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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들은 노처녀 친구얘기다. 치매 걸린 할머니 병문안을 갔는데, 할머니가 친구를 보자마자 손을 덥썩 부여잡고 "아이고, 우리 손녀가아, 우리 손녀가아..." 를 무한 반복하시며 그렇게 우셨다고 한다. 바쁘다고 통 병문안을 가지 못 했던 친구는 마음이 짠해졌다.

 

 '할머니가 그간 혼자서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스스로를 반성하며 울지 마시라고, 더 자주 찾아뵙겠다고 할머니를 다독였다. 그러자 할머니는 더욱 구슬프게 울며 말했다.

 

"아이고야, 이래 살다 죽으면 억울해서 우짜노... 우리 손녀 처녀귀신 되면 우짤꼬..."

 

웃픈 일화이긴 하지만, 치매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도 '노처녀'라고 하면 그렇게들 안쓰럽게 본다. '연애를 못 하고 독수공방하는 외로운 여자' 라는 선입견 때문이리라. 노처녀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 노처녀는 으레 사랑에 목마르고 몸이 안달이나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겉으론 아닌 척 해도) 여자로 다루어지곤 한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노처녀라면 다 그런 줄 알고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수 쓰는 남자다. 이런 남자들은 노처녀 알기를 우습게 알아서 조금만 잘해주면 홀랑 넘어올 거라 착각하고는 말도 안 되는 드립을 치며 들이댄다. 그런 개수작에 넘어갈 거였으면 이날 이때까지 노처녀로 남아있지도 않았다는 걸 왜 모를까.

 

우선 '노처녀=건어물녀'라는 인식부터 바꿔야한다. 연애세포가 바싹 말라 버려서 연애를 포기한 여자를 '건어물녀'라고 한다는데, 단언컨데, '노처녀=건어물녀' 는 절대 아니다!

1년 365일 내내 활발히 사랑 중인 노처녀들도 있다. 나 역시 남자친구가 있다. 문어발인 노처녀도 봤다. 썸을 타든 연애를 하든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기도 한다.

물론 모태쏠로인 노처녀도 있고 건어물녀도 있다. 하지만 소위 '건어물녀'라고 하더라도 외롭고 불쌍한 여자라고 보는 건 착각이다. 건어물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일본 만화 '호타루의 빛'의 주인공 '아메미야 호타루'도 연애를 못 하는 여자가 아니라 연애생각이 없는 여자다(연애하기로 작정하고 난 뒤에는 심지어 양다리까지 걸친다). 하루종일 일하고 피곤에 쩔어서 집에 돌아온 뒤에는 아무에게도 일절 간섭받지 않고 가장 편한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뒹굴면서 가장 좋아하는 책과 TV를, 가장 사랑하는 맥주와 건어물안주를 먹으며 보는 게 행복의 극치라 표현한다.

결혼했다고 해서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아니듯, 노처녀라고 해서 '홀로 외로이 삭막하게 지내다가 우울증으로 고독사했습니다'는 아닌 것이다. '사랑 밖엔 난 몰라'인 노처녀도 있고, '사랑 따윈 필요 없어'인 노처녀도 있고, '사랑,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노처녀도 있는 법이다.

유부녀들이 가끔 그런 질문을 한다. 외롭지 않느냐고. 물론 노처녀에게도 외로운 밤이 있다. 지독한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엔 친구들에게 하소연하기도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외로웠던 순간은 혼자일 때가 아니었다. 둘인데도 하나인 것만 못했던 때가 가장 고독했다.

사랑 때문에 울기도 하고, 사랑을 안 해도 웃기도 하고, 우리 노처녀들은 이렇게 희노애락을 느끼며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답니다. 그러니 처녀귀신될까 걱정마세요, 할머니. 사실 할머니 손녀 딸은 실버타운 들어가서도 섹시한 할아버지랑 눈 맞아서 꽁냥꽁냥 아주 자알~ 지낼 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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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시집가야하지 않겠냐
한치 네가 노력해서
올해 안에는
꼭 가도록 해라

 

새해 떡국을 앞에 두고 엄숙한 표정으로 아빠가 내게 고했다. 결혼은 늘 천천히 해도 된다고 하던 아빠도 딸이 서른 여섯까지 시집 갈 생각도 없이 집에 눌러앉아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친구분들의 딸, 아들 결혼식에 주말마다 불려다니며 노처녀 저격질문을 대신 듣고 계실 아빠에게는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지만, 발칙한 딸내미는 기어이 아빠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아빠...어쩌지...
결혼은 나 혼자 노력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결혼이 나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는
아빠에게

 

아빠. 나도 알아. 세상엔 노력으로 이루낼 수 있는 게 많다는 거.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돼서도 교향곡을 작곡했고, 헬렌 켈러는 3중고를 안았음에도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다지.

