를 사라고 했다. 그리고 에이플러스도! 라고도. 교수님께서 껄껄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학생들은 신나서 저마다 먹고 싶은 차를 주문했다. 그날, 40여명의 학생들에게 차를 판 아가씨도 덩달아 신이 났다. 상수도 카모마일을 하나 주문했다. 오늘따라, 왠지 그 차가 쓰게 느껴졌다. 여전히 상수의 마음은 무거웠다.

상수는 그 아가씨에게 한가지 부탁을 했다.

혹시, 그 아저씨 소식 들리거든 연락 좀 해주실 수 있나요?”

, 그러세요. 어려운 일 아니니까요. 연락처 주세요.”

상수는 아가씨에게 연락처를 남겼다. 그리고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카페의 이름이 뭔지 모른다는 것이다.

혹시, 이 카페 이름이요?”

, 도롱뇽과 개구리요.”

카페이름이 도롱뇽과 개구리. 사람들이 과연 이름을 보고 이 카페를 찾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상수는 카페 밖으로 나가 보았다. 카페 간판에도 그 녀석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카페 이름은 써 있지 않았다. 미희가 그런 상수를 보더니,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래?”

카페간판에 이름도 없고 그림만 그려져 있는데, 아가씨는 카페이름이 도롱뇽과 개구리라는데

그럼, 물어보면 되지

미희는 얼른 아가씨에게 카페 간판에 이름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카페 간판에는 없고, 쿠폰에 있다고 했다.

쿠폰? 우린 왜 쿠폰 안 줘?”

교수님께서 웃으면서 따졌다.

, 이미 쿠폰값 반영해서 할인해 드렸습니다.”

아가씨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미희가 쿠폰 하나만 보여달라고 했다. 거기에 도롱뇽과 개구리라고 진짜로 써 있었고, 역시 그 녀석들의 그림이 있었다. 상수는 그 쿠폰을 보았다. 어딜 가나 그 녀석들이 있었고, 어딜 가나 그 녀석들만 눈에 들어왔다. 상수는 그 녀석들에게 너무 깊이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5.

교수님께서는 약속대로 상수와 미희에게 에이플러스를 주었다. 같은 청강학생들도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덕분에 신기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에이플러스를 준 이유는 핸드폰 주인을 찾아준 데 대해서 기특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 놀라운 체험을 다같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그 녀석들이 살아서 뛰노는 것은 보지 못하지만, 교수님의 핸드폰 배경화면에도 그 녀석들의 그림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 녀석들이 교수님의 핸드폰에서도 뛰어노는 걸 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 배경화면을 깔아놓았다. 그러다가 그 녀석들이 보고 싶을 때는 미희를 찾아가서 그 화면을 보고 싶다고 하면, 미희는 언제든지 그 녀석들이 놀고 있는 걸 보여주었다. 그러나, 상수는 조금 달랐다. 상수는 다른 학생들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상수에게 말을 잘 붙이지 않았다. 상수는 그 녀석들을 잘 보지도 않았다. 왜 이 녀석들은 미희와 나의 핸드폰에 둘 다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의문을 풀 숙제는 사장님게 있을 것만 같았다. 상수는 아가씨에게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가씨에게 연락이 온 것은 학기가 끝날 때 즈음이었다. 이제, 비교학 과목은 기말고사만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교수님께서는 기말고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체험한 것들,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까지 다루던 주제들을 수필 형식으로 쓰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니, 미리 공부할 필요도, 미리 써올 필요도 없었다. 그날 와서, 즉석에서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체험한 것을 쓰는 것이 비교학에서 가장 중요한 자신과의 비교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험이 있기 전날, 상수는 전화를 받았다. 아가씨는 아저씨가, 내일 오전 즈음에 잠시 들를 것이라고 했다. 아저씨가 보고 싶다면, 그때 오시면 될 것이라고 했다. 상수는 교수님께, 중요한 일이 생겨서 시험은 못 볼 것 같다고, 다음에 다시 수강해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했다. 교수님께서, 그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 교수님은 자신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곳에서 상수의 시험을 치를 것이라고 했다. 학생들 시험은 조교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했다. 상수는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그러겠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상수는 도롱뇽과 개구리 카페로 갔다. 아가씨가 웃으며 인사했다.

사장님, 곧 오실 거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교수님꼐서 상수와 차와 자신의 차를 시켜주었다. 그리고 아가씨한테 쿠폰을 달라고 했다. 아가씨는 웃으면서 쿠폰을 건네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교수님과 상수 외에는 없었다.

30여분 쯤 기다렸을까, 사장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이 있는 걸 보더니, 깜짝 놀랐나 보다. 그리고, 상수임을 알아보았다.

,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이분은 누구?”

저희 교수님이세요

, 안녕하세요. 지금은 사장이 아니지만, 이전에 이 집 주인이었던 사람입니다.”

, 알고 있습니다. 오신다는 소식 듣고 왔습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제가 돈이 좀 떨어져서 돈 받으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카운터로 가더니, 아가씨에게 얼마 정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얼마 필요하신지 말씀하시면 그만큼 드릴 수 있어요.”

돈 많이 벌었나 보네. 우선, 1000만원.”

가능해요.”

현금으로?”

아니요. 계좌이체요.”

, 고마워.”

그러더니, 곧 가려고 서두르는 모양이었다.

, 사장님, 저분들, 아까부터 기다리셨는데요.”

나를?”

.”

상수가 있는 테이블로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다가왔다.

사장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는데요, 상수가.”

교수님이 대신 이야기했다.

어떤?”

상수가 물어보기 시작했다.

개구리와 도롱뇽의 존재를 아세요?”

그야, 내 그림이지요그 둘을 절묘하게 조합한.”

아니, 살아 있는 거요.”

40대 중반의 아저씨, 사장님은 상수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이내 말을 꺼냈다.

때로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나을 때가 있어요. 그랬을 때, 모든 존재는 확장을 하지요. 때로는 하나가 둘이 될 때도 있고, 둘이 셋이 될 때도 있어요. 내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해 버리고 나면, 그들은 숨기 바쁘지. 내가 누군가의 위에 서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럴 필요가 있지. 그래서 삶이란 게 힘든 거라요. 교수님께서는 잘 아시겠네요.”

교수님께서 껄껄 웃었다. 교수님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걸 상수는 그때 느꼈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학생.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내 번호 알지요?”

상수는 잠시 사장님이 무슨 얘기를 하나 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처음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 그 전화번호가?”

액정이 깨진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지요.”

상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있었다. 사장님은 곧 다시 떠났다. 교수님은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상수는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교수님께서 지금부터 시험을 치르곘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학교가 난리가 났다. 자기 핸드폰에서도 그 녀석들이 뛰어놀고 있다며, 기뻐하고 있는 녀석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희가 상수에게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지?”

