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획일을 강요하는 자본의 몬스터
인권 특강은 국가인권위가 직원들을 대상으로 매월 실시하는 특강으로, 박 교수의 강의는 지난 7월 6일 진행됐다. 박노자 교수는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 교수를 맡고 있으며,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의 저서를 낸 바 있다.

정리: 월간 <인권> 편집부

▲ 강의하는 박노자 교수
ⓒ2004 인권위 김윤섭
먼저 제가 왜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집단 따돌림이라는 주제를 택했는가에 대한 ‘변명’의 성격이 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소련이 망할 때까지 소련 사회의 가장 큰 인권 문제로 생각한 것이 이른바 양심수였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체제가 망하고 나서, 옐친 체제로 접어든 후 체첸 독립운동 투사를 잡아 둔 것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양심수는 거의 없어지게 된 겁니다.

러시아 사회의 일상적 인권 유린

그런데도 시민들이 몸으로 겪는 인권 상황은 대단히 악화되었습니다. 사회가 빈곤해지는 과정에서 과거의 중산층 대부분이 빈곤층으로 추락하고, 인간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입니다. 즉, 연금 생활자들이 연금으로는 연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집에 있던 책이나 잡동사니를 지하철역에서 파는 그런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현재 러시아의 상황입니다.

노점상들은 경찰한테도 괴롭힘을 당하고, 뒷골목 깡패들에게도 갈취를 당합니다. 자릿세를 내지 않으면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기업 입사 과정에서는 여성이 입사를 원하는 경우, 이른바 성상납은 불문율입니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취업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성상납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 언론에서 이를 다룰 때는 일종의 낭만적인 에피소드로 거론하지 인권 침해 문제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사회가 폭력화되면서 가장 나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중산층 가정의 아동과 청소년들입니다. 집단싸움이 일반화되었고, 빈민 거주지역의 공교육 기관들은 집단싸움과 마약밀매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도 국가적 인권 보호 기관이 존재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을 갖지 않고 실제로는 사회의 극단적인 폭력화를 방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가에 의한 인권 탄압을 지적해도, 국가의 경제실책이나 언론의 오도(誤導)로 인해 황폐화된 사회의 인권 유린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국제 인권단체들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대단히 아쉽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일반인에 의한 인권 유린의 한 형태를 말씀드리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집단 따돌림이란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길어진 변명이지만 이제 조금씩 본론으로 들어갈까 합니다.

한국에서 집단 따돌림을 다루는 석·박사 논문들이 꽤 있는데, 대개는 집단 따돌림 현상을 개인적인 문제로 다루려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경향이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문제를 더욱 더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갖고 있습니다.

1998년에 교육개발연구원에서 학생들에게 집단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87%가 “튀는 행동을 해서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얘기입니까. 똑똑한 척한다, 남보다 아는 척한다 등을 지목한 것 같은데, 남과 다르게 행동한다면 집단 따돌림당하기 쉽다는 얘기입니다. 최근엔 직장인들의 집단 따돌림 현상에 대한 여론조사도 있었는데, 역시 튀는 행동이 집단 따돌림의 한 원인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집단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이와 같다면, 집단 따돌림은 사회문제라는 견해를 지울 수 없습니다. 한국의 집단 문화를 문제삼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국의 집단 문화는 남과 다른 행동, 남과 다른 외모까지도 포용하지 않습니다. 집단 차원에서 상처를 주는 폭력이라는 것이 군사주의적인 집단 문화와 상당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한국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근대 지상주의적 집단 통합의식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대 지상주의란 ‘서구 표준’과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불인정, 괄시를 말합니다.

한국 사회, ‘서구 표준’과 다른 것을 불인정

예를 들면 한국 직장인 가운데 턱수염이나 콧수염을 기르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면도 문화가 생긴 개화기 초에는 면도를 한 사람은 근대적인 문명인이었고 수염을 기르는 사람을 전근대적인 야만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지금도 수염을 기른다는 게 너무 ‘튀는 행동’이라고 취급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비교적 자율적이라는 교수집단에서도, 한복을 입거나 수염 기른 사람을 이상하게 대한다는 것이 제가 감지한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다름’에 대한 근대 지상주의적인, 군사주의적인 불인정 등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반영돼 집단 따돌림 현상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겁니다.

