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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부는 사나이 - 제1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기홍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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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홍의『피리 부는 사나이』는 짐작대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야기이다. 사실 나도 소설을 처음 봤을 때,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생각나 눈길이 갔던 것이다. 쥐떼를 피리로 유인해 쥐를 없애 주었지만, 정작 아무 보답도 받지 못한 그가 피리 소리로 아이들을 유혹해 사라져 버린다는 이야기.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다시 생각해보면 굉장히 무섭고 소름끼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는 쥐떼나 아이들을 원하지 않는다. 현대판 피리 부는 사나이다. 그는 세계 각국의 여성들의 실종과도 관련이 있으며, 수연과도 관련이 있다. 수연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한 번 만난 적이 있고, 그 후 묘한 일을 겪었으며, 지금도 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어느 날 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언젠가 꾼 적 있는 꿈이었다. (…….)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찾았다. 산양의 다리와 둥글게 말린 두 개의 뿔을 가진 남자, 판, 피리 부는 사나이. 그러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그리고 마침내 언덕 꼭대기에 다다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나를 돌아보며 손짓하는 수연을.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서 내게 등을 보인 채 걷고 있는 누군가를. 희미하게 피리 소리가 들린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고, 그것이 피리 부는 사나이가 보낸 메시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운동화 끈을 꽉 묶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 발짝, 한 발짝, 아직은 멀리 있는 그들을 향해.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될 또 다른 세계를 향해." (p.319)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작품의 주인공이 피리 부는 사나이의 꿈을 꾸고, 다시 길을 나서는 것으로 끝이 난다. 주인공이 만나게 될 또 다른 세계는 과연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계가 아닐까. 이 이야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일까.   

  결국, 소설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끝이 난다. 결론이 어떠했든, 주인공이 자신만의 세상을 박차고 나와 더 큰 세상과 접촉하게 된다는 계기를 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주인공은 착실하게 정신적 성장을 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라고 이해해보려 해도, 냉정한 작가! 피리 부는 사나이와 관련한 이야기에 대해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도 않은 채 끝내다니.  

  아무리 소설이 열린 결말로 결론을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지만, 그래도 왜 수연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쫒아가야만 하는지, 피리 부는 사나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힌트라도 남겨두고 떠나시지. 결국 책을 덮고도 풀리지 않은 궁금증들을 머리위에 잔뜩 떠올린 채로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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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거짓말 (Jakob the Liar)
소니픽쳐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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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줄거리 


‘거짓말쟁이 야콥'은 한 사람의 선의의 거짓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의 유태인 게토지역, 야콥은 야간 통금에 걸려 독일 비밀경찰에 잡혔다가 운 좋게 목숨을 구한다. 잡혔을 때, 라디오에서 소련군이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엿들은 그는 다음 날 희망을 잃은 친구인 미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 이 소식은 야콥이 라디오를 소유했다는 헛소문과 함께 퍼져 나간다. 독일 비밀경찰 스파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라디오를 숨기고 있다고 말하는 야콥. 그런데 라디오 소유는 사형이 적용되는 중죄에 해당된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야콥은 연합군이 나찌를 물리치고 진격하고 있다는 거짓뉴스를 중계하고 이 소식은 주민들에게 활기와 희망을 가져다준다. 거짓으로 꾸면 낸 뉴스는 리나와 주민들에게 희망을 전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목숨은 위태로워만 간다.


  내용상의 차이점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은 원작『거짓말쟁이 야콥』의 줄거리에 충실하되, 몇몇 부분에서 미세한 변화를 보인다.  

  우선 영화 속에는 이야기의 전달자 역할을 하는 제 3의 화자가 등장한다. 원작은 야콥과 다른 어떤 한사람으로 나타나는데, 영화에서는 개인적으로 ‘리나’가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원작에서는 중간 지점쯤에서 등장한 리나가, 영화에서는 수용소로 가는 기차에서 탈출하는 모습으로 처음에 나온다.  

