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을 때 - 감성 포토에세이
신미식 글 사진 / 푸른솔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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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신미식 씨의 포토 에세이이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뉴칼레도니아와 한국 그리고 그 외에 각종 여행지들(미국의 뉴욕 타임 스케어, 노르웨이의 베르겐, 벨기에, 캐나다의 벤쿠버 섬, 에디오피아의 다나킬) 을 여행하며 찍었던 풍경, 동물, 식물, 사람의 표정, 행동 등 특정 순간 속에서 자신이 가슴으로 느꼈던 울림 내지는 감동을 짤막한 글로 소개하는 책이다. 박광수 씨의 ‘광수생각’ 과 비슷하나 특정 목적과 전체적인 컨셉 속에서 구성을 보이는 책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사진기로 담았던 곳곳의 여행지에서의 느낌을 단지 지역별로 나눠 자유롭게 나열해놓은 듯한 느낌이 크다. 저자의 책을 추천해주는 글에서도 나와 있듯이 작가의 작업은 사진 비평의 영역이 아닌, 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사진 실력을 보여주려는 사람도 아닌, 그가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그의 작업 태도는 그저 ‘가벼운 마음’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사진가도 작가도 그렇다고 기자도 아닌 다른 방법 혹은 스토리 텔링의 기술 상으로 볼 때 아마추어적인 홀가분한 태도를 취한다고 추후 설명하면서 사람의 감수성에서도 바로 ‘초저녁’의 감수성. 소년, 소녀적 감수성을 일관되게 건드리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위 책을 쓴 작가의 스토리 텔링과 사진 기술에 대해 추천의 글은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축약하기도 한다. ‘그의 카메라는 날카로운 편이 아니라 부드러운 면봉의 텃치로 세상을 묘사합니다’ 라고.

그런 마음으로 가볍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포토 에세이임에도 ‘읽어볼’ 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이 책은 사진 속에서 저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며 이 사진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이 느끼지 않니 라고 내게 긍정의 반문을 던지는 듯한 느낌을 가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보는 포토 에세이가 아닌 읽는 포토 에세이이다.

특정 개념에 대해 누구나 각자 가치판단 기준을 가지고 산다. 여행도 그렇다. 적어도 우연찮게 집어든 이 책에서 나는 저자의 여행관에 대해 가슴깊이 공감했다. 저자는 책 어느 부분에선가 이렇게 말한다. ‘여행은 떠남이 아닌 또 다른 만남의 시작’ 이라고. 저자의 에세이를 읽으며 그가 시장 바닥에서 과일을 살 때도, 길거리를 지나가는 아이의 눈망울 속에서, 지나가며 우연찮게 보았던 사람들의 일상 모습에서 그렇게 자기 자신과 그리고 그들과 마음으로 또 다른 만남을 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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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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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제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인간 유성룡의 다각도적인 분석과 같은 내용을 기대했었다.
현대 시대 사람들이 지식정보 사회인 요즘을 역사에 비유하며 적절한 인물로 정약용의 학문이나 인간 정약용을 분석한 그런 내용의 책들처럼 말이다.
그 시대의 고정관념을 넘어 혁신적인 사고를 지향했던 유성룡이라는 인물에 대해 연애하듯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는 것이 더 솔직한 대답일까.
 하지만 이 책도 다른 이덕일씨의 역사서와 같이 한 시대의 인물을 수단으로 삼아 그 시대를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다분했었다.
그 시대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상식인 임진왜란을 다루고 있었고,
유성룡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유능하다던 재상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해, 그 전후 상황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으나, 이 책에서 유성룡은 흔히 사극에서 볼 수 있는 인상좋은 배우가 분한, 머리는 스마트하고 인격은 후덕하기까지한, 섹시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재미없는 인물이었다.
적어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사극을 떠올리며 역사서를 읽어나간 나의 개인적인 느낌은 그러했다.
 

