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연구회에서 펴내는 [철학연구]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여기 올리는 판본은 아직 교정이 완료되지 않은 판본이니 인용이나 토론을 원하는 분은 


[철학연구]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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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에티엔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에 대하여


 

1. 발리바르 폭력론의 문제설정

 

폭력이라는 문제는 자명한 문제이거나 무기력한 문제가 되기 쉽다.[이하 1절은 논의는 {폭력과 시민다움} [역자 후기]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폭력의 문제가 자명한 문제인 이유는, 폭력을 비판하거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폭력이 현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문명 원칙인 인간의 권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비폭력이,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가장 자명한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폭력의 문제가 무기력한 문제로 간주되는 이유는,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 딱히 대응할 만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폭력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널리 의지하는 것은 법과 공권력이다. 그런데 만약 법과 공권력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곧 법과 공권력 자체가 지배를 위한 수단이거나 인권 및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또 다른 폭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비단 내전이나 준 내전 상태와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아프리카나 중동 또는 남아메리카 사람들에게만 제기되는 질문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는 수많은 국가 폭력의 기억들로 점철되어 있거니와,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국가 폭력의 자취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의 예를 든다면, 2014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 당시 많은 사람들은 침몰해가는 배 안의 승객들에 대한 국가의 태만한 무관심에서, 냉혹한 폭력 기계 또는 치안 기계로서 국가의 모습을 목도한 바 있다(진태원 2015b 참조).


20세기 초에 이미 막스 베버가 국가를 적법한 (또는 적법하다고 간주되는) 폭력Gewalt이라는 수단에 기반하여 성립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라고 규정했거니와, 독일의 비평가철학자였던 발터 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벤야민 2008a)에서, 또 자크 데리다는 󰡔법의 힘󰡕(데리다 2004)에서 각각 불법적인 폭력 대 정당한 공권력이라는 구도가 지닌 허구성을 날카롭게 드러낸 바 있다.(진태원 2010 참조) 따라서 공권력 역시 불법적인(또는 불법적이라고 간주되는) 폭력과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폭력이라면,[물론 이것은 정당한 권력과 부당한 권력, 권력과 폭력, 합법적 질서와 비합법적 무력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들이 근거하고 있는 토대가 자명한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단순히 역사적 상대성에 입각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0)의 평주를 참조.] 폭력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은 또 하나의 폭력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폭력의 문제는 비폭력의 자명함과 대항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 사이에서 순환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의 문제를 현대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엉뚱한 발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에 따르면 폭력의 문제, 특히 극단적 폭력의 문제는 정치라는 개념 자체의 개조”(Balibar 2010c, 42)를 요구하는 문제다. 역으로 말하자면, 발리바르의 폭력론은 그의 정치철학의 개념적 독창성 및 이론적 적합성을 측정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 폭력에 관한 발리바르의 사유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독창성의 핵심을 이룬다.


첫 번째 독창성은 폭력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또는 맑스주의의 역사적 모순들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시켜 사고한다는 점이다. 폭력이라는 주제는 가령 데리다[특히 데리다(2004) Derrida(2003) 참조. 후자의 책은 국역본이 있지만(데리다 2003), 번역이 좋지 않아 참조하기 어렵다.]나 아감벤[특히 Agamben(1998); 아감벤(2008); Agamben(2005); 아감벤(2010) 참조.] 같은 철학자들의 정치사상의 핵심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폭력의 문제를 해방의 관점에서 사고하지만, 이들은 맑스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문제설정에 입각해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게발트’: 맑스주의 이론사에서 본 폭력과 권력이라는 논문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글에서도 늘 맑스주의를 몰락하게 만든(따라서 그것이 재개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하는) 아포리아라는 관점에서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발리바르(2012) 참조. 사실 발리바르가 폭력에 관해 처음으로 발표한 글에서도 폭력의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Balibar(2010c)에 수록된 Violence et politique: quelques questions참조. 이 글은 1992년에 처음 발표되었다.] 현대 정치철학의 동향에 대해 얼마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맑스주의의 역사(그 쟁점들과 모순들)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거니와, 폭력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러한 역사를 고찰한다는 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오랜 천착과 더불어 상당한 지적 용기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발리바르 폭력론의 첫 번째 독창성은 폭력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역사적 모순의 핵심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폭력의 문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이라는 관점에 따라 사고한다는 것이 발리바르 폭력론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폭력을 대항폭력이나 비폭력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고 ()폭력의 문제설정에 따라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알랭 바디우 같은 이론가들의 저술에서 볼 수 있듯이 폭력을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은 폭력을 하나의 독자적인 이론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특히 지젝(2011) 참조. 지젝과 발리바르 폭력론을 비교하고 있는 김정한(2011)도 참조. 김정한이 발리바르의 폭력에 관한 글이 많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과 시민다움󰡕의 존재를 간과한 발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의 문제를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게 되면, 가능한 두 가지 선택지가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정치의 문제는 순수한 힘의 문제가 된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하듯이 인간 역사 속에서도 두 개(또는 그 이상)의 세력들 사이의 무력 다툼만이 존재할 뿐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궁극적인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또는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를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것은 힘의 크기다). 고전적인 맑스주의로 대표되는 다른 관점은, 지배 세력의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폭력적인 저항은 정당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폭력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 및 피지배 계급들의 대항 폭력은 언제나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항 폭력은 착취 없고 지배 없는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정당한 목적이 수단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이는 사실은 1950년대 이후 사르트르가 대표했던 관점이기도 하다. 폭력의 문제를 둘러싼 사르트르와 카뮈의 논쟁에 대해서는 베르네르(2012). 또한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진보적 폭력의 가능성을 옹호하지만 좀 더 미묘한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입장에 대해서는, 메를로-퐁티(2004) 참조.] 따라서 폭력은 수단 내지 전술의 문제일 뿐 독자적인 이론적 대상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좌파 이론가들이나 활동가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바로 이러한 관점 속에서 맑스주의를 역사적 몰락으로 이끈 궁극적인 원인 중 하나를 발견한다.


