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 자유사회주의와 중국의 미래 현대중국의 중국의 사상과 이론 2
추이즈위안 지음, 김진공 옮김 / 돌베개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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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제8호 2014년4월호

 

중국 신좌파의 불안한 모험?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추이즈위안 / 돌베개 / 20142/ 12,000

 

얼마 전 영국의 좌파저널 <뉴레프트리뷰>에 실린 인터뷰를 모은 책 좌파로 살다(사계절)가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무엇보다 관심을 끈 것은 60여년 동안 발행되는 이 저명한 잡지의 수많은 인터뷰 중 <뉴레프트리뷰> 편집부가 누구의 인터뷰를 선별해 실었고, 어떻게 배치했는지였다. 16개의 인터뷰 중 제4부에서는 21세기 비서구 좌파의 사유를 다루었는데 주앙 페드루 스테딜레(브라질 MST)와 아사다 아키라(일본), 그리고 중국의 대표적인 신좌파인 왕후이(汪暉)의 인터뷰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인터뷰는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를 유작으로 남기고 2009년 세상을 떠난 조반니 아리기였다. 이러한 선별과 배치는 20세기와 21세기 초입을 거치면서 전지구적으로 분포된 좌파의 확장을 보여줌과 동시에 중국에 대한 서구 신좌파들의 관심을 보여준다.

추이즈위안(崔之元, 1963년생)은 왕후이(1959년생)와 동년배로서 이 둘은 중국 신좌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왕후이가 루쉰 연구가로서 인문학적 신좌파를 대표한다면, 추이즈위안은 정치(경제학)학자로서 제도적 신좌파를 대표한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그는 신좌파 중에서도 가장 실천적으로 충칭모델의 성립에 가담했다. (지난 미래에서 온 편지2호에 소개했던 책 중국을 인터뷰하다(창비)에는 추이즈위안의 인터뷰와 중국 신좌파들의 최근 경향에 이론적 영감을 준 자유주의자 야오양, 그리고 이들을 비판하는 첸리췬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 이번에 나온 추이즈위안의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은 바로 그 충칭모델의 이론적 자원에 대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실험은 계속된다

2012년 충칭 당서기 보시라이는 대륙 권력의 핵심인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기 직전 역풍을 맞고 추락했다. 이로서 중국 신좌파의 충칭실험이 끝난 게 아닌가, 광둥모델의 대항마는 사라진 게 아닌가라는 세간의 평이 존재했다. 그러나 추이즈위안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보시라이와 더불어 충칭모델의 또다른 핵심 주체였던 충칭시 시장이었던 황치판이 중국공산당 183중전회에서 개혁방안의 초안을 작성할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는 과연 무엇일까? 추이즈위안에 따르면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의 경제적 목표는 개혁과 기존 금융시장 체제의 전환을 통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하는 것이며, 정치적 목표는 경제적 민주주의정치적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추이즈위안을 비롯한 중국의 신좌파들은 (금융) 자본 위주의 경제질서에 매우 부정적이며 이러한 질서를 확립한 서구 보편주의에 부정적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를 경우 제3세계의 다양성과 역량을 사상시킨다. 그렇다고 대척점에 서 있는 문화상대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신좌파들은 양자를 초월하기 위한 관건은 제도의 창조적 혁신이라고 보고 있다. 추이즈위안이 보기에는 이러한 혁신의 총합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또는 자유사회주의이다.

그는 국가소유도 아니고 개인소유도 아닌 중국 농촌의 토지 집단소유가 푸루동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이는 자본주의 대농장이 소농을 모두 잡아먹기를 기다리던카우츠키와 독일 사회민주당과는 다른 중국적 실천이었다는 것이다. 추이즈위안에게 강력한 영감을 준 이론가 중 하나는 제임스 미드이다. 미드의 노자합자기업사회적 배당’(기본소득과 연결되는 개념)을 근거로 추이즈위안은 중국의 주식합자제도가 사회적 배당으로 나아가는 실험을 기대한다.

이러한 추이즈위안의 제도적 설계의 이면에는 사상적 전제가 있다. 바로 자본주의시장경제와 같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시장적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를 대표하는 이론가는 프랑스 아날학파의 창시자인 페르낭 브로델이다. 이 지점에서 브로델-월러스틴-아리기의 사상적 계보가 중국의 신좌파들로 연결되고 있다.

 

신좌파, 공산당의 이데올로그인가?

