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 읽는 방법
추월용민 / 운주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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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문관으로 배우는 선어록 읽는 방법»(운주사, 1996)은, 그 제목만 놓고 보면, 꼭 무슨 선어록 해설서 같은 짐작이 든다. 나 역시 이 책을 서점에서 처음 접했을 때 제목만 보고 쓸데없는 고칙 해설서이겠거니 하고 아예 들춰보지도 않았다. 나중에야 도서관에서 이 책을 접하고 내용을 살펴보니, 이것은 해설서가 아니라 당송의 선어록 한문독해를 위한 책이었다. 이 책의 의의를 살피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漢文’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 마침 저자는 이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漢文’이라 하고 중국에서 ‘古文’이라고 하는 것은, 周秦시대의 말하기 단어를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쓰기 단어이며, 그밖에 후대의 작가가 그러한 고대의 쓰기 단어를 흉내내서 쓴 文語文(擬古文)도 포함하고 있다. 戰後까지는 그것을 일본의 고전으로서 보통교육의 ‘國語’科 안에서 가르쳐 왔다. 그 흐름에 따라 오늘의 고등학교의 ‘漢文’교육은 일본어의 ‘古文’을 기준으로 가르치는 것으로 주로 ‘先秦의 고전어’로서, 말하자면 ‘사서오경’을 비롯한 ‘당송팔가문’ 등으로 일컬어지는 ‘擬古文’을 읽는 한문인 것이다. 따라서 당송의 구어를 자유로이 사용한 ‘禪宗語錄漢文’을 읽기에는 그대로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273-274면)

저자 아키즈키 료민(秋月龍珉)의 설명처럼, 우리가 중국고전을 읽기 위해 배우는 한문은 ‘고문’ 내지 ‘의고문’에 해당한다. 그러나 선어록 고칙은 대부분 스승과 제자간에 깨달음에 이른 인연실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것으로서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자로 가득하다. 따라서 당송의 구어체가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는 만큼 기존의 고문 문법만으로는 선어록 독해를 하기가 아주 어렵다. 더구나 그 정신세계의 층위가 전혀 다른 만큼 제아무리 고문에 능통한 학자라도 선어록 앞에서는 물러설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무문관으로 배우는 선어록 읽는 방법»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나온 저작이다. 다시 말해, 선어록은 당송의 구어체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고문이나 의고문의 문법이 아닌 새로운 문법이 필요한데, 그 문법의 초석을 놓기 위해 이 책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전형적인 문법책은 아니다. «무문관» 48칙을 한 구절 한 구절 전부 번역하고 구문과 문법을 설명하였으며, 책 말미에는 학습문법(school grammar) 수준의 문법을 종합정리해서 실어놓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이 책은 «무문관» 번역본이기도 하고, 무문관 및 선어록 독해를 위한 문법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에, 번역이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정확하다.

물론 학자 특유의 고집이 드러나는 대목들이 있긴 있다. 한 예로, 제9칙 대통지승불 대목을 읽어보자:

흥양의 청양화상은 어느 스님이 “‘대통지승불은 십겁이라는 오랜 시간을 좌선했지만 불법은 현전하지 않아 불도를 성취하지 못했다’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으니, 화상은 “그 질문은 과녘을 정확히 맞추었구나.”라고 했다.

그 스님은, “도량에서 좌선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째서 불도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거듭) 물었다. 청양화상은 말했다. “그것은 저 분(대통지승불)이 스스로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80-81면)

저자는 마지막 문장 “爲伊不成佛”을 “그것은 저 분이 스스로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로 옮겼지만, “그대가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로 옮겨야 한다. 이 공안은 임제의 “부처는 作佛하지 않는다”는 평으로 깨끗이 끝나는 것이어서 더 이상 토를 달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자는 나름의 신념이 있어서 “나는 ‘그것은 저 분이 대비천제의 마음에서 스스로 성불하지 않는 까닭이다’라고 풀이하고 싶은 독자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78)고 밝혔던 것이다. 이 신념 때문에 결국 (내가 보기에) 오역을 했지만, 사실 이런 대목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즉, 저자가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을 극도로 삼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 구문, 문법에만 치중할 뿐 이러한 독자적 해석이나 토달기는 아주 예외에 속한다.

이러한 겸허한 자세는 그가 선어록 독해를 배움에 있어서 여러 스승들을 거쳤던 과정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는 일반 학자들뿐만 아니라 수행자로부터 선어록 독해를 배웠다, “그런 식으로 읽는다면 조주화상이 우시겠지” 하는 핀잔도 들으면서.


 

«무문관»은 «벽암록» 100칙의 절반쯤 되는 48칙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험준하기로 유명한 공안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책이 아닌데도 국내에 «무문관» 48칙에 관한 해설서가 이미 출간되어 있다. 한형조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여시아문, 1999)가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물론 선불교의 역사와 해설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읽히는 맛이 있긴 하지만, 그 해설이라는 것이 의리선에 치우쳐 있어 얼토당토 않는 결론에 도달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의 해설들은 실참이나 수행과는 관계가 없을 성싶다. 또한 선불교의 역사나 일화는 기존에 잘 알려진 것들이고 «선의 황금시대»(경서원, 1986)에서 원용한 바도 드물지 않아 그 내용이 새로울 것도 없다. 번역 역시 저자의 개성이 앞서는 발랄한 번역이다.

«무문관»을 읽으려면, 오히려 이 책, «무문관으로 배우는 선어록 읽는 방법»을 추천한다. 특히 당송시대의 한문선어록을 독해하고자 하는 분들은 반드시 이 책을 거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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