사장님 만났어.”

그랬었구나.”

미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때, 범용이가 상수에게 다가와서 애기했다.

상수야, 고맙다.”

? 뭐가?”

네 덕분에 희망을 찾았어.”

내가 뭘 했는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잖아.”

그러면서, 범용이는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거기에서 그 녀석들이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

난 한 게 없는데?”

교수님께서 이야기했어. 그 카페 사장님한테 가서 다른 학생들도 다 이 녀석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정말, 고마워.”

아니,

범용이가 그런 말을 하고 가더니, 또 다른 학생이 와서 말을 건다.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렇게 몇 번의 인사를 받았는지 모른다. 미희는 그런 상수를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상수야.”

?”

고마워.”

뭐가?”

그냥.”

미희는 그냥 웃더니, 그 말만 하고 저 멀리 공을 차고 뛰어다니는 학생들 곁으로 다가가 자신도 축구할 수 있다면서 끼워달라고 말했다. 미희는 놀랍도록 축구를 잘했다. 상수는 그런 미희를 한참 동안 그냥 지켜보았다.

 

 

6.

10년 후, 상수는 여전히 그 녀석들의 배경이 있는 핸드폰을 쓰고 있다. 어쩌면, 이 핸드폰은 영원히 고장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수는 굳이 핸드폰을 바꾸어야 할 이유를 못 느꼈다. 그 녀석들은 여전히 핸드폰 속에서 뛰어놀았지만, 거기엔 10년 전에 비해 하나 바뀐 게 있었다. 녀석들은 미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걸 좋아했다. 녀석들이 미희의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미희에게서 전화가 오곤 했다. 이번에도 왔다.

, 어디야?”

이제 퇴근해.”

, 나도!”

집으로 갈 거야?”

아니, 우리 어디 가서 맛있는 거 보고 영화도 보고 가자. 불금이잖아.”

어디서 볼까?”

미희가 상수에게 장소를 주소를 보내겠다고 했다. 상수는 미희가 알려준 주소로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주소가 호텔연회장이다. 호텔 연회장? 무슨 일일까.

상수가 도착하자, 미희가 나와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무슨 날인데?”

그 녀석들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준 날.”

그런 날이 뭐야?”

에이 바보, 네가 비교학 기말고사 시험 본 다음 날.”

, 오늘이?”

그래서 10주년 기념으로 모두 너 보고 싶다고 해서.”

근데 그렇게 말하면 되지, 왜 영화는 보자고?”

상수가 툴툴댔다.

그러면 너 안 올까 봐서.”

상수는 기쁜 건지, 부담스러운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친구들이 자신을 보러 온다는데 싫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연회장에는 이미 동창생들이 와 있었다.

반가워, 상수야! 우리 모두 기다리고 있었어!”

상수는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는 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 상수에게 핸드폰을 들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상수는 핸드폰의 앞쪽을 앞으로 향하게 하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동창생들 모두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상수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핸드폰 속에 그 녀석들이 있었고, 모두 똑같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미희도 상수의 옆에서 핸드폰을 손에 들고 손을 흔들었다. 미희의 핸드폰 속에는 상수의 사진이 있는 것만 다를 뿐, 모두 그 녀석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핸드폰 속에 각자에게 의미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녀석들은 그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흔드는 그 녀석들이 상수의 눈에 들어왔다. 상수는 웃었다. 어쩌면, 그 웃음은 친구들이 상수에게서 볼 수 있었던 첫 번째 웃음이었을 것이다. 상수가 웃는 것을 본, 친구들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혔다. 미희의 눈도 조금씩 젖어들었다. 상수는 그 눈물의 의미를 몰랐으나, 지금 이 순간, 웃음을 거두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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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인 ( 外 人 )

 

 

 

 

프 롤 로 그

 

"접근 암호 x208. 살인 목표물 여우 팔찌. 수신 여우 꼬리. 발신 여우 목걸

.”

통화는 조용하고 간단했다.

'찰칵'

'찰칵'

 

1

"날씨가 많이 추워졌군.”

외투깃을 여미며 들어오는 서장의 굵은 목소리가 비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 서장님. 오늘은 유난히도 춥죠?”

형식적인 대화가 몇 차례 오고 갔을 뿐, 이내, 오후의 침묵은 싸늘한 날씨만큼이나 그들을 에워쌌다. 한참 후 서장은, 서랍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들고 그 중 한 장을 골라 이 형사에게 내밀었다.

"자네, 이 여자 아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몽타쥬. 그래, 그것은 사진이라기보다는 몽타쥬에 가까웠다. 사진을 보는 이형사의 눈빛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서장은 그런 그의 눈빛을 지우기라도 하듯, 사진을 낚아채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거물급 사기꾼인데, 아주 특이하고 영리해서 좀처럼 덜미를 잡기가 힘들다네. 그녀의 주요 목표물은 다른 사기꾼인데, 바로 그 여자의 그런 사기행각이 우리를 골치 아프게 만든다네. 그녀가 사기를 치는 사기꾼을 우리가 찾아내야만, 그녀의 덜미를 잡을 수 있는데 말이야.”

전화벨이 울렸다. 서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그래? 곧 보내겠네.”

통화는 간단했고, 서장은 곧 이 형사를 향해 말을 퍼부었다.

"드디어, 그여자도 걸려들 모양이군. 지금 곧 출동하게. 총력전이네.”

"여자 한 명에 총력전을 펼칩니까?”

"여자라고 우습게 보지 말게. 마약 밀매에 손을 댄 모양이야.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준비해!”

 

 

이형사는 지우려 지우려 아무리 애써도 자꾸만 떠오르는 여인의 모습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사진 속의 그 여인. 지금은 이미 몽타주라는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버린,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 한 구석 깊은 곳에 자리잡고, 마치 그의 수호천사라도 되는 듯 떡 버티고 서서 좀처럼 나가려 하지 않는 한 여인의 기억.

"서장님, 한 가지 물어 봐도 됩니까?”

"뭔데 그러나?”

"그 여자에 대한 정보는 누가 입수합니까?”

"김 형사에게 물어보게나.”

 

 

2

 

여인의 모습이, 주택가 귀퉁이 골목길에서 줄지어 노는 아이들의 눈에 비쳤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허공을 휘저었고, 홱홱 젖혀대는 길다란 팔 안으로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아이들은 그녀가 나타나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를 놀려댔다.

"오리 궁둥이. 헤헤.”

"아니야. 저건 분명 여우 꼬리야.”

"웃기지 말라구. 저 누나는 분명 오리야.”

"여우꼬리! 오리 궁둥이!”

끝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놀림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여인은 몸에 꽉 끼는 옷차림으로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녀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쩍쩍 다시며, 하나 둘 저마다의 집으로 제각기 흩어졌다. 지평선 사이로 물드는 붉은 하늘만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출렁이고 있었다.