최근 한국 지식계에서도 오랜만에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의 중심에는 연세대 조경란 HK 연구교수가 낸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글항아리)가 있다. 조경란 교수는 이 책을 통해 2000년대 후반, 정확히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중국 경제의 성공(이른바 중국 굴기(崛起)’) 이후 왕후이를 비롯한 중국 신좌파들은 더 이상 비판적 지식인도 아니고 국제주의자도 아니라고 비판한다. 중국 신좌파들은 자본에는 비판적일지언정 국가에는 침묵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이데올로그가 되었다는 것이다. 왕후이는 2000, “세계 체계의 힘에 주목하고 그 힘에 대항하는 세계적 규모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최근에 와서는 시진핑이 얘기하는 중국몽(中國夢)을 두둔하면서 세계질서 속에서의 중국의 위상 재고, 미국을 넘어서기 위한 전략, 중국모델론, 소프트파워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경란 교수의 이러한 신좌파 비판에 대해 신좌파에 대해서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일당체제가 체제의 출발점인 사회에 대해 서구적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 아닌가등의 반비판이 존재한다.

하지만, 왕후이와 더불어 중국의 대표적인 루쉰 연구가이자, 신좌파에 대해 관대했던 첸리췬의 중국 신좌파에 대한 비판적인 물음을 들어보면 중국 신좌파의 위상과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공산당이 정말로 자기조정의 기제를 가지고 있는가? 중국의 농민은 진정 사회적 주체성을 지니는가? 중국의 당과 정부는 진정 중성적(中性的)이어서 이익집단과 분리되어 있는가?”

예컨대 신좌파들은 야오양의 중성정부(中性政府)’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중국 정부(혹은 중국 공산당)특정한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계급이익을 대변한다고 보는데, 이거야말로 국가에 포섭된 지식인의 대표적인 모습 아닌가?

중국 신좌파들이 국가주의화 되면서 이들의 관심은 중국모델론으로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중국모델론은 서구 신좌파들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다. 바로 미국을 넘어서기 위한 현실 가능한 경로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 말이다. 중국모델론은 미국 중심 체제, 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모델로의 정합성과 현실성을 기준으로 지적 자원이 배치되면서 상상력을 제한하고 협소해질 수 있다. 또한 중국 공산당 체제를 옹호해주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는 비판 역시 주목해서 봐야 한다. 설사 그러한 대안적 중국모델이 성립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서구 중심주의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자유주의 좌파로 분류되는 첸리췬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재구성이 신좌파보다 더욱 좌파스럽게, 더욱 급진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물론 복잡한 대륙의 사상적 지형을 온전히 따라잡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곳으로, 보다 넓은 시야로 옮겨가야 하지만 말이다.

 

<더 읽을만한 책>

중국에서 좌파로 산다는 것/ 좌파로 살다/ 뉴레프트리뷰 엮음 / 사계절 / 20142/ 35,000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조경란 / 글항아리 / 201310/ 18,000

중국을 인터뷰하다/ 이창휘·박민희 엮음 / 창비 / 20138/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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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장석준 지음 / 개마고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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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제7호 2014년3월호

 

 

지구적 좌파정치의 르네상스를 위한 프리즘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장석준 / 개마고원 / 20141/ 15,000

 

19891230KBS 명화극장에서는 낯선 영화 한편이 방영되었다. 칠레 인민연합 아옌데 정권의 등장과 미국 CIA의 사주로 벌어진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를 다룬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가 그것이다. 아무리 87년 민주화 이후였다 하더라도 엄연히 군부독재의 주역 중 한 명인 노태우가 집권한 시기에 이런 영화가 공중파로 상영되는 거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에피소드의 주역은 패기 넘치게 기습 편성해 내보낸 KBS 노동조합이었다. 바로 다음날인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국회에서 면피성대국민 사과 연설을 하던 전두환이 초선 국회의원이던 노무현이 던진 명패에 맞을 뻔한 수모를 겪었다. 명화극장 기습 상영은 광주학살 원흉전두환의 퇴장에 KBS 언론노동자들이 보내는 찬사이자 그간 군부독재의 언론통제 협조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이었다. 미국의 개입, 군사독재, 민간인 학살 등 한국 현대사와 겹치는 상황 때문에 많은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기도 했지만, 이 영화는 바다 건너 운동 세력에 대한 정보에 목말라 하던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한 잔의 샘물이었다.

 

박정희 18년 독재와 전두환 정권 7년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세력과 좌파세력에게 암흑의 시기였다. 단지 폭압과 착취 때문만이 아니다. 한국의 군사독재는 다른 여타 군사독재정권과 마찬가지로 해외의 모든 정보를 통제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우편물은 검열을 거쳤다. 좌파 서적 비슷한 거를 국내에 반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오죽하면 막스 베버(Max Weber)와 마르쿠제(Marcuse)의 책을 들고 다니다가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회자되겠는가? 국민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정권이 선별해 제공하는 정보 밖에는 없었다. 외신이라고 해봤자 미국, 일본의 통신사와 언론사 외에는 없었다. 시각은 좁아지고 시력은 떨어졌다. 보통 사람들에게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전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진 것도 8911일 이후에나 가능했다. 그 이전 시기에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으로 여겼다. 해외 사람들과 손에손잡고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소는 잠실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으로 한정되어 있던 것이다. 그나마 한국을 알고 있는 소수의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프리카 변방에 있는 독재정권과 비슷한 나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은둔의 나라, 폐쇄적 공화국은 한반도 북쪽 뿐만이 아니라 남쪽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남쪽으로 좁혀진 시야와 시력은 조정되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러한 한계는 극복되기 어려웠다. 주체사상과 정통맑스 레닌주의는 한반도 남쪽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시각을 옭아맸다. 어쩌면 진정한 조정의 계기는 87년 민주화 뿐만 아니라 911231, 소련의 해체 이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소련과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한국의 좌파들에게(또한 전 세계 좌파들에게) 저주이면서 동시에 축복이었다. 90년대가 사상적으로 혼돈의 시기였는지는 몰라도, ‘조정은 늘 혼돈을 동반하기 마련 아닌가.

