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프린트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이수영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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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선가 이 책을 소개한 글을 봤던 기억이 있다. 인간복제 문제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꼭 읽어봐야지 다짐해놓고는 한동안 잊고 지내온 책이다. 그러다 우연히 직장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에 빌려보게 되었다.
  오랜 기다림 뒤라 그럴까. 책의 서두에 해당하는 프롤로그만 읽었을 뿐인데 그만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몇 마디의 오고가는 말로 사랑에 빠져버린 연인 같다고나 할까.

  "2주 전, 나의 쌍둥이 자매이면서 엄마이기도 한 이리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멘트로 시작되는 책은 유명 피아니스트인 이리스(엄마)가 시리(나)를 복제하게 된 과정을 회고하면서부터 전개된다. 
  다발경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으로 점점 죽어가고 있는 이리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자신을 복제하게 되고 이를 스스로 임신함으로써 "쌍둥이 자매면서 엄마이기도 한" 시리를 낳게 된다. 하지만 엄마의 욕망에 의해 복제된 시리의 삶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시리는 엄마(이리스)의 병이 깊어질수록, 자신에 대한 엄마의 집착이 강열해질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찾지 못한 체 '작은 이리스'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엄마의 생명선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고 나의 생명선은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어요. 두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선 결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나 아니면 엄마, 엄마 아니면 내가 살아남을 테지요? 내가 성인이 되는 문턱에서 우리 두 사람은 둘로 갈라졌어요. 내가 드디어 모든 사실을 파악하게 되고 불화가 시작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마침내 도래한 거예요." (p122)

  1인칭으로 시작되어 여러 시점을 넘나들며 자신과 타인의 심리를 오가는 모습은 '복제'라는 소재와 맞물려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순응하고 갈등하는, 고민하고 저항하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일인다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노련한 배우를 보는 것 같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는 넘나드는 감정의 변화는 암전 사이를 넘나드는 연극처럼 극적이었기에 책을 읽는 동안 캬를로테 케르너라는 작가의 이름을 계속해서 쳐다보게 되었다. 
  또한 매끄러운 번역이 일품이다. 마치 우리나라에 오래 살아온 토종 작가의 글처럼 군더더기가 없고 매끄럽다. 원문의 우수함도 있겠지만 역자의 부드러운 번역이 이 책을 더 빛내는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책이 절판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책의 구성이나 내용을 볼 때 여러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몇 해 전 어느 신문에서 이미 인간복제가 성공했으며 그 중 일부는 일상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어느 과학자의 주장을 들은 기억이 난다.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미 우리의 삶 속에도 복제라는 말이 일상적인 용어로 자리 잡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복제문제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아직 낮은 것 같다. 단순히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막연함만 있을 뿐 이것이 갖고 올 우리사회의 영향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계기로 점점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인간복제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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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개정증보판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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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과에 다니던 친구가 자신의 전공에 막 취미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늘어놓던 장광설이 기억난다. 그 요지는 모든 학문의 기초가 물리학이고 어느 분야이고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는 최고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크게 공감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살아보니 점점 더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물리학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고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는 법칙이자 전자, 컴퓨터는 물론이고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그 원리와 이론이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물리학, 천문학과 같은 과학이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공식과 어려운 용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호관계는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과학적으로 풀어보고 이해하려는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 책이 쏟아져 나오면서 쉽게 풀이한 물리학, 천문학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고 일반인 대상의 강연이나 세미나가 열리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벼르고 벼른 책이 바로 <과학 콘서트>다. 한 때 모 방송국에서 제작했던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를 통해 소개되면서 더 빛을 받게 된 책으로 과학을 일상으로 끌어들이는데 공이 큰 교양과학서이다. 당연히 수많은 교육기관, 청소년단체에서 권장도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사실 <과학 콘서트>가 일반인들, 특히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운 감이 없질 않다. 백화점, 대중음악 등을 예로 들면서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많지만 아무리 쉽게 풀어 적었다고는 하나 과학은 과학이고, 학문은 학문이다. 한정된 페이지에 전체적인 과학이론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다보니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다.
  그러나 과학 대중화를 위해 오랫동안 매진해 온 작가의 열정만 보더라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정재승 님의 모습이 여느 교양서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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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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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조지 오웰의 <1984>(1949)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이 쓰인 시대도 비슷하고 미래사회를 암울하게 그린 것도 그렇고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회조직이나 개인 생활면에서 파격적인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는 <1984>에 비하면 좀 더 시각적이고 감각적이었다. 미래의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개인 사생활에 대한 묘사도 남달랐다.

