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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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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그리고 유시민



일단, 이 책이 많이 팔린다고 한다. 근데...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까? 느낌에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꼴이 될 것 같다. 읽기 편하지 않다는 말이고, 그리 쉽지도 않다. 다만 유시민 파워 내지는 그래도 책 속에 익숙한 사람들이 나온다는 정도인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베스트셀러의 위치에 올라가기엔 쉽지 않아 보인다. 유시민... 딱히 뭐 한 것은 없는 사람인데... 다만 노무현처럼 짠한 느낌을 주고 알쓸신잡에서 좋은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심고... 그런데!! 파워가 있다. 물론 그래서 적도 많기도 하지만 말이다. 마냥 부러울 따름이다.

이 책에 대해 비난(?) 최소한 이러쿵저러쿵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유시민 같은 사람 까면서 결국 자기 자랑하는 것 아닌가 하는 뻔한 비판처럼 보인다. 적어도 근쉬는 역사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역사책에 대한 서평과 소개를 잘 해준 책을 본 적이 없다. 너무 좋은 가이드 북인데... 비평하는 사람 중에서 어느 누구도 이런 가이드를 해줄 생각도, 해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저런 요소들을 끄집어 내어 뭐라뭐라 하는 걸 보면... 역시 사촌이 땅을 사는 건 나쁜 일 같다. 강남 집 값이 내려가도 땅을 사지 말아야 겠다. 지인들의 복통방지를 위해.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통해서 최초(?)의 역사서 기술 방식에 대한 고전을 소개하고 있다. 둘다 감정적이고 편향적으로 쓰지 않고 공정하게 다뤘다고 강조한다. 사마천의 이야기에서는 자료 수집의 중요성과 그 자료의 접근성에 대한 강조점을 이야기 했다고 봤다. 물론 사마천이 사기를 쓰기까지 겪은 고초에 대해서도 멋있게 표현하기도 했다. 이븐 할둔은 사학을 전공한 친구도 첨 들어본 사람이라 했다. 한국사, 중국사, 서양사 이외에는 배우지 않는 한국 사학교육의 협소함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암튼 할둔의 역사 서술에서 중요한 점은 과학적 서술이라는 점이다.

랑케는 '전문' 역사학자의 등장으로서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저술들이 그것들을 증명하고 있다며 세간의 핵노잼에 대해 비판한 것 같았다. 그 저술에서 강조점은 "확실한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여기에 대해 할 말은 참 많다. 그러나 이 말 자체는 틀린 말도 아니도 틀려서도 안되는 말이다. 한편으론 불가능한 말 이기도 하지만... 이 랑케 밑에서 또 다른 위대한 혁명가가 나오는데 마르크스이다. 역사학자라고 보기엔 어려운 점도 많지만 그의 사상(계급투쟁)에 있는 역사성 때문에 유시민은 이 범주에 넣은 것 같다.




조선에도 역사학자들이 있어서 투키디데스라면, 사마천이라면 썼을 법한 기록들을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같은 학자들이 했다고 언급하면서 우리 역사의 재미진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E.H. 카에 대해서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 역사가는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고 말이다. 역사적 사실은 당연한 것이다. 그 사실에 발언권을 주며, 서열과 순서를 결정하는 것이 역사가라고 말한다. 토인비도 그런 맥락에서 사실의 선택, 배열, 표현 그 자체가 창작의 영역에 속하므로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고서는 위대한 역사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이야기를 한다. 이 둘은 독특하다. 지금까지와는 역사를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정재승이 "물리학으로 어떻게 사회를 이해하는가?" 라는 강연을 했는데 거기서 인문사회학은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연구하는데 물리학은 통계 등 정밀한 과학적 방법으로 사회를 읽어 간다고 했다. 총균쇠와 사피엔스, 호모데우스를 통해 기존 역사 방법론이 아닌 방식으로 역사를 읽어내는 패러다임 시프트를 주목했다고 근쉬는 보았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역사학자와는 다른 류의 학자였고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근쉬는 이 모든 과정이... 내가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에 초점이 있다고 본다. 지금 우리는 사마천보다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고, 이븐할둔보다 과학적으로, 기타 모든 사학자들보다 풍성한 자료들과 멀티미디어로 경험하지 못해도 공감각적 시청으로 사건들을 접할 수 있으며, 수많은 댓글들과 개인들의 의견들을 종합해서 어떤 학자도 하지 못했던 역사적 기록을 남길 수 있다. 학자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 했다. 근쉬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느 역사가 못지 않은 역사적 서술을 할 수 있다 아니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2018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역사책에 기록될 엄청난 격변 속에 살고 있다. 유시민은 그 기록을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근쉬가 생각해 본 유시민의 숨겨진 의도였으리라 짐작해 본다.


