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시집가야하지 않겠냐
한치 네가 노력해서
올해 안에는
꼭 가도록 해라
새해 떡국을 앞에 두고 엄숙한 표정으로 아빠가 내게 고했다. 결혼은 늘 천천히 해도 된다고 하던 아빠도 딸이 서른 여섯까지 시집 갈 생각도 없이 집에 눌러앉아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친구분들의 딸, 아들 결혼식에 주말마다 불려다니며 노처녀 저격질문을 대신 듣고 계실 아빠에게는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지만, 발칙한 딸내미는 기어이 아빠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아빠...어쩌지...
결혼은 나 혼자 노력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결혼이 나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는
아빠에게
아빠. 나도 알아. 세상엔 노력으로 이루낼 수 있는 게 많다는 거.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돼서도 교향곡을 작곡했고, 헬렌 켈러는 3중고를 안았음에도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다지.
김연아는 피겨 불모지에서 세계의 피겨 여왕으로 거듭났고, 박태환이나 양학선도 인간한계를 극복하고 우뚝서서 우리에게 무한 감동과 희망을 선사했어.
어쩌면 나도 죽도록 노력하면 철인 3종경기에서 우승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빠.
결혼은... 나 혼자 할 수 없는 거잖아.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무조건 그런 게 아니잖아.
식장에서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그러니까 그런 남자를 빨리 만나기 위해 노력하라는 얘기 아니겠냐고?
맞아. 아빠 말이 맞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알아가고,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남은 인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하고.
이 모든 걸 두 사람이,
서로, 동시에, 노력해야 한다고.
어떻게 간신히 마음이 통했다고 해도 거기서부터 더 큰 노력이 필요해져. 결혼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야 하니까.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 여건 갖추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아빠도 알지?
개인의 노력만 가지고는 택도 없어.
개인의 무한노력 플러스 은행의 노력과 부동산시장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그렇다는 건 정부의 노력도 중하다는 거고.
괜히 혼족이 늘어나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뿐인가?
이런저런 거 다 어찌저찌 해쳐나갈 요량으로 결혼할 사람을 구해왔다 쳐.
그렇게 기껏 데려온 남자가 아빠 맘에 안 들면 어떡해?
응? 일단 데려와 보라고?
남자이기만 하면 된다고?
아빠. 솔직히 말해봐.
정말 아무나 데려와도 괜찮아?
.
.
아버지. 왜 갑자기 시선을 피하십니까..?
그리고 그 남자네 집에서
날 맘에 안 들어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내 딸을 싫어할 리 없다고?
그런 집엔 못 보낸다고?
.
.
나도 싫어, 아빠.
그런 저런 거 다 따지는 골치아픈 애니까 아빠 딸이 이제껏 결혼을 못한 거야.
근데 아빠, 그거 알아?
내 결혼을 막는 끝판왕은 사실 따로 있어.
그게 뭐냐면...
바로 '운'이야. '타이밍'말이야.
결국엔 모든 게 타이밍이 맞아 떨어져야 할 수 있대. 이게 되게 묘한 게, 안 될것도 되게 하고 될 것도 안 되게 한다더라.
그러니까 봐라?
나의 노력에 그의 노력, 그의 집안과 우리 집안의 노력, 돼지저금통의 노력, 대출기관의 노력, 부동산 시장의 노력, 정부의 노력, 거기에 '결혼운'까지!
아주 온 우주가 나의 결혼을 위해 움직여줘야 내가 결혼할 수 있다고! 어마어마하지?!
아무래도 세상이 아직 날 결혼시킬 준비가 안 되어 있나봐. 나 시집 보내려면 다들 더 노력해야 할 텐데 말이야. 그치?

<그것은 흡사, 기적...>
아빠, 화났어?
헤헤.
어떻게, 지나가는 남자 아무나 붙잡고 막 끌고 와서 그냥 확 결혼해버릴까?

근데 그랬다간 아빠 딸 감옥간다.
그러니까 아빠.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음... 사실, 조금 많이 참아야 할 거 같긴 한데,
시작이 반이라고, 나도 노력할게. 응?
아빠
우리 오래오래 같이 행복하게 살자♥

(올해는 이미 틀렸다고 보는
불)효녀 한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