반대로 비폭력의 관점은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폭력 그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금기시한다. 비폭력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은 악의 구현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곧 비폭력의 관점은 목적이 정당한 것이든 부당한 것이든 간에 폭력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비폭력의 관점 기저에 존재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선악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다.[반대로 악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 내지 인권을 옹호하려는 이러한 비폭력적인 입장에 반대하여 선의 존재론적 우선성에 기반을 둔 윤리학(및 따라서 선에 근거한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알랭 바디우(내지 그와는 다소 다른 관점이기는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 같은 입장도 존재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폭력과 시민다움에서 이러한 관점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발리바르(2012), 150 이하.]  하지만 발리바르는 폭력은 역사의 동력중 하나이며, “고유한 창조성’”(발리바르 2012, 124)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에, 폭력을 무차별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비폭력의 관점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다만 간디가 주창했던 비폭력 운동의 경우 그것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폭력에 맞선 정치 투쟁의 한 형태를 이룬다는 점에서 시민다움civilité의 한 전략으로서 독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가령 레닌(또는 마오) 같은 사람이 발전시킨 바 있는 맑스주의 전통 내의 시민다움 전략과 대조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Étienne Balibar, “Lénine et Ghandi”(Balibar(2010c)에 수록) 참조. 또한 간디와 마오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있는 Balibar(2011)도 참조.]


이러한 관점들과 달리 발리바르는 폭력의 문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라는 문제로 다룬다. 이것은 곧 폭력의 문제는 정치라는 일차적인 수준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관련된 이차 수준의 쟁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차 수준의 쟁점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이렇다. 정치(특히 고전적인 의미에서 해방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이든 민중이든 아니면 시민이든 간에,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는 한 정치가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발리바르가 보기에 폭력, 특히 그가 극단적 폭력extrême violence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폭력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더 나아가 파괴하는 폭력이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를 성립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또 그것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감축할 수 있는 실천적 해법을 모색하지 않은 가운데 해방의 정치를 주장하거나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공문구에 그치기 십상이다.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알튀세르가 이론화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경유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단적) 폭력이라는 훨씬 더 까다로운 문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마지막으로 발리바르 폭력론의 또 다른 특징은 반()폭력의 문제를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의 발명의 문제와 연결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사실 폭력과 대항폭력의 이항 대립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발터 벤야민 이후, 또 한나 아렌트[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저작은 폭력론이라기보다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발리바르는 󰡔전체주의의 기원󰡕의 관점에서, 폭력론󰡔혁명론󰡕, 󰡔인간의 조건󰡕에서 제시된 아렌트의 몇몇 보수적인 테제를 탈-구축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폭력론(아렌트(2011)에 수록) 및 아렌트(2006) 참조. 아렌트에 대한 발리바르의 독해로는,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발리바르(2010) 7)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Balibar(2010b)에 수록)을 각각 참조.]나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들뢰즈와 가타리의 폭력론은 󰡔신학정치론󰡕 「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실로 군주정 체제의 최고의 비밀monarchici summum arcanum, 그 주요 관심사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그들을 매어놓아야 할 두려움을 종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은폐하여,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Spinoza(1925), 7. 이 질문은 󰡔()오이디푸스󰡕의 화두이자 또한 󰡔천 개의 고원󰡕의 핵심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착취와 모욕, 예속을 감내해 왔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 착취와 굴종, 예속을 원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라이히가 파시즘을 설명하기 위해 대중들의 몰인식이나 미망에 의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욕망에 의한, 욕망의 견지에서 이루어지는 설명을 요구했을 때, 그는 사상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다. 아니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상황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욕망했고,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군중 욕망의 이러한 도착이다.” 들뢰즈가타리(2014) 64-65(강조는 들뢰즈-가타리가 한 것이고 번역은 약간 수정했다).], 자크 데리다(데리다(2004) 및 데리다(2014) 참조) 이후 현대 폭력론의 공통의 과제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극복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 정치철학이 역사적 맑스주의의 몰락과 파시즘(또는 전체주의’)의 유령이라는 20세기의 두 가지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마르크스주의가 프롤레타리아운동이자 계급투쟁이론이라는 자신들의 토대 위에서 나치즘과 대결하는 데 무력했으며, 나치즘을 분석하고 나치즘이 위력적인 이유들을 이해하는 데 무능력했(발리바르(2010), 188. 강조는 발리바르.)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유산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가지의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포함하는 해방의 정치가 어떻게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토대 위에서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유산을 (데리다 식으로 표현하면) 상속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맑스주의가 그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무능력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한계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수의 해석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한 그러한 한계를 지양하거나 전위(轉位)시키려는 다수의 실천 전략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독창성은, 거의 대다수의 현대 철학자들이 반()국가적인 관점, 더 나아가 반()제도적인 관점을 택하고 있는 데 반해(가령 바디우, 랑시에르, 아감벤, 네그리, 지젝 등[현대 정치철학에서 반()국가적 관점 및 메시아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적 토론으로는 Dean & Villadsen(2016) 참조.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2012) 및 진태원(2014)를 각각 참조.]), 파시즘과의 대결이라는 문제, 더 나아가 극단적 폭력의 퇴치라는 문제를 시민권 제도의 쇄신 내지 재발명의 문제와 결부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민권 제도야말로 폴리테이아politeia, 곧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본질을 이루며, (정치적) 주체화의 핵심 메커니즘을 구성한다는 발리바르의 깊은 이론적 신념에서 비롯하는 생각이다. 반폭력의 정치가 오늘날 진보 정치의 근본 과제 중 하나를 이룬다면, 그것은 극단적 폭력의 메커니즘이 폴리테이아 또는 시민권 헌정 내부에서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시민권의 재발명이라는 과제가 반폭력의 정치를 위한 조건을 이룬다면, 그것은 시민권의 재발명 없이 정치적 주체화를 사고하고 실천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폭력의 문제는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중핵을 이루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극단적 폭력 개념

 

반폭력의 정치철학의 두 가지 이론적 핵심은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은 몇 가지 개념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2.1.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폭력

 

극단적 폭력은 우선 정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 경우 정치는 개인들과 그들이 일부를 이루는 공동체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립하는 근본적인 양식, 즉 개인들을 집단화하고 역사적 집합체의 성원들을 개인화하는 (물질적이자 상징적인) 양식(발리바르 2012, 101)으로 규정된다. 이처럼 넓게 정의된 정치에는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정치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정치까지 포함된다.