E.H.카에 대해서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 역사가는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고 말이다. 역사적 사실은 당연한 것이다. 그 사실에 발언권을 주며, 서열과 순서를 결정하는 것이 역사가라고 말한다. 토인비도 그런 맥락에서 사실의 선택, 배열, 표현 그 자체가 창작의 영역에 속하므로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고서는 위대한 역사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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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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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채식주의자 독후감


무언가 창작한다는 사람들, 노래나 그림, 문학 등등 여러 장르로 창조를 해내는 사람들은 그 작품 속에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부커스이니까 그들을 글 쓰는 작가라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작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메시지나 생각들을 쓰는 것이다. 그게 스토리로 이야기하던, 시어로 함축하던, 논리로 풀어내던지 간에 작가들은 주제의식이 있고 그것을 개성있고 공감가게 기록할 수 있으면 좋은 작가가 아닌가 싶다. 독서라는 것은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 좋은 독서법이라고 배웠다. 이걸 20세기적 독서법이라 할수 있는데 그 독서법에 의해 채식주의자를 읽어 보자.

한강은 채식주의자라고 제목한 3권의 단편집 모음을 통하여 인간의 폭력성을 고발했다. 고기를 잡는 과정,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과정, 고기를 안먹는 과정 속에 가해지는 폭력을 조금은 섬뜩하게 그려냈다. 자해, 근친, 단식 등은 그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이해되었다. 그 몸부림으로 육식거부와 토플리스는 당연한 결과였다. 영혜 주변의 사람들은 남들이 다 그러는데 왜 그러냐는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삶을 강요한다. 과연 정상이란 과연 무엇일까?다수가 동의하고 취하는 행위를 정상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한 개인을 둘러싼 소집단이 정상적(?) 삶을 강요한 폭력을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으로 고발했다면, 한강은 소년이 온다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사회적 폭력에 대해 당사자로서의 아픔을 고발했다.

채식주의자에서 자해씬, 몽고반점에서 형부와 몸을 섞는 씬, 나무불꽃에서 물구나무 씬은 섬뜩하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분명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임에도 가슴이 아렸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믿는 것은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언니, 내가 물구나무 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라는 영혜의 독백은 단순한 저항, 그 이상이었다. 이 소설이 한 단계 뛰어올라 ‘인간의 보편성’을 다뤘다는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인정하는 지점이다.

너무 말라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되어버린 영혜는 끝내 나무가 되었을까? 상처로부터, 억압된 욕망으로부터,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았을까? 부디 그러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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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20세기 독서법에 의한 근쉬의 독후감이다^^;;;;

나는 이런 독서법이 익숙하다. 왜? 구 시대 사람이니까!! 20세기에 교육을 받았고, 그 시대에서 정서와 기호를 형성했기에 21세기적 사고와 정서에 익숙하지 않고 어색하기 때문이다. 꼴통으로 남고 싶지 않아서 21세기적 사고와 감성을 익히려고 애는 쓰지만, 딱~ 그 정도일 뿐이다. 사고구조나 감성이 어디 쉽게 바뀌겠는가!! 그래도 아는 모든 것을 끌어모아 21세기적 독서법으로 생각해 보면... 음~ 21세기적 독서법이라는게 뭐냐 하면 독서의 권위는 작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음악학자인 니콜라스 쿡의 『음악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이 책 읽으면서 고생 많았다 ㅠㅠ - 을 통해 배운 것인데 독자가 없다면 결국 작가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니콜라스의 주요 논지였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부커스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진짜 권위 있는 이야기였다는 말이다. 전혀 터무니없는 무논리의 쌩뚱맞은 말만 아니라면 부커스 선배들의 모든 말들은 한강보다 뛰어난 관점, 다양한 감성, 색다른 논리의 전개였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선배들의 말을 들으면서 한강이 아닌 나일강(?)을 본 듯 하였다. 영혜는 무속인이 있으면 나았을 거라는 말, 영혜는 정신병이 아니라는 말,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본거 아니냐는 말, 방어 때문에 회를 못 먹었다는 말, 영혜는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말, 졸혼 vs 휴혼, 등등 한강이 이렇게까지 생각했을까, 이것이 21세기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풍성함이었다. 한강도 동석했다면 아주 흥미롭다고 할 시간이었으리라.

