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른생활 > 2009년 6월29일 고도원님 강연
2009년 6월29일 고도원님 강연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제 인생의 책
저는 5년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 밑에서 연설 담당 비서관으로 일했습니다. 그 전에는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15년 동안 근무했는데 처음엔 사회부에 있다가 정치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평민당 총재를 하시던 김 전 대통령을 만난 것도 그때입니다.
이분에겐 인생의 책이 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란 책입니다. 세 권으로 된 아주 굵은 책이에요. 이분이 어느날 젊은 기자들하고 차를 마시면서 당신의 인생의 책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그 이야길 꺼냈는데 그 책을 읽은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 재미가 없잖아요. 같이 읽은 사람이 있어야 이야길 주거니 받거니 하죠. 그런데 저는 이미 그 책을 15번 이상 읽은 사람이었어요. 어떤 구절은 제가 암송해요.
왜? 그게 제 인생의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게 제 인생의 책이었느냐?
제 아버님은 시골 교회 목사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이렇게 네 권을 떡 던져주시며 "밑줄 그어 놓아" 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날 회초리로 때리셨어요. 저의 형님은 그날 가출했습니다. 원망했어요. 그런데 저는 가출까진 안 했어요. 맞으면서 엉터리로 줄을 다 그어 놓았습니다. 그 책 네 권이 지금 제 서재 가운데에 보물처럼 꽂혀 있어요. 최고의 유산입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읽었는데 대학 시절 연세춘추 기자를 하면서 다시 펼치니까 그때 엉터리로 그었던 부분에서 소리가 나는 거예요. 나중에 기자 생활을 하니 세상이 보여. <역사의 연구>의 테마에 퇴각(withdraw)과 복귀(return)가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은퇴하고 영국으로 떠났을 때 저는 이분은 반드시 리턴하리라, 아놀드 토인비의 논법을 가지고 예언했어요.
아무튼 그날 인생의 책을 두고 두 시간, 세 시간 이야길 했어요. 전 이게 인연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분이 어느 날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의 주인이 되어 절 청와대로 불렀어요. 물으시길 청와대에서 일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제가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 있다마다요라고 대답했죠. 제가 여쭸습니다. 어떤 자립니까? 대통령 연설문 쓰는 자립니다 라고 하시더군요. 제 꿈이었습니다. 글쟁이로서 죽기 전에 대통령 연설문을 꼭 쓰고 싶었어요. 근데 그 자리에 와서 일을 하라니. 그 자리라면 9급이라도 하겠습니다. 바로 다음날부터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책이 있으십니까?
2. 아버님이 물려주신 책들
저희 집은 가난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도시락을 싸가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부부도 싸움을 많이 합니다. 궁핍하면 별 수 없지요. 여러 유형의 싸움이 있는데 책 갖고도 많이 싸우셨습니다.
제 아버님이 돌아오실 때 옆구리에 책 한 권을 끼고 돌아오십니다. 아주 행복해 하세요. 하지만 제 어머님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입니다. 어머님이 책을 보시고 이걸 해 말어 하시다가 "또 책을 사셨어요!" 합니다. 아버님의 행복한 표정, 거룩한 목사님의 얼굴은 사라지고 아내 앞에서 비굴한 표정이 됩니다. 오늘은 뭐라고 달래나. 정말 미치겠다. 오늘 이 국면을 어떻게 모면하나.
제가 아들이니 아버님 말씀하시는 걸 흉내내 보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거여. 어떻게 하자는거여? 목사가 책을 읽어야 설교 준비라도 하지!"
그러면 저희 어머님도 안 집니다. 한 옥타브 목소리가 올라가서 "내가 한 달 내내 고구마 이삭 주어야 당신 책 한 권 값이 안 된단 말이여." 합니다.
그런 싸움을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어머님이 제게 하소연을 많이 했어요. 네 아버지랑 못 살겠다고. 저는 제 아버지가 아주 못된 사람으로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전 어머님 편이었어요. 돈 벌고 싶었어요. 어머님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어요. 책만 보면 울분이 생겼습니다. 제가 또 매를 맞으며 책을 읽었잖아요?
그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게 엄청난 양의 책을 물려주고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책을 책이라고 하잖아요? 제게 책은 책이 아닙니다. 특히 아버님이 물려주신 책은 책이 아니에요. 혹시 여러분의 부친께서 평생 피리 하나 불고 가셨으면 그 피리가 그냥 피립니까? 시중에 나도는 피리예요? 그분의 영혼입니다. 그분의 눈물입니다. 그분의 전 재산입니다. 그분의 비굴함입니다. 그분의 부부싸움의 결산이에요.