김연아는 피겨 불모지에서 세계의 피겨 여왕으로 거듭났고, 박태환이나 양학선도 인간한계를 극복하고 우뚝서서 우리에게 무한 감동과 희망을 선사했어.

어쩌면 나도 죽도록 노력하면 철인 3종경기에서 우승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빠.
결혼은... 나 혼자 할 수 없는 거잖아.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무조건 그런 게 아니잖아.

식장에서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그러니까 그런 남자를 빨리 만나기 위해 노력하라는 얘기 아니겠냐고?
맞아. 아빠 말이 맞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알아가고,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남은 인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하고.

이 모든 걸 두 사람이,
서로, 동시에, 노력해야 한다고.

어떻게 간신히 마음이 통했다고 해도 거기서부터 더 큰 노력이 필요해져. 결혼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야 하니까.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 여건 갖추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아빠도 알지?

개인의 노력만 가지고는 택도 없어.
개인의 무한노력 플러스 은행의 노력과 부동산시장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그렇다는 건 정부의 노력도 중하다는 거고.
괜히 혼족이 늘어나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뿐인가?
이런저런 거 다 어찌저찌 해쳐나갈 요량으로 결혼할 사람을 구해왔다 쳐.
그렇게 기껏 데려온 남자가 아빠 맘에 안 들면 어떡해?

응? 일단 데려와 보라고?
남자이기만 하면 된다고?

아빠. 솔직히 말해봐.
정말 아무나 데려와도 괜찮아?
.
.
아버지. 왜 갑자기 시선을 피하십니까..?

그리고 그 남자네 집에서
날 맘에 안 들어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내 딸을 싫어할 리 없다고?
그런 집엔 못 보낸다고?
.
.
나도 싫어, 아빠.
그런 저런 거 다 따지는 골치아픈 애니까 아빠 딸이 이제껏 결혼을 못한 거야.

근데 아빠, 그거 알아?
내 결혼을 막는 끝판왕은 사실 따로 있어.
그게 뭐냐면...

바로 '운'이야. '타이밍'말이야.

결국엔 모든 게 타이밍이 맞아 떨어져야 할 수 있대. 이게 되게 묘한 게, 안 될것도 되게 하고 될 것도 안 되게 한다더라.

그러니까 봐라?
나의 노력에 그의 노력, 그의 집안과 우리 집안의 노력, 돼지저금통의 노력, 대출기관의 노력, 부동산 시장의 노력, 정부의 노력, 거기에 '결혼운'까지!
아주 온 우주가 나의 결혼을 위해 움직여줘야 내가 결혼할 수 있다고! 어마어마하지?!

아무래도 세상이 아직 날 결혼시킬 준비가 안 되어 있나봐. 나 시집 보내려면 다들 더 노력해야 할 텐데 말이야. 그치?

<그것은 흡사, 기적...>


아빠, 화났어?
헤헤.
어떻게, 지나가는 남자 아무나 붙잡고 막 끌고 와서 그냥 확 결혼해버릴까?

 

근데 그랬다간 아빠 딸 감옥간다.

그러니까 아빠.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음... 사실, 조금 많이 참아야 할 거 같긴 한데,
시작이 반이라고, 나도 노력할게. 응?

 

아빠
우리 오래오래 같이 행복하게 살자♥


(올해는 이미 틀렸다고 보는
불)효녀 한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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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결혼을 못 해?
네가 뭐가 부족해서.

 

노처녀를 향한 관용구 TOP10 안에 들어가는 대사이다. 다른 말들은 듣자 마자 짜증이 치솟는데 이 말은 다르다. 처음 들었을 땐 날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해 주나보다 뭉클하기까지 했다.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이 말을 들으면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여러 일을 겪으면서 찜찜했던 이유를 알게 되자 그 때부터는 더 이상 흘려들을 수 없게 되었다. 좋게 하는 말, 그 이상의 의도를 가지고 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세상엔 많았다. 

좋은 친구를 곁에 두는 건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지만 노처녀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진정한 친구는 제 2의 가족이며 때로는 가족보다 더 큰 힘이 된다. 노처녀에게는 두 종류의 동성친구가 있다. 같은 노처녀 친구거나 유부녀인 친구. 삶의 노선이 달라지면 삶의 방식도 변하기 마련이지만 마음만큼은 늘 한결같이 서로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랴.