여인이 이 동네에서 살게 된 건, 어느 추운 겨울날부터다. 그녀는 쬐그만 용달차에다 책상과 화장대, 그리고 보따리만 몇 개 실고 이 동네로 이사를 와서는 그 후 한 번도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녀가 무얼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그녀가 언제 이사 왔는지조차 몰랐다. 심지어, 그녀를 이웃동네에 사는 아가씨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봄기운이 그녀를 거리로 내몰았을 때, 그녀는 아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화려한 등장을 했지만, 그녀는 동네의 어떤 사람에게도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누가 말을 건넬라 치면, 그녀는 그 사람을 무시해버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동네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고, 곧 그녀가 버릇없다느니, 무례하다느니 하는 말만이 떠돌았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해 버리거나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밤낮 여인을 배웅하는 재미에 골목길을 드나들었다. 여인은 그들의 배웅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가끔 귀찮다는 듯이 그들에게 돈을 몇 푼 쥐어주면서, 멀리 구멍가게로 쫓아내곤 했다. 그럴 때, 여인은 웃음을 짓곤 했는데, 아이들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신기하게 쳐다보면서도 막상, 공돈이 생겼다는 게 기쁜지,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서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럴수록 더욱더 솟구치는 아이들의 호기심은 억제할 수가 없었다.

봄기운이 채 가시기 전, 아이들은 몇 명의 남자를 거느리고 다니는 그녀를 보았다. 그들은 어쩔 때는 한 명, 다른 때는 두 명, 가끔은 여러 명씩 거느리고 올 때도 있었는데, 얼굴은 거의 매번 바뀌었다. 처음에 아이들은 무서워서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한번은 여인과 남자가 아이들이 노는 골목을 지나다가 정면으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남자는 아이들에게 동전 몇 개를 쥐어주면서 말했다.

"얘들아, 까까 사 먹고 가서 놀아라. 여기로 오지는 마. 안 그럼, 다음부턴 까까 안 사준다."

그 후로 아이들은 여인이 남자를 데리고 오는 날을 기다렸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구멍가게로 가서는 맛있게 놀 수가 있었다. 아이들은 여인이 데리고 오는 남자를 모두 '보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들이 돈을 받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보스, 고맙습니다. 이번 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처치하고 오겠습니다."

하며,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는 쏜살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남자들은, 한 결 같이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그들이 영화 흉내를 내는 것임을 깨닫고, 요즘 아이들의 머리는 참 일찍 돌아간다며 혀를 내두르면서 씨익 웃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혀엉, 그런데 그 사람들하고 그 누나랑 뭐야?”

"무슨 말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아찌들하고 그 누나 뭐 그런거있잖아?”

"난 또. 그걸 '관계'라고 하는 거야.”

"맞아. 간개가 뭐야?”

"'간개'가 아니구, 관계!”

"어렵단 말야.”

"좋아, 대충하자. 저기 대답해줄 만한 사람이 오는데……

", 미선이 누나다!”

"무슨 얘기를 하는데 나를 그렇게 빤히 쳐다만 보고 있는 거야?”

"누나, 아찌들하고 그 오리누나랑 무슨 간개야?”

"간개?”

"얘는 '관계'란 발음을 못 하잖아.”

", 관계가 뭐냐고?”

"너라면 알 것 같은데.”

"아마, 남편일 것 같애.”

"남편? 무슨 남편이 그렇게 많아?”

"혀엉. 남변이 뭐야?”

"네 엄마의 아빠가 남편이지 뭐야?”

"? 그러믄, 우리 외할아버지가 남변이야?”

"아휴, 이 바보.”

"그게 아니라, 네 엄마한테는 네 아빠가 남편이라는 거야. 알았지?”

", 그러니까 아빠가 엄마한테 남변이라는 소리구나. 근데, 저 누나는 남변이 저렇게 많아? 그러믄, 우리 같은 애들이 몇 명이나 되는 거야?”

", 너하고는 말이 안 통한다.”

 

아이들의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닭이 알을 까듯이 하나씩 더해졌다. 그들은 5월의 어느 날, 여인에게서 어린이날이라며 억지로 뜯어낸 돈으로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사서 먹으면서 놀다가, 문득 새 화젯거리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 여자 돈이 어디서 나지?”

"누구 말이야, 혀엉? 그 누나?”

"그래, 임마. 미선이, 너는 알 것 같은데. 너는 그쪽에선 끝내주잖아?”

"글쎄. 내 생각으로는 그 뭐라더라? 매춘부라 그러나? 그런 거 같애.”

"혀엉, 매춘부가 뭐야?”

"임마, 넌 아직 몰라도 돼.”

"피이-. 형도 모르니까 갠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남자한테 돈 받는 여자래.”

"? 그냥 돈 주는 남자도 있나? 하기야, 저 여자도 그냥 우리한테 돈 주니까. 그럴 만도 하네.”

"글쎄, 그런가 봐. 매춘부하면 그렇대. 그런데, 우리 엄마는 절대로 나는 그런 거 하면 안 된대. 정말 어른들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러믄 난, 매춘부 해야지.”

", 남자는 안 돼.”

"그래, 남자는 매춘부하면 돈 주는 거래.”

"에이……

 

아이들은 여자를 매춘부로 놀려댔고, 그 놀림은 소문으로, 그 소문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동네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보면, 슬금슬금 피해 다녔고, 아이들에게도 그녀는 나쁜 사람이라고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의 눈을 피해 여전히 여인을 쫓아다녔다. 마치, 개가 닭을 쫓는 모양으로.

마지막. 아이들이 그토록 잘 따르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한여름의 가장 더운 어느 날이었다.

 

3

 

"그래, 잘 됐나?”

"마약밀매업자들은 소탕했지만, 그 여자만은 사로잡지 못 했습니다.”

"그럼, 죽였단 말인가?”

"아닙니다. 마찬가지겠지만, 여자는 동맥을 끊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이형사의 목소리에 약간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런가? 어쨌든 수고했네.”

 

이 형사는 조각난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무슨 이유였을까. 그에게 이 목걸이를 붙잡고 놓아 주려 하지 않는 이 알 수 없는 힘은. 그 신비한 힘은 그가 처음 이 목걸이를 보았을 때 그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바치고서라도 그것을 가져야 한다는 강한 욕망을 가졌었다. 도대체 왜일까.

 

 

4

 

"그래, 웬일이야?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다하고?”

",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뭘로 드시겠어요?”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속을 후볐다.

"뭐 마실래?”

이 형사가 물었다.

, 커피 마실 거지?”

"아니야, 난 레몬차.”

"그래? 웬일이야, 커피를 다 마다하고?”