앞서 말했듯이 발리바르에게 폭력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맑스주의적인 정치, 곧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게발트라는 논문에서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맑스의 두 가지 방식 사이의 긴장을 강조한다. 한편으로 맑스는 극단적 폭력을 “‘자연화하려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원인과 결과의 연쇄 속으로 통합’”(발리바르 2012, 37)하려고 시도한다. 이 경우 극단적 폭력은 일차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이 지닌 허무주의적인 차원을 지칭하게 된다. 곧 맑스는 자본주의는 이전의 생산양식과 달리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자신들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재생산 조건을 파괴하고, 그리하여 부르주아지 자신들의 존재 조건을 파괴하게 된다”(발리바르 2012, 42)고 간주한다. 이는 특히 󰡔자본󰡕 1권의 노동일에 관한 분석이나 기계와 대공업에 관한 분석에서 잘 드러나듯이 자본주의적인 착취가 경향적인 과잉착취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살아 있는 원천, 곧 대지와 노동자를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을 발전시킨다”(발리바르 2012, 44)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고유한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경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이 정당화된다. 그렇다면 맑스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적대적인 두 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한 계기로 간주하는 셈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맑스는 극단적 폭력에서 정치의 실재le réel de la politique라고 불릴 수 있는 것, 즉 정치에 비극적 성격을 부여하는 예견 불가능한 것 내지 계산 불가능한 것”(발리바르 2012, 37. 강조는 발리바르)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정치의 실재라는 라캉적인 정식화가 시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극단적 폭력에 대하여 그 적대자들이 맞세우는 혁명적 폭력이 과연 극단적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맑스가 다분히 회의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압력을 받아 국가가 자본에 대하여 개혁을 강제하는 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시초 축적이 산출하는 과잉착취와 극단적 폭력의 효과를 주변부로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불가피성이라는 생각에 전제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극단화 경향이 다른 수단들을 통해 완화되거나 우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것은 과연 혁명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의문이다. 맑스 자신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 보여주었듯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지지였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궁핍화 과정의 산물인 프롤레타리아 또는 적어도 그 중 일부는 이러한 궁핍화 과정 및 착취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자본과 그 대표자들의 지지자로 변모한 것이다. 또한 이후의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문화산업론(프랑크푸르트학파), 이데올로기론(알튀세르), 통제사회론(들뢰즈) 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발적 예속의 효과를 낳는 예속적 주체화 작용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게 된다. 그렇다면 노동자 계급의 주체화, 곧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로의 전화는 무한정하게 멀어지는 지평으로, 그럴 법하지 않은 반경향으로, 심지어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한 기적적인 예외로 나타”(발리바르 2012, 56)나게 된다고 말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더욱이 게발트라는 것이 마음대로 활용 가능한 도구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된다. 이 문제는 혁명적 계급의 조직화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노동자 계급을 혁명적 주체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조직화가 필수적이고 조직화를 위해서는 노동자 조직, 특히 노동자 정당이 불가결하지만, 이러한 정당이 어떻게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일부가 아닐 수 있는가, 또는 국가장치의 전도된 거울 이미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실로 19세기 말 노동자 계급 정당이 등장한 이래, 또한 러시아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급으로 구성된 이래, 맑스주의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결국 붕괴에 이르게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1970년대 말-80년대 초에 발리바르 연구의 중심 주제를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 문제들이다. 이 주제에 관한 발리바르의 탐구는 특히 다음 연구에 집약되어 있다. “La vacillation de l'idéologie dnas le marxisme”(Balibar(1997)에 수록). 이 글의 국역본은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발리바르(2007)에 수록)인데,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다. 이 시기 발리바르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논의는 서관모(2011)을 참조.] 


자유주의 정치의 경우 극단적 폭력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문제, 일차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의 이중적인 본성에서 생겨나는 문제다. 곧 자유주의 국가는 한편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주의적 측면을 구현하는 국가로, 보편적 인권과 시민권을 제도화하고 성원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국가이며, 이러한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치안 기계로 전화될 수 있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국가는 법치국가이지만 또한 치안국가이기도 하다. 개인들과 집단들을 시민들의 공동체로 통합하는 국가이지만 또한 반항자, 비정상인, 일탈자 및 이방인들을 배제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사회국가이지만 또한 자본주의 시장 및 그 불굴의 인구 법칙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계급국가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적이고 문명화된 국가이지만 또한 무력국가이자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국가이기도 하다. 잠재적이지만 때로는 공개적인 방식으로 극단주의는 단지 주변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또한 중심에 위치해 있다.(Balibar(2010c), 328. 강조는 발리바르)

 