다만 그 마음이 미묘하게 어긋날 때, 만나고 나면 괜시리 우울하고 시간이 갈수록 만남의 기쁨보다 스트레스가 커질 때. 그럴 때에는 친구와의 우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예전의 나처럼 뭔가 이상하긴 한데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는 노처녀들은 믿는 도끼에게 발등 찍히기 전에 이 글을 읽고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우선, 노처녀의 팔을 쓰다듬으면서 그윽한 눈길로 다정다감하게 위의 말을 하는 유부녀 친구는 조심해라. 노처녀인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듯한 뉘앙스와 제스처를 풍기면서 다가오니 순진한 노처녀들은 감정적으로 약해지기 십상인데 정신 바짝 차리고 필히 경계해야 한다.

그 나이까지 결혼 못한 '불쌍한 노처녀인 너'에 비해 '결혼한 나'는 '너보단 나은 사람'이라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다. 동정어린 시선을 따뜻한 눈길로 착각하다간 큰 코 다친다. 단지 넘쳐나는 동정심으로 노처녀인 나를 긍휼하게 굽어 내려살펴주시는 것 뿐이다. 본인의 결혼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일부러 연락을 해와서 이것저것 물어본 뒤, 저 말로 마무리하고는 뒤돌아서 '그래. 그래도 내가 얘보단 낫지'라고 위안한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에 성공한 나는 승자이고 노처녀는 패자라는 마인드가 기본전제로 깔려 있기 때문에 노처녀가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면 기분 나빠 한다. 마땅히 가야 할 올바른 길에 오르지도 못하고 도태됐으니 힘든 게 당연한데 왜 안 힘든 척, 괜찮을 척을 하느냐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든 힘들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나오도록 유도한다. 거미줄 같은 유도심문에 '응, 힘들긴 하지.'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측은지심 모드를 스위치온 하고 쓸데없이 과한 리액션으로 위로해준다. 그리고 너라는 노처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데 참 남자들이 보는 눈이 없다는 사족을 덧붙인다. 돌아서는 그녀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걸려 있을 게 눈에 선하다.

 

노처녀 친구를
우월감과 자기위안을
얻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지 말아줘

 

얼마 전 라디오에서 직장을 때려치고 싶을 때 이겨내는 나만의 필살 방법으로 '취준생 친구 만나기'를 추천한 사연을 들었다. 불쌍한 취업준비생 친구를 만나면 직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열심히 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무한경쟁시대에 결혼이라고 예외겠는가. 유부녀들의 고단한 삶에 한 줄기 위안을 주는 노처녀. 어쩌면 당신이 늘 내 편을 들어주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그녀가 사실은 자기삶에 행복을 느끼기 위해 당신을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 함정
무언가 '부족'한 게 있기 때문에 결혼을 '못'한 것이라는 논리를 살펴봐라

 

저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라는 말은 얼핏 '넌 부족한 게 없다'는 칭찬의 말로 들리지만, 뒤집어보면 '네가 부족한 게 없었다면 왜 결혼을 못 했겠니'라는 맥락이 된다. 바꿔 말하면, '네가 뭔가 부족한 게 있으니 결혼을 못한 거겠지'라는 뜻이다. 대놓고 차마 말은 못했을 뿐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각은 못하지만 무의식 중에 저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한번 씩 수습이 안 되는 말 실수를 하면서 실체를 드러내기도 한다(본인은 끝까지 모르는 것도 함정).

 

뭔가 모자라거나 켕기는 게
있으니까
결혼을 못한 거 아냐?

 

너네가 모든 걸 다 갖춰서
결혼한 게 아니듯,
우리라고 뭔가가 부족해서
결혼을 못 한 게 아니야

 

괜히 나쁘게 꼬아서 받아들이는 거라고, 노쳐녀 콤플렉스로 과대망상한 거라고,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내 자신을 한동안 의심했으니까. 하지만 세 번째 함정에 빠지고나서 확신했다. 그냥 하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았다. 세상에는 다분히 나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도 많이.

 

세 번째 함정,
음흉한 목적을 가진 가십제조기들을 조심하라

 

 

따분한 이들의 안주거릴 물어다주는 게 삶의 보람인 가십제조기들. 노처녀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언나 좋은 먹잇감인 모양이다. 이들은 늘 뭔가를 자꾸 캐내지 못해 안달이다. 없는 사연이라도 만들어서 들려줘야 물러나는 집요함의 끝을 보여준다.

