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외전 - 이외수의 사랑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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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외수님의 책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구입한 책은 아니고 우연히 하늘에서 쿵! 떨어진 책.

사연인즉, 얼마 전에 한 온라인 서점(알라딘)에서 페이스 북을 통해 <사랑외전>을 소개하는 이벤트에 당첨되어 출판사로부터 받은 것. 별 기대 없이 적은 멘트가 당선된 터라 기분은 좋았지만 책 자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상태랄까...


우선 책 내용이 뻔~하다는 것. 사랑이 어떻고 감성이 저떻고 하면서 써내려간 단편적인 문구들은 더이상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말 꼬리를 잡고 장난치듯 넘어가는 것도 그렇고 자신은 모든 것을 다 통달하고 있다는 식의 의식도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옛날부터 이런 생각은 아니었다. '외수'라는 말만 붙어도 사 모으고 읽어 내려갔던 시절이 있었다. <꿈꾸는 식물>로부터 시작된 그에 대한 애정(아니 차라리 열망이라는 표현이 맞겠다)은 그를 내 인생의 이정표로 삼을 만큼 엄청난 존재였다. <칼>, <사부님 싸부님>, <벽오금학도>를 읽으며 최고 절정에 다다랐다.

하지만 94년에 출판된 <감성사전>을 정점으로 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식어갔다. 그의 특기였던 '치열함'을 느낄 수 없다고 해야하나... 평론가에 대한 서슬퍼런 반감도 자신의 이상만 옳다고 주장하는 어린아이의 독선처럼 부담스러워졌고 자신의 스타일만 고집하는 소설 역시 변화를 두려워하는 글쟁이의 아집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또한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출판되는 산문집 역시 감성이니 뭐니 하는 번드르한 말로 독자들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사치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기대 없이 펼쳐든 14,500원짜리 <사랑외전>은 그의 전작 산문집과 별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재탕, 삼탕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는 글을 적당히 끼워 맞춰 제본해 팔아먹는, 조금 심하게 말하면 그의 상업성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미 전국적인 브랜드가 된 '외수'의 이미지를 복사해서 팔아먹는 상업성만 보였다.

'외수'는 찰리 채플린과 같은 영상시대의 캐릭터가 아니라 아날로그 세대의 글쟁이다. 사랑이니 감성이니 떠벌리기 보다는 이야기로서 인생을 이야기하는 소설가, 스토리를 통해 먹고 살아야 하는 전업 작가인 것이다. 고가의 하드커버 '명언집'을 찍어내기 보다는 자신의 삶이 녹아든 소설로서 '외수'의 존재를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그와 그의 책에 대한 글을 쓸 때면 늘 이런 분위기다. 사랑했지만 변해버린 당신을 그리워하는, 대중가요의 노래가사처럼 되는 것이다. 샛길로 빠져버린 듯한 그를 보면 늘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 글을 읽는 외수 매니아 여러분! 나에게 돌을 던지지 마세요. 저 역시 외수 형님을 사랑하는 독자로, 그의 이름을 빛낼 최고의 소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던지는 돌덩이는 외수님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제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니, 부디 제 본심을 알아주소서~ 그 노여움을 삭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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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김종대 지음 / 시루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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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마음에 담아둔 인물이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이다. 부모님이나 친척 어른처럼 일상 속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감화를 받은 경우도 있고,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책이나 언론을 통해 알게 된 유명인도 있다. 아니면 사회의 음지에서 조용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이가 될 수도 있고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을 동경하기도 한다.
그 대상이야 어떻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들을 가리켜 흔히 우상이나 위인, 영웅이라 한다. 나에게도 수많은 관객을 휘어잡으며 정열적으로 노래하는 영국의 보컬리스트나 소박한 생활과 글로 텅 빈 충만함을 알게 해 준 스님처럼 특정 세대나 한정된 시대를 빛낸 우상이나 위인은 있다. 하지만 국가나 민족적인 차원의 장벽까지도 뛰어넘어버린 '영웅'은 늘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거북선에 대해 객관적으로 쓴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정광수, 1989)를 읽었는데, 막연하게만 다가왔던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후부터 이순신은 나의 영웅이 되었다.

