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결혼을 못 해?
네가 뭐가 부족해서.
노처녀를 향한 관용구 TOP10 안에 들어가는 대사이다. 다른 말들은 듣자 마자 짜증이 치솟는데 이 말은 다르다. 처음 들었을 땐 날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해 주나보다 뭉클하기까지 했다.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이 말을 들으면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여러 일을 겪으면서 찜찜했던 이유를 알게 되자 그 때부터는 더 이상 흘려들을 수 없게 되었다. 좋게 하는 말, 그 이상의 의도를 가지고 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세상엔 많았다.
좋은 친구를 곁에 두는 건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지만 노처녀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진정한 친구는 제 2의 가족이며 때로는 가족보다 더 큰 힘이 된다. 노처녀에게는 두 종류의 동성친구가 있다. 같은 노처녀 친구거나 유부녀인 친구. 삶의 노선이 달라지면 삶의 방식도 변하기 마련이지만 마음만큼은 늘 한결같이 서로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랴.
다만 그 마음이 미묘하게 어긋날 때, 만나고 나면 괜시리 우울하고 시간이 갈수록 만남의 기쁨보다 스트레스가 커질 때. 그럴 때에는 친구와의 우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예전의 나처럼 뭔가 이상하긴 한데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는 노처녀들은 믿는 도끼에게 발등 찍히기 전에 이 글을 읽고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우선, 노처녀의 팔을 쓰다듬으면서 그윽한 눈길로 다정다감하게 위의 말을 하는 유부녀 친구는 조심해라. 노처녀인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듯한 뉘앙스와 제스처를 풍기면서 다가오니 순진한 노처녀들은 감정적으로 약해지기 십상인데 정신 바짝 차리고 필히 경계해야 한다.
그 나이까지 결혼 못한 '불쌍한 노처녀인 너'에 비해 '결혼한 나'는 '너보단 나은 사람'이라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다. 동정어린 시선을 따뜻한 눈길로 착각하다간 큰 코 다친다. 단지 넘쳐나는 동정심으로 노처녀인 나를 긍휼하게 굽어 내려살펴주시는 것 뿐이다. 본인의 결혼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일부러 연락을 해와서 이것저것 물어본 뒤, 저 말로 마무리하고는 뒤돌아서 '그래. 그래도 내가 얘보단 낫지'라고 위안한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에 성공한 나는 승자이고 노처녀는 패자라는 마인드가 기본전제로 깔려 있기 때문에 노처녀가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면 기분 나빠 한다. 마땅히 가야 할 올바른 길에 오르지도 못하고 도태됐으니 힘든 게 당연한데 왜 안 힘든 척, 괜찮을 척을 하느냐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든 힘들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나오도록 유도한다. 거미줄 같은 유도심문에 '응, 힘들긴 하지.'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측은지심 모드를 스위치온 하고 쓸데없이 과한 리액션으로 위로해준다. 그리고 너라는 노처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데 참 남자들이 보는 눈이 없다는 사족을 덧붙인다. 돌아서는 그녀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걸려 있을 게 눈에 선하다.
노처녀 친구를
우월감과 자기위안을
얻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지 말아줘
얼마 전 라디오에서 직장을 때려치고 싶을 때 이겨내는 나만의 필살 방법으로 '취준생 친구 만나기'를 추천한 사연을 들었다. 불쌍한 취업준비생 친구를 만나면 직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열심히 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무한경쟁시대에 결혼이라고 예외겠는가. 유부녀들의 고단한 삶에 한 줄기 위안을 주는 노처녀. 어쩌면 당신이 늘 내 편을 들어주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그녀가 사실은 자기삶에 행복을 느끼기 위해 당신을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번째, 함정
무언가 '부족'한 게 있기 때문에 결혼을 '못'한 것이라는 논리를 살펴봐라
저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라는 말은 얼핏 '넌 부족한 게 없다'는 칭찬의 말로 들리지만, 뒤집어보면 '네가 부족한 게 없었다면 왜 결혼을 못 했겠니'라는 맥락이 된다. 바꿔 말하면, '네가 뭔가 부족한 게 있으니 결혼을 못한 거겠지'라는 뜻이다. 대놓고 차마 말은 못했을 뿐 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각은 못하지만 무의식 중에 저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한번 씩 수습이 안 되는 말 실수를 하면서 실체를 드러내기도 한다(본인은 끝까지 모르는 것도 함정).
뭔가 모자라거나 켕기는 게
있으니까
결혼을 못한 거 아냐?
너네가 모든 걸 다 갖춰서
결혼한 게 아니듯,
우리라고 뭔가가 부족해서
결혼을 못 한 게 아니야
괜히 나쁘게 꼬아서 받아들이는 거라고, 노쳐녀 콤플렉스로 과대망상한 거라고,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내 자신을 한동안 의심했으니까. 하지만 세 번째 함정에 빠지고나서 확신했다. 그냥 하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았다. 세상에는 다분히 나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도 많이.
세 번째 함정,
음흉한 목적을 가진 가십제조기들을 조심하라
따분한 이들의 안주거릴 물어다주는 게 삶의 보람인 가십제조기들. 노처녀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언제나 좋은 먹잇감인 모양이다. 이들은 늘 뭔가를 자꾸 캐내지 못해 안달이다. 없는 사연이라도 만들어서 들려줘야 물러나는 집요함의 끝을 보여준다.
오만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속내를 말하도록 부추기는데 거기에 넘어가 미주알 고주알 얘기했다가는 '어머나~ 그랬구나' 하고 뒤돌아서 '내가 아는 노처녀가 있는데, 이랬다더라' 라며 심심풀이 땅콩처럼 아작아작 씹어먹히고 말 것이다. 심지어 없는 얘기까지 살이 보태져서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나게 될 테니 아무쪼록 '안줏거리 여기있습니다요~' 하고 있는 속 없는 속 다 꺼내어놓지 않도록 하자.
제발, 내 인생은 내버려두고,
네 인생에 집중해줘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죽은
노처녀의 부탁
양의 탈을 쓴 늑대친구를 필히 조심하라고 순진한 노처녀들에게 진심을 담아 조언하는 글을 썼지만, 한편 이 글을 보며 '아니야, 난 아니야, 저런 의도로 말한 적 없어. 나는 진짜 양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이다. 그런 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세상엔 이상한 사람들이 넘쳐나니 그런 사람으로 오해받기 싫다면 그 돌 고이 내려놓아주세요.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면 도대체 노처녀에게 어떤 말을 하라는 거냐, 할 수 있는 말이 없지 않냐 하시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