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이레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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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다음처럼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하라! 기쁨과 슬픔에 휘둘리거나 지나간 과거, 오지 않은 미래에 연연하지 말라. 당신이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내다보라."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이를 통해 인생의 참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책으로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보거나 읽어봤던 내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만만한 문제는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을 객관화하라? 말이야 쉽지 아옹다옹 살아가는 현실 속에 중심을 잃지 않고 평정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쉽겠는가.

  공기의 존재처럼 평소에는 잊고 살았던 삶의 원리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책이기에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조금 식상한 내용일 수도 있겠지만 이래라저래라 하는 참견이나 잔소리로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로 생각하고 음미해 본다면 좋지 싶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 책을 잘못 받아들이면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것. 사망이나 불치병, 교통사고와 같은 내용이 많다보니 책을 읽는 내내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인데 이런 노력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유한한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체험들을 통해 삶 자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책은 읽고 음미하되 일상의 의지까지 함몰시켜 버려서는 안될 것 같다. 

 

  사실 책장에 꽂아만 놓고 손이 가질 않던 책이었는데 이번에 더 좋은 사람에게 분양을 주게 되었다. 떠나보낸다고 생각하니 더 애절해진 것일까, 아직 읽지도 못한 책을 남에게 넘긴다는 것이 아깝기도 해서 부랴부랴 읽게 되었다. 

  한참을 읽다보니 한번 읽고 치워버리는 책이 아니라 오래토록 봐야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 무료하고 힘겨울 때 읽어볼 수 있는, 영양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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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행 정신과학총서 4
이경숙 지음 / 정신세계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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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으로 풀어 본 삶, 죽음, 영혼"이라는 부재가 붙은 이 책은 우리가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정신적인 부분, 영혼이나 전생, 생명이나 죽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한다. 특히 불교의 관점에서 많은 부분을 풀어놓는다. 
 
  몇 년 전,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국어선생님으로부터 '최고'라는 극찬과 함께 선물 받고는 지금까지 읽기를 미뤄온 책이다. 책을 받았을 당시에는 원자니 우주, 영혼, 마음이니 하는 방대하고 형이상학적인 주제에다 말나식, 아뢰야식과 같은 생소한 용어에 질려 결려 읽기를 포기했었다. 인간을 정신세계를 논하면서 원자의 불확정성과 시간의 상대성과 우주의 생성원리를 거론하고 있었으니 나의 '작심3일'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리라. 
  이런 무시무시한 책을 다시 폈다. 소설의 재미에 한창 빠져있다 문득, 너무 인생을 가볍게 사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은 심각해지고 싶은 욕구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다시 도전하리라, 인간정신의 심오함에 다시 온몸을 맡기리라!" ^^
 
  역시 책은 어려웠다. 특히 우주와 물질, 생명에 대해 설명하는 1, 2장은 거의 물리학 전공서적 수준이었다. 하지만 조금 집중하다보니 그럭저럭 읽혔다. 특히 말나식이나 아뢰야식에 대한 개념이 잡히고 나자 한결 읽기가 수월해졌다.
  말나식이란 "감정, 본능, 정서 등에 가까운 것이다. (중략) 모든 생리적인 욕구나 생존의 본능에 바탕을 둔 결정은 말나식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보면 된다. (중략) 이 말나식을 프로이트식의 정신분석학 용어로 표현한다면 '잠재의식'이 될 것"이며, 아뢰야식은 "최초로 등장한 생명체인 단세포 생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수십억 년의 진화를 통한, 그리고 억겁의 세월 동안 윤회를 반복한 모든 삶의 경험이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 두 개념을 바탕으로 생명, 영혼과 사후세계, 전생과 윤회, 마음과 기, 반야에 대해 하나씩 설명한다. 그럼 잠깐씩 그 중심내용을 살펴보자.


  - 새로운 생명체에 영혼이 어떻게 깃드는가?
  수억 년을 진화해 혼 아뢰야식이 훈습을 통해 생명체에 깃든다고 설명한다. 훈습이란 향냄새가 옷에 배어들 듯 육체라는 하드웨어에 영혼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연결되는 과정으로 그 연결의 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생명활동을 계속되는 것이다. 

  - 영혼이란 무엇이고 사후세계란 존재하는가?
  사후의 아뢰야식을 영혼이라 하며 말나식이 소멸된 상태이므로 집착이나 연민이 사라져버린, 그저 '정보'의 상태로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사후세계의 체험이란 것도 의식이 돌아올 때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했다.
 