  '신세계'에서 인간은 직급에 따라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복제했고 어머니나 가족이라는 개념은 혐오의 대상으로 세뇌시켰다. 사회와 조직에 필요한 이념을 끝없이 반복 주입해 원하는 인간형으로 만들었고 어릴 때부터 성을 놀이의 대상으로 교육시켜 성인이 되었을 때는 상대를 바꿔가며 섹스를 즐기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물론 순결이나 결혼, 가정 따위는 반사회적인거나 혐오스러운 단어로 인식되어 입에 올리는 것도 꺼리게 되었다. 또한 '소마'라는 환각제를 통해 슬픔이나 고독이라는 개인감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과 사회가 완벽한 균형을 이룬, 어디 한군데서도 불평이나 불만이 없는 완전한 유토피아를 완성했다.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나 노령이란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아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연인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상도 없어. 그들은 조건반사 교육을 받아서 사실상 마땅히 행동해야만 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뭔가가 잘못되면 소마가 있지" (p274)

  하지만 버나드는 이 모든 것이 싫었다. 소마를 통해 즐거움을 얻고 적당한 대상을 골라 섹스를 하는 만인의 존재가 아닌, 슬픔이나 괴로움, 고독을 감내해야하는 온전한 자신이길 원했다.
  그는 평소 흠모하던 레니나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은 신세계의 이상에서 벗어난 야만인들, 이를테면 오늘날의 아프리카 오지에 살고 있는 원주민과 같은 부류로 신세계의 해택이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있는 존재들이었다. 여기서 버나드는 신세계에 살다가 우연한 사고로 그곳에 남게 된 린다와 그녀의 아들 존을 신세계로 데려오게 된다.
  문명사회를 접한 존의 눈에는 모든 것이 비정상적일 뿐이었다. 인간은 기계장치의 부품에 불과했고 사회는 이를 운영하는 정제된 메뉴얼이었다. 인간성이나 감정이 들어갈 틈이 없는, “공유, 균등, 안정”의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신세계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지만 실상은 외부적인 자극이나 요인에 의해 인간이 맞춰진 지극히 통제되고 폐쇄된 사회였던 것이다. 조직화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태아 때부터 조건반사를 거듭했으며 섹스와 소마를 통해 개인의 환락을 제공했다. 물론 여기에 길들여진 인간은 스스로의 감옥을 보지 못한 체 현실 속에 묻혀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야만인 존은 달랐다.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p299) 라고 외치며 탈문명을 선언한다.

  책이 발표되던 1930년대는 기술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1939~1945)의 공포가 겹쳐지던 시대였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마냥 좋게만 볼 수 없었던 시대에 헉슬리는 인류의 미래를 경고했다. 물론 멀티미디어의 폭발적인 발전이라든가 각종 질병의 정복을 내다봄으로써 보다 나은 내일 그리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런 기술의 어두운 면을 더 걱정했다. 인간성 상실, 성의 상품화, 가족의 해체, 사회의 획일화 등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문제점은 ‘멋진 신세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는 존과 레니나 사이에서 극명하게 드러닜다. 존과 레니나는 서로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들이 자라온 상반된 환경 탓에 격한 오해만 불러일으켰다. 존은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임으로서 사랑을 약속받고 싶어 했지만 사랑이나 결혼이라는 개념이 없는 레니나로서는 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안타깝게 비껴가는 이들의 사랑에서 인간 개개인의 감정이 배제된 전체주의적 모순, 신세계가 갖고 있는 유토피아의 허상을 아이러니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햄릿, 오델로,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왕과 같이 셰익스피어의 글이 인용되어 처음에는 조금 난해하게 다가왔지만 계속 음미하다보니 이야기 자체에 무게감이나 무대극 같은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켰다.
  하지만 옛날(1998년)에 번역된 책이라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부분도 종종 보였다. 원문에 충실하고자 했던 번역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매끄럽게 의역해 놓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기회가 된다면 최근 번역된 다른 번역가의 책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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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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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쪽으로 높이 솟구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언덕 경사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경사면 일대에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중턱에서 꼭대기를 향해 크고 작은 사각형 동굴들이 무수히 뚫려 있었다. 개중에는 층층이 이어진 동굴도 있었고, 어떤 것은 동굴 하나가 다른 2층짜리 동굴에 맞먹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동굴들이 위치한 언덕 단면은 달빛을 받아 검푸른 빛을 띠었으며, 동굴들은 하나같이 움푹 파인 눈가처럼 어두컴컴했다." (p213)
  (막고굴은 둔황을 대표하는 유적지로 수많은 불상과 불화가, 불교서적이 발굴되었던 수백여개의 석굴군을 말한다. ) 