오만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속내를 말하도록 부추기는데 거기에 넘어가 미주알 고주알 얘기했다가는 '어머나~ 그랬구나' 하고 뒤돌아서 '내가 아는 노처녀가 있는데, 이랬다더라' 라며 심심풀이 땅콩처럼 아작아작 씹어먹히고 말 것이다. 심지어 없는 얘기까지 살이 보태져서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나게 될 테니 아무쪼록 '안줏거리 여기있습니다요~' 하고 있는 속 없는 속 다 꺼내어놓지 않도록 하자.

 

제발, 내 인생은 내버려두고,
네 인생에 집중해줘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죽은
노처녀의 부탁

 

양의 탈을 쓴 늑대친구를 필히 조심하라고 순진한 노처녀들에게 진심을 담아 조언하는 글을 썼지만, 한편 이 글을 보며 '아니야, 난 아니야, 저런 의도로 말한 적 없어. 나는 진짜 양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이다. 그런 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세상엔 이상한 사람들이 넘쳐나니 그런 사람으로 오해받기 싫다면 그 돌 고이 내려놓아주세요.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면 도대체 노처녀에게 어떤 말을 하라는 거냐, 할 수 있는 말이 없지 않냐 하시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드리고 싶다.

 

노처녀에게는
무관심이
최대한의 따뜻한 관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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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댕-. 보신각 타종 소리가 울려퍼지고 나는 서른 다섯 노처녀에서 서른 여섯 노처녀가 되었다. 소름이 끼쳐 닭살이 돋았다. 서른 다섯 임을 알리던 지난해 종소리를 들으며 올해는 꼭 무언가를 해보자 다짐했었는데. 벌써 1년이라니.

정신차려.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간다. 일, 이년은 순식간이야.

 

툭하면 무섭게 엄포를 놓던 어른들 심정을 이제 알겠다. 단언컨데, 나이 먹으면 다 이렇다는 수많은 속설들 중에 이것만큼은 정설이다. 어떤 도시괴담보다 제일 무섭다.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아♥'친구들의 따뜻한 문자도 종소리에 돋아난 닭살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다. 우리, 복만 받고 나이는 안 받을 수 없는 걸까? 나이 안 받는 대신 복도 안 받는 조건이라도 좋은데. 하지만 현실은 복은 안 주면서 나이는 빼놓지 않고 준다. 정말 너무한다, 너무해.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이 순간에도 시간이 일하는 소리가 들린다. 365일 24시간 풀타임 근무로 36년 째. 힘들지도 않은 지 당최 쉴 생각을 안 한다. 심지어 갈 수록 업무능력이 좋아진다. 서른 다섯번째 일년은 그 어느 해보다 짧았다. 어김없이 정해진 성과가 뭐 그리 급하다고 이렇게 빨리 이루어내고야 마는지.

그래, 이게 다 시간 때문이다.

 시간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내가 걷다가 뛰다가,

넘어졌다가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시간이 속절없이 제 할 일만 한 탓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유난히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대한민국의 나이시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건 억울하다. 언제 태어났든지 간에 1월 1일에 일괄적으로 한 살 더 먹어야 한다니 너무하지 않나. 덕분에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한국인은 한 살 더 많다. 심지어 두 살 더 많은 기간도 있다. 12월 31일 23시 59분 59초에 태어난 아기는 세상에 갓 나오자마자 1초 만에 2살이 되니 만약 아기가 말할 수 있었다면 이게 말이 되냐며 소리쳤을 거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우리도 만으로 세면 안 될까? 다른 나라 사람들과 얘기할 때에 헷갈리지도 않고, 골치아픈 뺄셈도 안 해도 되고. 고령화 시대를 쬐꼼 늦출 수도 있고! 어쩜 이렇게 좋은 점 투성이일 수가. 다음 대통령이 아무쪼록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다.

숫자하나 줄어든다고 노처녀에서 그냥 처녀가 되는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른 여섯에서 서른 넷으로 내려간다면 새해를 덜 우울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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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결혼 안 해요?
남자친구 없어요?