   - 전생의 유뮤와 윤회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윤회를 통해 거듭 태어난다. 하지만 사람은 억겁의 세월동안 진화한 아뢰야식의 결과이므로 그 이전 상태인 동물로 태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다만 현생의 업에 따라 다음 생의 환경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 마음과 기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집단이라는 것. 그래서 이런 마음의 감정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를 다잡으라고 한다. 또한 기를 영혼의 실체인 정보의 활동으로 보고 그 원활한 흐름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민족 최고의 경전이라는 천부경도 소개한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불교의 정수를 260자로 모아놓은 반야심경을 설명한다. 부처도 없고, 열반도 없다는, 그래서 결국에는 누구나 다 부처라는 사실을 '공'을 통해 이야기한다. "극한의 부정을 넘어서는 극한의 긍정"으로 말이다.

 
  난해하고 심란하다. 삶이란 무엇이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경숙 님은 오랜 시간의 수련과 통찰, 안목으로  허공에 떠있는 향기를 담아내면서도 숲 전체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이 책에 담으려는 '우주의 질서'는 그녀가 살아온 삶의 질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의 인연을 존중하고 그 질서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거대해 보인다.
  그녀의 세계관이 나에게도 훈습된 것일까.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여러 채널을 통해 들어왔던 난잡한 생각들이 하나의 고리를 통해 추려지고 연결되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설명한 것을 모두 동의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나의 얕은 정신세계와 빈약한 과학적 지식으로 이경숙 님의 사상과 논리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원리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 분야의 여러 결과물을 임의로 조합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어쩌면 정신적인 부분을 과학으로 풀어내려는 이런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처음 그대로의 신비함을 간직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부처님의 손바닥 위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다. 몇 권의 책으로 세상만물의 이치를 통달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에 대한 공부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영혼도 더 맑아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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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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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바는 거침이 없고 대담하고 섬세했으며 야성적이었고 원초적이었고 감성적이었으며 사려깊었다. 순박하지만 저돌적이었고 따뜻하지만 날카롭고 직설적이었다. 그를 닮은 요한이 이 소설을 이끈다. 탁월한 연애술사에다 철학적 면모를 겸비한, 어디에서도 거리낄것 없는 자유인의 모습으로 나(주인공, 화자)와 그녀 사이를 연결해준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금은 웅장하고 장대해 보이는 제목의 소설이다. 띠지를 보니 "프랑스의 작고가 모리스 라벨은 1899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피아노 연주곡을 만들었다."고 적혀있다. 에... 그럼 우선 마르가리타 공주에 대해 알아보자.
  스페인 공주였던 그녀는 두 살이라는 나이에 오스트리아 왕자 레오폴트 1세와 약혼했지만 어린 나이 탓에 혼기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얼굴도 모르는 신부를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었기에 스페인에서는 공주의 초상화를 오스트리아로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주가 성장해가면서 유전적으로 내려오던 주걱턱이 점점 흉해지기만 했다.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최대한 흉하지 않게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공주 나이 15살에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사는 듯 보였지만 네째아이를 출산하다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단다.
  그리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그 피아노곡도 들어봤다. 뭐랄까, 장중하면서도 섬세한, 안개 낀 낙엽 길을 거니는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파반느(파반, pavane)가 궁정무곡을 의미하는 말이니 다시 말하면 젊어서 죽은 마르가리타를 위한 궁정무곡 정도가 아닐까. 무거운 제목과는 달리 상당히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제 소설 속의 그녀를 살펴보자.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중략) 그때까지 꽤 많은 못생긴 여자들을 봐왔지만 나는 그녀처럼 못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세기를 대표하는 미녀를 볼 때와 하나 차이 없이,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에게도 남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p82)
  비운의 여인 마르가리타의 주걱턱이 그녀의 얼굴 위로 스쳐간다. 스페인 왕녀의 기구한 삶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연애담으로 태어난 것일까. 그녀와 백화점 지하에서 같이 일하게 된 그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었던 특출한(?) 외모의 그녀에게 묘한 관심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요한의 중재와 협조를 통해 사랑의 빛을 키워나간다.