더 나아가 이는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에 고유한 배제라는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의 병리성이나 이런저런 특수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편주의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다시 말하면 근대 민주주의는 그것의 고유한 보편주의적 원칙으로 인해 이전의 정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근본적인 배제를 산출한다. 이는 외연적 보편주의와 내포적 보편주의의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발리바르(2010) 4공동체 없는 시민권?“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Balibar(2010b)에 수록) 참조. 또한 이에 관한 평주는 진태원(2011) 및 진태원(2013b)을 각각 참조.] 외연적 보편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는 단순히 약탈이나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선교나 문명화의 관점에서 식민화를 추구했지만, 식민지의 비유럽적인 인민들은 같은 국민들로 포섭되었음에도 본국의 시민들과 동일한 시민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동일한 정치체 내에 법적으로 동등한 시민이기는 하되 또한 불평등한 시민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바로 외연적 보편주의가 산출하는 배제의 양상이다. 하지만 좀더 심각한 것은 내포적 보편주의의 측면인데, 발리바르가 말하는 내포적 보편주의는 인권선언에서 구현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 곧 평등=자유라는 명제를 가리키며, 또한 그것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인간=시민 명제, 곧 인간은 무매개적으로 시민이라는 명제를 가리킨다.(진태원 2013a 참조) 문제는 근대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평등자유명제에 따라 모든 사람은 그가 사람인 한에서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시민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 성립한다고 해도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원리가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서는 그가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곧 특정한 정치체에 속하는 특정한 국민적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실효성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보여준 바 있듯이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국가의 국적을 갖고 있지 않는 한에서는, 곧 그가 이러저러한 국민이 아니고, 따라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을 누리지 못하는 한에서는 실제로는(잠재적으로는) 인간성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진태원 2011, 188) 이것은 근대 보편적 민주주의에 고유한 배제 형식이며, 인권선언또는 그 핵심으로서의 평등자유명제의 아포리아를 구성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권선언은 아주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것이어서 모든 특수한 차별받는 사람들 또는 배제된 사람들(프롤레타리아, 식민지인, 여성, 오늘날의 이주민)이 기성 질서에 맞서 투쟁할 때 이를 원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 역사에서 바로 이러한 인권선언의 기치 아래 이 배제들이 유지되어 왔고 또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평등자유의 사회에 선행했던 어떠한 신분 또는 위계 사회에서도 우리 사회에서와 같은 절대적인 배제 형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곧 사회가 위계화되어 있고 불평등한 자유의 원리에 따라 기능할 때에는 정치 참여 또는 기본권이 부재한 사람들을 굳이 인간 종에서 배제할 필요가 없으며, 또는 그들을 열등한 인간들로 전환시킬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Balibar 2010a, 12)

 

극단적 폭력이 근대 민주주의 또는 근대 문명 바깥의 어떤 특정한 예외적 상황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근대 민주주의 문명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보는 이러한 생각은 벌거벗은 생명 및 주권적 폭력에 관한 아감벤의 관념과 얼마간 공명하면서도 또한 그러한 관념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데, 이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부연하겠다.

 

2.2.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폭력

 

극단적 폭력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폭력이라면, 이는 이러한 폭력이 주체성의 가능성을 잠식하거나 와해시키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발리바르는 이를 저항의 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저항이란 기성 질서에 반대하고 불의에 맞서 정의를 옹호하는 부정적인 또는 소극적인 의미의 저항을 넘어 능동적 주체성과 집합적 연대가 형성되는 장소라는 적극적 의미의 저항”(발리바르 2012, 118)을 가리킨다. 그는 이러한 의미의 저항에 대한 철학적 정식화를 스피노자에게서 찾는다. 이는 생존해 있는 모든 개인에게 포함되어 있는 억압 불가능한 최소라는 생각, 곧 개인성 자체는 근본적으로 관개체적(transindividual)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에게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개인들의 능력을 이루는 것, 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이 항상 이미 다른 개인들(이들은 개인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있으며, 개인 자신 역시 다른 개인들이라는 존재의 일부를 이룬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총화”(발리바르 2012, 119)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 폭력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실행되지 않는다. 발리바르는 특히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우선 그가 초객체적 폭력ultra-objective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는 인간 존재자들을 상품의 세계 속에서 마음대로 제거될 수 있고 도구화될 수 있는 사물의 지위로 환원”(발리바르 2012, 129)하는 폭력이며, “극단적인 빈곤과 기근 및 기타의 소위 자연적재앙들(전염병, 가뭄, 홍수나 지진 같은 재난시 사회적 보호망의 부재 등. 지역에 따라서 아주 불균등하게 인명 피해 효과를 낳는 이런 현상들에는 그 명칭 말고는 자연적인것이 전혀 없습니다)”(발리바르 2010, 244)을 통해 표출되는 폭력이다. 또한 그가 초주체적ultra-subjective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존재하는데, 이는 “‘의 세력을 일소한다는 기획의 집행자, 즉 주권적 권력의 광기에 개인과 공동체를 제물로 바”(발리바르 2012, 129)치는 폭력이다. 이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나 아프리카 내전 등을 통해 격렬한 형태로 표출된 바 있는 증오의 이상화를 낳는 폭력이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증오의 이상화는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동일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는 맹목적이고 (구체적인 개인들 및 집단들의 의지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주체적인 의지 작용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 정상적인 개인 주체들로 하여금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종교라는 이름 아래 어제까지 같이 살던 이웃에게 총부리를 겨누거나 심지어 성폭력을 통해 다른 민족 내부에 자신들의 씨앗을 남기려는 끔찍한 잔혹성을 실행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폭력의 힘, 그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말하는 초주체적 폭력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폭력은 인간 주체를 상품이나 사물 또는 일회용 인간으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무의식적인 충동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어떤 초주체의 의지를 집행하는 단순한 대행자(또는 자발적 예속의 주체)로 환원함으로써, 합리적인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극단적 폭력의 형태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주체적 폭력과 초객체적 폭력은 다른 여러 폭력들과 함께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이를 가장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발리바르가 인용하는 피에르 세나르클랭이라는 인도주의의 활동가의 아프리카 상황에 대한 보고문이다. 발리바르(2010), 249.]