계기는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좌파들의 현재성에 대해 그러나 우리는 많이 알지 못했다. 브라질노동자당(PT)의 활약상이 소개되고, 만델라의 석방과 ANC의 집권을 뉴스를 통해 접하긴 했지만 말이다. 장석준은 이러한 정보불균형정보비대칭의 시대에 세계 좌파정당의 동향에 대해 일찍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장석준과 일군의 젊은 활동가들은 <카피레프트 모임>을 결성하고 외국의 좌파저널 중 논쟁적인 글들을 번역해 읽을꺼리라는 자료집으로 묶어 냈는데, 읽을꺼리5호는 세계 진보정당의 이념/구조/운동이 주제였다.(http://copyle.jinbo.net에 가면 당시 카피레프트모임의 읽을꺼리를 다운받을 수 있다.) 이 자료집은 민주노동당 창당 일정을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이후 만들어진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실천에 장석준은 역사 속의 진보정당들등의 코너를 통해 꾸준히 세계 좌파정당들의 동향을 소개해 왔다. 2005년 공공연맹에서 세계 진보정당 운동의 교훈과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과제라는 자료집을 냈는데, 그 중 상당수의 글이 장석준의 글이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좌파들의 힘이 약화되고, 우여곡절을 겪게 되면서 세계 좌파정당들의 공시적(共時的) 실천을 소개할만한 여유와 지면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겨레21>에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코너가 마련되었고, 여기에 실린 글을 묶어서 낸 게 바로 장석준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이다.

새로운 세계 좌파정당 입문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는 이전의 좌파정당 동향 소개와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지리적 초점의 이동이다. 글의 개수로만 보면, 30개의 글 중 16개가 유럽을 다룬 것으로, 여전히 서구중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변화가 눈에 띈다. 유럽 내에서도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으나, 유로존의 위기 한가운데 있는 남유럽 국가들의 좌파들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또한, 아이슬란드나 러시아, 덴마크 등 새로운 좌파가 부상에 주목한다. 심지어 스웨덴,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이른바 사민주의의 선도국가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 좌파들의 약진과 재구성에도 주목한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아프리카와 중동 등 아랍의 봄의 핵심 지역과 인도에서 독재와 근본주의 모두에 반대하며 부상하고 있는 세속 좌파들에 대한 분석, 그리고 좌파연대를 통해 지구적 반신자유주의 중심으로 부상한 남미의 베네수엘라,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 등에 대한 분석 등이다. 이러한 지리적 초점의 이동의 이면에는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생-청년 세대의 불만의 표출과, ‘아랍의 봄’, ‘남유럽 점거운동등 새로운 공세적 거리정치의 등장이 있다.

장석준은 에필로그를 통해 한국 진보좌파정치도 세계 좌파정치와 마찬가지로 기나긴 재구성의 과정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한국 정치가 마주했던 결정적 계기들을 짚는다. 예를 들면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진보좌파의 독자적 정치구심 결성 여부가 이후 브라질과 한국의 진보좌파 정치의 경로를 좌우했다는 것이다. 또한 남아공과 한국 모두 민주화 과정과 신자유주의 시기가 중첩되면서 자본 독재와 겹쳐진 민주주의가 결국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기회들은 존재했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새로운 대안 제시를 통해 명실상부한 제3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2007년 대선시기와, 2011년의 글로벌 점령 운동의 설익은 한국판 버전이었던 2008년 촛불항쟁이 그러했다. 그러나 진보좌파정치는 민주대연합론을 넘어서지 못했다.