  남자의 사랑에서, 아니 인간의 사랑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이 사실이다. 보다 예쁘고 잘생긴 이성에게 몸과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지사. 몇 해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인간의 이런 모습을 보다 적응력 좋은 종족을 생산하고 보존하려는 생물학적인 진화의 결과라고 설명했지만 미인이나 훈남 앞에 마음이 동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어쩔 수가 없다.
  아무튼 인간의 욕구,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포장된 인간 욕구의 내면을 은근슬쩍 들춰놓는다. 지난날의 연애 기억들과 오버랩 되면서 나의, 우리의, 당신의 '생물학적인 선별과정'을 되짚어보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외모라는 사소한, 아니 절대적인 기준 위에 난도질당한 체 세상 밖으로 내팽겨졌다. 어디에서고 고개를 들 수 없었던 어둠 속에서의 삶이 바로 그녀 자체였다. 하지만 그를 만나면서부터 지난날의 상처가 하나 둘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 바로 사랑이었다.
  "좀 아닌데 싶은 여자들... 아니,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p185)

  은연중에 갖게 된 외모에 대한 편견, 설사 그것이 생물학적인 진화의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혐오스러워진다. 나 역시도 외모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 사회의 일원이었기에 많은 이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줬을 가해자였는지 모르겠다. 경쾌하게 읽혀지는 소설을 통해 내 안에 숨어있는 가면을 들켜버린 느낌이다.

  소설은 이렇게 후반부로 넘어가고 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전구에 사랑의 전기를 넣어주던 그는 그녀를 만나고 오는 길에 애기치 못한 사고가 당하는데... 과연 그들의 사랑, '얼굴'을 뛰어넘는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직접 읽어보시라. 잔잔함과 찌릿함을 동시에 불어넣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니. 마치 일반판 영화가 발매된 뒤에 재편집되어 발매된 감독판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다양함이랄까.  


  박민규 소설의 진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인 것 같다. 일단 재미가 있고 그 속을 관통하는 철학이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감성을 자극하는 사랑에다 추리적인 요소까지 곁들인 기막힌 결말까지 갖고 있다. 그래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 속에 빠져 들었다.
  마치 수세기 전의 일 인양 잊어버리고 지냈던 내 유년시절의 풍경들이 젊은 날의 사랑과 추억, 아픔과 함께 되살아났다. 그땐 정말 미치도록 사랑했고, 보란 듯이 퍼 마셨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일상이라는 쳇바퀴에 매몰되어 버렸다. 가족과 직장, 명예와 돈이라는 굴레에 묶여 젊은 날의 '사랑'은 모두 잊어버렸다. 

  세상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왕녀', 그녀를 위한 궁정무곡이 들리는 것 같다. 어쩌면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선율인지도 모르겠다. 부드럽게 울리는 피아노 선율은 우리의 과거를 일깨우며 말라비틀어진 사랑의 불씨를 움트게 했다. 저 땅 속 깊숙하게 숨어 있은 미미한 희망을 되찾은 기분이다.


* 책에 CD형태로 포함된 머쉬룸(Mushroom)의 음악이 일품이다. 잔잔하면서 경쾌한 재즈풍의 선율이 소설 속의 아름다운 사랑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인터넷을 찾아봐도 머쉬룸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더 많은 음악을 듣고 싶었는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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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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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담하다. 그래서 더 서글픈 것일까. 현대사의 질곡에 묻혀버린 인생들이 깨어났을 때 세상 속으로 두 팔 벌려 달려나갈 수는 없었다. 어쩌면 자유에 대한 열망도 새로움에 대한 기대도 이미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에 대하여>라는 책이 기억난다. 시집을 연상시키는 얇은 매수에 수상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 얼핏 봐서는 개의 죽음에 대해 읊어놓은 산문집 같았다. 하지만 내용을 읽다보면 그 속에 담겨진 상황이나 비유가 우리 인간사의 모든 내용을 함축해 놓은 명상서적 같았다. 모호한 듯 하면서도 읽을 때마다 새롭게 와 닿는 의미가 매력적이었다.
  이번에 읽은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역시 이런 부류에 가깝지 싶다. 독일이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바람에 엉겁결에 러시아 수용소에 갇히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로 수용소 생활에서의 경험을 담담하게 써내려간다. 전쟁이나 사상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수형생활의 소소한 소재를 통해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인간을 객관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써내려간 작은 일상 속에는 삶과 죽음, 가족과 이웃, 행복과 불행과 같은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는 듯 했다. 이야기가 전쟁과 수용소 생활의 참담함을 전면에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사는 오늘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걱정, 불안한 미래에 대한 근심,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밀러의 글 속에 녹아있었다.
  그러나 어둡다거나 무겁다는 느낌을 들지 않는다. 오히려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랄까. 마치 아름다운 한편의 시집을 보는 듯, 부드럽고 감미로운 언어 속으로 유영하는 것 같다. 몸은 수용소 안에 있지만 마음만은 푸른 잔디밭을 산보하는 것처럼 신선했다.
  그래서일까, 헤르타 뮐러라는 작가 이름 밑에 적힌 옮긴이, 박경희 님의 이름도 계속 눈여겨보게 된다. 번역서가 아닌 한국 여류작가의 글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부드럽다. 물론 이해되지 않는 문장도 간혹 보이지만 나의 문학적 한계 때문인지 뮐러의 글 자체의 난해함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번역도 엄연한 '작품'이라는 말에 적극 공감하게 된다. 
 