2.3. 전환 불가능한 폭력

 

또한 극단적 폭력은 전환 불가능한inconversible 폭력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폭력의 전환이나 전환 가능성이라는 관념은 근대 정치 문명에 고유한 관점으로, 발리바르는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이러한 관념이 가장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발리바르가 전환conversion이라고 부르는 것은 폭력이 (역사적으로) 생산적인 힘으로 전화되는 것, 파괴력으로서의 폭력의 소멸과 제도들의 내적인 에너지 내지 역량으로서의 재창조를 의미”(Balibar 2010c, 61)한다. 헤겔에게서 폭력의 생산력으로의 전환은 역사에서의 이성, 따라서 역사적 목적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역사적 목적론을 단순히 비난하거나 처음부터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헤겔의 역사적 목적론의 핵심은 우연의 제거로서의 역사”(Balibar 2010c, 73)라는 관념이다. 역사를 우연의 제거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은 고대적인 섭리론이나 운명론과 대립하는 근대적인 합리성의 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정확한 의미에서의 섭리나 운명이란 자연적인 필연성에 거스르거나 그것을 파열하면서 실현되는 외재적인 또는 초월적인 힘을 뜻하기 때문이다. 반면 헤겔 식의 역사적 목적론은 역사 과정에 내재적인 필연성을 뜻한다. 곧 겉보기에는 비합리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작용이나 힘들이 사실은 어떤 내재적인 경향이나 목적의 실현 방식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헤겔의 역사철학이다. 그런데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향이나 목적 또는 역사의 의미가 이미 시초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제하거나 아니면 먼 장래에 이러한 목적이나 의미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역사에 내재하는 목적들은 그것들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인간, , 의지, 제도)과 동일한 현재내부에서 생산된다는 것”(Balibar 2010c, 74)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 과정의 시초에는 역사적 필연성 내지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우연들로 가득 차 있지만,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 또는 정치적 제도 등과 같은 수단들을 통해 이러한 우연성을 제거하고 역사의 목적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되게 하는 것이 바로 우연의 제거로서의 역사가 뜻하는 바이다. 헤겔은 프랑스혁명 이후 법치국가(또는 인륜적 국가)의 구성을 통해 결국 인류가 우연의 전면적인 제거에, 곧 역사적 목적의 실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발리바르가 폭력의 전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헤겔 식의 역사적 목적론이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과거나 현재에 산출되었고 또한 산출되고 있는 수많은 폭력, 특히 극단적 형태를 띠는 폭력들이 역사적 진보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는 생각이나, 무의미한 폭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쨌든 적어도 그러한 폭력들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진보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9번째 테제에서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벤야민 2008b, 339)으로 역사를 묘사하면서도,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합의 ... 약한 메시아적 힘”(벤야민 2008b, 336)에 대해 말할 때, 벤야민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함축하는 실천적 결과를 극복할 수 있는 인식론적 수단을 (절망적으로) 찾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2.4. 합리성을 초과하는 폭력

 

따라서 극단적 폭력의 전환 불가능성이라는 관념에 깔려 있는 생각은 합리성 자체 내부에 환원할 수 없는 비합리성의 잔여가 존재한다는 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화의 형식과 제도 자체에 인간에 의한(곧 사회문화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생산인간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파괴가 공존한다는 점, 극한적으로는 서로 식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발리바르 2012, 130. 강조는 발리바르)이다. 이로부터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이라는 생각이 나온다. 발리바르는 폭력의 현상학에서 극단적 폭력의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인간에게 고유한 저항 가능성이 소멸되고 인간이 사물화되는 현상이다. 그는 시몬 베이유의 󰡔일리아드󰡕에 대한 주석에 의거하여 이를 설명한다. 베이유에 따르면 극단적 폭력은

 

죽이지 않는 힘, 곧 아직은 죽이지 않는 힘 ...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로 만드는 권력[이다]. ... 죽지도 않는 가운데 생애 내내 사물이 되어버리는 가장 불운한 존재들도 있다. 그들의 나날에는 어떤 놀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을 위한 어떤 여지도, 어떤 빈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다른 이들보다 사회적으로 더 아래쪽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다른 종류의 인간, 인간과 시체의 타협물이다. ... 죽음이 끝장내기 이전에 이미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삶인 것이다.(발리바르 2012, 105)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처럼 만드는 폭력의 기저에 존재하는 두 번째 측면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서의 삶이라는 측면이다. 이것은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경우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지만, 발리바르가 세네갈 출신의 철학자 아쉴 엠벰베를 원용하여 지적하듯이 식민지나 포스트식민지에서 끝없이 계속되는 폭력의 상황에서 존속하는 삶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의 세 번째 측면은 목적 합리성, 효용성을 초과하는 것으로서의 폭력이라는 측면이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는 아무런 사회적 효용성도 없고 경제적 합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무익한 낭비에 불과함에도 대대적인 비용을 들여서 유대인 대학살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대표적이거니와, 합리적인 효용과 무관하게 심지어 자기 손해나 자기 파괴를 무릅쓰면서 감행되는 폭력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바로 극단적 폭력의 이 세 번째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극단적 폭력이 자양분으로 삼고 재생산하는 전능함의 환상, 극단적 폭력이 그 희생자들을 무기력으로 환원하는 것(극단적 폭력의 내재적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사이에 상호연관성이 존재”(발리바르 2012, 112)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상호연관성에는 폭력의 대상을 이루는 희생자들이 폭력에 감염되는 차원”(발리바르 2012, 112)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은 우리 시대에 자살폭탄테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을 통해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이, 제국주의적 폭력과 그에 맞선 절망적인 대항폭력 사이의 악순환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프리모 레비가 회고록에서 묘사한 바 있고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조르조 아감벤이 나치즘에 관한 자신들의 분석에서 각자 분석한 바 있는, 도살자와 희생자 사이의 구별 불가능성이라는 문제 또는 희생자 자신을 도구로 삼아(이른바 특수부대’) 희생자를 도살하는 잔혹한 폭력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이 합리성을 초과하는 폭력이라면, 이는 극단적 폭력에 의해 개인의 삶과 인간의 문명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규범들이 애매해지거나 식별 불가능해진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으며, 역사적 진보는 고사하고 목적 합리성과도 무관한, 따라서 경제적 효용이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자행되는 폭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극단적 폭력이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의식의 차원, 특히 환상의 차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이 때문에 극단적 폭력에 대한 분석에서는 정신분석(여기에는 자캉 라캉과 앙드레 그린 같은 정신분석가만이 아니라 조르주 바타이유,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자크 데리다 같이 정신분석에 관한 탐구를 수행하는 철학자이론가들의 작업도 포함된다)에 대한 준거가 본질적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Étienne Balibar, “Violence: idéalité et cruauté”(Balibar(1997)에 수록) 참조. 이 글의 번역본은 폭력: 이상성과 잔혹(발리바르(2007)에 수록)인데,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다. 또한 Balibar(2010c) 1부 두 번째 강의도 참조.] 물론 이 때의 환상은 순전히 심리학적인 의미의 환상, 곧 주관적인(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적인) 망상이나 공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관개체적인(Balibar 2011, 227)환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에서 극단적 폭력이 합리성을 초과한다는 것이 함축하는 또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극단적 폭력은 그 인과관계를 분석하기가 어려운 폭력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사태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태의 원인이 정확히 식별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극단적 폭력의 특징은 관찰 가능하지만 그 원인(대개 중요하고 궁극적인 원인)부재하는효과들의 구조”(발리바르 2012, 129)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나 인과적 설명 대신에 일종의 현상학적 기술을 제안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폭력의 현상학이 인과관계에 대한 분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실증적인 차원에서 완결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킨다.]