 

남은 것은 새 출발이다. 그러나 새 출발은 재건복원과는 다르다. ‘단절이 전제되어야 한다. 장석준은 단절의 과제로 자유주의 세력 중심의 연합 흐름과의 단절’, 그리고 주체사상과의 단절을 주장한다. 단절 뒤에는 좌파정치의 철저한 실험과 개척, 정비를 통한 혁신이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조바심은 금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련의 시간이지 시간 단축이 아니다. 현재를 비관하되 미래를 비관하지 말자. 기나긴 시간 지평 속에서, 지구적 시야를 통해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사유를 가지고 실천하자. 바로 지구 곳곳에서 우리 동료들이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더 읽을만한 책과 자료>

 

위기 반란 대안 1,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엮음, 책세상, 20131, 12,800

유럽의 경제위기와 정치 변동 : 남유럽을 중심으로, 김종법, 내일을 여는 역사47(20126)

북아프리카 민주화운동의 성격과 전망, 엄한진, 비판사회학회, 경제와사회90(2011년여름)

유럽통합의 모순과 재정위기의 정치경제, 박상현, 비판사회학회, 경제와사회97(2013년봄)

라틴아메리카의 중도좌파 붐, 이성형, 역사비평사, 역사비평96(2011년여름)

라틴아메리카: ‘종속배제에서 해방의 혁명으로, 안태환, 문화과학사, 문화과학67(2011년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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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8
장석준 지음 / 책세상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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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2014년1월 신년호

 

 

사회주의-역사 속 가능성의 퍼즐 맞추기

 

양솔규 노동당 기획조정실 국장

 

사회주의/ 장석준 / 책세상 / 201311/ 9,500

 

퍼즐을 맞춰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행의 우여곡절을 경험해봤을 것이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선택과 실수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마는 속수무책의 과정을 반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실마리를 잡으면 순식간에 진도를 빼기도 한다. 이러한 우연한 발견의 쾌감, 그리고 잘못된 선택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정합의 실루엣이 퍼즐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퍼즐조차도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할진대 우리가 마주하는 역사라는 저 도저한 흐름 안에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응축되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역사의 방향은 어떤 선택과정을 통해 채택되는가? 단지 우리에게 경로의존성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조건에 구속된(것으로 상정되는) 현재의 선택을 단순하게 승인하는 역할만 부여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 채택하며, 실현해야만 할까?

노동당은 지난 623일 정기당대회를 통해 강령을 채택했다. 강령 <노동당 선언>에 따르면 노동당은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소수자 운동과 결합된 사회주의를 천명하고, “평등·생태·평화 공화국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강령에서 말하는 사회주의가 어떤 역사적 경험과 지적 반성을 거쳐서 도출된 개념인지, 80~90년대 수없이 외쳤던 슬로건으로서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고 같은지 짧은 당 강령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말하자면 강령 형성의 이해 수준은 울퉁불퉁하기에 복기 과정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당 강령 작성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 중 하나인 장석준 노동당 부대표의 지적 작업을 들여다봄으로써 당 강령 형성의 맥락에 한발 다가갈 수 있다. 장석준 부대표는 올해 여름 <적록서재>(뿌리와이파리)를 통해 자신의 지적 행보를 일별한 바 있다. 그리고 11월 마지막 날, 자신의 지적 자원을 <사회주의>라는 하나의 개념을 통해 버무렸다.

그러나 개념을 정리하는 작업은 수많은 논쟁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견(異見) 없는 개념이란 없다. 언어적 개념이 지칭하는 역사적 내용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개념은 정의의 대상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해석의 대상이다. 해석에는 왕도가 없으며, 정통도 없다. ‘정통을 뒷받침하는 권위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개념을 단단한 실재로 바라보기보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품은 언어적 구성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베가 받아들이는 민주화의 개념과, 이른바 386 세대가 받아들이는 민주화의 개념이 다르며, 19세기의 사회민주주의20세기 후반 사회민주주의는 다른 파장과 깊이를 간직하고 있듯이 말이다.

 

장석준은 170여 쪽에 불과한 짤막한 입문서를 통해 사회주의 운동의 중간결산을 시도한다. 프랑스 혁명과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운동으로 사회주의를 발견(?)했다. 당시의 사회주의란 E.O.라이트의 표현대로 하자면 사회중심 사회주의였다.

당시의 사회는 그러나 자본주도의 문명이 아직 만개한 사회는 아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문명 탐색은 자본주의 문명 이후에나 가능한 시계열적 연속선상에 있지 않았고, ‘자본주의 문명대신에 선택 가능한 근대 문명의 또 다른 길이었다.

그러나 이후 사회주의의 종합을 시도한 맑스와 엥겔스의 시대는 자본주의 대승리의 시대였다. 증대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불평등의 원천이 아니라 해방의 힘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맑스, 엥겔스의 사상은 정통 마르크스주의로 정리되었고, 역사유물론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운명에 결박시켰다. 1917년 혁명을 통해 등장한 국가사회주의에게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궁극적 성취에 이르러야 하는 체제가 되었다.