한국은 그렇다 치고, 군사주의·집단주의가 만연되지 않은 유럽에서 집단 따돌림은 어떤 요인으로 발생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집단 따돌림은 가장 잘 알려진 사회문제 중 하나입니다. 유럽 역시 한국과 같은 정도로 집단 따돌림이 만연되었고, 구타 등은 한국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집단 따돌림을 경험한 사람이 40%에 이르고, 피해를 많이 보는 학생들이 거의 20%에 달해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서 폭력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이 학교입니다. 학교에 이른바 모빙(mobbing) 문화라는 게 있는데 모빙은 원래 무리로 하는 악행으로 지금은 주로 왕따 현상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불링(bullying)인데 이는 학교 안에서의 이른바 왕따 현상, 특히 집단구타와 같은 형태를 지칭합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 집단 따돌림이 시작되는 곳은 유치원입니다. 대개 15~25%가 상습 피해자로 나오고, 20~25%의 학생들이 상습적인 가해자로 나타납니다. 유치원에서의 집단 따돌림은 무척 가혹해졌고, 이때 고립된 아이들은 심각한 성장 장해를 갖게 돼 문제가 큽니다.

특히 중학교에서는 피해 형태들이 고약하고 악질적이며, 한국보다 구타의 비율이 약간 높습니다. 한국은 주로 학생을 고립시키는 방식인데, 스칸디나비아는 인격 모독이 주를 이뤄 침 뱉기, 분비물 가방에 넣기, 이름 대신 좋지 않은 별명 부르기 등입니다. 이로 인해 학교마다 1년에 적어도 거의 한두 명씩 전학을 갑니다.

따돌림 방지는 ‘국가적 과업’

▲ 박노자 교수가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2004 인권위 김윤섭
조사 결과 스칸디나비아의 집단 따돌림은 신자유주의 분위기가 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는 납세자의 납세액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으로 공개됩니다. 부동산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납세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주민들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민주의 국가는 세금 징수에 완전히 의존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동네 학교에서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인터넷에 접속해 학부모들의 납세액이 얼마인지를 조사해, 납세액이 가장 적은 10%의 부모 아이들을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인 집단 따돌림을 예방·근절하기 위해서 노르웨이 등의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국가·지자체·개별 학교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해당 학교의 교장 및 담임들에게 묻는 등 따돌림 방지를 의무화시키고 폭력방지요원(대개 대체복무를 하는 병역 거부자들)을 학교마다 상주시켜 가해자·피해자들의 상담, 갈등 조절 등을 하게 합니다.

교육부 당국자들이 관련 연구자와 협력하여 따돌림 현황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벌이고 피해가 가장 심각한 학교에서 특수 프로그램을 운영케 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따돌림 근절에 실적이 가장 우수한 학교를 국무총리가 직접 방문해 그 성과를 축하하는 등 따돌림 방지는 ‘국가적 과업’의 위상을 가집니다.

중앙·지역 일간지에서 피해자의 편지들을 공개하여 그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가해자 및 그 부모들의 양심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사실, 많은 일간지들이 따돌림 근절의 당위성에 대한 의식이 높아 피해 사례가 있으면 꼭 편지로 써 달라고 공고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따돌림 방지 차원에서 역극극(role-play)을 진행해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의 일단이라도 ‘놀이’를 통해서 맛보게 합니다. 그리고 많은 학교들이 따돌림 방지 웹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피해자·가해자의 고백을 인터넷으로 공개합니다.

피해자의 솔직한 심정이 만인에게 알려지면 그 피해자를 보는 가해자의 눈은 달라지게 돼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한국의 관련 기관들도 참고해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일중독’에 빠진 부모들

그러나 이와 같은 전 사회적인 노력과 일련의 국지적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따돌림이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 건수가 증가하고 그 수법들이 더 악질적이 되고 있습니다. 즉, 각종 방지 프로그램들이 그 확산을 어느 정도 견제하는지 모르지만 병근(病根) 제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단 따돌림을 유발시키는 사회·문화적 심층적 요인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이 원인인 듯합니다.