  <둔황>에서 '둔황'은 후반부에 잠시 나올 뿐이다. 하지만 그 전편에 흐르는 장엄함은 돈황의 모습과 비견될 만했다. 모래산(명사산) 절벽 끝을 가득 메운 불교문화의 보고는 수천년의 시간의 거치면서 많이 낡고 퇴색되어 버렸지만 그 깊은 곳에 감추어진 기원과 바램은 소설 전편을 감돌고 있었다. 불교에 대한 각별한 조애가 없더라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서사를 통해 역사를 되세김질해온 인간의 이상과 고대 서아시아(위구르족)의 문화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진사시험에 낙방한 조행덕은 죽음도 불사하지 않던 위구르족 여인을 통해 서하 지방과 그곳에 만들어진 문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자석처럼 이끌린 그는 고향(송나라)을 등진체 서하로 여행을 떠난다. 서하 지역은 서방과의 무역거래가 시작되면서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있었지만 거란과 대적중인 송나라의 외면으로 인해 서하국이나 토번에의해 실질적으로 점령되고 있었다.
  상단을 통해 서하에 들어온 조행덕은 우연히 서하국의 병사가 되었고 거기서 서하군 장수 주왕례와 위구르 왕족 여인을 만나다. 왕족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 조행덕은 흥경으로 서하어를 배우러 떠났고 그 사이 주왕례는 왕종 여인을 연모하게 된다...
 
  조금 진부할 수도 있는 스토리지만 빠르게 전개되는 사건과 적당한 양념들 합쳐져 지겨운 줄 모르고 읽었다. 사막의 광활함이나 전쟁의 잔혹함, 남자의 욕망이나 애틋한 사랑이 이야기의 흥을 더했다. 유비 중심으로 중국 역사를 서술했던 '삼국지'처럼 조행덕이라는 일개 평민을 통해 실크로드의 시작과 그 중심에 있었던 도시들의 흥망을 이야기했다. 
  앞서 말했던 둔황은 서역과의 무역거래가 이루어지던 길목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로 사막을 관통하는 실크로드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도시다. 작가도 지역적인 특징 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큰 의미를 둔 것 같다. 수많은 벽화와 불상이 있었던 불교문화의 보고였지만 문화재에 대한 이해부족과 이민족의 약탈로 껍데기만 남아버린 지금의 모습에서 유와 무가 혼재된,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인간의 애처로운 모습을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곧 둔황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로 여행을 떠난다.  아마 몇 일 후면 둔황의 막고굴 앞에서 뜨거운 땀을 훔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을 거쳐갔던 조행덕의 영혼을 기억하기에 쉬 지나칠 수 없지 싶다. 막고굴의 어두운 동굴 속에는 조행덕의 이상과 사랑, 열정이 여전히 숨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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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문 뒤의 야콥
페터 헤르틀링 지음, 김의숙 그림, 한경희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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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굉장히 초초했다. 소설은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마무리 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과연 야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까? 이제 몇 페이지도 안 남았는데 작가는 과연 어떻게 수습하려고 계속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거지? " 하는 조바심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극적으로 풀려버린다. "아하! 그래, 이거면 되겠군." 하며 막막했던 가슴이 시원스레 뚫려버렸다.

  야콥, 그 이름도 그렇지만 <파란 문 뒤의 야콥>이라는 제목도 조금 낯설고 이국적이었다. 마치 이슬람 문화권의 이야기인 것도 같고 동화나 우화 같은 느낌도 받았다. 하지만 이 책을 접한 지는 좀 된다. 몇 년 전부터 학생들에게 줄 책 선물을 고르려다가 저렴한 가격과 좋은 평들에 끌려 두세 권을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때마나 내가 직접 읽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책을 고르면서 접했던 대중매체의 분위기에 이미 질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직접 펼쳐드니 그간의 느낌과는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청소년용이라는 단순한 범주에 넣기에는 상당히 심오한(?)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일어나는 주변의 변화에 민감해진 야콥이 상상속의 대상과 이야기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린다는 이야기지만 단순히 한 아동의 심리적 갈등을 묘사했다기보다는 정신병리학적인 관점이 추가된, 일종의 사례집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정신분열증이나 다중인격과 같이 영화에서나 봐왔던 내용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심심풀이 소설로서 읽기에는 그 속에 깃든 심리묘사와 행동패턴이 예사롭지 않아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기승전결이 분명한 보편적인 소설과 비교하면 색다른 경험이었다.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독백과 내레이션으로만 구성되는 일인극을 관람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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