그냥, 나에게도 뭔가 변화가 필요한 거 같아서.”

그래? 그럼, 레몬차 두 잔 주세요.”

", 감사합니다.”

여자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뭘 물어 보시려고? 여자 때문에 고민하시나?”

"여자? 난 널 보면서 여자는 사귈 만 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 너 재미없을 줄 알어.”

차가 나올 때까지 그들은 이런 저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제, 본론을 얘기하시지.”

그들은 서로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나누어 붙였다. 담배연기가 그들이 앉아 있는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여자에 대한 정보 말인데…… 그 정보 어떻게 입수했지?”

김 형사는 잠시 주저했다. 이 형사는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사실, 정보 입수하기는 어렵지 않았어. 그 여자가 우리 집에다가 전화를 해서 알려주었거든.”

"직접 너네 집에? 그 여자가?”

". 아마 그 여자였을 거야. 그게 전부야. 여자에 대한 정보는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었거든. 그 여자는 거래 장소를 알려 주었을 뿐이야. 물론 암호 같은 말로 했는데, 암호는 바로 접촉 직전에 해석을 할 수 있었어.”

 

더 들을 건 없었다. 그녀에게선. 그들은 헤어졌다. 아무 말 없이. 찻값은 각자 부담. 그것이 그들의 인사였다. 전류의 짜릿함이, 그들을 감전시킬까 봐 그들은 서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5

 

잡으려 잡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잡히질 않던 여인의 얼굴. 그녀의 얼굴이 차디찬 시체로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여인의 온몸에서 풍겨 나오던 온화함.

여인, 새삼스레 여인이라는 낱말이 그녀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이 형사는 검퓨터의 스위치를 올리고, 정보부를 연결했다.

"암호는?”

암호? PASSWORD? 그는 아득한 먼 추억을 회상하듯, 기억을 더듬었다.

"2049. 100000”

아무런 뜻도 없는 암호. 그는 간신히 기억해낸 그 번호의 자판을 눌러댔다.

"O.K. PASS”

그는 여인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불여우? 그런 사람은 등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컴퓨터의 음성 신호가 '-' 소리를 냈다. 지문 검색. 그는 손바닥을 컴퓨터의 모니터에 갖다 대었다.

"YES. RIGHT. PASS.”

이 형사는 다시 여인의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여우 목걸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자료를 찾아보겠습니다. , 화면에는 그녀에 관한 정보가 나열되었다. 프린터를 하시겠습니까? (Y/N)

그는 Y자의 자판을 눌렀다. 프린터기에서 자료가 복사되었다.

 

여우 목걸이에 관한 정보 자료. 죄수번호 1111. 2025,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음.

5년 후, 탈옥. 또 다시 살인을 했으나, 잡지 못함. 살인 동기는 두 번 모두 강간범에 대한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명됨.

지금은 거대한 X 조직의 일원으로 마약과 사기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짐.

여우 목걸이에 대한 사적인 정보를 원하면, P를 누르시오.

 

그는 P자를 쳤다. 곧이어 또 다른 정보가 프린트 되었다.

 

여우 목걸이의 사생활. 2015년 낙태 수술을 해 벌금을 문 적이 있음.

2019년 딸을 출산. 두 번 모두 사생아였음. 2023년 딸을 고아원에 버림.

그 이듬해 아이는 입양된 것으로 알려짐.

혈액형 인자는 BB. 최신정보를 원하십니까? (Y/N)

 

그는 N을 치고, 전원을 내렸다. 그리고 마냥 전해져 오는 아득한 기억 속에 그의 몸을 내맡겼다.

 

6

 

아이는 조용히 서 있었다. 여인은 멀뚱히 아이를 쳐다보다가 금빛의 목걸이를 아이의 목에 걸어주고 말없이 멀어져 갔다. 하늘은 맑았다. 아이는 여인이 멀어지는 거리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는 목에 걸린 목걸이가 걸리적거리는지 그것을 빼내었다. 아이는 한참동안 그 목걸이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더니 하수구 구멍으로 그것을 집어던졌다. '퐁당'하는 탁한 소리가 아이의 귀를 때렸다.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아이에게 물었다.

"집이 어디니?”

아이는 말이 없었다.

"엄마가 누구니?”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마치 자기를 버린 엄마를 원망하듯 마음씨 좋게 생긴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없나 보구나? 아유, 불쌍해라.”

아이가 간 곳은 고아원이었고, 그 다음해 아이는 바로 입양되었다.

 

여인은 비틀거렸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져 가고, 사람들은 퇴근길을 서둘렀다. 여인이 골목길을 들어섰을 때, 비로소 그녀는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

", 저 여자 왜 저러냐?”

아이들의 소곤거림. 이어 동네 관리인의 등장.

", 고자질쟁이다. 어서 도망가자.”

그들은 잽싸게 달렸다. 남자의 얼굴이 지는 햇살 속으로 가려져 갔다.

 

아이는 밤길 나다니길 좋아했다. 그날 밤, 아이는 골목길 어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보, 오랜만이야.”

"왜 왔죠?”

불분명한 여인의 말소리.

"여기가 어디죠? 나를 집에 데려다 줘요.”

"취했군. 너무 취했어.”

"그래요, 취했어요. 당신은 누구죠? 관리인?”

"여보, 나야. 정신 차려.”

"저는 그년을 죽일 거예요.”

여인의 욕지거리가 아이의 귓가를 타고 흘렀다. 곧이어 알 수 없는 신음소리. 여인은 행복해 보였다. 아이는 말없이 사라졌다.

 

다음 날, 아이들이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잠들어 있는 여인의 모습을 발견 했다. 여인의 치마 자락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누나! 누나! 정신 차려요!”

아이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여자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아이들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응, 내가 왜 여기 있지?”

"어제부터 있었어요.”

", 어제부터?”

그녀는 일어났다.

"! 내 옷이 어떻게 된 거야? 어제, 나 말고 또 누구 본 사람 있니?”

", 관리인 아저씨요.”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그녀는 사라져갔다. 그 후, 그녀를 더 이상 그 동네에선 볼 수 없다.

 

동네는 술렁거렸다. 아이들은 여인의 집에 어느 날 갑자기, 경찰이 들이 닥친 것에 흥미를 느꼈다.

"저 아찌들, 저기는 왜 저렇게 지키고 서 있는 거야?”

죽음. 관리인은 여인의 집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여인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다만, 그들은 여인을 배웅하던 골목길에서 그녀의 향수를 아쉬워하며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혀엉, 이게 뭐야?”

"목걸이 같은데.”

조각난 금 빛깔의 물체가 아침 햇살에 반짝거렸다.

"그 여자 건가보다. , 내가 가져갈 테니까.”

"싫어, 내가 줏었으니까, 내꺼야.”

"내가 까까 사줄께.”

"정말?”