이번에 읽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는 기존의 임진왜란 이야기나 이순신 전기와는 달리 임진왜란을 중심에 두고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쫓는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 임금에게 올린 장계와 선조로 부터 받은 유서, 그가 언급된 글이나 편지 등을 통해 왜란 중에 행적을 소상히 정리했다. 특히 오랜 기간 하나의 길(재판관)에 매진해 온 저자의 경력답게 많은 부분을 인간관계나 소통과 같은 리더십의 관점에서 이순신을 설명한다. 개인과 국가, 책임과 의무 사이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고 조직을 이끌어 왔는지를 오랜 병영 생활과 스물 세 번의 해전을 통해 보여준다.
옥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 명랑, 노량 등지에서 방심한 적의 틈을 노려 공격하기도 했고 물러서는 척 적을 유인해서 섬멸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의 용병술도 주효했지만 이를 추진하는 장수와 병사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군율로 엄하게 다스리는 한편 아버지와 같은 신뢰로 장졸들을 보살폈다. 또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과 한정된 자원으로 싸워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자신을 믿고 의지한 백성을 온 몸으로 끌어안았고 다른 장수가 적의 수급에 집착할 때 장군은 전투의 과정을 통해 승패를 가름했다. 지극한 정성과 철저한 준비로 왜란을 이겨낸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을 지나치게 신성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에 대한 오랜 연구와 깊은 이해에서 나온 애정임은 알겠으나 아무런 심적 동요도 없이 모든 일을 처리했다는 식의 표현은 왠지 어색했다. 멀리 있는 영웅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조금 부족하고 모순되더라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위인이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지나친 신성화로 오히려 거리감을 들게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문득 이순신 장군의 서슬 퍼런 칼날이 우리의 흐트러진 정신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오늘날의 모습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정치인들이 남발하는 선심성 공약, 실직과 함께 거리로 내몰린 가정, 거리를 활보하는 파렴치범, 늘어나는 대졸 취업자와 와해되고 있는 공교육 등 연일 계속되는 사건 사고와 어정쩡한 후속 처리는 임진왜란을 당해 우왕좌왕했던 조정과 도망가기 바빴던 일부 장수의 모습이었다. 무사 안일한 자세와 근시안적인 접근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렸고 임기응변식 대처로 매년 불미스런 일이 반복되었다.
우리는 화려한 이상향을 쫓아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달려왔다. 경제적 가치로 세상을 재단했을 뿐 사람과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을 사랑했다. 나아가 부모, 처, 자식들과 친척을 사랑하고 부하들을 사랑했다. 그의 충만한 사랑은 사회와 나라로 이어져 백성을 사랑하고 국토를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렀다."(p213)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 누리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나라를 구한다는 거창한 명목은 아니더라도 내 자신과 가족, 이웃부터 챙길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지 싶다. 작은 실천이 모여 자신과 가족, 직장을 변화시키고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다. '영웅'이란 수많은 적을 쓰러뜨렸기에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세상 위에 꽃피웠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영웅은 이제 우리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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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에 언급한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정광수, 정신세계사, 1989>는 절판되었지만 저자 정광수님이 주축이 되어 만든 '이순신역사연구회'를 통해서 <이순신과 임진왜란> (이순신역사연구회, 비봉, 2005, 전4권)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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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인가 - 신의 실체에서 종교 전쟁까지
오강남 지음 / 김영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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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력은 책장을 넘길수록 흐려졌다. 소설 중심의 책읽기에서 벗어나 조금 심각해지고 싶다는 막연한 치기에서 선택한 종교이야기는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흥미가 반감되었다. 그렇다고 책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 오강남 님의 종교관은 그동안 내가 생각하고 지지해온 생각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나를 비워라'는 말로 귀결되는 종교의 이상을 이해하자 페이지를 가득 메운 문구는 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예수와 석가, 사랑과 자비의 의미를 이해했으니 무엇을 더 얻겠다고 책을 읽는다는 말인가... "뭐 이런 자식이 있어!“ 라며 어처구니없어 하거나 건방지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 그런 것을 어쩌란 말인가.


  서른 즈음에 기독교를 홍보하고 전도하는 한 대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역설하며, 자신과 같이 예수를 믿어 천국행 열차에 오르자고 강권했다. 보통 때 같으면 무시하고 지나쳤겠지만 여유시간도 있는데다 그의 천국론에 대한 내 생각도 말해주고 싶어 조금 긴 시간을 이야기 했었다.
  예수는 유일신이며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예수나 부처와 같은 성인은 결국 하나의 존재가 아니었을까하고 되물었다. 생활했던 환경이나 외적인 모습, 혹은 사랑이나 자비라는 표현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인간에 대한 존중으로 시작되는 원류는 모두 같을 거라고 말해준 것 같다. 마치 하나의 나무줄기에서 뻗어나가는 나뭇가지처럼 말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그의 주장에 예수가 그렇게 옹졸한 분이 아님을 역설했고 자신의 길에서 바르게 살아간다면 굳이 예수님의 ‘빽’이 아니더라도 천국, 아니 그에 해당하는 안식을 얻을 거라고 답해줬다. 그는 예수님과 교회를 통해서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역설했지만 나는 예수님과 교회를 통하지 않고도 충분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였지만 그와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통해 나의 생각에 더 많은 확인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의 설득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특정 종교가 내세우는 교리를 넘어, 그 이상의 사랑과 자비를 정리해볼 수 있었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성인에 대한, 종교에 대한 나의 믿음은 이렇게, 여전했다.


