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자서전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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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기르는 소처럼 1년을 살기보다는 하루동안이나마 들소가 되리라.'

<영혼의 자서전>에 나오는 문장을 싹둑 잘라 카톡상태메시지에 올려놓았다.

몇몇 지인이 물어온다.

'언니, 왜 들소가 돼요?' '길들여진 영혼보다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겠다는 결심이겠지. 호호호'

 

책장을 펼치면 고뇌하느라 미간을 좁히다 못해 급기야 붙어버릴 것 같은 눈썹과 움푹 들어간 눈, 그리고 수북한 콧수염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나타난다. 그 사진은 아이들이 좋아했던 캐릭터, 앵그리버드에 가까웠지만 그것은 그를 조류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류를 고뇌하는 인간상으로 끌어올리게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덮고 한동안 조르바와 부불리나 (오르탕스 부인의 별칭) 사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덫을 놓았던 화려한 전적의 그가 아닌가. 조심해야한다. 웃다가는 큰 코에서 콧물이 마구 쏟아지므로.

 

자유, 사전적 의미로 자유란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 풀이되는 데 그렇다면 무엇에 대하여 자유로워져야 하는가.

그런 류의 질문에는 무엇을 갈망해야하는지, 왜 갈망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부단히 옮겨다닌

젊은 시절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도움이 될 것이다. 서문에서 그가 이 책이 자서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까닭은 자서전을 넘어선 어떤 영성을 일깨우는 책에 가깝기를 희망해서가 아닐까.

신에 대하여 누구나 품고 있는 의문과 성서에 대한 혼란, 그리고 도전이 포진해있다.

 

그의 영혼을 처음 뒤흔든 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가 자아를 깨닫게 될 때부터 찾은 자유의 시작은 터키에게 빼앗긴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지만 이것이 발전하여 나는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낳게 했다. 결국은 크레타와 터키의 싸움뿐 아니라 선과 악, 빛과 어둠, 신과 악마라는 싸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피에 굶주린 해적인 아버지쪽과 선량한 농민인 어머니쪽 조상 아래 크레타 섬에 태어났다. 

어려서는 물에 담구어 부풀려진 버찌가 쪼그라드는 게 보기 싫어 눈을 감고 물에 잠긴 버찌를

우그적우그적 씹던 소년이었고 훗날에는 세계를 여행하며 행복감에 교만해지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작은 신을 신고 고행을 선언하는 젊은이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숭고함은 '크레타적 경지'에 오르는 삶의 자세로 설명되곤 했는데

지진과 침략이라는 불안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려움과 맞서 싸워가던 조상들의 피가

그에게도 흘렀으리라. 동, 서양에 끼어 강대국의 영향을 받으며 자유를 침탈당하고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르며 그는 자유의 중요성을 뼈에 깊숙히 새겨 터였다.

 

자신을 아끼는 영혼이라면 이 목표에 다다르자마자 곧 그것을 더 멀리 밀어놓는다.

달성이 아니라 오름을 절대로 쉬지 않아야한다.

오직 그것만이 삶에 숭고함과 단일성을 부여한다.              -102 p

 

법대에 재학하며 최고 점수를 받은 후 아버지로부터 1년 간의 여행이 선물로 주어졌을 때 그는 그리스 본토를 여행하고 이탈리아, 팔레스타인 등지를 떠돌며 영혼을 확장시켜나가는 데 그리스를 여행할 때는 그 아름다운 역사 속에서 전설을 입고 태어나는 그들 족속의 의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스의 업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한 노부인이 바구니에서 무화과 두 개를 꺼내준다.

저를 아세요, 할머니?

그렇지 않단다, 얘야. 모르는 사람한테 뭘 주면 안된단 말이냐?

너는 인간이지? 나도 그래.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아?             - 195 p

 

그리스 본토여행을 마친 후 몇 달 있다가 또 여행을 떠나려하자 어머니가 울면서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방랑을 할 셈이냐?" '죽을 때까지요, 어머니. 죽을 때까지.'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던 카잔차키스. (에이, 불효자같으니라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버지였지 자신의 아버지는 아니었다고 생전에 아버지와의 포옹을 거부했다'던 만델라 넬슨의 딸처럼 그의 어머니도 아들을 방랑에게 내주고 결국은 인류에게 양도한 희생의 어머니였을지도.

 

'난 저 애가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아이들에게 얻어맞을 때에만 걱정을 합니다.

그 두 가지 경우에만 말예요. 다른 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어야죠!'