  그 후 영화의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리나가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내용면에서 중요한 차이점들만 보자면, 첫째, 원작에서는 줄거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나무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풀어 나간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야콥이 날아다니는 신문 한 장을 잡기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이 장면을 설정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과연 저 신문 한 장이 무엇이 길래 통금시간까지 어기며 쫓아다닐까하는 흥미와 호기심을 유발하게 된다. 

   그리고 신문의 동선에 따라서 게토안의 모습이 비춰지는데, 광장에 목이 메 달려있는 시신들과 함께 어두운 배경을 보여줌으로써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둘째로, 원작 속에서 나오는 “병든 공주 동화”가 영화 속에서는 야콥과 리나의 춤추는 장면으로 바뀌게 된다. 원작에서는 이 동화가 작품의 주제를 나타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작품의 주제를 깊게 다루기보다 이러한 춤추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쪽으로 초점을 맞춘 것 같다. 

   마지막에 리나가 열차에서 야콥과 춤추던 기억을 떠올리며 울던 장면은 그녀가 야콥에게 가졌던 애정과 그에 대한 추억, 그리움의 감정들을 더 애틋하게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이게 바로 감독이 노린 의도가 아닐까. 셋째로, 의사의 역할. 원작에서는 의사가 야콥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며, 라디오를 없애라고 강요한다. 반대로 영화 속에서는 야콥의 편에 서서, “당신이 갖고 있는 약이 내 약보다 더 힘이 있다.”며 그를 격려한다. 

   또 의사가 죽는 장면을 원작과 달리 영웅적인 모습으로 설정하였다. 영화는 의사에게 지식인을 대변함으로써 원작에서보다 좀 더 큰 역할을 부여하였다.  

  마지막으로 결말에 다다르면, 이 둘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영화는 관객들을 어필하기 위하여 원작과는 달리 역시 주인공의 죽음을 좀 더 영웅적으로 설정하였고, 깔끔한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낸다.
 


 원작과 영화 중 ‘주제’가 어디서 더 잘 나타나있으며, 원작과 영화 중 어느 것이 더 좋았나? 


  주제는 원작이 물론 더 잘 나타나 있다. 확실히 원작만한 영화가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영화는 재미와 감동을 주는 쪽에 더 초점을 맞춘 것 같고, 주제와 암울한 상황은 원작에서 더 깊게 다뤄 진 것 같다.
원작의 철학적 질문이 필름 안에 모두 들어 갈 순 없었으니, 원작에 비해 영화의 한계가 나타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훌륭했다.  

  영화에서 내용이 몇 가지 생략되었고 그랬기에 아쉬운 부분들도 좀 있었지만, 난 영화가 더 좋았다.
솔직히 책은 중반부로 갈수록 지루했다. 내용도 가볍지 않았기 때문에 보는 내내 책을 몇 번이나 덮었다. 하지만 영화는 내용상의 무거운 부분을 좀 더 유머 있게 다룸으로써 보는 내내 시종일관 웃음이 나왔다. 미샤의 귀엽고도 엉뚱한 행동, 코발스키의 우스꽝스러운 말투 등 상황에 맞지 않는 모든 행동들이 게토와 히틀러라는 큰 주제 가운데서도 웃을 수 있게 했다.  

  또 로빈 윌리암스가 아니면 못할 제이콥 역이 훌륭하게 소화되는 것을 보았다. 특히 제이콥이 죽는 장면에서 그의 감정연기는 정말 전율을 일으켰다. 그 장면에서는 나도 제이콥이라는 인물에 감정이 이입되어 눈물이 고였다.
필요한 만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연기는 훌륭했고, 시나리오도 원작을 잘 살리고 알맞게 배분한 것 같다. 최고!
 