 

물론 맑스에게 그러한 혐의를 과도하게 소급해 씌울 필요는 없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그러했듯이 맑스에게도 사회주의에서의 사회가 어떤 형식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는 하나의 과제였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하는 협동조합적 생산을 코뮌주의의 구성요소로 제시하기도 했다. 맑스 뿐만이 아니다. 레닌도 말년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과제는 주민을 협동조합 결사체로 조직하는 것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람시의 평의회 운동 역시 자본을 대체할 사회적 실체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국가 = 사회라는 공식은 도그마일 뿐이다. 장석준은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의 입을 빌러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발전을 계승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 문명 전체의 치유전환그리고 새 출발을 위한 프로젝트라고 정식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실체들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지구적 생태위기가 단지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인류문명 자체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는 지금, ‘사회(주의)’의 목표는 경제적 성장이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합리성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멈퍼드와 일리치의 역동적 균형’(멈퍼드)다중 균형’(일리치)이 사회주의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목표에 풍부한 거름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중심) 사회주의를 실체화하고, 새로운 문명을 추구할 주체는 누구인가? 저자는 현실의 노동자 계급을 자동적으로해방의 주체로 상정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맑스가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의 주체로 바라본 까닭은 기존 사회의 이해관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 비롯되는 자유’” 때문이지, 생산력 증대를 담지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결박당한 노동자계급이 아니었다. 체제에 결박당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중들 스스로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기로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며, 결단을 실천할 주체가 없다면 발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정치적 과제라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쿠바혁명, 차베스를 비롯한 남미 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색 등 사회주의 운동 속에서 국가사회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운동들에 대한 검토, 자본주의 내에서의 급진적 변화를 추구한 스웨덴 임노동자기금 모델, 영국과 프랑스 등의 구조개혁 노선에 대한 검토, 앙드레 고르, G.D.H.콜 등 수많은 현대 사회사상가들의 상상력 충만한 이론들에 대한 검토는 사회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재구성하기 위한 재료였다. 사회주의 역사를 다시 반추하면서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들을 환기하는 것, 가능성을 조각모음 해 새로운 퍼즐로 조합하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의 새 출발에 필수적이다.

 

개념은 무엇보다 해석의 대상이며, 언어적 구성물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말하자면 개개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다양한 사유들, 검토 가능한 모든 역사적 운동들을 가지고 우리는 더 많은 사회주의 퍼즐 조합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려는 사회주의 문명의 등장에는 더 많은 자양분이 필요할 것이다. 노동당 강령도,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개념도 더 많은 해석과 논의, 그리고 실천을 필요로 한다. 도약하자! 그리고 사유하자!

 

<더 읽을만한 책>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 / 2009/ 38,000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생각의나무 / 앙드레 고르 / 2011/ 15,000

적록서재/ 장석준 / 뿌리와이파리 / 2013/ 1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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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눈물 우리시대의 논리 18
박흥수 지음 / 후마니타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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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2013년 12월호

 

[불온한 서재]

 

기차의 눈물닦아줄

행복한 실패를 위하여

 

철도의 눈물/ 박흥수 / 후마니타스 / 201310/ 13,000

탈선/ 앤드루 머리 / 이소출판사 / 20032/ 12,000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강촌역은 폐쇄되고 신촌역에는 민자 역사 들어서

tvN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화제다. 1서울사람편을 보면, ‘삼천포가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겪게 되는 촌놈의 상경기가 그려진다. 기차까지 타고 온 삼천포는 당시 수도권에만 있는 지하철을 못타 헤맨다. 3신인류의 사랑편에서는 주인공 나정이 강촌으로 MT를 가는 장면이 나온다. 4거짓말을 보면 나정이 친구들의 거짓말에 속아 신촌 기차역에서 꿈에도 그리던 농구선수 이상민을 기다린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보면서 추억 돋는다. 시간은 세상을 많이 바꿔 놨다. 부산지하철 1호선이 완전개통된 해가 94년인데, 현재 부산에는 네 개의 노선이 땅 속을 누비고 있고, 다른 도시들에도 지하철과 경전철이 제법 많이 생겼다. 수도권의 대학생들이 강촌이나 대성리로 MT를 갈 때 많이 이용하던 경춘선에는 복선전철이 들어섰고, 강촌역은 폐쇄되었다. 나정이 기다리던 조그맣던 신촌역에는 거대한 민자역사가 들어섰고, 사랑스럽던 구 신촌역사(驛舍)는 헐렸다. 문화적 가치, 사회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밀려 순식간에 내팽개쳐진다.

문제 하나 내보자.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은 어떻게 베를린에 갔을까? 일제 강점기 여의도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탔을까? 아니다. 그럼 부산에서 여객선을 타고 머나먼 유럽 땅으로 갔을까? 아니다. 손기정은 기차를 탔다. 그 당시 조선은 한국과 같은 섬나라가 아니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면 베이징으로, 베를린으로, 파리로, 모스크바로 달려갈 수 있었다. 손기정도 서울역에서 703 열차를 타고 베이징과 하얼빈을 거쳐 대륙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장거리 기차여행은 일단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간 후에야 어찌해볼 수 있는 이 되었다. “분단은 사람들의 몸만 반도에 가둔 게 아니라 꿈도 가둬 버렸다.”