"그래, 임마.”

"그럼, 먼저 사 줘. 까까랑 바꾸게.”

"알았어, 임마.”

하늘의 구름이 뽀얗게 흐려지고 있었다.

 

 

7

 

이 형사는 담배를 꺼냈다. 그는 빈속에 담배를 피우는 때가 별로 없었지만,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담배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대개는, 사건을 처리하고 난 뒤에 그러는 버릇이 잦았고, 그러고 나면 아침을 거르기 일쑤였다. 그는 신문을 펴들었다. 사회면을 읽으면서 그의 얼굴이 흥분되기 시작했다.

"2049xx. 사기로 악명 높은 사기꾼인 '여우 목걸이'는 대규모 마약 밀매에 성공했다. 이날 그녀는 경찰에 헛 정보를 흘림으로서, 그의 명성답게 여러 곳에서 거래를 성공시킨 것으로 알려졌는데, 경찰의 총력전이 펼친 가고파 빌딩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여자는 그녀의 동생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을 위장한 타살인 것으로 검사의는 진단을 내렸다. 경찰은……

그는 컴퓨터의 전원을 올리고, 정보부를 연결했다. 여우목걸이에 대한 최신 정보. 잠시 후, 화면이 모니터에 인쇄되었다.

 

여우목걸이에 관한 최신 정보. 최근 그녀에게 동생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녀의 정보를 원하십니까?(Y/N)

 

그는 Y를 쳤다. 다시 화면이 모니터에 인쇄되었다.

 

여우 목걸이 동생에 관한 정보. 성별은 여. 2019년 아들 출산.

여우 목걸이 밑에서 일하는 마약 밀매 전문업자.

2023년 아들 행방불명.

전해지는 말로는 그녀가 직접 거리에 내버린 것으로 알려짐.

혈액형 인자는 AA.

특기 사항.

두 자매 모두 같은 해 같은 날에 아이를 버린 것으로 추정됨.

복역 사항 없음. 그외 다른 사항의 질문이 있으십니까?

 

그는 HUSBAND라는 자판을 눌러댔다.

 

이것은 극비 사항입니다. 지문 검색. 혈액형 검사. 신분 확인.

 

그는 양쪽 손바닥을 모두 모니터에 갖다 대었다.

 

지문 통과. 혈액형 인자는 AO. 신분 확실함.

 

곧 기밀 정보가 흘러나왔다.

 

극비 사항에 관한 자료. 이것은 사생활 침해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이 자료를 발설시는 처벌.

극비 사항.

여우 목걸이의 동생은 여우 팔찌라 불림.

남편은 두 자매가 같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함.

, 그들 자매 아이들의 아버지는 한 명이라는 의미.

2030년 여우 팔찌가 살던 집에서 관리인이 시체로 발견됨.

관리인의 혈액형 인자가 OO형인 것으로 보아 두 아이의 아버지인 것으로 추정됨.

더 이상의 자료는 없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조각난 목걸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세히. 거기엔, 희미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여우 목걸이. 2030.'

 

8

 

"뭔가?”

서장은 귀찮다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이형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 형사의 혈액형을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왜?”

"아무래도 미심쩍어서요.”

"김 형사가 여우 목걸이라도 된다는 건가? 꿈꾸지 말게. 그녀는 너무 어려."

"혹시나 하고요.”

"잠시 기다려보게.”

서장은 별 큰 뜻 없이 혈액형에 관계된 서류를 뒤져보았다.

"으흠. 혈액형은 B, 인자는 BO구만. 짚이는 게 있나?”

"아닙니다. 별로.”

 

9

 

"솔직히 말해! 그 정보 어떻게 입수 헀지?”

방안. 이형사의 집은 침묵에 휩싸였고, 벌거벗은 그들의 몸이 한밤중의 싸늘한 기온을 느끼게 했다. 느닷없이 총구를 들이민 이형사의 손짓에 놀란 김 형사의 얼굴에선 땀이 베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네 엉덩이에 새겨진 여우꼬리는 무엇을 의미하지? 네 어머니는 여우목걸이야, 맞지? 어서 대답해!”

이 형사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아니라고 말을 해줘, 제발! 아니라고. 너는 내 오랜 친구였잖아. 나는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제발, 아니라고! 그는 그녀와 그렇게 오랜 세월 함께 했으면서도,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를 숨기려 했음에 막막한 허탈감을 느꼈다. 너는 뭐가 될 거야? ? 나는 엄마를 돕기 위해 경찰 정보국에서 일할 거야. 엄마가 뭐 하시는데? 우리 엄마? 글쎄, 하여간 그래. 그녀의 어물거림이 이형사의 눈앞에 머무르는 듯 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정작 다른 말이 흘러 나왔다.

"바른 대로 말해! 입 잘못 놀렸다간 …… !”

그녀의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착하려 애쓰며, 흘려 내리는 땀을 솜으로 부풀어져 있는 이불의 안쪽 면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난 너를 사랑해.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러면, 차라리 나를 죽여. 그것이 너나 나를 위해서 차라리 낫겠어.”

"이 바보야! 넌 내 어머니를 죽였어, 그렇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나 해?”

충격이 김 형사의 얼굴에 번졌다. 이 형사는 총구를 그녀의 가슴에 겨누었다.

"이러지 마! 법적으론 아무런 문제도 없단 말이야

"그래, 그건 법일 뿐이지. 하지만, 밉든 곱든 너는 내 어머니를 죽였어

"네가 말한 대로야.”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녀의 비명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웠다. 그는 옷을 입고, 뛰었다. 이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의 비극이 그를 묶어둘 순 없었다. 아주 어렸을 적 그의 어머니가 항상 타이르던 말이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다.

'절대로 사람을 믿지 마라. 이 팔찌 외에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조그만 팔찌가 손에 짚혔다. 어릴 때부터 차고 다니다, 손에 맞지가 않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닌 이후로 그것은 계속 그의 주머니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서서히 새벽의 햇살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어디로 뛰는지도 모른 채, 마냥 그 빛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 빛이 마치, 자신의 구원자라도 되는 듯이.

 

 

10

 

서장은 신문을 펼쳐들었다.

"김 미선 형사를 살해한 혐의로 수배중인 이 형사의 행방은 서산 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의 옆에는 여우 목걸이라 새겨진 금빛의 목걸이가 선명하게 반짝거리며 놓여 있었다. 이것은 여우 목걸이가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되며……

서장은 아무 표정 없이 담배에다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서 어느 여형사에게 명령을 했다.

"고 형사, COFFEE, PLEASE.”

서 안은 평온했다.

 

11

 

"내 아들은 왜 죽였지?”

"당신에 대한 복수. 그는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어요. 내 딸까지 죽였고.”

"아직도 원한이 남아 있었나? 나는 당신을 살려줬는데?”