지난 1달간, 정약용을 통해 후기 조선시대를,
송시열을 통해 인조반정 이후의 당쟁사건을,
그리고 유성룡이란 인물을 통해 조선시대가 한 번 물갈이 되듯이 뒤집어지는
임진왜란을 머릿 속에 떠올리면서,
가슴 속의 답답함은 왜 이리 여운이 오래 남았었는지,,,
 

한편으로 드는 또 다른 생각은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을 100년, 200년 후에 바라보았을 때에도 나 같은 답답함을 느낄 그 시대의 사람이 있을까 하는 그런 우려감도 있었고.

‘고정관념을 깨 나간 사람’

이 책은 최초 유성룡이 아버지를 따라 유년시절 잠시 의주에 가서 살았을 때 처음으로 양명학을 접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양명학과 성리학은 학문의 근본을 달리하는 체계이고, 성리학은 자신들과 근본 자체가 틀리면 사문난적으로 규정해버린다.
곧 나와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유성룡이 양명학자였다는 이야기는 전해져 오질 않고, 또 유성룡은 양명학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며 그가 행했던 파격적인 정책들.
 

속오군 - 신분제와 상관없이 양반, 양민, 천민으로 구성한 군대
작미법(대동법) - 가호가 아닌 토지 결수에 따라 쌀로 세금을 납부
서예면천 - 천민이 공을 세우면 천인의 신분을 면해줌
 

이런 대표적인 정책 외에도 여러 파격적인 정책들은 아마도 양명학이 지향하는 것과 너무나도 비슷하기에 저자가 양명학과 유성룡을 관련시켜 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유성룡이 행했던, 유성룡이 지향했던 삶과 재상으로서의 정책들을 보며 원래부터 애시당초 이렇게 나아가야 정상인 정책과 언행들이 당시 상식으로 통했던 여러 시대적 고정관념들에 사로잡혀 사익에만 급급했던 많은 이들의 반대 때문에 그것이 정상이 아닌 특별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 저자의 책에서도 그렇게 해서 유성룡은 달랐다고 보여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당연히 행해야할 정책과 언행 대신, 그들이 행하고 싶고,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믿고 싶은 것들로만 가득 채우는 순간 그 사회라는 풍선은 뻥 하고 터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아무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시대적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도 가혹했다.
그 시대에는 상식이라고 통하던 것들을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곧 죽음이고, 마녀사냥이었다. 유성룡이 왜란이 끝난 후 파직당한 것은 그 시대 권력에 눈이 먼, 자기와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세상을 바라본 사람들의 당연스러운 노력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 선조가 있었다는 사실은 다소 파격적이었다. 실제로 책에서 저자는 임란극복의 최대 장애물은 바로 선조였다고 말한다. 왕으로서의 대의보다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군림자로서의 모습보다는 여느 백성과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사실.

일관성 없이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무릇 신하들을 고생시켜온 모습.
자신 외에 민심을 얻는 신하에게는 가차없이 칼을 빼드는 선조의 모습은 한탄스럽기 그지 없었다.
 

아마도 선조의 그런 모습을 보고 체감한 유성룡, 이순신, 권율 등 많은 신하들은 이미 선조에 대한 충성을 버린 지 오래였을 것이다.
무책임한 남편을 뒤로 한 채 아이들 때문에 자신이 살아감의 명분을 얻는 불행한 한 가정의 아내처럼 그들도 너무나도 불쌍한 백성들을 보며 자신의 명분을 세웠을 것이다.
책 마지막 부분 유성룡의 말년을 서술한 부분에서 "유성룡은 선조를 버렸다." 라고 저자는 평하고 있다.
봉록을 내리고, 벼슬을 제수하고, 공신등급을 정해 보내도 끝끝내 마다하며 고향에서 두문불출한 유성룡은 이미 삶을 초탈한 상태였을 것이다.
 