  ‘거짓말쟁이 야콥'은 한 사람의 선의의 거짓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의 유태인 게토지역, 야콥은 야간 통금에 걸려 독일 비밀경찰에 잡혔다가 운 좋게 목숨을 구한다. 잡혔을 때, 라디오에서 소련군이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엿들은 그는 다음 날 희망을 잃은 친구인 미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 이 소식은 야콥이 라디오를 소유했다는 헛소문과 함께 퍼져 나간다. 독일 비밀경찰 스파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라디오를 숨기고 있다고 말하는 야콥. 그런데 라디오 소유는 사형이 적용되는 중죄에 해당된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야콥은 연합군이 나찌를 물리치고 진격하고 있다는 거짓뉴스를 중계하고 이 소식은 주민들에게 활기와 희망을 가져다준다. 거짓으로 꾸면 낸 뉴스는 리나와 주민들에게 희망을 전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목숨은 위태로워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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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버
막스 프리쉬 지음, 봉원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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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줄거리    


호모 파버는 실용주의적이고 기술만능주의에 빠져있던 냉전시대 미국적 사고방식의 전형인 사람이다.
사람의 일은 확률 상으로 계산될 수 있고, 인생의 모든 일은 인간이 치밀하게 계획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절대적 믿음 안에서 50 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부인하고 신의섭리, 인간의 운명, 불가사의 등을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불가항력적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을 꿈도 안 꾸는 남자라고 소개하는 그는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고, 예술이나 감정, 사랑 등은 무시한다. 그러나 그는 우연한 돌발행위로 타게 된 파리 행 유람선에서 만난 소녀 자베트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그녀가 헤어진 옛 애인 한나와 자기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음을 알게 된다. 
 


 내용상의 차이점  

  영화 「사랑과 슬픔의 여로」와 문학작품 『호모 파버』에서 처음 발견한 차이점은 제목이 다르다는 점으로써 소설의 제목보다 영화제목이 더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원작에서 거의 대부분의 이름들이 영화 속에서 전혀 다르게 변해있었다는 점이었다. 구조에서도 둘은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데, 영화는 원작과 달리 액자식 구조를 띄고 있다. 영화 속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뉴욕이 아닌 아테나의 공항장면이다. 과거부터 시작해 파버가 죽음을 맞기까지를 되돌아보는 보고서형태를 띠고 있는 원작과는 달리 영화는 현재에서 시작해 현재로 끝난다.  

  또한 영화에서는 원작과 같은 시점을 사용하였는데, 근친상간을 중심으로 한 멜로에 비중을 둔 영화에 특성에 따라 인물의 심리를 드러낼 수 있는 1인칭 시점을 사용함으로써 주인공 파버의 심리상태와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본격적으로 내용면에서 살펴보자면, 원작에선 공항으로 주인공 파버를 마중 나온 아이비가 등장하지만, 영화 속에서 아이비는 등장하지 않으며, 또 비행기를 타지 않기 위해 피해있던 화장실은, 원작에선 바의 화장실로 바뀌어 있었고 화장실에서 만난 뚱뚱한 흑인 여성도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쟈베트의 애정표현을 보게 되면, 원작에서는 못 느꼈는데, 영화를 보니까 굉장히 적극적이라고 느껴졌다. 원작에서는 그녀가 먼저 다가가고 리드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었는데, 영화에서는 쟈베트가 방까지 찾아가는 대담함을 보여줌으로써 서로간의 사랑이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살을 한 쥬라킴의 모습을 원작에서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글을 써가고 있기 때문인지 중간 중간에 다른 이야기와 과거회상의 장면들과 함께 섞어가면서 전체를 다 보여주지 않고 조금씩 나눠서 보여주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훼이버가 여행을 하는 장면에 이어서 바로 보여주고 있다. 결말에 다다르면, 이 둘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원작과 달리 영화는 오픈 엔딩을 선택하여 파버의 병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운명적 체험을 겪고 난 후 원점으로 되돌아와 망연자실 앉아있는 파버의 모습에 포커스를 맞추어 원작보다 오히려 더 서사적이고 현실적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는 원작에 비해 단적이고 평이하게 전개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정거장의 내용만을 다루고 있는 영화에서는 자베트의 죽음 후 인식의 전환을 일으키는 파버의 모습이 빠져 있다. 특히 두 번째 정거장에서 하바나 체류에서 다시 한 번 체득한 자연에 대해 달라진 인식과 죽음을 앞에 두고 이성 및 기술 중심적 사고에 등을 돌리게 되는 파국부분은 영화에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영화는 파버와 자베트 사이의 근친상간 문제에 비중을 더 실으면서 소설이 던지는 실존적 질문에 시각을 맞추기 보다는 멜로적 성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할리우드를 주요 타깃으로 삼은 감독의 상업적 계산이 반영 된 것 같다. 또한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관객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이야기를 쉽고 대중적인 방향으로 풀어간 것 같다. 
  