"그래요. 이제, 복수는 끝났어요. 당신과 함께 남은 시간을 즐기고 싶어요. 사랑해요.”

"조직은?”

"해체 시켰어요. 당신을 위해. 우리의 새 아기를 만들어요.”

"당신의 문신은?”

"엉덩이에 새긴 문신이요? 그건 이미 오래전에 지워버렸어요. 내 동생을 탈옥시킬 때.”

"그녀를 왜 빼냈지?”

"조직에서 필요로 했어요. 그리고 걔를 이용해 먹기 위해서.”

"돈은 많이 벌었나?”

"이번이 마지막 거래였어요. 그거면 평생 동안 살 수 있어요. 호화롭게.”

서장의 눈빛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당신은 천재야. 이젠 다 끝났어. 우리 둘이 멀리 떠나서 살자. 당신의 여권은 내가 만들어주지.”

서장과 여우 목걸이는 웃으며, 서로의 몸을 부벼 댔다.

 

 

 

에 필 로 그

 

"내 아인 어디 있지?”

"알 거 없어!”

"빨리 말해! 그 앤 내 아이야! 왜 언니가 마음대로 버려 놓는 거지? 언니가 뭔데?”

"정 알겠다면 가르쳐 주지. 하지만, 넌 아이를 몰라볼 걸. 널 마지막으로 본 지 이미 7년째야. 그동안 아이는 몰라보게 컸을 거고. 우리도 그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7년 전에 길바닥에 내버린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뭐야? 그럼, 진짜로 내버렸단 말이야? 이 빌어먹을 년!”

"그것이 내 애인을 빼앗은 죄보다 덜할 걸. 앙큼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여우 팔찌는 아이가 있는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20301.

 

"관리인은 왜 죽였지?”

"그는 잠복 경찰이야. 아니면, 사립탐정이든가.”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그는 너무 많은 걸 알아.”

"언니가 직접 죽였군?”

"그렇지. 하지만 붙잡혀도 감옥 가는 건 너지, 내가 아니야.”

"언니는 그 점을 노린 거고. 하지만 나는 도망쳤어.”

"널 잡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안 됐어. 너는 아직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 제기랄!”

"명심해 둬. 네가 아무리 날뛰어봤자 내 손아귀에 있다는 걸.”

여우 팔찌는 침묵했다. 2030년 여름.

 

여우 목걸이는 이 형사 앞을 가로막았다. 헉헉거리는 그의 앞에 선 그녀는 총구를 그의 머리에 겨눴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번득였다.

"당신은 누구죠?”

"대답하기 어렵군. 이 목걸이를 보여주면 대답이 될까?”

그녀는 목에서 목걸이를 빼내었다.

"여우 목걸이?”

"그래. 내 딸을 죽인 녀석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왔지.”

"드디어 만났군. 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아버지?”

"20여 년 전,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살해했고, 내 친어머니에게 누명을 씌웠지.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군.”

"하하, 그랬었군. 그가 네 입양 아버지였군. 그는 경찰이었나?”

"정보원이었지. 하지만, 결국은 당했어. 내 친아버지는 누구지?”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이 형사의 입은 중얼거렸으나, 거대한 굉음의 메아리 속에 그의 음성은 묻혀버렸다. 이형사의 입에서는 계속되는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나를 자유롭게 해 줘서 고마워, 여우 목걸이. 당신은 영원히 행복할거야. 그 행복 뒤에 오는 고통만 없다면 말이야……

여자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신선한 피비린내가 그녀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그녀는 이 형사가 쓰러지면서 떨어뜨린 두 개의 금속품이,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 중 조각난 금빛 물체 한 개를 골라 그녀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식어가는 이 형사의 시체에서 멀어져갔다.

약간 녹이 쓴 물체가 부분부분 번쩍였고, 또 하나의 금빛 물체가 아침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여우 목걸이.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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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변하다

1.

시해는 집에 들어오는 벌레를 쫓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약을 뿌리는 건, 일시적인 방편이니, 지속적으로 벌레가 근처에 안 오게 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어느 날, 상구네 집에 갔는데, 식물이 하나 있었다.

이게 뭐야?”

로즈마리.”

, 이걸 왜 키워?”

벌레들이 싫어하거든

그래, 나도 키워야겠다.”

그래, 그럼 하나 골라봐.”

진짜?”

, 난 많거든. 가지치기 하면 여러 개 키울 수 있어.”

그렇구나.”

벌례 때문에 고민이었던 시해는 상구가 고마웠다. 상구의 집에서 로즈마리를 골라 보는데, 희한한 모양의 로즈마리가 하나 있었다. 위와 중간이 넓은데, 위와 중간의 사이는 좁고, 아래 쪽 역시 좁게 풀들이 나 있는 로즈마리였다.

이건 왜 이래? 다른 건 반듯한데?”

나도 모르겠어. 아무리 똑바로 자라게 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늘 저래. 희한한 건, 그래도 죽지는 않는다는 거야. 어때, 맘에 들어?”

난 오히려 이런 게 좋은 거 같은데?”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역시, 그건 내꺼가 아니었다니까.”

?”

왠지 저 로즈마리는 나를 싫어하는 거 같거든.”

그런 느낌도 들어?”

, 그래서 나도 그 녀석을 언젠가 떠나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지.”

, 그래? 고맙다. 내가 질 키워볼게.”

내가 고맙다. 히히.“

시해는 로즈마리를 가지고 집에 왔다. 그것을 보면, 왠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로즈마리가 벌레를 쫓아준다는 말이 좋았다. 그래, 이젠 벌레에서 해방되는 거야!

 

2.

시해는 로즈마리를 데리고 와서 지극적성으로 돌보았다. 너무 지나치게 물을 많이 줘도 안 된다는 말에, 물을 언제 주는 것이 적당할까를 고민하면서 물을 주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로즈마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덕분인지, 더 이상 시해의 집에 벌레가 접근하지 않았다. 시해는 살 것 같았다. 이 로즈마리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벌레들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안도감이 시해의 마음에 자리잡았다. 시해는 더욱 더 로즈마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시해는 꿈을 꾸었다. 로즈마리가 사람으로 변하는 꿈이었다. 그것도 여자다. 사람으로 변한 로즈마리는 시해에게 몹시도 불친절했다.

 

, X!“

사람으로 변한 로즈마리가 욕부터 해댔다.

아니, , 누구세요?“

너 때문에 망쳤다.“

망쳤다니요?“

내가 사람되는 거. 너 나를 왜 이렇게 예뻐해? !“

아름다운 그 여인은 오히려 시해를 나무랐다. 시해는 정신을 못 차렸다.

