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회원들이 로쟈님에게 사전에 댓글로 질문한 내용에 대해 먼저 답변을 주시고 현장에서 참석자들에게 몇 개의 질문을 따로 받아 답변을 하는 걸로 토크를 마무리하셨습니다. 토크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서평은 어떻게 쓰나.
일단 몇 매짜리인지 분량이 중요하다. 그 분량에 맞게 책을 읽는다. 책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10 매짜리 서평을 쓸 수가 없다. 생각할 거리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런 경우 슬쩍 읽어야 한다. 20 매짜리는 조금 더 깊게 들어가야 되고 30 매짜리는 더 깊이 들어가고 다른 책도 보고 하는 차이가 있다.
2. 그렇게 많은 책을 어떻게 읽나.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좋아하는 책은 자세히 읽고 싶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되지 않아 부득불 이것저것 들춰 본다.
읽지는 않지만 많은 책의 표지와 목차를 본다. 학교 도서관에서 50권, 동네 도서관에서 3권을 대출할 수 있는데 늘 53권을 다 대출해 놓고 있다. 이렇게 읽지는 않더라도 많은 책을 본다.
거의 매일 검색을 해, 관심 저자나 관심 주제다 싶으면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은 다 구해 쌓아 놓는다. 필요한 부분을 필요할 때 찾아 읽는다. 쏟아져 나오는 책을 다 읽는 건 불가능하다.
3. 인문학이 위기라는데.
한마디로 생계위기다. 먹고 살기가 힘든 것이다. 즉 인문학자의 위기다.
하지만 이런 뭉뚱그린 인문학 위기 담론엔 공감하기 힘들다. 인문학 내에서도 위기에 대한 체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학부제 실시 후 군소학과는 위기지만 영문학과나 중문과는 절대 위기가 아니다.
4. 인문학의 범위는.
인문(人文)은 사람 인(人) 자와 글월 문(文) 자를 쓴다. 즉 인문학은 전부다. 이런 포괄성이 인문학의 특장이기도 하고 인문학의 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협소한 관심을 갖는 인문학자라는 것은 넌센스다. 문학을 예로 들면 작가마다 전공이 다 있다. 나는 A 작가 전공이라서 B 작가는 잘 몰라요, 혹은 C 시대가 전공이라서 D 시대는 모르겠어요 같은 얘기가 통한다. 이런 전문화 경향 때문에 다른 분야에 대한 무지가 아주 쉽게 정당화되곤 한다. 인문학에 대한 원(原) 이미지와 어긋나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요즘 들어 내가 전체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주의와 대립되는 이념으로서의 전체주의가 아니라 올바른 개인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체성에 대한 고려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인문학적 보편성이란 게 유럽적 보편성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유럽인의 사고는 인문학이 되고 비유럽인의 사고는 인류학으로서 연구가 된다. 비유럽권은 학문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것이다. 인문학 자체에 유럽 중심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게아닐까. 어느 일본인이 이런 말을 했다. 일본인이 인문학을 하는 것은 원숭이가 그리스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가능은 하지만 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5. 인문학 공부가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것 말고 세상에 대해 바른 태도를 가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별로 상관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문학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 공부라면 아주 지겨워 하는 것을 많이 봤다. 세상에 대해 바람직한 태도를 가지는 것 같지도 않다. 인문학과 인격은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6. 요즘 같은 세상에 인문학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난 희망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필요한 건 절망이다. 희망, 행복은 값어치가 없는 말이다. 제대로 절망하는 법만 알게 되어도 다행이 아닌가 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는데 책을 읽을수록 고통에 대해 민감해지게 된다. 가령 양차 대전에서 유럽에서만 6천만 명이 죽었는데 그 역사를 맨정신으로 읽기는 어렵다.
어떤 행복이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다만 우리에게 왜 희망이 없는가 아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이 왜 부끄러운 것인가 제대로 아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재미란 말도 싫다. 요즘 세상이 루키즘, 외모지상주의, 외관주의, 온통 그런 것에 지배되는 것 같다. 책도 재미난 책만 찾는다. 재미 없어도 좀 읽는 거다. 재미 없어도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 재미만 찾는 생활방식은 동물적이다.
질문. 서재에 번역 관련 글이 많다.
단순한 번역비평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확장해 번역과 주체의 문제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번역-내(內)-존재이다. 대다수 책들이 번역서이고 사회, 국가, 민족처럼 우리가 쓰는 개념어들이 수입되어 번역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의 기원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오역을 다루는 번역비평과 관련해서 나는 기본적으로 번역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다. 고난이도의 오역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부정문을 왜 긍정문으로 옮겼냐를 지적하는 수준이다. 명백한 오역을 교정해서 읽자는 주의다.
알려진 것과 달리 한국어가 영어보다 의미가 섬세한 경우 번역이 어렵다. people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어론 인민, 민중, 국민, 다중, 어중이떠중이, 사람이 다 people이다. 영어 단어 people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걸 한국어로 번역하는 건 어렵다. 다른 예로 에스키모어엔 눈에 대한 단어가 수십 가지라고 한다. 한국어의 눈을 에스키모어로 옮긴다면 그 중 무슨 단어를 골라야 할지 어려울 것이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내년쯤 번역서와 번역비평서를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