 원작과 영화 중 ‘주제’가 어디서 더 잘 나타나 있는으며, 원작과 영화 중 어느 것이 더 좋았나? 


주제는 물론 원작에 더 잘 나타나 있다. 앞에서 말했듯, 영화는 파버와 자베트 사이의 근친상간 문제에 비중을 더 실으면서 소설이 던지는 실존적 질문에 시각을 맞추기 보다는 멜로적 성향에 초점을 맞췄다. 여태 보았던 문학영화 중 에서는 원작에 비교적 충실했던 작품이었지만, 나는 소설이 더 좋았다. 영화는 원작에 담긴 영화적 글쓰기 방식을 너무 충실하게 재구성했기에, 그래서 오히려 신선함이 떨어졌고, 원작에 비해 전체적으로 평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특히 두 번째 정거장 부분이 완전히 삭제 된 점. 나는 소설에서 파버가 변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에 대해 달라진 인식과 죽음을 앞에 두고 이성 및 기술 중심적 사고에 등을 돌리게 되는 모습 등 이 담겨있는 두 번째 정거장을 무엇보다 인상 깊게 읽었기 때문에 이 부분이 어떤 식으로든 영상매체의 다양한 기능을 통해 반영 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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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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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책을 잡은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볍게 시작했는데, 지순한 사랑이 상대에겐 집요한 폭력이 되고, 배려는 친구에게 상심이 되며, 나의 수단이 상대에겐 감동적인 목적이 되어버리는, 대단히 매력적이며 독특한 구조에 퐁당 빠져들었다.
 밀란 쿤데라의 장편 소설『농담』은 1948년 체코 공산혁명 직후 혁명적 낙관주의가 강요되던 시대에, 제목 그대로, 한마디 '농담'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삶으로 내몰린 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줄 모르는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풍자와 그러한 사회 자체가 악몽과도 같은 농담임을 날카롭게 폭로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인용하고 풀이하면? 


 우선 소설이 장편이고, 내용면에서도 여러 챕터로 나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중요한 것을 뽑기 힘들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특이하게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거론하겠다.
 소설 전반에 걸쳐 여러 인물들을 통해 뚜렷하게 제시하는 고약한 관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젊음 혹은 어리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냉소이다.
 검은 견장 군대에서의 루드빅 자신과 알렉세이 그리고 중대장, 루체의 고향에서 루체를 강간하는 동갑내기 막내의 행동,

 루체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최연소였기 때문에, 루체는 용기를 내어 소년을 힘껏 밀어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제일 어렸기 때문에 누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소년은 자신의 그런 생각을 보여 주기 위해 루체에게 따귀를 갈겼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p.323)


 특히 헬레나를 사수하려는 인드라의 치기어린 행동들.