나를 미워해야 내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왜 나를 이리로 데려와 가지고, 끔찍이 아껴주는 거야?“

그야, 식물이니까요.“

난 식물이 아니라고!“

좀 전까진 식물이었잖아요. 로즈마리.“

그래, 그랬지.“

어떻게 된 거예요?“

마법에 걸렸어. .“

왜요?“

난 다시 식물으로 변한다. 아아 억울해. 아직 할 말도 다 못

시해는 그녀가 식물로 다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니, 로즈마리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저 식물이 정말로 사람으로 변하까? 그럴 리는 없을 거 같은데. 로즈마리를 바라보는 시해의 표정에 두려움이 일었다. 여태껏 자신이 열심히 돌봐왔던 로즈마리에게서 배신감도 느꼈다. 사랑의 대가(代價)가 이런 것인가. 시해는 로즈마리를 정말로 미워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마리가 정말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로즈마리가 정말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생겼다. 꿈에서 본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읻. 시해는 이 알 수 없는 양가감정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시해를 지탱해주는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 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해는 밤새도록 로즈마리를 기다렸다. 로즈마리는 변하지 않았다. 아침이 오고 뜬금없이 상구한테 전화가 왔다. 상구가 시해네 집에 있는 로즈마리를 보고 싶다고 했다. 시해는 상구에게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상구가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 로즈마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밤에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시해는 상구에게 집으로 오라고 했다. 상구가 집까지 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왔기 때문이다.

 

시해는 상구에게 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했다. 상구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지금은 꾸지 않지만, 그 로즈마리를 갖고 있을 때는 자주 그런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 로즈마리를 미워했고, 그래서 시해에게 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껄끄러우면, 자기가 다시 가져가겠다고도 했다. 시해는 싫었다. 이 로즈마리를 미워하기가. 시해가 상구에게 말했다.

너는 미워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로즈마리를 미워하지 않을 거야. 그냥 꿈일 뿐이잖아.“

그런데, 이상한 꿈이지.“

너는 이 로즈마리를 버려놓고 다시 보고 싶어 이렇게 온 거잖아.“

상구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이 로즈마리는 내가 잘 키워볼게. 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상구의 마음이 틀어진 것은. 상구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잘 있어, 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휭하니 가버렸다. 시해는 상구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지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해는 상구를 보내고 로즈마리를 쳐다보았다.

로즈마리, 오늘부터 너에게 너의 이름을 지어줄게. 영순이. 어때? 마음에 들어? 넌 오늘부터 나의 여자친구다.“

시해는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로즈마리에게 왜 여자친구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상구가 자주 꿨다는 그 꿈을, 시해도 자주 꾸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자주 나타나 시해에게 투덜댔다.

이러면, 내가 사람이 못 되잖아! 제발 날 사랑하지 말라구.“

, 왜 사람이 못 되는데요?“

그걸 말로 설명할 수가 없, X. 또 변하네

듣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늘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꿈 속의 영순이는 언제나 투덜대기만 하다가 로즈마리로 돌아갔다. 꿈속의 영순은 늘 알몸이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옷을 왜 안 입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저 식물로 살아가느라 옷이 없겠더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더더군다나, 그건 꿈일 뿐이잖아, 라며 시해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어떤 성적인 욕망도 허용되지 않는 꿈일 뿐이었다.

 

가끔, 꿈에서 깨고 나면 몽정을 할 때도 있었다. 알몸의 영순이가 너무나도 탐이 나서 그녀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고자 시도하려고 하면 꿈에서 깨었다. 시해는 로즈마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꾸 그의 꿈 속에 나타나서 이렇게 성적 욕망을 부추기는지. 시해는 로즈마리를 계속 돌봐주는 게 맞는지, 계속 사랑해야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시해는 그래서 결정을 내렸다.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가지치기를 해보기로. 만약, 이 로즈마리가 진짜 사람이라면 잎을 자를 때 조금은 아플 거다. 그래서 다시는 내 꿈에 나타나지 않을 거다. 라는 위험한 생각도 함께 했다.

 

 

3.

꿈은 이어졌다. 아주 조금 잎의 귀퉁이를 살짝 잘라 내었을 뿐이라서 그런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해는 로즈마리 잎의 반을 잘라내기로 했다. 가위를 들고 그 앞에 섰다.

네가 사람으로 변하면 안 자른다!“

시해는 잎을 잘라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꿈일 뿐인 건가. 시해는 문득, 자신이 이 로즈마리를 미워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시해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시해는 이 로즈마리 영순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기로 마음먹었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지금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시해는 다시 로즈마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너를 더욱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줄게

꿈은 점점 더 심해졌다. 어느 날은 사람으로 변한 영순이가 시해를 죽이려고 칼을 든 것을 보기도 했다. 로즈마리 영순을 사랑하면 할수록, 꿈은 점점 더 악몽으로 변해갔다. 시해는 자꾸 왜 그런 꿈을 꾸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너를 돌봐주는데, 그 대가가 겨우 이거냐, 며 푸념을 하는 순간이 늘어만 갔다. 한편으로는 꿈일 뿐이잖아, 라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렇지만, 꿈이 자꾸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해는 상구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꾸고 있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상구가 미안하다고 했다. 자기도 그런 꿈을 자꾸 꾸었다고 했다. 이 식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시해가 가져가겠다고 해서 반가웠다고 했다. 아무래도 버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상구가 말했다. 아직도 그 식물이 보고 싶냐고 상구에게 물었다. 지금은 벗어났다고 했다. 어떻게 벗어났냐고 물었더니, 시해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더 이상 그리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상구가 물었다.

아직도 그 마음 변함 없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어느 날은 미운데, 그러다가도 이럼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그냥, 식물일 뿐이잖아. 그리고 꿈은 꿈일 뿐이고. 왜 분리가 안 되는 거지?”

버리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줘봐. 대신, 그 상황을 솔직히 얘기하고.”

상구는 다른 누군가가 또 같은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면서, 시해에게 솔직히 얘기하라고 했다. 시해는 그 식물을 받아 줄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상구에게 물었다.

그거야, 잘 모르지. 동기들 집에 초대해서 파티 한번 벌이는 건 어때? 네 생일이 언제지?”

아직 멀었지.”

뭔가 축하할 만한 일 없어?”

이번에 면허 땄어.”

, 그걸 이제야 얘기하냐. 축하파티 연다고 해. 내가 도와줄게.”

상구는 시해와 파티의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이 식물이 누구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건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파티에서 시해가 겪은 이야기를 모두 이야기할 거라고 하면서.

 

4.

