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결혼 안 해요?
남자친구 없어요?
최대한 이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말을 돌리고 돌렸건만, 결국 오늘도 노처녀 공식 질문을 받고야 말았다. 마치 연예인들의 찌라시를 접할 때처럼 눈을 반짝이며 묻는 그들은 불과 몇 분전까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거나 하루 세 번을 마주쳐도 '안녕하세요'만 꼬박 세 번씩 주고받으며 스쳐지나가는 딱 그 정도의 사이이다. 어쩌다 말을 트게 된 그들은 고작 몇 번의 문답 만에 '서른 여섯에 미혼'이라는 두 가지 정보를 캐내자마자 똑같은 질문을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말투로 뱉어낸다. 왜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결혼을 안 했는지, 안 한건지 아니면 '못'한 건지, 대체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건지, 그게 그렇게도 궁금해 죽겠나 보다.
그러게요, 어쩌다보니......
참신하지 못한 그들의 질문만큼이나 나의 대답도 식상하다. 하지만 애초에 습관처럼 가볍게 툭 던지는 질문에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노처녀가 미주알고주알 속사정을 털어놓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사실 이 상황에서 진짜 웃기는 건, 나다. 지긋지긋할 만큼 노처녀 문답을 되풀이 해왔음에도 매번 난감해 하면서 움찔거리는 꼴이 참으로 우습다. 대체 나는 왜 이러는 걸까.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그러게 난 왜 결혼을 안 했지?' 머릿속으로 자문하게 된다. 순식간에 내 안에서 그럴 듯한 이유가 무수히 떠오르지만 어느 것 하나 탐탁치 않다. 정확히 이것때문이라고 한 마디로 꼬집어 말하기에는 영 부족한 감이 든다. 그렇다. 어쩌다 이 나이까지 결혼을 못한 노처녀가 되어버렸는지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표면적인 이유은 명확하다. 결혼할 남자를 못 만났으니까. 결혼 생각이 있는 싱글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통할 이유다. 하지만 노처녀라고 다 같은 노처녀가 아니다. 남모를 사연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남자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어설픈 풋연애와 짝사랑으로 점철된 10대를 지나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36살인 현재까지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지낸 날은 거의 없다. 그럼 짧고 가벼운 연애만 되풀이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늘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길게 만났다. 어릴 적부터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서 그와의 가정을 꾸리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인 시시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친구따라 찾아간 용하다는 역술인은 내게 '현모양처 사주'라고 했다. 혼자 살 팔자라는 말을 들었으면 사주 탓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것도 아니라니 결혼을 못한 건 순전히 내 탓이다. 그 대신 눈물의 사랑찾기 외길인생을 쉼없이 걸어온 건 사주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일을 10년을 넘게 하면 그 분야의 달인이 된다는 데 나는 20년 넘게 쏟아부어서 일개 노처녀가 되었다. 그 덕분에 내 안에 숨겨져 있다는 현모양처의 능력은 그렇게 영원히 봉인된 채로 끝날 위기에 처해 있다.
뭘 그렇게 심각해
그냥 '손해보기 싫어서요'라고 받아쳐
연애했던 그 어떤 남자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해온 나의 소중한 친구들. 나홀로족, 혼족이 트렌드라는데 최신 유행을 앞서 간 우리들은 어쩌다보니 한 명만 빼고 모두 노처녀다. 결혼 그까이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쿨한 여인과 내 생애 봄날을 기다리는 굳세어라 금순이. 무조건 결혼해야겠다더니 짝사랑을 시작한 순정소녀까지. 학창시절에 미래의 배우자를 상상할 땐 우리가 이렇게 싹 다 노처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네가 먼저 갈 거 같아'를 연발했으니까(지금은 '난 이미 틀렸어. 먼저 가'로 바뀌었다).
그래도 유행은 유행인 건지 주변에 노처녀 패밀리가 점점 늘고 있다. 남자가 다가오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싸한 말로 얼려서 쫓아버리는 엘사에 20대 때의 전성기를 여전히 구가하고 있는 팜므파탈에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녀 등등. 노처녀마다 성격도 속사정도 제각각이지만, 뭇사람들의 노처녀에 대한 타박에 분노하고 노처녀의 설움에 한탄하고 그래도 노처녀의 삶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며 낄낄대는 우리의 노처녀들이 함께이기에 든든하다.
현모양처 사주라는 나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또 다시 사랑 중이다. 아홉살 연하 취준생과 은밀하게 위대하게 연애 중이다. 이 사랑이 나의 봉인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줄지, 노처녀 히스테리의 화려한 서막을 열어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당분간은(아마 꽤 오랫동안) 일개 노처녀로서 살아갈 것 같다. 그러니 지금부터 한 동안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느 36살 철없는 노처녀와 그 주변 노처녀들의 이야기를 생중계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