  <종교란 무엇인가>에서도 비슷한 말을 한다. 비교종교학계의 석학인 오강님 님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집착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달 자체에 집중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사랑이나 자비를 통해 나를 비워나가라고 말한다. 성인의 말씀과 행동의 본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자신을 둘러싼 욕망이나 아집, 이기심을 벗어 던지게 되면 자연히 자신이 비워지게 된다는 것. 도가에서 말한 '무위자연'의 상태가 진정한 종교인의 길이라 조언했다.
  특히 헌금, 전도, 기도에 임하는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를 이야기하며 기독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종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조심스럽게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 한다.


  상황이 이러니 나의 집중력이 흐려지지 않고 배기겠는가. 나는 이미 예수를 알고 석가를 안다. 그분들의 사랑을 믿으며 자비를 존경한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것은 그분이 행한 사랑과 자비를 내 삶에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있지 않을까 싶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예수와 석가가 아니라, 입으로만 알고 있는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싶다. 이를 과정을 통해 나를 비우고 삶의 순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바로 예수이자 석가인 것이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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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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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는 것이 최고의 출세였던 시절, 신학교 입학 시험을 보기위해 주(州) 최고의 수재들이 슈트가르트에 모였다. 슈바벤 지역의 대표로 올라온 한스 기벤라트도 그중 한 명으로 마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2등으로 합격한다.
  이렇게 마울브론 수도원에는 입학한 한스는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 슈바르츠발트에서 온 헤르만 하일너와  가깝게 지낸다. 하일러는 엉뚱하지만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인물로 공부에만 매달려온 한스에게는 신선한 바람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하일러와 가까워지면서 한스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전부라고 믿었던 학문적인 공부 이외의 다른 세상을 접하면서 공부에 대한 열정이 조금씩 시들어버린 것이다. 최고의 모범생으로 입소한 한스의 성적은 계속 떨어졌고 급기야 수도원의 문제아로 전락해버렸다. 한스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급기야 수도원에서 도망친 하일러로 인해 더욱 자포자기해 버린다. 결국 수도원에서 쫓겨난 한스는 주변의 안타까운 눈총 속에 귀향했고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들른 대장간에서 육체노동의 건전한 가치를 알게 되며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간다. 하지만 사랑에 눈을 뜸과 동시에 찾아온 배신으로 다시금 깊은 수렁에 빠진다. 결국 한스는 강물에 빠진 체 주검으로 발견되고 만다.
 
  한스의 장래식에서 마을 주민이 나눈 대화를 끝으로 소설은 끝난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 양반들 말입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사람들도 한스를 이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p263)
  "신사 양반"이란 다름 아닌 한스가 다닌 학교의 교사, 교장. 한스의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으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교육을 꼽으며 현실의 교육제도와 이를 수행하는 교사에 의해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희생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소설 중간에도 "수레바퀴 아래 놓인 달팽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수레바퀴가 현실의 교육제도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그 아래에 놓인 달팽이는 바로 학생들을 의미했다. 아무 잘못 없는 달팽이를 짓눌러버리는 무지막지한 수레바퀴를 교육으로 묘사한 것이다.
 
  아무래도 헤르만 헤세는 기존의 교육제도를 부정적으로 본 것 같다. 인간이 갖고 있는 다양하고 고유한 특성을 무시한 체 특정분야의 지식만 측정, 평가함으로써 인간을 황폐화 시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특히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소설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10대 때 자살을 시도했고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던 헤세의 이력이 마치 억압접인 교육으로 인해 기인한 듯 인상을 받게 된다. 기존의 교육제도가 없었다면 보다 더 자유로운 이상을 가졌을 수도, 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다는 무언의 시위처럼 보였다.
 