 

촛불이 막아낸 철도 민영화, 박근혜 정권이 완성하나

우리나라에는 철도 오타쿠가 많지 않다. 하지만 이웃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철도 오타쿠와 관련한 애니메이션이 등장할 정도로 많다. 그런데 여기 자칭 철도 오타쿠라고 말하는 한국의 박흥수 철도기관사가 귀중한 책을 하나 냈다. <철도의 눈물>이 그것이다. 명색이 이 꼭지 제목이 불온한 서재인데, 이 책은 전혀 불온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불온한 생각을 반박하는 내용이 주다.

신자유주의 시대 역대 모든 정부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진행되던 민영화, 정확하게 사유화(Privatization)’ 정책을 박근혜 정부는 완성하려 하고 있다. 촛불이 막아낸 사유화, 이명박이 결국 완수하지 못한 철도 사유화가 곧 결판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시절 국민적 동의와 사회적 합의 없는 철도 민영화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국토부 장관이 임명되자마자 KTX 경쟁 체제 도입을 발표했고 철도사유화 추진은 재개되었다.

핵심은 이렇다. 한국 철도는 포화상태다. 철로는 모자란데, 수요는 많아 서비스의 질이 떨어졌다. 주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서 KTX 수서-평택 고속연결선이 제시되었다. 그렇게 되면, 기존 서울-금천간 병목현상(고속선+일반선)이 완화되고, 평택에서는 일반선과 연결되며, KTX 열차 투입대수를 늘릴 수 있다. 또한 무궁화호와 새마을호의 속도 역시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빨라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수서발 KTX노선을 코레일의 자회사 형태로 민영화하겠다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땅 짚고 헤엄치기인 알짜배기 흑자노선을 재벌에게 넘겨주면 네트워크 산업의 특성에 따라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하게 된다. KTX에서의 영업이익은 지방의 적자선들을 보조(교차보조)해주는 중요한 자원이다. 이를 통해 적자를 보고 있음에도 지방선들이 운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서발 KTX이 사유화되면, 기존 서울역발 KTX 수익은 떨어지게 되고, 교차보조 비용은 줄어들게 되며, 지방선의 적자는 가중되고, 결국 지방선은 폐쇄되거나 민영화되고 마는 악순환이 벌어지게 된다. “밀양마산진주창원으로 가시는 승객께서는 코레일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고객을 생각하는 저희 수서발 KTX는 일반철도 노선과 연계 운행되지 않습니다.” 2016, 우리는 수서역에서 이런 안내방송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이 비극적 시나리오는 국토부가 가장 원하는 시나리오인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수서발 KTX는 일부 노선으로 한정된 부분적 민영화가 아니라, 한국 철도 민영화 도미노의 가장 첫 번째 블록인 셈이다.

 

철도 민영화로 엄청난 댓가 치른 영국, 그 전철을 그대로 밟겠다고?

이명박 정부는 철도 운영의 핵심중 하나인 관제권을 철도공사에서 철도시설공단으로 넘기려 했다. 그러나 저항이 거세지자 박근혜 정부는 관제권 이관을 수서발 KTX 민영화 이후로 넘긴 상태이다. 또한 철도공사가 관할하는 역과 차량기지 등을 환수해 재벌과 해외자본에 개방하고 넘기려 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는 2010WTO정부조달협정을 통해 한국 철도의 모든 분야를 외국 자본에 개방했다. 그런데 이미 한국의 사회간접자본의 상당수가 외국자본이 잠식한 상태이다. 얼마 전까지 맥쿼리는 지하철9호선의 2대주주였으며, 지금도 인천공항 고속도로, 인천대교, 서울-춘천 고속도로, 우면산 터널 등의 대주주 또는 운영자이다.

한국의 철도는 전체 길이가 약 3,500km로 규모의 경제와 네트워크의 유기적인 안정성을 이룰 수 있을 만큼 크지 않다. 독일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런데 정부는 이마저도 쪼개려고 하고 있다. 한국 철도를 발전시키려면 오히려 네트워크 분리가 아니라 통합적으로 조화롭게 운행하면서 수서발 KTX를 지렛대로 새롭게 도약해야 한다.

정부는 코레일이 비효율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경쟁을 시켜야 하고, 민영화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어디서 비롯된 생각일까? 정부의 정책은 실패한 민영화의 사례인 영국 철도의 민영화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영국판 <철도의 눈물>이 있다. 영국 철도기관사 노조 공보 담당관 앤드루 머리가 쓴 <탈선>은 한국 철도가 맞이할 지도 모르는 파국의 묵시록이다. 이 책은 당시 민주노총 정책부장으로 있던 오건호 박사가 번역했다.