시해와 상구의 친구들이 면허를 땄기 때문에 축하파티를 연다는 말에 다소 의아해했지만, 파티에 오면 깐풍기를 시켜주겠다고 하니, 흔쾌히 오겠다고 했다. 다른 것보다 깐풍기는 무척 먹고 싶었나 보다. 여섯명이 오기로 했다. 상구와 시해는 로즈마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작전을 짰다. 시해가 꾸는 지나친 악몽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악몽을 꿀 수도 있다는 정도만 얘기하기로 했다. 시해는 그래도 되냐고, 상구에게 물었더니, 만약 불편을 느낀다면, 버려도 된다고 얘기해주면 된다고 했다. 시해는 맞는 말인 거 같다며 동의했다.

파티날이 되었다. 토요일이었다. 시해는 친구들에게 12시쯤 오라고 했다. 10시쯤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친구들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해는 문자를 보냈다. 몇 시쯤 와? 여섯 명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고, 10분 후 답문이 오기 시작했다.

미안. 급한 일이 생겼네. 갑자기 부모님이 오신대

미안, 오늘 여자친구가 만나자고 떼를 써서. 거기 간다고 했더니, 오늘 자기 안 만나면 헤어지는 걸로 알래.”

미안. 동생이 갑자기 아파서.”

미안. 갑자기 해외출장이 잡혔네. 오늘 아침에 연락왔어.”

미안. 나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와 있어. 링거 맞고 있어.”

미안. 오늘 집이 이사하는 걸 깜빡했네. 와이프가 그걸 잊어버리면 어떡하냐고 벼르고 있어서.”

여섯 명 모두 오지 않았다. 시해는 상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상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다.

모두 못 온다는데 어떡하지?“

10분 후 상구한테 전화가 왔다.

시해야. 미안하다. 이제 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네가 알아서 해야겠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버리던가 해야 할 거 같아.”

시해는 로즈마리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이걸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다가 또 잠이 들었다.

넌 내가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성욕의 대상이지? 네 알량한 성욕을 채우려는 욕심으로 나를 택한 거야. 가증스런 자식!”

시해는 꿈에서 깨었다. 로즈마리는 여전히 로즈마리였다.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건, 허무맹랑한 생각인 걸 시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5.

아침부터 시해는 분주했다. 신제품 볼펜광고의 프리젠테이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광고를 못 따내면, 시해는 팀장 싸움에서 밀릴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카피라이터 인생을 마감해야 할 지도 몰랐다. 사활을 걸어야만 했다. 볼펜에서 영순의 얼굴이 겹쳤다. 볼펜광고에 영순의 알몸이미지를 덧입히고 싶었다. 성인광고의 이미지를 이용하면서도, 성인광고 같지 않게 덧입히는 방법을 시해는 고민했다. 로즈마리를 처음 봤을 떄가 떠올랐다. 로즈마리의 이미지와 볼펜의 내구성을 잘 결합하면? 뭔가 나올 것 같았다.

 

대박을 쳤다. 광고주가 시해가 만든 광고에 흡족해했고, 볼펜은 대히트를 쳤다. 시해는 광고의 성공 덕분에, 3팀의 팀장을 맡게 되었다. 팀장 자리는 프리젠티이션 능력도 좋아야 하지만, 팀원들이 좋은 카피를 쓸 수 있도록 지원도 해 주어야 한다. 지원이야 팀장의 몫은 아닐 수도 있지만, 시해는 그것이 팀장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팀원의 사기가 높아지고, 훌륭한 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악몽은 계속되었다. 로즈마리 덕분에 시해는 점점 더 성공의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꿈 속의 영순은 시해를 점점 더 괴롭혔다.

나를 여자로만 보는 개자식!”

, 나 강간이라도 하지 그러니?”

내가 아직도 여자로 보이니?”

영순는 비아냥거렸고, 시해는 너무 두려웠다. 언제든 저 로즈마리가 사람으로 변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이젠 정말 로즈마리를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로즈마리를 버리려고 결심하면, 이번엔 영순이 꿈에 나타나 시해에게 명령했다.

나 버리지 말아!”

나 버리면 죽을 줄 알아!”

나 때문에 잘된 거잖아. 은혜도 모르고!”

시해는 영순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해는 악몽과 함께 몇 년을 보냈다.

 

시해는 영순이 실존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시해가 로즈마리 영순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본 건, 신입사원 면접 자리에서였다. 신입사원 영순은 꿈에서의 영순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시해는 면접관이었다. 눈앞이 아득했다. 저 사람을 뽑지 않으면 시해는 뭔가 큰일날 것만 같았다. 시해는 다른 면접관에게 우리 팀으로 넣을 테니, 신입사원 영순을 뽑자고 했다. 영순의 이름은 영아였다. 시해는 영아를 뽑았다. 신입 카피라이터. 시해는 영아가 좋으면서도 미웠다. 한편으로는 잘 해 줬지만, 실수할 때는 따끔하게 혼을 냈다. 영아는 그런 시해를 잘도 버텨냈다.

 

 

6.

 

어느 날 영아가 시해에게 말했다.

팀장님, 저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뜨끔했다. 시해는 자기가 뭘 잘해 줬는지 생각해 봤지만, 딱히 잘해 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잘해 줬다고?”

.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글쎼.”

영아는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시해를 보더니 말했다.

저희 집에 가요

?”

집에 가요.”

시해는 잠깐 놀랐으나,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다.

자꾸만 로즈마리 영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로즈마리 영순이 있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래도 될까?”

그래요, 가요. 까짓 거.”

시해는 영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으니, 영아의 집에 같이 가기로 했다.

시해의 다소 들뜬 마음이 하늘에 부딪혔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과 드디어, 나도, 라는 생각이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과 맞부딪혔다.

영아는 전혀 긴장된 표정이 아니었다. 가는 도중 영아가 물었다.

팀장님, 저 그럼 내일부터는 팀장님께서 밥을 사 주시는 거죠?”

, 그러지, 그렇게 하자.”

시해는 영아의 거침없는 대쉬에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영아의 집은 조금 멀었지만, 깔끔한 동네였다. 시해는 드디어 영아의 집에 도착했다는 기쁨에, 영아에게 물었다.

, 정말 영아 집에 가도 돼?”

 

7.

영아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영아네 현관문을 열었다. 시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영아의 집이 꽤 넓다는 건 알겠는데, 왜 가구가 하나도 없는 걸까. 침대도, 책상도, 의자도, 심지어 이불도 보이지 않았다.

영아씨, 왜 가구가 하나도 없어?”

영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해를 집안으로 끌어당겼다. 영아의 웃음소리가 저 멀리 울려퍼졌다. 시해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영아의 벗은 몸조차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 시해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햇빛, 그리고 여기저기서 흘려들어오는 물소리만이 시해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시해는 그 자리에 서서 얼어붙었다.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모습, 시해의 눈에는 이제 사람이 된 영아가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고, 시해는 따라갈 수 없었다. 시해에게 들리는 물소리는 점점 더 거칠고 세졌다. 햇빛도 점점 따가워졌다. 시해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리고 시해는 점점 더 시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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