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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평점 :
넓지는 않지만, 방문을 열면 한낮 해가 제 마음대로 들어와 놀다 가는 방. 환한 햇살이 물밀듯 들어와 삶의 그늘을 지워주는 방. 별다른 장식은 없어도 내 읽고 싶은 책은 갖춰두고, 사랑하는 아내와 차를 마시며 독서에 열중할 수 있는 방....(p136)
유난히 이사를 많이 다녔던 내게,집을 고르는 첫째 조건은 '햇빛' 단지 이 하나였다. 허균의 이 글을 읽으며,옛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구나...잠시 생각을 멈추어 보았다.
박지원,홍대용,이덕무,정약용 등 유명인들과 세상에 알려지는 않았지만 번쩍였던 인재들의 글들이 차분하게 묶여있다. 고어체로 한번 서술되고 작가의 해석이 뒤를 따르는 형식인데,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 문자 자체만 보았을 때 눈치챌 수 없던 숨겨진 의미들이 굴비 엮듯 주루룩 딸려 나오니 원문의 내용이 대 여섯배는 풍성해진다. 그 시대에 살지도 않았음에도, 짧은 한자 몇 자만으로 그들과 한살림 살았던 것 마냥 속내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것도 수 백 년이 지난 지금에.
새삼 기록의 중요함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였다.
척독(尺牘)은 지금으로 치면 엽서쯤에 해당하는 짤막한 편지라는데,18세기에 많이 성행했다고 한다. 짧은 글 속에 두 사람만이 아는 암호를 감추어 마음을 주고받는 널찍한 통로를 만들었던 셈이다. 절제된 비유와 간결한 표현,말할 듯 하지 않고 머금은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 (p 213) 박지원은 돈 꾸워 달라는 이 짧은 편지를 많이 썼는데, 그 어디에도 돈이라는 말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편지를 받은 상대는 돈을 보내주고 ,미리 쌀 들고 친구에게 가지 못함을 부끄러워 한다. 빌려 달라는 사람이나,빌려주는 사람이나 피차 곤궁한 살림 불보듯 뻔하나,궁색한 모습 없으니 이들의 벗 사귐이 아름답다.
또 박지원은 이덕무에게 밀랍을 녹여 가짜 매화 만드는 법을 배워 오랜 연습끝에 매화 11송이를 만들어 이를 비단 가게에 팔고 받은 돈 가운데 한 냥을 이덕무에게 보내면서 자랑삼아 쓴 편지도 인상 깊다.
꽃병에 11송이 꽃을 꽂아 팔아 동전 스무 닢을 얻었소. 형수님께 열 닢을 드리고,아내에게 세 닢,작은 딸에게 한 닢,형님방에 땔나무 값으로 두 닢,내 방에도 두 닢,담배 사느라 한 닢을 쓰고 나니,공교롭게도 한 닢이 남았소. 이에 올려 보내니 웃고 받아주면 참 좋겠소.(p213)
이에 이덕무가 답했다.
내가 마침 구멍난 창을 바르려 했지만 종이만 있고 풀이 없었는데,무릉씨(無陵氏)가 내게 돈 한 닢을 나누어 주는 바람에 풀을 사서 바르는 일을 마쳤다. 올해 귀에 이명(耳鳴)이 나지 않고 손이 부르트지 않는것은 모두 무릉씨의 덕분이다.(p230)
이렇게 짧은 짜투리 글들도 누군가 섬세한 손길이 차곡차곡 모았을 것이고,그런 과정을 거쳐 수 백년이 지난 지금 내가 그들의 삶을 읽으며 오늘을 반성할 수 있지 않은가. 기록하고,정리하고.단순하고 쉬워보이지만 너무한 위대한 작업 같다.
중간 중간 작가의 말들도 울림을 준다.
무엇이 좀 잘된다 싶으면 너나없니 물밀 듯 우르르 몰려 갔다가 아닌듯 싶으면 썰물 지듯 빠져나간다.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싫은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어하고 칭찬만 원한다. 그 뜻은 물러 터져 중심을 잡지 못하고,지킴은 확고하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려 하지 않고 일확천금만 꿈꾼다. 여기에서 무슨 성취를 기약하겠는가? 옛사람들은 김득신의 노둔함을 자주 화제에 올렸지만, 그 속에는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외경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세상을 놀래키는 천재는 많다. 하지만 기웃대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성실한 둔재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한때 반짝하는 재주꾼은 있어도 꾸준히 끝까지 가는 노력가는 만나보기 힘들다. 세상이 갈수록 경박해지는 이유다. (p67)
이제 10살이 된 큰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일기를 써 오고 있다. 하루도 빼지 않고. 점차 내용도 늘어나서 지금은,좁은칸 스프링 노트 20줄씩 하루 두 쪽을 쓴다. 한 쪽은 영어로,한쪽은 한글로. 한글을 잊어버리지 않기위해 한글연습이 반드시 필요하니 좀 과하다 싶지만 해야만 하는 과제이다. 그러나 매일 거르지 않고 척척 써내는 아이를 보면,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신통한 일이다. 매일 매일 그날이 그날일텐데 아이의 일기는 다채롭고 방글거린다. 예전엔 가끔 일기 쓰기를 싫어 할 때가 있었는데,그때마다 내가 주문처럼 해주던 말이 있었다. '오늘 하루를 적는 것은 그날 하루를 기억하는 일이야. 너도 가끔 일 년 전에 쓴 일기를 보면 기분이 좋고 웃음이 나지?. 만약 네가 그날을 적어 놓지 않았다면,그날은 그냥 없어졌을 거야. 일기는 바로 너야.'
기억의 잔고를 무럭무럭 쌓아가는 큰아이의 일기장은 인생 최고의 선물이 될게다. 선조들이 남긴 글들이 내게 근사한 선물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