  우리나라의 일선 교육현장을  담당하는 내 역할 때문에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한 인간의 삶을 제도권 교육의 결과로서만 해석하려는 것은 아닐까 의아했다. 학교 교육도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유년기의 가정 상황, 이를테면 부모님의 생활습관이나 경제적 정도, 가족 구성원의 상호관계에 따라 학교 교육의 영향이 천차만별로 나타나는데 말이다.
  제도권 교육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회적 요인들은 배제한 체 교육제도만을 만병의 근원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교육은 가정과 사회 모두의 책임인데도 유독 학교와 교사만 모진 매를 맞아야 한다. 잘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당신 탓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교육의 역할이 크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제대로 된 교육은 한 인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모든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교육을 부정적인 요인만을 물고 늘어지며 책임을 운운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짧다.
  교육만을 악의 축으로 몰아가는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분야의 반성과 협력이 필요하지 싶다. 드러난 문제점을 교육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경제, 문화, 정치, 언론 등의 분야에서 함께 바로잡아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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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와 프리즘 - 이윤기 산문집, 내일을 여는 글들 1
이윤기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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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시절 읽은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책을 하나 읽었는데 그 책의 출판사가 "문성출판사"였다. 내 이름의 첫 두 글자가 같은 출판사 이름이기에 적잖이 관심을 갖던 기억이 난다. 펴낸이의 이름을 찾아보기고 하고(아마 문 씨였던 것 같다) 책 사이에 꽂혀있던 독자엽서도 보내기도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성출판사에서는 작은 시집 한권을 보내 왔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번에 읽은 <무지개와 프리즘>도 이와 비슷한 연유에서 집어든 책이다. 내 홈페이지 이름이 프리즘(freeism.net)이라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궁금해 검색해봤더니 책 제목과 함께 '이윤기'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알다시피 그는 우리나라에 그리스 로마신화 열풍을 불게 한 주역으로 그리스 신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유려하고 정확한 번역문으로 명성이 자자했었고 나 또한 그가 번역한 <장미의 이름>, <그리스인 조르바>와 <그리스 로마신화>를 읽었기에 상당히 반가웠다. 특히 이윤기 님의 글을 모두 읽고는 그에게 주례를 부탁했다는 <전작주의자의 꿈>의 저자, 조희봉 님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아무튼 우리 시대를 빛내고 있는 최고의 글쟁이라는 점과 같은 '프리즘'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게 책을 펼쳐들었다.

 

  '1부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에는 혜능, 니코스 카잔차키스, 생텍쥐페리, 베토벤, 소크라테스 등 인류의 삶에 빛을 가져다 준 현인들에 대한 단상들이 실려 있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들려주며 새로운 관심을 불러오게 한다. 특히 베토벤에 대한 글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 여기서 소개된 <베토벤의 생애> (로맹 롤랑)까지 덩달아 주문해버렸다. 마음 맞는 친구의 오랜 지기를 만났을 때의 호감, 바로 이 느낌이다. 친구가 덩달아 늘어난 느낌이다.

 

  '2부 신화는 힘이 세다'에서는 신화속의 이야기가 어떻게 현실 속에 반영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스 신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전개되는 글이기에 조금 난해한 부분도 보인다. 하지만 현실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과거의 신화에서 발견해내는 해안이 돋보인다.

 

  '3부 청년들에게 고함'은 굳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글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느낌을 적은 산문이나 수필로 보는 것이 가깝겠다. 그래서 심각하지 않으면서 어디 하나 얽매임이 없다. 깊은 성찰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그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가볍게 훑어보는 느낌이다.

 

  '4부 꿈이 너무 큰가요'는 후기를 대신해 29회 동인문학상(1998년)을 수상한 뒤의 인터뷰 글이 실려 있다. 그의 번역작업과 글쓰기에 대한 총평쯤으로 봐도 되겠다.
  특히 그가 매진했던 신화에 대한 견해가 인상 깊다. "신화와 고대 종교 읽기를 좋아합니다만 그 자체가 나의 목적은 아닙니다. 나의 목적은, 거기에 투사되어 있는 인간의 모습을 읽는 일입니다." (p342)
  신화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소박한 이야기가 뭉클하게 다가온다. 결국엔 인간, 우리라는 말이 그의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프리즘’은 무지갯빛 글을 만들어내는 작가 자신이나 시대, 혹은 문화를 의미했다. 상황이 어떻든 이것이 만들어내는 글이야 말로 우리시대 최고의 무지개라는 말.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내 홈페이지(프리즘, freeism.net) 역시 나를 빚어내는 하나의 도구인 샘이다.
  이윤기 님에 대한 진면목을 깨달을 수 있는 책으로 조금 더 일찍 알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도 아마 조희봉 님처럼 이윤기 작가의 전작주의자가 되려는 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에는 이미 이윤님의 소설, 번역서, 산문이 한 아름 쌓여있으니 말이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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