 

3. 시민다움의 전략

 

시민다움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몇 가지 핵심적인 윤곽만 제시해보겠다.[시민다움의 전략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5a)를 참조.]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을 중심으로 한 폭력에 맞서는 정치, 곧 반()폭력의 정치를 시민다움의 정치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반폭력의 정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전적인 부르주아 정치 또는 근대 민주주의 정치로서의 해방의 정치와 맑스주의적인(또는 푸코적인) 변혁의 정치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를 이루고 있다.[Étienn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É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é”(Balibar(1997)에 수록). 이 논문의 국역본(발리바르(2007)에 수록)에서는 논문 제목이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 인륜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시민 인륜이라는 번역어를 시민다움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다. 그 이유는 봉건적인 도덕 질서를 가리키는 인륜이라는 용어를 발리바르가 말하는 civilité 개념에 대해 사용하는 것은 (시민이라는 한정이 붙는다 해도) 얼마간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제안은 역자 후기: 수구 세력이 반역을 독점하게 만들지 말자(발리바르(2011)에 수록) 참조. 그렇다고 해도 발리바르 자신이 말하듯이 civilité라는 개념 자체가 기본적으로 번역 불가능한 용어라는 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Balibar et al.(2015)(이 좌담은 발리바르의 폭력론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Rue Descartes nos. 85~86, 2015에 수록된 것이다) 참조. 곧 이 개념의 번역은 독자적인 개념적 발명의 작업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여전히 새로운 개념적 발명의 가능성들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곧 해방의 정치 또는 정치의 자율성은 인권선언을 비롯한 고전적인 시민혁명 내지 부르주아 혁명을 정초하는 문헌들에서 잘 나타나듯이 인간 집단(인민이나 국민, 국가 또는 인류 등과 같은)이 이제는 어떠한 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권위 및 역량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을 통치한다는 정치의 권리 선언에 준거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변혁의 정치 또는 정치의 타율성은 정치를 규정하는 (물질적상징적) 조건들, 특히 지배 구조 및 권력 관계들의 변혁을 중심적인 대상으로 삼는 정치를 의미한다(발리바르는 맑스와 푸코를 변혁의 정치의 대표자로 제시한다). 반면 시민다움의 정치는 행위자들 사이의 인정과 소통, 갈등의 조절을 가로막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들을 감소시킴으로써 정치적 활동(그 실행의 시간공간’)의 가능성의 조건들 자체를 생산하는 것”(발리바르 2010, 229)을 목표로 삼는다.