 

<사진: 민주노총 정책부장 시절 오건호 박사가 번역한탈선(앤드루 머리 / 이소출판사 / 20032)

 

영국은 사유화의 폐해를 겪은 후 민간에 매각한 시설 부분을 다시 정부가 인수하면서 재공영화되었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연이은 열차사고가 벌어졌고,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사용되어야 할 막대한 부가 사유화의 혜택을 입은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공적 보조금이라는 이름으로 흘러 들어가 주식배당으로 귀결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영국 화물 철도는 세 개의 기업으로 분할되었고, 열차운행은 25, 여객 차량은 3, 선로유지는 3개 기업으로 분리되는 등 총 100여개의 회사로 쪼개졌다. 하청까지 합치면 1,000여개의 기업이 생긴 것이다. 납세자들의 부담은 오히려 늘었고, 도로와의 경쟁에서 철도는 밀렸다. 민영화가 경쟁을 통해 효율을 높이는지, 아니면 비효율과 무책임만 양산하는지 영국의 사례는 생생하게 보여준다. 번역된 지 10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탈선>이 고발하는 영국 철도 민영화의 폐해는 참고할 만하다.

 

재벌과 정권의 위험한 거래막기 위한 철도노조의 싸움

2013, 민영화를 저지하기 위한 철도노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싸움은 국민의 철도, 철도의 공공성을 위한 싸움이다. 또한, 필수인력을 제외한 모든 철도노동자를 2천만원짜리 비정규직으로 만들 수 있는, 재벌과 정권의 위험한 거래를 막기 위한 비정규직 예방투쟁이기도 하다. 지난 1023일 노동당 강북당협은 <철도의 눈물>의 저자 박흥수 기관사를 모시고 강연회를 열었다. 강북당협처럼 저자의 풍부한 자료와 생생한 입담을 노동당 당원협의회가 쏙쏙 빼먹었으면 좋겠다. 당장 각 당협에서 저자와의 대화를 시작하면서 철도노조와의 연대에 나서보자! 지하철9호선 환수, 단일요금체계로의 전환, 지하철 운영기관 통합 등 지방선거 공약도 고민해보자! 시장맹신주의자들에게 2015년은 철도민영화 완수의 원년이란다. 자본과 권력이 인간다운 삶을, 공동체적 사회를 탈선시킨다면 우리의 사명은 탈선된 열차를 제대로 돌려놓고, 부서진 선로를 복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저들의 성공이 우리의 불행이며, 저들의 실패는 우리에겐 행복한 실패이다. 2년 남았다.

 

<더 볼만한 자료>

캔 로치 감독, 영화 <네비게이터 the Navigators>,(2001, 영국 철도민영화를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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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용체제론 우리시대 학술연구
정이환 지음 / 후마니타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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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2013년 11월호

 

신자유주의 분절노동시장을 넘어

사회적 노동시장으로

한국고용체제론/ 정이환 / 후마니타스 / 20138/ 17,000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 변수는 노동시장

언제부터인가 총선이나 대선과 같이 큰 선거의 판세를 좌우할 주요 이슈로 일자리 문제가 대두되었다. 아마도 IMF 이후부터 이러한 현상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듯한데, 이른바 호시절이던 1987~1995년에는 일자리고용안정보다는 임금문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 변수는 노동시장의 문제이고, 우리 삶은 일자리’, ‘고용안정성등의 성격에 따라 좌지우지 된다. 그래서 이 시대를 불안정 노동의 시대라 하지 않던가.

삶에 대한 노동시장의 규정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시대에 정이환 선생의 한국고용체제론은 실천적으로 긴요한 책이다.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기대하고 기다린 책이기도 하다. 정이환 선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동시장’, ‘고용체제연구자다. 이미 이 분야에 관해 많은 책을 저술한 바 있다. 한국의 제조업 노동시장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했는지 분석한 그의 박사논문 제조업 내부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1992)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2006년에는 현대 노동시장의 정치사회학을 통해 서구 다른 나라의 노동시장과 우리 노동시장을 비교사회학적 관점으로 분석하였다. 이 책의 논지는 이번 한국고용체제론에서도 반복해서 주장된다. 또한, 2011년에 출간된 경제위기와 고용체제를 통해서는, 서구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한국과 일본의 고용체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면밀히 검토했다.