  <숨그네>는 이야기 전개에 상관없이 어느 페이지를 펼치더라도 바로 읽어 나가도 되지 싶다. 잠자기 전이나 약속을 기다리는 거리에서, 혹은 흔들거리는 버스 안에서 잠깐씩 읽어도 충분한 여운을 남기지 싶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지만 따로 한권을 준비해 가까이 두고 읽고, 또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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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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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사람들은 멀쩡한 음식들을 미처 먹어치우지 못하고 묵히다가, 또는 너무 많이 먹다먹다 질려서 버려대고 있었다. 비닐 속에서 녹아 미끈거리는 얼렸던 밥덩이며, 물주머니 같은 비닐에 가득한 굴이며, 말라비틀어진 생선이며, 녹지 않은 고깃덩이들, 겉잎사귀만 벗겨내면 아직도 싱싱한 노란 양배추, 새벽 수산시장에서 버려진 엄청난 내장들과 생선의 대가리 꼬리 또는 팔다 남은 멀쩡한 것들, 그야말로 이런 때 며칠은 꽃섬 사람에게 밤마다 잔칫날이나 마찬가지였다." (p94)
 
  도시에서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 더미를 파헤치며 생활하는 꽃섬 사람들. 추석 명절이 지나자 잔칫날 같은 분위기로 한껏 들떠 있다. 얼마 전에 엄마와 함께 이사온 딱부리도 이곳 생활에 적응해 추석의 '버려진 해택'을 맘껏 누렸다.
  그날 밤, 딱부리와 땜통(딱부리의 이복동생)은 메밀묵을 먹고 싶다는 김서방네 아이를 만난다. 사실 김서방네 가족은 오래전 여기서 살았던 사람들의 혼백들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딱부리와 땜통은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던 빼빼엄마와 함께 묵과 막걸리를 이들에게 대접한다.
  그에 대한 대가였는지 김서방네 아이는 땜통에게 금붙이와 돈뭉치가 묻혀있는 곳을 알려준다. 큰돈을 손에 쥐게 된 딱부리와 땜통. 도심을 배회하며 물질문명에 취해보는 것도 잠시, 이들의 행복은 검붉게 타오르는 화마와 함께 산산 조각나 버린다...
 
  황석영이 말하는 세상은 새 것이 헌 것으로 바뀌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순환의 과정이다. 오늘의 슬픔이나 내일의 즐거움 역시 서로의 인과관계를 따라 돌고 도는 것. 결국 거대한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수많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중심가까지의 집과 건물과 자동차들과 강변도로와 철교와 조명 불빛과 귀청을 찢는 듯한 소음과 주정꾼이 토해낸 오물과 쓰레기장과 버려진 물건들과 머지와 연기와 썩는 냄새와 모든 독극물에 이르기까지, 이런 엄청난 것들을 지금 살고 있는 세상 사람 모두가 지어냈다는 것을. 하지만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들판의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온갖 풀꽃들이 솟아나 바람에 한들거리고, 그을린 나뭇가지 위의 여린 새잎도 짙푸른 억새의 새싹도 다시 돋아나게 될 것이다." (p228)

  낯익은 세상은 낯선 세상에 대한 설익은 농담처럼 모순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낯익은' 것에 대한 반감, 혹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은 무안함이랄까. 미처 우리가 담아내지 못했던 근현대사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별다른 느낌이 없다. 그저 스토리를 따라가며 공감하는 정도에서 그칠 뿐 더 이상의 감정이입은 되지 않는다. 오래된 정원에서도 그랬듯이 여기서도 오래전에 죽은 혼령이 등장한다. 아마 그 때문인지 이야기에 몰입하기 힘들었다. 유식하게 말하면 '리얼리티'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반복되는 일상에 치어 살다보니 나 역시도 현실의 노예가 되어버린 걸까. 소설을 대할 때도 그 속의 감성을 잡으려하기 보다는 이성적인, 논리적인 구성에 자꾸 집착하게 된다.
머리를 식혀야할 때가 온 것일까? 산문집이나 수필집을 읽으면 좀 괜찮아질까. 낯익은 소설을 통해 낯선 나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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