근쉬는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라고 할 때 언니 인혜는 끝까지 곁에서 영혜를 돌보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었다. 1, 2부에서 가족과 남편마저 영혜를 버리고 내팽겨쳤을 때 인혜는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라며 가족들의 상흔을 홀로 앓는다. “그녀는 영혜를 버릴 수 없었다(169쪽)” 이것만이 야만에게서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았다. 영혜 곁으로 가는 인혜의 자세야말로 비극이 이어지고 있는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보았다.

근쉬에게도 이런 인혜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ps. 참고로 한강의 아버지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유명한 한승원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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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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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개인적으로 배우다 포기한 사람으로서 쉽지 않은 언어라는 것을 쬐금은 안다. 노래로 접하다가 몇가지 문서를 읽어보기 위해 발을 담궜다가 얼른 빼버린... 뭐 그런 언어였다. 라틴어로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는데 그에 비해 공부는 너~무 많~이 힘들어서 손익분기점을 생각하다 접는게 낫다는 판단을 했다. 근쉬에게 라틴어는 입문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결정이 내 인생에 몇 안되는 잘한 짓 중에 하나였다.


한동일. 이 분을 변호사라 말하기도 뭐하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신부라고 말하여야 할 것 같기도 하다가 교수인가 햇갈리고 뭐 복합적인 그런 분이시다. 요즘 시대코드에 맞는 그런 분인 것 같다. 이 책에선 주로 교수 포지션에서 글을 썼기에 주 대상이 20대인듯 싶다. 청년들에게 라틴어 문장을 통해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뷰를 제공해 준 것 같다. 당연히 청년세대들에게 또한 신기하게도 중년세대들에게도 많이 읽히는 것 같다. 작가로서 라틴어라는 독특한 지점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게 좋아 보이기도 했다.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은 유치함이라는 코드로 사람을 끌어 당기는 역할을 했다. 내 안의 위대한 유치함이라는 직접적이면서도 적나라한 인간 심리를 이용하여 많이 사람을 독자로 만들어 버린 작가적 도전에 박수를 보냈다. 사람 안에 있는 나도 고상한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그 심리, 바로 이것이 공부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들 그런 심리로 공부하게 되지 자기절제와 자아성취로 공부했을까!! 인간 본질적인 심리를 꿰뚫은 저자가 대단하다 싶었다.

28강의 강의 중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고 부족한 것도 없어 보인다. 하나하나가 힐링이 되고 읽기에 부담이 없다. 마치 아프니까 청춘이다 느낌... 내가 (상대적으로) 늙어서 그런지 뭔가 아쉬움이 짙게 묻어난다. 동사의 160개 변화, 명사도 1격~5격까지 변화, 끔찍한 do동사 활용표 등의 언어적 깊음으로는 메워지지 않는 컨텍스트의 궁핍함을 느꼈다. 차라리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나 키케로의 “국가론”, “최선과 최악에 관하여” 같은 작품을 일정 단락이라도 읽었다면 나사로가 지옥에서 부자 혀끝에 찍어준 물 한방울 같았을 것이다.

라틴어를 통해 지적인 것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이 조금은 들었다. 이탈리아와 교황청에서 가톨릭이라는 채널을 통해 라틴어의 권위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로마의 역사와 위치를 통해 얻어지는 권위를 통해 더 강조가 되는 부분도 있다. 일정 부분 동의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전부 공감되지 않는다. 왜? 라틴문화보다는 헬라(고대 그리스)문명이 더 고전이고 원본이기 때문이다. 깊이도 더 깊고 넓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ad fontes라는 구호 즉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캣치프레이즈로 중세에서 벗어나 원본으로 돌아갔는데 거기가 어디냐 하면 로마, 라틴이 아니라 그리스, 헬레니즘이다. 당연히 언어도 헬라어이고. 심지어 로마인들 중 황제와 귀족, 학자들은 라틴민족이면서 헬라어를 사용했다. 최우선의 공식언어로.