예컨대 많은 학생들이 저지르는 가해 행각의 직접적인 원인이 부모로부터의 애정 결핍, 가정에서 느끼는 소외감, 부모의 무관심 등으로 밝혀져 있는데, ‘일중독’과 ‘소비중독’에 빠져 아이를 ‘2순위’로 인식하는 상당수 부모들의 사유 형태는, 생산·소비를 물신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 않는 한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가혹 행위의 당위성을 가르쳐 주는 것은 텔레비전에서 매일같이 보는 싸움·죽임의 장면인데, 역시 이윤 추구적 대중문화는 폭력이라는 ‘눈요기’의 주된 요소를 폐기 처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두 살 된 아이들이 하루에 두세 시간씩 텔레비전으로 보는 만화에서마저도 추격·충돌·격투 등의 이미지들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폭력을 당연지사로 여기게 되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현실’과 ‘연출’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이 연출된 영상물에서 본 폭력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본받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입증한 결과인데, 이윤 추구에 몰두하는 대중문화 생산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신문에서 텔레비전까지 모든 매체들이 늘 주목해 부각시키는 것은 프로 스포츠나 연예계 소식 등인데, 의식·무의식적으로 남학생들이 강인하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스포츠 스타들을, 여학생들이 요즘 시쳇말로 ‘몸짱’·‘얼짱’으로 인식되는 연예계 스타들을 인간의 ‘표준 모델’로 각각 삼게 돼 있습니다.

그 ‘표준 모델’의 틀에 맞지 않은 - 즉, 허약해 보이거나 사교 능력이 없어 보이거나 너무 ‘빈티’ 나거나 ‘외모에 문제가 있는’ - 남녀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왕따 후보’가 되고 맙니다.

‘자유’를 표방하는 자본주의는 놀라울 정도의 일상적 사고의 획일화를 가져다 주는데, 그 획일적인 규범에 맞지 않은 자는 곧잘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게 됩니다. 인권 이상(理想)에 완전히 상반되는 현실이지요.

그러나 이윤 추구적 시스템이 이 지구를 계속 괴롭히는 이상 이 시스템이 고쳐질 것 같지도 않고 인권의 이념이 제대로 실현될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은 바로 반(反)자본주의적 투쟁과 둘이 아닌 하나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긴 시간 동안 부족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노자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 8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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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9-16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너무하네요..............

Fithele 2004-09-1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관심을 끄는 부분들이 있어 퍼갈게요

간달프 2004-09-16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서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국가나 권력 따위가 아니라 자기 내부의 불안과 불만이 아닐까? 그런데 자본주의 혹은 자유경쟁체제는 바로 그 내면의 불안, 불만을 통해 지탱되는 체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평등과 자유를 조화시키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이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여유없이 자유없다.

sweetmagic 2004-09-16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그 여유를 만들어 내는 요인들이 문제예요 ........................


으앙~~!! ㅠ.ㅠ;;;

간달프 2004-09-1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유 만들기 (1) 결과의 평등 -> 국가의 일 (2) 가치의 평등 -> 문화(사회)의 일

갈대 2004-09-17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든지 '튀는 것'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성향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집단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표준을 위험하게 만들고 깨뜨리려는 자는 흔히 처벌을 받습니다. 자본주의와 한 사회의 특수한 문화가 집단 따돌림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더 심화시킬 수는 있겠습니다만). 하워드 블룸은 <집단정신의 진화>에서 동조를 강요하는 집단의 성향을 '동조집행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간달프 2004-09-17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 따돌림'을 자연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시는 것인지요? (하워드 불룸은 접하지 못했습니다만) 집단 따돌림을 일종의 '집단적 지혜'(혹은 networked intelligence)라고 보시는 것인지요? 하지만 집단 동조적인 성향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만일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튀는 것'과 '튀는 것을 배척하는 집단적 동조 성향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 마저도 본성(?)이 아닐까요?

간달프 2004-09-17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혹은 특정 문화)가 근본적인 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성향을 증폭시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성향을 단순히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윤리적 판단을 중지한다면(윤리의 은폐) 일종의 범주 오류는 아닐런지요?