 이 어린애 같은 표정은 스무 살의 소년을 기쁘게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이 연령에는 실격이어서, 그에게 남은 것이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어린애다움을 감추는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예컨대 소년은 복장이나 행동거지로 그것을 감추려 했다. 그래서 그는 다신 만만한 듯이 약간 거칠게 굴고, 때로는 냉담한 무관심을 가장했다. (p.401)


 작가의 젊다는 것에 대한 반감은 검은 표지 부대에 새로 부임한 젊은 신임 중대장을 비롯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을 심문한 사무국 동료들, 마르케타, 제마넥 등의 모든 젊음에 대해 공평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중대장을 상대로 한 루드빅의 사유는 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 무렵 나는 대장이라는 인물 속에서 복수심에 불타고 간계를 꾸미는 비열한 사나이를 발견했을 뿐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는 젊고, 그래서 잘난 체해 본 것뿐이었다.
 젊은이들이 그런 연기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죄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는 자신의 겉모습이 어리게 보인다는 것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그 냉혈인 역할을 더욱 광신적으로 수행하려 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열심히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p.131)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맨 먼저 이런 풋내기 배우와 부딪치게 되었단 말인가? 그림엽서 문제로 서기국에서 심문받았을 때 나는 겨우 스무 살을 넘었었고, 나를 심문한 그들도 나보다 고작해야 두 살 정도 위였다.

 그들도 역시, 자신들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가면, 금욕적이고 의지가 확고한 혁명가의 가면으로, 자신들의 미숙한 얼굴을 숨기고 있는 애송이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p.132)


 그 외에도 연주회장 등 여러 곳에 등장하는 조연급 젊은이들 통해 그러한 냉소를 겹겹이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밀란 쿤데라는 유치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인상 쓰면서 글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소설을 한 두 마디로 요약해서 감상과 비평을 한다면? - 가끔 인생은 지독한 농담 같다.

 이 소설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초반에 혁명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책을 덮으려고 했다. 근데 예상외로 잘 읽혔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니 사상이니 하는 말들이 나올 때 마다 내가 예전에 느끼던 멀미가 예상보다 매우 적게 일어났다. (더군다나 그것에 대해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래서 혼자서 뿌듯해 하면서 읽었다. 이 책이 특히 마음에 들었던 점은 루드빅이 말할 때, 나처럼 괄호를 써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는 점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또한 한 부마다 시점이 바뀌면서 서술해 가는 것도 신선했다. 산뜻한 단편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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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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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줄거리  

 1738년 한여름 파리의 생선 좌판대 밑에서 매독에 걸린 젊은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난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 태어나자마자 그는 생선 내장과 함께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나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남고, 대신 그의 어머니는 영아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천재적인 후각의 소유자 그루누이. 처음 파리를 방문한 날, 그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여인의 매혹적인 향기에 취해 살인을 저지른다. 그 후, 향기를 소유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그는 주세페 발디니를 만나 향수제조방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향기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더욱 간절해진 그는 마침내 파리를 떠나 ‘향수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그라스로 간다.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향수를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사람냄새를 증류할 수 있게 되고,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젊고 아름다운 처녀들만을 골라 살인을 저지른다. 

 

