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져 내려오고 있고, 또 그 진실이라는 것은 언젠가 옳고 그름이 누군가에 의해 수없이 파헤쳐지고 있다. 그 또한 역사이다. 그 근거 또한 누군가 의혹을 품게 된다. 내가 알고 있었던 사도세자의 세자빈 혜경궁 홍씨는 남편을 일찍이 참혹하게 잃고, 그 한을 달래기 위해 <한중록>을 기록했으며 우리는 그 여인의 설움이 그 시대의 전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연히 읽게 된 이 책에서 새로운 또 다른 사살을 알게 되었다. 풍산 홍씨 가문이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병신처분이 없었다면, 이 몰락이 아니었다면 <한중록>이 쓰여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그녀의 눈물은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해자를 위한 눈물이었다.

 

영조가 8년 만에 얻은 세자에 대한 애착은 책의 여러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

문무가 뛰어나고 지방 행차시 따르는 백성의 행렬은 출생의 콤플렉스를 안고 태어나,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게장과 감, 인삼차와 상극인 약을 강제로 왕에게 올렸다는)를 받는 영조에게는 위협이 되고도 충분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세자의 정신병은 아버지 영조에게 더없는 아픔이기에 가혹한 죽음을 결코 내릴 수 없었을 것이며, 비행이라면 폐세자로 충분치 않았을까. 아마도 영조의 부정으로 본다면 비행조차도 어여삐 보아넘길 정도로 넘쳤다.

 

탕평책에 주력했던 영조. 그러나 자신의 콤플렉스로 인해 노론의 강세를 극복하지 못했던 영조. 노론의 횡포에 반발한 사도세자는 장인 홍봉한을 위주로 했던 노론 세력을 인원왕후 김씨, 숙의 문씨(영조 후궁),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친정을 택해 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친정에게 고한 세자빈 홍씨 등 이들에 둘러싸여 고된 세자의 길을 걷ㄷ가 죽음을 맞는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이 외침으로 일단의 그 시대의 노론 세력은 주춤했으나 계속 잔류하고 있는 그 파벌 속에서 아버지의 궁중 생활을 보아온 정조는 아주 조심스럽게 왕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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