가난한 목사였던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나라에서 당대 최고의 장서를 자랑하는 목사였습니다. 저는 아버지 책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거 끌고 다니다 제 아내랑 여러 번 다투었습니다. 책이 산더미입니다.
3. 아침편지의 시작
청와대에서 일하면서 정식 휴가를 딱 사흘 받아 보았습니다.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일을 했습니다. 대통령 연설문 작성하는 일은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에요.
한때 오른쪽 손끝만 겨우 감각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마비된 상태인 적도 있었습니다. 고개조차 못 돌려요. 겨우 잠들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 합니다. 글쟁이들이 예민합니다. 토씨 하나에 번쩍번쩍 깨는 게 글쟁이예요. 아침에 못 일어나요. 식은 땀이 즐비해. 정말 흥건한 거예요. 그래도 새벽 6시면 벌떡 일어나 나가야 합니다. 퇴근 예정 시간이란 건 없었습니다.
정말 죽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삿짐 챙길 때 제 책상에 약봉지가 산더미예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약을 다 먹었냐고 놀랍디다. 그때는 단 세 시간만 정신이 명징하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약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절망의 시간이 왔을 때 아버님이 보시던 책에서 밑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전율이 왔습니다. 전선에 감전된 느낌이었습니다. 당신은 돌아가셨는데 당신이 그어 놓은 밑줄에서 당신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목소리가 들립니다. 노신의 <고향에서 본 희망> 속의 구절입니다.
내가 아침편지를 시작하면서 어떤 구절로 시작할까? 내가 그어 놓은 밑줄? 그게 아니고 아버님이 그어 놓으신 그 밑줄로 시작한 겁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제 인생의 최고 모토가 된 이 글은 저희 아버님이 주신 글이에요. 저는 이런 씨앗들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책에서 발견했어요.
4. <꿈 너머 꿈>
제가 카이스트에서 강연을 하는데 한 학생에게 "꿈이 뭐예요?" 라고 물었더니 "과학자가 되는 겁니다"라고 대답해요. "과학자가 돼서 뭐하시게요?" 라고 하니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다른 학생에게 또 물었습니다. "꿈이 뭐예요?" "교수 되고 작가 되는 것입니다." "교수, 작가 돼서 뭐하시게요?" 대답을 못합니다. 또 다른 남학생한테 물어 봤어요. 그 학생이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저는 빌 게이츠처럼 대박 쳐서 돈을 버는 겁니다"라고 합니다. "돈을 벌어서 뭐하시게요?" 했더니 "저 혼자 편하게 잘 먹고 잘 살려고 합니다"라는 답을 하더군요.
엉겁결에 본심이 나온 겁니다. 제 아들도 과학고 다니지만 애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다 의사예요. 큰일 났습니다. 너 왜 의사 될래, 물어 보면 돈 많이 벌잖아요, 안정적이잖아요, 여자에게 인기 있잖아요, 이럽니다.
근데 그 말을 듣자마자 속에서 불덩이가 올라왔어요. 그날 15분 즉석 웅변을 했습니다. 오늘은 2분으로 줄여 메시지만 전하겠습니다. 목소리 낮춰서 할게요. 그날은 귀청이 떨어져라 고함을 지르면서 했습니다.
이 세 학생의 꿈에 이 학생들의 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정말 안타깝게도, 이 꿈이 이루어진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는 '꿈 너머 꿈'이 없습니다. 고함을 질렀어요. 제 책 <꿈 너머 꿈>은 거기서 나온 겁니다.
우리 시대에 몇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한 대통령은 중학교 2학년 때 자기 책상머리에 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잘 적어 놓았습니다. 노력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겐 대통령이 된 다음 무엇을 하겠다는 '꿈 너머 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IMF라는 환란을 맞게 되었습니다.
저 혼자 편하게 잘 먹고 잘 살겠습니다는 젊은이가 꿀 꿈이 아닙니다. 그 꿈이 이루어질수록 많은 사람들한테 재앙이 될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좋은 꿈이냐? 한 사람의 꿈이 한 사람의 꿈으로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꿈이 한 사람의 행복, 한 사람의 성공에 머물지 않는 거예요. 한 사람의 꿈이 열 사람, 백 사람, 천 사람, 만 사람의 꿈으로 자라나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꿈이에요.
꿈을 가진 사람, 꿈을 이룬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 너머 꿈'을 가진 사람은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