시민다움의 정치에 관해서 발리바르는 세 가지의 전략을 구별한다. 우선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Sittlichkeit 개념[이 개념은 임석진 교수가 인륜성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한 이래로 국내 헤겔학계에서는 대부분 인륜성으로 번역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말의 인륜 내지 인륜성이라는 용어가 전근대적인 도덕적 질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데 반해,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도덕성 및 개인성을 전제하고 그것을 지양하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번역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개념을 그냥 음역해서 사용하겠다.]을 통해 고전적으로 표현된 바 있는 헤게모니의 전략이 존재한다. 발리바르가 이를 그람시의 용어법을 빌려 헤게모니의 전략이라고 부른 이유는,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 개념이 표현하는 것이 의고적 민족주의나 심지어 유기체론적인 전체주의가 아니라 하버마스가 제안한 바 있는 헌법애국주의Verfassungspatriotismus와 유사한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곧 지틀리히카이트를 구현하는 헤겔 식의 국가는 시민들의 공동체로 간주된 근대적인 국민국가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 국민국가는 가족 및 친족과 같은 일차적 공동체에 대한 속박에서 개인들을 해방시켜 국가 자신이 조직하는 이차적 공동체(, 공공성과 관련된)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는 법치국가의 헤게모니 아래 근대적 다원성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재구성하는 헤겔의 정치철학은 오늘날 많은 헤겔 연구자들의 관점과 더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가령 Siep(1982), Kervegan(2008), Pippin(2008), 7-8, 김준수(2012)를 각각 참조.] 그럼에도 발리바르는 헤겔 식의 헤게모니 전략은 여러 가지 난점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가령 헤겔은 일차적 동일성에서 개인을 분리시켜 이차적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해방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과정(푸코적인 의미에서 규율적 폭력이면서 부르디외적인 의미에서 상징적 폭력인)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근대적인 헌정국가는 동시에 허구적 민족성에 기반을 둔 국민적인 국가, 따라서 본래적인 배제와 차별을 함축하는 국가라는 점 역시 간과하고 있다. 아울러 헤겔 식의 시민다움 개념은 공과 사의 구별에 관한 지나치게 규범적인 관점, 곧 사적 영역에 대하여 정상성을 강제하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두 개의 상이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는 이것을 각각 다수자 전략소수자 전략이라고 명명한다. 다수자 전략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고전적인 해방 운동에서 나타나는 주체화의 전략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전략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아포리아의 핵심에는 피지배자들의 다수-되기가 존재하는데, 발리바르의 이 개념을 피지배자들의 비지배적인 주체-되기라는 문제로, 곧 피지배자들이 이전과 같은 지배 계급(곧 피지배자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기초를 둔)으로 구성되지 않으면서 헤게모니적인 집단적 주체가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진태원 2015a, 222. 강조는 원문)로 번역해볼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 전략은 푸코 및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이 대표하는 것인데, 이것의 핵심에는 “‘국가 장치와 국가 권력의 폭력에 맞서고 그것을 소멸시키려고 했던 혁명 운동의 역사가 이러한 폭력을 재생산하거나 모방하게 되었다는 생각(Balibar(2010c), 180. 강조는 발리바르)이 놓여 있다. 따라서 다수자 운동, 곧 대중운동에 고유한 미시파시즘적인 욕망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소수자 전략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수 되기라는 개념이 이 전략의 핵심을 이룬다.[아래로부터의 시민다움의 전략이라는 발리바르의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한국 현대 문학사를 재구성하려는 매우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시도로는 김익균(2017)을 참조.] 문제는 소수자들minorities(이들은 어원이 말해주듯이 또한 약소자들이면서 (정치적사회적) 미성년자들이기도 하다)의 확산(이것을 시사적인 용어법에 입각하여 ()들의 확산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7) 참조))으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에 탈정체화의 작용을 특권화하는 소수 되기의 개념만으로는 정체성에 기반을 두지 않는 연대와 결합의 과정, 또는 그들의 용어법대로 하면 이접적 종합의 과정을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다수자 전략과 소수자 전략의 결합,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양자의 동시적인 변증화를 요구하고 있다.

 

4. 몇 가지 쟁점

 

이제 끝으로 간략하게 몇 가지 논평을 제시해보자. 바깥의 정치 또는 좌파 메시아주의에 입각해 있는 현대 정치철학의 흐름의 영향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따라서 국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곧 법은 폭력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다. 아마도 이를 가장 도발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조르조 아감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충격적이게도 근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인권선언을 벌거벗은 생명들의 주권적인 포섭을 천명한 문헌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인권선언과 강제수용소 사이에는 직접적인 논리적정치적 연속성이 존재하게 되며, 일체의 법은 주권적 폭력의 표현이 된다.(이점에 관해서는 특히 아감벤 2008 중 3부 참조)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의 차원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의 분석과 아감벤의 분석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 내지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인권선언에 대한 해석 및 민주주의와 근대 시민권 제도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서 양자 사이에는 뚜렷한 대립 관계가 존재한다. 발리바르는 󰡔폭력과 시민다움󰡕에서 아감벤과 자신의 관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나는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들(불가능성의 조건들과 분리될 수 없는)은 정치의 와해의 형태들로부터 사유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아감벤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와해의 형태들이 유일한 모델(그것이 수용소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로 귀착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조건들은 이질적이며, 그 조건들은 어떤 존재론이 아니라 어떤 구조의 정세적 변이에 속하는 우연적 상황들 속에서만 자신들의 효과를 산출한다고 믿는다. 2) 이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역사 개념”(좀더 근원적으로는 역사성의 도식)을 그 목적론적 정식화들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본질적이다. 그런데 여러 시각에서 볼 때 아감벤이 벤야민의 테제들에 대한 심층적인 독서로부터 발전시킨 역사성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여전히 목적론의 지평 속에 위치해 있다. 이 관점은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주권과 그의 권력을 서양 정치의 형이상학적 운명으로 만든다(이 때문에 특히 아감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주권적역량에 대한, 그리고 비오스 폴리티코스와 시민권의 설립을 통한 조에의 내적 배제에 대한 최초의 인물을 판독해내는 게 중요하다). 3) 이것과의 대비를 통해 도출되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메시아적관점(호모 사케르 연작에 앞서 출간된 저작, 󰡔도래할 공동체󰡕(1990)의 테제들과 합치하는)은 근원적으로 반()제도적이다. 나는 제도 그 자체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보증물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제도가 그러한 보증물이 될 수 있는 영속적인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제도적 지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메시아적 관점이 아니라 비극적 관점을 소묘한다. 내가 시민다움의 전략들이라는 이름 아래 검토해보려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Balibar 2010c, 148-49)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법 또는 정치 제도는 양가적이다. 곧 정치의 공간을 개방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으로서의 제도는 한편으로 (한 계급, 한 카스트, 한 관료제 내지 한 국가장치에 의한) 권력의 독점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 자유와 평등의 현실적인 획득으로서의 시민권으로의 경향 사이의 갈등(Balibar 2010c, 152)사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 없는 정치 또는 제도 바깥의 정치를 꿈꾸는 것은 반폭력의 정치의 입장에서는 자멸적인 결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제도를 더욱 더 폭력의 집적으로, 치안기계의 장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고 따라서 주체성의 가능성 또는 역량이 더욱 더 잠식되도록 조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 또는 제도 그 자체는 전적으로 폭력적인 것도 또한 전적으로 해방의 역량인 것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폭력 또는 역량의 이중적 공간으로서의 법을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지, 또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것인지가 문제인 것이다.


이제 발리바르의 극단적 폭력 개념에 담겨 있는 몇 가지 모호성을 지적해두고 싶다.