말년 유성룡의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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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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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은 인물의 인간 자체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여다 볼 수가 있다. 물론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가 일정 부분 가미될지는 몰라도 나는 김훈이 적어도 난중일기를 보며 기록에 입각한, 또한 그 기록을 남긴 이순신 장군을 애써 바라보려 했다는 것이 소설을 보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짧게나마 느낀 소설 속에서의 이순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광화문의 늠름하게 서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도 나약한 한 인간이었고, 선택의 순간마다 고뇌에 차 마음속으로는 우유부단함을 느껴왔던 중년의 조선 장수였던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 그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내 머릿속에서는 한 편의 대하 사극이 펼쳐진다. 이 책을 읽으며 내 머리 속에서는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50대 중년의 갑옷을 입은 장수가 근심어린, 생각에 잠긴 채 해풍을 맞으며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고, 주변에는 조선시대의 해군 기지가 조성되어 있다. 장면이 바뀌며 불에 타고 폐허가 된 마을 하나가 보인다.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고 살아있는 사람이라 한들 사람의 모습이 아닌 비참함 그 이상이다. 부녀자들은 왜군에게 강간당한 후 곧장 살해당했고 젊은이들은 노역으로 쓰이기 위해 끌려갔다. 그들은 노예로 부려지다가 쓰러지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그대로 담으려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그리고 전쟁의 모습을 고스란히 표현하려 한 흔적도 인상적이다. 소설에서 인간 이순신은 결코 위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 또한 선택의 순간에 고뇌 속에 빠졌으며, 선택한 그 순간에도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침착했다. 그는 인정이 있었지만 때에 따라 분명한 선을 그었다. 백성들이 전쟁 통에 겪게 되는 고된 삶과, 지켜주는 이 없어 비참하게 당하는 그들을 보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품어줄 때는 품어주고 스스로 다시 일어날 때에는 그대로 두었다.  

 그도 아버지였다. 왜군이 자신의 고향 충남 아산으로 진로를 수정했다는 첩보를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셋째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흔들렸다. 아들이 꿈에 나올 때마다 강하게 밀어냈지만 결국에는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들을 죽인 왜군들 중 하나로 보이는 이를 포로로 잡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순신은 마음 속 저편으로 일어나는 복수심에 친히 칼을 들었다. 그도 아버지였다. 

 밤마다 누린내가 풍기는 식은땀을 흘릴 때면 이순신은 종을 불렀다. 코피를 쏟을 때면 종은 이순신의 피를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종사관 김수철과 이야기하다가도 피곤함을 종종 느꼈고, 그럴 때면 그들은 그의 자리를 직접 펴주었다. 이순신은 임금이 내린 면사포를 보면서도 세상의 무상함을 느꼈고 세상의 덧없음, 세상의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허약한 자신을 스스로 알고 죽는 자리를 항상 고민했다. 

 전쟁은 무서운 것이었다. 백성들의 삶은 파탄과 비참 그 이상이었다. 지켜주는 이는 없었지만 착취하는 이는 양 쪽 모두였다. 전염병이 돌면 백성들은 죽었고, 걔 중에는 살기 위해 자신의 민족과 가족과 이웃을 버리는 이도 있었다. 왜군에게 끌려가 노역으로 일하다가 그들의 배를 끄는 격군이 되기도 했다. 조선과 왜군의 수군이 한판 싸움을 벌이는 날, 양 쪽 모두에서 조선말이 섞인 비명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백성들은 어느 쪽 편도 아니었고 그저 이 전란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저 우리들의 풍속과 하루가 지켜지기를 바랬고 평탄히 이 하루에 삼시 세끼를 빼앗기지 않고 먹을 수 있기를 바랬다. 

 위인이란 무엇인가? 소설을 읽으며 이 생각을 한다. 대단한 성과를 거두고 역사를 바꾼 이들인가? 그들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스스로 생각할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한 인간의 진솔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것에 경탄했다. 이순신도 인간이었고 임금 선조도 인간이었다. 백성들과 상감이 어찌 다르겠는가. 역사 속에서 그들도 고민했고 선택의 순간 우유부단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들은 순리를 따랐고 거슬러 올라가기를 바랬다. 적어도 이 소설 속의 이순신은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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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통찰 - 폄하와 찬사로 뒤바뀐 18인의 두 얼굴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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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인물이라 하여 어찌 어질다 할 수 있겠느냐?’