갈대 2004-09-1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 따돌림'을 정당화 하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집단 따돌림'은 집단의 단결을 해치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려는 행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방과 동조가 인간 집단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요인임은 분명합니다. 분열된 집단보다는 단결된 집단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런 본능이 길러진 게 아닌가 합니다. '튀는 것', 즉 다양성을 생성하는 것이 집단에 이익을 줄 경우에는 큰 보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엔 위험이 뒤따르죠. 결국 튀는 것도 위험을 감수한 본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하워드 블룸은 이런 성향을 '다양성 생성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해서 모방과 다양성은 적당한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까지가 진화론을 근거로 한 하워드 블룸의 인간 집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갈대 2004-09-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이런 설명을 가지고 '집단 따돌림'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정당화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집단 따돌림'의 원인에 대해서 훌륭한 통찰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아는 것과 그 문제를 판단, 해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원인을 알면 해결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을 테지요. 개인적으로는 다양성이 보장받을 수 있는 집단이 더 건강한 집단이라 여기기에 집단 따돌림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동조 집행자'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야만성을 억누르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집단 구성원을 집단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도 모두 '동조 집행자'의 작용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간달프 2004-09-1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덕분에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미심적은 부분도 있습니다. (쓰신 글로만 보아 판단하건데) 인간의 야만성을 억누르고 사회질서를 유지한다고 하셨는데 만일 사회질서(혹은 집단) 자체가 야만적일 경우에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물론 여기선 야만성에 대한 고찰이 먼저 필요하겠지만... 하워드 불룸의 논리는 혹시 개인의 실천에 대해 집단의 실천(혹은 생존)을 선험적으로 우위에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혹시 파시즘의 뉘앙스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간달프 2004-09-18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또 하나는, 왕따 현상의 근본적 원인이 자본주의(혹은 특정문화)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왕따현상을 그 특정문화가 교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촛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하네요. 그러니까 왕따현상와 특정문화의 관계를 '문화적 실천'의 차원에서 봐야지 인과관계가 있느냐 없느냐로만 파악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물론 불룸의 진화행동학적(?) 통찰이 그 문화적 실천에 긴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엔 동감합니다.

갈대 2004-09-1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질문을 던지셨군요. 우선 하워드 블룸은 생물학적 결정론자가 아니며(오히려 그 반대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지만요) 파시즘 뉘앙스를 깔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그는 <집단정신의 진화>에서 진화의 핵심은 신다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전자의 이기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네트워크'(공존)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관심은 네트워크를 통한 '집단정신'이 어떻게 형성, 발전하는가에 쏠려 있습니다. 그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파시즘이 발생하는 원인은 집단 구성원들의 무비판적이고 그릇된 동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조가 가능했던 이유는 집단을 위협하는 강력한 외부요인(위기에 처했다고 느낄 때 인간의 이성은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기 쉽죠)과 그런 외부요인을 이용해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몇몇 선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파시즘의 경우엔 외부요인의 위협은 분명 부풀려진 것이고 또 외부요인에 대응하는 방법 역시 다른 집단 모두를 적으로 만들면서 스스로 고립상태에 빠뜨리는 것이었으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비인륜적, 우생학적 행위들 역시 용서받을 수 없는 것들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갈대 2004-09-1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만성은 말씀하신 대로 고찰이 먼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가령 아직도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들의 잔인한 행위를(문명인의 관점에서 보기에) 야만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 행위들이 집단의 지속적인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개인의 실천과 집단의 실천을 놓고 봤을 때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의 실천은 집단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 반대과정도 성립하니까요. 또 무조건 개인에게 집단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집단의 실천이 우선적으로 작용하는 듯 합니다. 하워드 블룸은 책의 말미에서 집단 전체의 지속적인 생존(공존)을 강조하고 극단주의를 경계할 것을 역설합니다. 파시즘(집단주의)은 집단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인을 강조한다는 점만 봐도 배척함이 마땅하고 자본주의는 말씀하신 대로 개인의 마음에 불안을 심어줌으로써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을 착취하는 체제이고 장기적으로 집단 전체의 생존에 위협이 되므로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왕따문제는 당연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겠지요. 너무 횡설수설한 것 같습니다. 아는 것 없는 저보다는 책과 얘기를 나누시는 편이 유익하겠네요^^;

간달프 2004-09-1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찮은 의문에 이렇게 긴 응대를 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더 고맙습니다.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불룸의 책을 선입견없이 읽어보아야 겠다는 의욕이 생기는 군요.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