 

4.1. 구조적 폭력과 극단적 폭력

 

극단적 폭력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첫 번째 쟁점은 그것이 구조적 폭력, 특히 자본주의적인 착취 및 상품화의 폭력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극단적 폭력이 구조적 폭력과 동일한 것(또는 개념적으로 구별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사실상 메시아주의적인 정치의 가능성만이 남게 된다. 극단적 폭력이 구조 자체의 고유한 특성이라면, 구조 자체의 완전한 전복 내지 파괴 이외에는 다른 인간적 삶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극단적 폭력이 구조적 폭력과 별개의 것이라면, 극단적 폭력은 예외적인 상황 또는 극단적인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될 것이다. 나치즘이나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 같은 상황이나 아프리카, 중동,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내전적인 상황이 그것이다(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파시즘이고 아닌지 사후에만 식별할 수 있다. 곧 우리가 생성 중에 있는 새로운 파시즘 속에 있는지 여부, 따라서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지 아닌지에 대해 확실히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이 우리에게는 부재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극단적 폭력이 우리에게, 곧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모면하고 있는(또는 그렇다고 믿고 있는)[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로 인해 전쟁의 위험성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은 과연 극단적 폭력의 상황과 무관한 것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현 상황이 두 주요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의 전략적전술적 고려의 산물이며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계산된 연출의 결과라고 해도, 극단적 폭력의 주요 특징을 계산의 합리성을 초과하는 우발적 비합리성이 산출하는 대규모 학살과 재난에서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정확히 극단적 폭력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 아닌가? 더욱이 예견되는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겪을 당사자인 남한의 시민들이 이 상황을 통제하는 데 매우 무력하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보면 발리바르의 폭력론이 전쟁의 문제를 매우 중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시민다움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더 숙고해보는 것은 매우 긴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하려는 시도는 자칫 구조적 폭력을 정상적인 폭력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역사 및 문명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이 단지 예외적인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정치적 쟁점이라는 점이 입증되어야 할 텐데, 발리바르에게서 여전히 모호하게 남아 있는 점이 이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극단적 폭력이 일종의 문턱이라고 말하고 또한 구조적 폭력과 달리 극단적 폭력은 목적 합리성이 부재한 폭력이라고 말함으로써 구조적 폭력과 극단적 폭력을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인 세계경제는 지난 2008년의 위기 및 2010년 이후 유럽 재정 위기를 통해 드러났듯이, 점점 더 목적 합리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비합리성 또는 광기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에서 목적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경계는 어떻게 식별될 수 있는가?


또한 지난 정권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를 통해(아울러 국정역사교과서 간행 시도 및 위안부 합의에서도) 드러난 바 있는 정부의 통치에서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경계가 어떤 것인지, 곧 우리가 여기에서 일종의 극단적 폭력의 한 형태를 목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익명의 심사자 한 분은 필자의 글에 대한 논평에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는 명백히 합리성이 결여된 사건, 즉 극단적 폭력의 한 양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내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와는 약간 초점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내가 너무 간략하게 논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점에 관해 약간 부연해보고 싶다. 나는 이 문장에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 또는 조류독감 사태 같은 어떤 특정한 사건이 극단적 폭력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질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었다. 다시 말하면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를 극단적 폭력의 사례로 보는 것 자체가 다수의 세부적 분화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가령 이 사태들을 극단적 폭력의 사례로 보면서 그것을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에서 비롯된 필연적 현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박근혜 정권의 비합리적 광기나 박근혜 자신의 무지 내지 비정상적 성품 등으로 인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또는 그러한 폭력의 원인을 박근혜 정권 배후에 있는 한국 수구 세력의 본래적 잔인성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것을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 자체의 비합리성의 한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따라 이 문제를 인식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는 데는 상당한 차이가 생겨난다. 만약 이 문제를 박근혜 정권의 광기와 무능력에서만 찾는다면, 새로운 정권에서는 이와 유사한 문제가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반면 이 문제가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정권에서도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는 소지를 지니고 있다. 내가 다음 문장에서 지적하려는 것이 이점이었다.] 아울러 새로 들어선 정권이 이러한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를 온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보완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혹시 현 정권이 앞으로 드러낼지도 모를 이런저런 한계들은 극단적 폭력의 잠재력과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 질문해볼 수 있다.

 

4.2. 극단적 폭력의 유형들

 

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질문이 극단적 폭력의 유형에 관한 질문이다. 발리바르는 여러 글에서 초객체적 폭력과 초주체적 폭력을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발리바르 자신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형태에 대한 개념화 또는 그것의 예시는 극단적 폭력을 예외적인 상황 또는 극단적인 상황과 관련된 폭력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폭력의 형태와 다른 또 다른 형태의 극단적 폭력의 유형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다. 또는 적어도 일상적인 상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 곧 상당히 안정된 정치 과정을 영위하는 서구 자유주의 정치체나 그에 준하는 다른 정치체들 내부에서 극단적 폭력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과정의 내부에서 어떤 위협으로 잠재되어 있는지 해명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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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 2017-09-22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전에 지인이 폭력과 시민다움 책을 사서 읽으려고 하기에 과거 막 출간 됐을 때, 호기롭게 사서 읽었다가 매우 매우 고생했던 기억이 나서 어떻게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조언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인-무브에 올리신 글 읽다가 오랜만에 선생님 블로그를 왔는데 오자마자 이런 반가운 글이 있어서 내심 기쁩니다.

참 인무브에 올리신 글도 과거에는 그냥 알튀세르가 풀란차스를 논쟁에서 이겼다고 정리한 글만 봐서 잘 몰랐는데 이번기회에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balmas 2017-09-22 14:12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인무브에 올린 발리바르의 글을 먼저 보셨네요. 도움이 되셨다니 반갑습니다. :)

dldiddn8429 2017-09-2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수강하고 있는 강의 주제가 현대프랑스철학과 폭력의 문제인데, 올려주신 글이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다른 참고 문헌도 읽어봐야겠어요~

balmas 2017-09-24 00:39   좋아요 0 | URL
ㅎㅎ 도움이 되셨다니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