책의 서문은 본문의 아우트 라인Out-Line을 대략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서문을 보면 저자가 책을 통해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를 다소 솔직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깨끗한 인물이라 하여 어찌 어질다 할 수 있겠느냐?’ 라는 공자와 제자 자로의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 아무런 비판의식 없는 고정관념처럼 - 가지고 있는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의외로) 매우 또렷하다. 흔히 철수는 착하고 영수는 나쁘고 식의 선악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논리의 아동용 만화의 이미지처럼 말이다. 사실, 우리는 역사 속 인물을 무의식적으로 항상 그렇게 받아들여 왔고 훈련되어 왔다.

위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하면, 우리는 역사 속 한 인물들을 그다지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저자 김종성 선생님은 일상생활의 한 단면에 비교하며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쉽게 말해주고 있다. 평소에 자주 접촉하는 가족, 친구, 또 오다 가다 접하는 슈퍼마켓 아저씨까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사람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간헐적인 접촉이나 몇 계단 건너 전해들은 이야기, 또는 사회적 지위에 의한 피상적인 선입견 등이 우리가 상대방을 ‘어떤 사람일 것이다’ 라고 대충 규정해버린다는 것. 그리고 그 현상은 우리가 역사적 인물을 바라볼 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제로 역사인물에 대해 교과서 등을 통해 학창시절 배우고, 어디서(주로 사극 드라마, 소설, 만화 등) 주워들은 이야기 등으로 충분히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인물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그래서 충성됨이나 깨끗함 같은 외면적인 특징을 넘어 인물의 내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아울러 균형적 시각 또한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역설하고 싶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독자들에게 ‘가끔 만나던 사람의 새로운 모습’이 아닌, ‘너무나 친숙한 사람의 새로운 모습’. 소위 “깬다” 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으리라 보인다.

‘너무나 친숙한 사람의 새로운 모습들’

소개되어 있는 역사 속 인물 18인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던 인물의 기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반대의 시각으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는 객관적 사료를 분석한다. 우리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뉘앙스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이 자신의 누이 정순공주의 집에서 연회를 즐기며 취중진담인 듯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흔히 양녕대군이 자신의 동생 세종대왕인 충녕대군에게 세자의 자리를 양보했다고 우리는 안다. 하지만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 이런 말을 남겼다는 기록을 통해 저자는 양녕대군이 적어도 세자 시절 비범함을 보였던 자신의 셋째 동생에게 분명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또한 그 말을 전해들은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이런 말을 남겼다.
 

임금께서 그것을 듣고 기뻐하지 않으며 “세자는 여러 동생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예를 마쳤으면 돌아오는 것이 옳거늘, 어째서 이같이 방종하게 즐기었느냐?” 라고 말하였다.
 

저자는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를 통해 이렇게 분석한다. 기뻐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세자가 그 말을 내뱉었다는 것과 세자의 입지로서 밤늦도록 유흥에 빠졌다는 것 두 가지 때문일 수 있는데 아마도 전자일 것이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아버지 태종 역시 첫째아들과 셋째아들 간의 보이지 않는 경계의 눈초리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반대로 형 양녕이 동생 충녕을 칭찬한다는데 왜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해보면 된다고 분석한다. 또한 형이 동생을 칭찬하는 행동. 즉 화목하게 지낸다는 것은 유교적인 조선 사회에서 당연한 이치거늘 왜 그것이 굳이 기록으로 남겨지느냐는 것은 사관들 조차 보이지는 않지만 당시 모두들 느끼고 있던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덧붙인다.
 

또한 태종의 발언. “세자는 여러 동생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라는 말은 아버지가 보기에 큰아들이 그다지 속이 넓지 않다고 평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과 자신의 큰 아들이 동생들에게 열등감을 갖지 않고 동생들을 안아줄 수 있는 여유를 좀 더 가졌으면 하는, 한 아버지의 바램을 보여주는 것 두 가지를 내포한다고 분석한다. 저자의 분석이 재미있는 또 다른 이유다.  