  내용상의 차이점    
 

 영화와 소설에서 처음 발견한 차이점은 주인공 그르누이의 외모이다. 원작의 그르누이가 추한 외모와 성장 환경으로부터 비롯되어 사람들로부터 인간이하의 쓰레기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캐릭터라면, 영화 속 그르누이는 그런 면은 조금 줄어들면서 온갖 더러운 것들이 묻은 가운데서도 똘망똘망하게 빛나는 눈망울을 통해 광기어린 천재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듯했다. 내용면에서 살펴보자면, 영화의 경우 첫 장면을 그르누이가 선고를 받는 부분부터 시작하는데, 소설에서는 클라이맥스 직전의 부분에서 볼 수 있다. 즉 영화의 경우 선고를 받는 부분을 먼저 보여주고 그 원이 되는 과거의 사건들을 보여주는 기법을 이용함으로서 관객들이 2시간여 동안 소설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해야 하는 것을 돕고 있다. 그리고 내용상 가장 쉽게 눈에 띠는 차이는 몽펠리에 이야기의 통 편집이다. 시간이 한정된 영화에서는 빠른 진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느슨한 전개를 보인 이 부분을 과감히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내용 전개는 원작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감독은 원작에 충실하게 영화를 재현시켰다. 그러나 그르누이라는 주인공에서 이 둘은 미묘하게 어긋난다. 처음 살구 파는 소녀 살인 장면을 보면, 소설과 다른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그르누이는 짐승과 같이 소녀를 숨어 지켜보며 먹잇감을 노리듯 그녀를 노린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는 오히려 사랑을 찾은 소년의 모습에 가깝다. 또한 원작과 다르게 그 장면에서 소녀는 그르누이에게 말을 걸기까지 한다. 물론 소설에서처럼 그는 소녀의 향기에 집착하며 소녀의 몸 구석구석의 향기를 맡지만, 개인적으로 그것은 사랑을 모르는 소년이 어찌 할 바 모르는 모습과 같이 보였다. 이 후, 영화 중간 중간 그르누이는 살구소녀와의 만남을 회상한다. 마치 사랑했던 옛 연인을 떠올리는 것처럼. 아마 감독은 영화 속 그르누이를 좀 더 감정적인 인물로 표현한 것 같다. 이외에 살구소녀와의 만남에서의 발견했던 차이점은, 원작에서의 소녀는 오이를 팔았었지만, 영화에서는 살구로 바꿨다는 것. 향기와 새콤한 식감을 좀 더 두드러지게 표현하기 위해서 소녀가 파는 것을 오이보다는 과즙이 뚝뚝 흐르는 과일로 바꾼 것 같다. 결말에 다다르면, 소설과 영화는 매우 미묘한 부분에서 어긋나듯이 다르다.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서 그르누이는 자신이 뿌린 향수를 맡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죽인 소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그르누이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일종의 깨달음인 것 같다. 그녀를 죽이지 않고 서로 사랑했더라면 영원히 그녀의 향기를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자신이 담아두고 싶었던 것은 그녀의 향(체취)이 아니라 그녀가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었음을 말이다. 이 장면을 보고나서 그르누이에 대하여 조금은 측은함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래도 감독은 영화 속 그르누이를 좀 더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인물로 표현하여 그 역시 결국은 외로움을 느낄 줄 알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면모를 깊이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그에게 동정과 더불어 감정이입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 같다.

 

  원작과 영화 중 ‘주제’가 어디서 더 잘 나타나 있으며, 원작과 영화 중 어느 것이 더 좋았나?  

 

 주제는 물론 원작에 더 잘 나타나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영화는 소설의 부제인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뛰어난 후각의 소유자 그루누이 보다는 살인자 그루누이에 더 비중을 둔 것 같다. 소설에서의 그루누이는 냄새라는 자기의 타고난 운명을 끝가지 추구하다가 살인까지 하게 된 것이라면, 영화에서의 그루누이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살인을 하는듯한 느낌을 주었다. 여태 보았던 문학영화 중에서는 원작에 비교적 충실했던 작품이었지만, 나는 소설이 더 좋았다. 영화 '향수'는 영화적으로는 평범했고 소설의 영상화로는 너무나 부족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정말 킁킁 거리면 향이 날 것만 같았는데. 영화는 나처럼 책에 매료된 독자들의 상상력에 조금은 미흡했다는 느낌이 든다.


전체적으로 영화를 보고 난 이후의 느낌을 말하라면 원작을 읽은 독자를 위한 영화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듯하다. 보는 중간 중간에 소설에서의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영화는 소설에 굉장히 충실했지만, 그만큼 생략에 의해 결말이 조금은 생뚱맞은 느낌이 들었다. 즉,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이라면 결말에 대해서 수긍을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소설 속의 장 바티스트는 냄새에 대해서 탁월한 능력을 가졌고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서 향수 제조에 매달린다. 그리고 스스로 실패도 하게 되고, 급기야 살인이란 것을 저지르면서 향수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너무도 완벽하게 향수의 달인으로 나온 영화 속의 장 바티스트는 살인에 대한 정확한 의도가 나오지 않고 있다. 당연히 일대기적인 소설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략을 해야 하지만, 살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의 이야기 전개는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에게는 그저 한 미치광이의 미친 짓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 같더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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