 

그의 아버지는 달랐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며 집으로 찾아온 신부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아버지의 그러한 교육방침이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진정한 남자가 되게 하'는 데에

제일 큰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아버지의 교육방침은 도대체 어떤 남자를 키워낸 걸까.

 

젊은 시절에 그에게는 약간의 연정을 품었던 에이레 아가씨가 있었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지 전 이별여행을 하자며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았었고 두 남녀 모두 젊은 날의 열정과 설레임으로 온몸이 들떠있었다. 하지만 여행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고 문득 그는 그녀와의 관계에 두려움을 느껴 그와 깊은 관계를 나누기 원하는 그녀의 손짓을 뿌리치기에 이른다.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자란 그였지만  후일 '같이 자고 싶어하는 여인의 청을 뿌리친 남자는 화있을진저'식의 이슬람 속담을 들었을 때는 좌불안석이 된다. 떨치지 못한 죄책감을 <뱀과 백합>이라는 책을 씀으로써 그녀를 글씨 속에 가두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여행중 머무르기 위해 방문하게 된 백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는 에이레 아가씨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아가씨와 즐거운 추억을 만들지 못한 회한이 없느냐는 부인의 질문에 대답한다.

 

행복감에 점점 길이 들어서 강렬함과 영광을 몽땅 상실하느냐, 아니면 그런 감정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전과 마찬가지로 항상 그것을 대단하게 생각하며 완전히 자아를 상실하느랴 하는 것이었죠. 난 언젠가 꿀에 빠져 죽은 벌을 보고는 교훈을 얻었어요.    -250 p

 

이야기를 다 들은 그녀는 꿈을 꾸듯 내뱉는다. "당신은 남자예요.!"

이 이야기에서는 달콤함과 부드러움을 멀리 해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바람직한 맹수의 이미지가 느껴지면서도 신 앞에서 범죄하지 않고 세상에서도 떨어져 나오지 않으려는 나약한 면모에 프슥 웃음이 난다. 크레타식 남자됨은 이렇게 성자적 예민함을 가지는 걸까.

뿐만아니라 이 이야기에서는 다르면서도 슬픈 감정의 줄기가 잡힌다. 그 노부인에게서 가당치도 않은 처녀같은 순수함과 떨림을 발견한 것이다. 노년이 되면 마땅히 남김없이 사라졌어야 할.

 

지극히 늙은 나이에 절망적인 찬란함을 보여주며, 수줍음과 처녀성이 어떻게 다시 진실한 여인에게서 죽지 않고 되살아났던가!

 

절망적 찬란함을 노년에도 발견하고 걸맞지 않은 수줍음과 처녀성이 재현된다면,

그것을 눈치채고 삶의 비극을 느끼는 젊은이의 눈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나는 수치에 몸을 떨게 되리라. 그래서

노년에는 여성성보다는 남자와 여자가 통합된 인간성 하나만을 꼭 추구하리라.

글을 쓰다보니 희화화되었지만 그 어떤 글보다 슬픈 대목이었음을 고백한다.)

 

세상의 어떤 힘도 인간의 영혼처럼 제국주의적이지는 못하다.

영혼은 점유하기도 하고 점유를 당하기도 하지만, 항상 제국이 너무 좁다고 느낀다.

답답해진 영혼은 자유롭게 숨쉬기 위해 전 세계를 정복한다.

                                                                          -  253 p

다음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강한 메시지를 준 부분이 아닐까한다.

그가 산길을 오르며 만난 아베신부와 이슬람교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신부가 호기심에 가득 차 한 승려에게 물었다.

"승려님, 당신은 신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신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신은 이름으로 얽어매기에는 너무 커요.

이름이 감옥이고, 신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신을 부르고 싶으면, 뭐라고 부르죠?"

"<아!> 나는 신을 그렇게 불러요. 알라가 아니라 <아!>예요."

 

신을 부를 때 <아!>라고 부른다고 했던 그 승려의 고백은 얼마나 정직한가.

나는 모르겠다고 하는, 나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신 앞에서의 탄식.

이름을 가지는 순간 만물은 안정이 되고 평화로워지는 반면, 의미는 이름에 갇혀 본질이 희미해지는 위험을 감수해야한다. 통일된 이름으로 신을 부른다는 것은 개인의 신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고대하는 것, 기다리는 것.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신앙의 가장 큰 위기가 아닐까한다.

 

영혼에 관하여 서문에 밝혔던 그의 기도 세 가지를 옮기며 포스팅을 맺는다.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이제 그는 시나이로 간다.

나는 내일 하권을 빌리러 도서관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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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10-23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책을 읽은 감동이 되살아나는 좋은 글이네요.

2015-10-23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