 

이처럼 저자는 객관적 사료에 근거해 일상생활 속 우리가 겪는 다양한 관계에서 갖게 되는 희노애락을 인용,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분석법을 보여준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를 또 한 가지 소개한다.

 

“일반인들의 상식과 달리 역사학계에서는 ‘조공은 일종의 무역이었다’고 인식되고 있다. 조공은 일방적으로 바치는 게 아니었다. 조공은 예물 증정의 형식을 띄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가성을 수반했다.” -p.31, 고구려 장수태왕 편.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집권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무인 강감찬을 띄웠지만, 그것이 도리어 강감찬의 ‘국제화’를 막고 있다는 것이다. 기획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국제적인 ‘관광상품’이 될 수도 있는, 강감찬이, 군사정권이 만들어놓은 좁은 틀에 갇혀 더 이상 크게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p.41, 고려 강감찬 편.
 

“두 차례나 중원을 지배한 여진족이 야만족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목민족이나 반농반목 민족을 천시하는 농경민족의 세계관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볼 수 있다...(중략) 하지만 유목민들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농경민들은 정처가 없다는 이유로 유목민들을 멸시했지만, 유목민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농경민들을 멸시했다. 땅에 얽매여 자유도 없이 사는 종족이라고 무시한 것이다.” -p.73, 조선 태조 이성계 편.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상식에 대해 또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역사학자들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학술적 의미일지 몰라도 일반인들은 모를 수도 있는 그런 내용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때론 파격적이다. 그래서 극과 극의 평가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도 당연히 든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또 다른 시각이다. 바로 이성계가 고려인이 아닌 여진족 엘리트일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조선사 전반을 흔들수도 있는 이 이야기 또한 저자 특유의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분석법을 통해 논리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읽으면서도 옳다 싶으면서도 기존의 학설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쉽지 않은 주제일 것으로 보인다.
 

18인의 분석에 따라 더러 ‘이 정도 가지고 사람을 이래 판단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도 들게 마련이다. 저자가 겸손하게 말했듯 아직도 학문적 소양과 분석이 부족하다 라고 할 수도 있고 독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일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 속 18인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반대의) 시각은 무작정 나쁜 놈으로 규정하거나 위대한 인물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이분법적인 우리의 사고와 시각을 조금은 넓힐 수 있는 조심스러운 가능성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할아버지 영조에 이어 개혁정책을 수행하고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등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조선시대 정조도 한,중,일 세 나라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관점을 넓혔을 때 한 국가의 성적표로서는 꼴찌였다는 분석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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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지음, 윤광준 사진 / 을유문화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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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 선생님의 첫 책이다. 20여년 간, IBM의 기업 경영혁신 분야에서 종사해 온 구본형 선생님은 IMF를 앞두고 1998년, 한국인들의 사고를 완전히 뒤집는 책을 한 권 출간한다. 흔히 자기 계발서는 ‘성공’ 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하고 몇 가지 법칙이 있는 양 설명한다. 이것은 미국식 자기 계발서이다. 사회 구조적인 모순보다 자기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된다는 식의 사고. 구본형 선생님도 그런 한계는 벗어나지 못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요, 이 책은 사회보다는 개인의 발전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내가 그에게 십분 동의하는 이유는 그가 ‘성공’ 보다는 ‘행복’ 이라는 관점에서 책을 썼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그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선동적이다. 사람을 울리는 표현을 ‘마구’ 쓴다. 마음을 울린다는 것은 크다. 말을 물가로 데려가는 것은 쉬워도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어렵다는 속담처럼, 마음을 움직여야 사람은 비로소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하게 된다. 그는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의 마음의 물에 파동을 일으켰다.
 

내 인생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이 책 제목은 참으로 기똥차게 지었다고 생각한다. 책 시작 말머리에서 영국 근해 북해 유전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를 언급한다. 당시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한 가운데 앤디 모칸은 몇 안되는 생존자 중 하나였다. 그는 불타는 갑판에서 몇 십미터나 떨어진 깊은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살 수 있었다. 무엇이 앤디 모칸을 검푸른 바다 속으로 뛰어들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살고 싶다는 생존이었다. 무엇보다도 본능과 자기 자신의 능동적 욕망에의 충실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삶에 익숙해져 있고 안주하며 어느 비판 의식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한다. 나의 의식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는, 나의 발상 자체를 전환시켜버려 나를 다시 처음부터 생각하게 만들어버리는 책들. 

