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30일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및 서울대 아시아도시센터 공동 주최로 열린 [포퓰리즘 시대의 민주주의] 


토론회 녹취록 가운데 제 발언 부분만을 올립니다. 전체 녹취록 내용은 참여사회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시민과 세계] 


33호, 2018년 겨울호에 실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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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퓰리즘의 국내적 용어법의 부정적 효과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아이디어도 좋지만, 이를 을의 민주주의라 부르는 건 어떻겠나? 왜냐하면 포퓰리즘을 우파, 좌파로 나누게 되면 마치 포퓰리즘이라는 일반적인 ’()라는 게 있고 그 아래 양쪽으로 스펙트럼이 나뉘면서 좌파 포퓰리즘, 중도 좌파 포퓰리즘, 중도 우파 포퓰리즘, 우파 포퓰리즘 같은 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면 좌파 포퓰리즘의 문제의식들이 상당히 희석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을의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마르크스주의 정치, 노동자계급 중심의 정치가 이제는 힘들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넓은 의미의 좌파정치는 연합, 교차적인 연대, 다중적인 연대 등의 정치를 추구해야하는데, 나는 이라는 기표를 갖고 정치와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적절한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발제문에 적었지만 국내에서의 포퓰리즘 용법은 상당히 특이하다. 국내에서 포퓰리즘이란 용어를 쓰는 건 주로 자유한국당 같은 정치 세력과 조중동’, 경제신문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언론이다. 진보적 또는 중도적인 쪽에서는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잘 쓰지 않는다. 외국에서, 특히 유럽쪽에서는 포퓰리즘이 주로 극우파 정당이나 정책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데, 국내에서 포퓰리즘은 주로 우파 세력들에 의해 보편적 복지 정책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의 용어법은 굉장히 협소할 뿐만 아니라 특이하고 정략적인 용어법이다. 국내에서 포퓰리즘에 관한 합리적인 토론이 힘든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정치적 용법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정치적 상황을 보면 2000년대 한국정치라는 게 좌파정치든 우파정치든 모두 포퓰리즘적 특성을 갖고 있다. 정치적 세력화가 촛불집회부터 노사모, 박사모에 이르기까지 제도정치 틀 바깥의 대중 동원에 의지하고, 박정희가 우파 정치의 표상이 되고, 노무현이 진보정치의 표상으로 군림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열망이 이러한 동원의 중심에 있다. 또한 여기에는 항상 엘리트와 다수 서민 사이의 대립구도가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2000년대 한국정치를 포퓰리즘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이야기하기 어렵다. 요컨대 실제로는 포퓰리즘 정치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반해 포퓰리즘이라는 용어 자체는 보편적 복지정책을 비판하기 위한 정략적 언어로 협소화되고 굴절되어 활용되는 게 한국의 상황이다. 그것의 부정적 효과는 수구적 반공주의와 재벌 중심의 지배 체제에 기반을 둔 기존 자유주의 정치질서를 정상화, 규범화하는 것이다.

 

착취, 배제,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라는 문제

 

좌파 포퓰리즘 또는 오히려 을의 민주주의의 쟁점을 3가지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착취, 배제,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 문제다. 신자유주의가 불평등을 심화한다고 말하는데 복지국가나 사회국가, 사회안전국가를 주장하는 논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라는 문제는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의 현 국면이라는 게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고려하지 않고는 제대로 사유할 수 있겠나 싶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건 오히려 자본가나 자본가의 싱크탱크 같다. 자본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사회주의적 대안이 어려울 것이라고 상당히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교조적인 전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모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사고하지 않거나 쟁점화하지 않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의 극복이나 대안을 얘기하는 것이 결국 자본주의의 대안,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대안에 대한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하는 것과 분리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라는 문제를 사고하기 위해서는 결국 착취라는 문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쟁점은 결국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인 착취 개념을 어떻게 개조하고 확장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배제의 문제다. 배제를 말하는 이유는 유럽의 포퓰리즘이 됐든, 아니면 한국의 포퓰리즘이 됐든 그것의 굉장히 부정적인 특성은 소수자와 약소자에 대한 배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엘리트에 대한 서민·민중적인 분노라는 통일성을 강조하지만 이질적이고 약소하다고 생각되는 이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상당히 배타적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외국인, 이주자, 난민에 대한 배타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 등에 대한 배타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좌파 포퓰리즘을 선뜻 포용하고 수긍하기 어려운 게 포퓰리즘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가 이질성, 다양성을 결여하고 약소자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배제의 문제가 중요한데, 첫째는 페미니즘, 특히 마르크스주의-페미니즘의 문제제기에 따르면, 기존의 착취 개념은 여성에 대한 착취(특히 가사노동의 착취)라든가 인종적인 착취 같이, 정상적인 착취에 추가되는 착취, 또는 오히려 정상적인 착취가 작동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초과착취 내지 (낸시 프레이저 같은 사람의 용어법을 빌리자면) 수탈/비전유(expropriation)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를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그러한 착취에 전제되어 있는 또 다른 착취를 배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 미셸 푸코의 규율권력론 역시 배제를 사고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준다푸코에 따르면 규율권력에 의해 예속적 주체가 생산이 될 때는 항상 배제의 경향이 뒤따른다. 정신박약자를 만들어내는 게 학교의 규율권력이고, 비행자를 만드는 것이 치안권력이고 탈영병을 만들어낸 것이 군대의 규율권력이다. 규율권력 등과 같이 예속적인 주체를 만드는 권력은 정상적인 예속자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항상 비정상적인 예속자들, 즉 배제된 자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푸코,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편, 󰡔철학사상󰡕 68, 2018을 참조). 갑을 관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이면서 배제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과 그에 대한 대안의 모색에서 배제의 문제를 사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결국 포퓰리즘의 맹점을 넘어서는 문제와 같은 문제다.


세 번째는 리프리젠테이션 문제다. 촛불에서 제기되었던 중요한 구호는 광장민주주의다. 광장민주주의가 현재 실현된 것이 국민청원게시판인데, 이는 광장민주주의의 희화화된 형태다. 광장민주주의는 기존의 대의제에 대한 불만과 혐오, 그걸 넘어설 수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무매개적인 직접민주주의와 동일시하는 것보다 리프리젠테이션의 개조와 확장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의제에 대한 기존의 사고에 갇혀 있는 리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새로운 상상, 제도화, 기존의 틀을 변혁하는 방법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미국 학자의 말을 빌린다면 리프리젠테이션의 반대말은 참여가 아니라 배제인 것이다.(좀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 네 가지 신화와 세 가지 쟁점,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편, 󰡔인문학연구󰡕 30, 20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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