 

한국의 고용체제, 신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분절적이다

원근법에서 모든 시선이 소실점으로 모이듯이 정이환 선생의 연구의 목적은 한국 노동체제의 특성은 무엇인가에 대해 밝히는 것으로 수렴된다. 이 책은 주로 고용과 노동시장 측면에서 한국 노동체제의 특성을 해명하려 하며, 이를 고용체제라는 용어로 정리한다. 경영학의 노동시장연구와는 달리 사회학에서는 노동시장을 순수한 경제적 공간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고용관계를 맺고 있는 행위자들 역시 중요하기 때문에 노동시장 체제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의 논지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고용체제는 신자유주의적 분절 고용체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적 성격분절적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논리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는 두 성격이 한국 노동시장의 현실에는 동시에 나타난다. 분명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노동시장 전반에 시장원리가 강하게 관철된 것은 사실이지만, 87년 이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기업내부노동시장을 일정하게 지켜내기도 했다. 말하자면, “한국의 기업내부노동시장은 전체 노동시장의 신자유주의적 경향을 제어할 정도로 강하지 못하지만, 내부자와 외부자의 근로조건에 현저한 격차를 만들어 낼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일차 노동시장의 규모도 작고, 중대 기업 노동자 비율도 낮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고용체제의 성격을 드러내는 점인데, 그럼에도 저자는 하도급 관계를 통한 1차 노동시장 부문의 강한 지배력으로 인해 분절 고용체제의 성격 역시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 저자는 비교연구를 통해 한국 고용체제를 대륙유럽형이나 북유럽형과는 멀고, (시장규정적인) 미국형과 (기업중심적인) 일본형의 성격이 동시에 나타나는 미국형과 일본형의 혼종형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혼종성은 단순한 섞임이 아니라, ‘한국형체제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한국 고용체제의 행위자를 규율하는 작동 원리로 강한 시장 중심성, 기업 중심성(내부노동시장과 재벌체제), 가부장주의, 그리고 기업 내 노사간 각축을 제시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기업 중심성은 한국의 노동시장 분절이 주로 기업내부노동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노동시장은 1, 2차로만 나뉘어 있지 않고, 기업규모별로 다층화 되어 있고, 기업별로 파편화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근로조건은 고용형태보다 기업 규모가 훨씬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계급적 주체는 어떻게 형성될 수 있나

여기서 계급주체 형성을 중심에 놓고 연구하는 또 다른 사회학자 조돈문 선생의 논지를 떠올리게 된다. 조돈문 선생은 비정규직 주체형성과 전략적 선택(매일노동뉴스)이라는 저서를 통해 한국의 비정규직 주체형성이 왜 실패하는지를 분석한다. 강한 신자유주의 (1,2) 노동시장이라는 참호로 둘러싸인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분절된 기업내부노동시장의 현실을 볼 때 일방적 자본지배력은 차치하고서라도 한국 비정규직 주체형성이 실패하는 것은 어쩌면 이미 예견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조돈문 선생은 정규직과의 연대의 수준을 가능한 만큼으로 한정하고 비정규직 운동은 장기적 관점에서 유연한 전략을 구사하자고 제안한다. 또한 요구조건의 완전쟁취보다는 조직의 보전강화에 활동의 방점을 두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유연한 전략을 구사하는 비정규직 투쟁의 궁극적 목표는 운동주체 형성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현실을 볼 때 일견 용감해 보이기도 하고, 타협적으로 보이기도 한 이러한 제안은 척박한 비정규직의 마지막 선택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이환 선생 역시 다른 책에서 분단노동시장이 노동계급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계급형성은 단순히 노동시장이나 경제성장과 같은 시스템이나 구조의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한국의 고용체제가 신자유주의적 성격분절적 성격을 모두 가진 것이라면, 처방도 두 가지를 공히 겨누어야 하지 않을까? 조직적 자원의 고갈 속에서 반신자유주의 구호만으로는 헛스윙만 날릴 뿐이며, 정규직 노동운동의 방어적 저항만으로는 노동운동의 미래도, 그 자신이 이룩한 과거의 성과도 이어나갈 수 없다는 점은 이미 실천적으로 증명됐다. 기업별로 파편화된 노동시장 속에서 노동조합의 조직적 저항수단 역시 기업별로 파편화되어 있다면 이거야말로 저항의지의 포기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금속산업 내 기업지부의 해소, 그게 어렵다면, 분권화 되었으나 조율되는 교섭패턴과 산업적 기준마련을 통해 산업 내 기업규모별 불평등을 줄이는 단초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노동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로서 노동조합의 유의미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저자가 제시하는 현재의 한국 고용체제론역시 ‘87년 노동체제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과도기적 체제일 뿐이다. 당장 노사관계를 통해 노동시장을 급속하게 재편할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이지만, 지금의 노동시장을 재편하기 위한 행위자의 주체적, 구체적 노력은 장기적으로도 필수적이다. 우리 노동운동은 이를 위한 지렛대로 숙련문제임금체계를 고민해 봐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사회적으로 논의하고 풀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장기적으로 사회적 노동시장의 구축을 위한 단초가 마련되지 않을까 한다.

 

<더 읽을만한 책>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 미셸 알버르 / 소학사 / 199310/ 6,000

일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1,2/ 윤진호 외 / 한울 / 2010, 2012

제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캐쓸린 씰렌, 신원철 역 / 모티브북 / 201112/ 2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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