 

최대한 이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말을 돌리고 돌렸건만, 결국 오늘도 노처녀 공식 질문을 받고야 말았다. 마치 연예인들의 찌라시를 접할 때처럼 눈을 반짝이며 묻는 그들은 불과 몇 분전까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거나 하루 세 번을 마주쳐도 '안녕하세요'만 꼬박 세 번씩 주고받으며 스쳐지나가는 딱 그 정도의 사이이다. 어쩌다 말을 트게 된 그들은 고작 몇 번의 문답 만에 '서른 여섯에 미혼'이라는 두 가지 정보를 캐내자마자 똑같은 질문을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말투로 뱉어낸다. 왜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결혼을 안 했는지, 안 한건지 아니면 '못'한 건지, 대체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건지, 그게 그렇게도 궁금해 죽겠나 보다.

  

그러게요, 어쩌다보니......

 

참신하지 못한 그들의 질문만큼이나 나의 대답도 식상하다. 하지만 애초에 습관처럼 가볍게 툭 던지는 질문에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노처녀가 미주알고주알 속사정을 털어놓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사실 이 상황에서 진짜 웃기는 건, 나다. 지긋지긋할 만큼 노처녀 문답을 되풀이 해왔음에도 매번 난감해 하면서 움찔거리는 꼴이 참으로 우습다. 대체 나는 왜 이러는 걸까.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그러게 난 왜 결혼을 안 했지?' 머릿속으로 자문하게 된다. 순식간에 내 안에서 그럴 듯한 이유가 무수히 떠오르지만 어느 것 하나 탐탁치 않다. 정확히 이것때문이라고 한 마디로 꼬집어 말하기에는 영 부족한 감이 든다. 그렇다. 어쩌다 이 나이까지 결혼을 못한 노처녀가 되어버렸는지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표면적인 이유은 명확하다. 결혼할 남자를 못 만났으니까. 결혼 생각이 있는 싱글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통할 이유다. 하지만 노처녀라고 다 같은 노처녀가 아니다. 남모를 사연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남자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어설픈 풋연애와 짝사랑으로 점철된 10대를 지나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36살인 현재까지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지낸 날은 거의 없다. 그럼 짧고 가벼운 연애만 되풀이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늘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길게 만났다. 어릴 적부터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서 그와의 가정을 꾸리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인 시시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친구따라 찾아간 용하다는 역술인은 내게 '현모양처 사주'라고 했다. 혼자 살 팔자라는 말을 들었으면 사주 탓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것도 아니라니 결혼을 못한 건 순전히 내 탓이다. 그 대신 눈물의 사랑찾기 외길인생을 쉼없이 걸어온 건 사주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일을 10년을 넘게 하면 그 분야의 달인이 된다는 데 나는 20년 넘게 쏟아부어서 일개 노처녀가 되었다. 그 덕분에 내 안에 숨겨져 있다는 현모양처의 능력은 그렇게 영원히 봉인된 채로 끝날 위기에 처해 있다.

 

뭘 그렇게 심각해
그냥 '손해보기 싫어서요'라고 받아쳐

 

애했던 그 어떤 남자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해온 나의 소중한 친구들. 나홀로족, 혼족이 트렌드라는데 최신 유행을 앞서 간 우리들은 어쩌다보니 한 명만 빼고 모두 노처녀다. 결혼 그까이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쿨한 여인과 내 생애 봄날을 기다리는 굳세어라 금순이. 무조건 결혼해야겠다더니 짝사랑을 시작한 순정소녀까지. 학창시절에 미래의 배우자를 상상할 땐 우리가 이렇게 싹 다 노처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네가 먼저 갈 거 같아'를 연발했으니까(지금은 '난 이미 틀렸어. 먼저 가'로 바뀌었다).

그래도 유행은 유행인 건지 주변에 노처녀 패밀리가 점점 늘고 있다. 남자가 다가오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싸한 말로 얼려서 쫓아버리는 엘사에 20대 때의 전성기를 여전히 구가하고 있는 팜므파탈에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녀 등등. 노처녀마다 성격도 속사정도 제각각이지만, 뭇사람들의 노처녀에 대한 타박에 분노하고 노처녀의 설움에 한탄하고 그래도 노처녀의 삶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며 낄낄대는 우리의 노처녀들이 함께이기에 든든하다. 

현모양처 사주라는 나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또 다시 사랑 중이다. 아홉살 연하 취준생과 은밀하게 위대하게 연애 중이다. 이 사랑이 나의 봉인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줄지, 노처녀 히스테리의 화려한 서막을 열어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당분간은(아마 꽤 오랫동안) 일개 노처녀로서 살아갈 것 같다. 그러니 지금부터 한 동안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느 36살 철없는 노처녀와 그 주변 노처녀들의 이야기를 생중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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