 

저자 구본형 선생님은 ‘바꾼다는 것은 곧 발견’ 이라는 언급을 통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느끼면 알게 되고 그 때 세상은 다르게 다가온다고 한다. 내게는 인식을 바꾼다는 뜻으로 마음 속에서 재해석되었다. 서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잘못된 깨달음으로 우리를 몰아간 것은, 우리를 기존의 체제에 묶어두고 통제하고 싶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이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과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때때로 부모의 모습으로, 선생의 얼굴로, 직장 상사의 이름으로, 그리고 친구의 한숨 섞인 충고로 우리를 설득시켜 왔다.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것은 어쩌면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무난한 처신이었는지도 모른다." -p.12
 

는 구본형 선생님의 표현. 이를 계기로 나는 생각을 통째로 바꾸었다. ‘그런 대로 무난한 처신’은 이전까지 겉으로 보이지 못한 바로 ‘나의 처신이었고, 나의 용기없음’ 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산업사회의 결과물인 직업세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익숙함에 대해서도 구본형 선생님은 분명히 언급하고 있었다.

"고용자에게 매달리지 말라. 그의 선처와 관용을 바라지 말라. 당신의 밥그릇을 그에게 맡기지 말라. 가장 확실한 밥그릇의 확보는 당신이 항상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p.142
 

우리는 주변에서 피고용인이 되어버리는 순간, 그에게 선택 전권을 주어버리는 것으로 한달에 한번씩 그 보상을 받아왔다. 어느새 우리는 능동적인 우리에서 수동적인 우리로 변해갔고 느끼지 못했다. 그 우리 속에는 분명 나도 있었다. 

 

마음의 죄책감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구본형 선생님은 변화는 곧 두려움이지만 두려움을 동지로 삼으면 큰 힘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능동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감으로서 ‘삶에는 흥분이 있어야 한다’고, 또한 ‘삶은 생존하는 것 그 이상’ 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욕망.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단어를 꼽으라면 바로 욕망이다. 구본형 선생님은 희망, 꿈 이런 것보다도 이 단어가 가장 솔직하고 야생력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스스로 정의했다. 삶과 욕망 사이의 관계, 욕망이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구본형 선생님의 표현 몇 가지를 직접 인용해보려 한다.
 

"욕망은 깊고 깊은 곳에 있다. 스스로도 움겨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숨어있다. 그것은 단순한 소망이나 충동이 아니다."
-p.11
 

"욕망을 가진 사람은 그것에 오랜 시간을 쓴다.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기도 하고, 자존심을 굽힐 줄도 안다.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 일에 말할 수 없는 정열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
-p.12
 

"욕망이 반사회적일 때 인간은 불행해진다.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통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개인이 가져야 할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주장한 홉스로부터 시작된 지배자들의 논리이다."
-p.259


 

구본형 선생님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욕망에 충실할 때 사람은 자신 모두를 다 쓰고 갈 수 있다고 언급한다. 또한 미래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며 미래를 기억해 내는 능력을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과거를 기억하는 데 사용되는 능력은 기억력이다. 그러나 미래를 기억해내는 데 사용되는 능력은 상상력이다."
-p.296

 

나는 이 책을 적절한 시점에 아주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한창 두려움과 홀가분함 사이에서 요동치며 앞이 안보이고 다시 사회와 타협해야 할까 라는 나약함의 반대편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너만의 삶을 살아보라고 위안과 힘을 주는 그런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구본형 선생님이 언급한 한 구절을 통해 나의 다짐을 남기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삶에는 언제나 약간의 흥분이 필요하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 시작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일도 너무 늙은 일도 없다. 마음에 드는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임을 믿어야 한다."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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