그러나 지금은 이탈리아가 그리스보다 강하고, 이탈리아보다 교황청의 영향력이 세계적이다 보니 그 근본이 되는 라틴어를 강조하게 되고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자기 것이 세계 최고라고 말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데, 한동일 이분은 한국사람이어서 아쉽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분이 사제시고 교황청에서 930번째 어쩌구 저쩌구 다 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인근을 근동이라 말하거나 우리나라 인근 3국을 극동이라 말하면 유럽이 잘났다는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라틴어도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말해야겠다는 근쉬만의 삐딱선이다^^;;;;

아마도 이런 글을 쓰는게 청춘이 아니어서 그런가 싶다. 라틴어 노래를 좋아했고, 지금도 가끔 혼자 흥얼거리는 사람으로서  라틴어를 폄하하고 싶지 않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근쉬는 다만 라틴어도 좋은데 헬라어가 더 좋다, 헬라어 수업!! 이걸 책으로 내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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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최미양 옮김 / 율리시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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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직도 가야 할 길 독후감

 

Scott Peck은 사상가, 정신과 의사, 작가, 강연가로 소개하고 있지만 이 사람의 또 다른 포지션은 신학도이다. 물론 외적인 스펙에는 신학에 대한 이력은 없지만 그는 부디스트로서 이 책을 썼고, 크리스천으로 개종하며 인간심리와 기독교 신앙을 통합하는 글쓰기와 강연을 했다. 신학의 코스는 거치지 않았지만 서구권에서 작가이고 의사였으며 사상가였다면 당연히 놀라운 독서력을 기본으로 깔아 줘야 한다. 서구학자들은 평생 3만 여권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 사람이 독서할 수 있는 기간을 50년 정도로 보면 하루 1.6, 147, 1년에 576권을 읽는다는 말이다. 이게 서양 학자들의 무서움이고 저력이다. 저자도 그 정도는 했다고 봐야 한다. 즉 전공은 안했지만 우리나라 신학교수보다는 나은 신학에 대한 논리가 있다고 봐야한다.

 

위의 말을 한 이유는 이 책은 (기독교) 신앙서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non크리스천도 읽음직한 논리와 내용이 있을 뿐 내용은 완벽한 기독교 서적이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은 읽기에 부담스럽거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4부의 은총이라는 결론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독서토론 중 은총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공허하게 들렸던 것은 그 말의 신학적 이해와 일반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건 독서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책의 문제였다고 본다.

 

근쉬가 이 책에서 가장 가치 있게 본 부분은 사랑에 대한 정의를 지금까지의 딴판으로 규정한 것이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고, 낭만도 의존성도 애착도 아니며, 자기희생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참 놀라운 선언이다. 이것이 주는 파장은 매~~우 컸다고 보인다. 여성 중 이 말에 동의하거나 공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차마 말하기 주저했을 뿐 인정도 하지 않았다. “단 한명도.” 이것을 근쉬는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닌 심정적, 정서적 쇼크로 보았다. 여성들 모두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동의와 공감을 할 수 없는 그런 영역으로 본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사랑을 Scott Peck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간택되면 그리고 그것이 쌍방인 것이 확인이 되면 그 사람에게 빠지게 되고 의지하게 되며 모든 것을 주게 된다. 남자보다 여자는 더 이런 경향이 크다. 여자가 사랑하는 일반적인 방법론이다. 여러 문학에서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영화에서도 그러했다. 그러한 사랑의 모습은 모두 아름답게 그려졌고, 그러한 여러 작품들을 감동적으로 접했으며, 그런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인정받는 사회 속에서 여성들의 사랑에 대한 사고는 그렇게 형성됐다고 보는게 합당한 추론이다.

 

Scott Peck은 정신과 의사로서 상담가로서 결정적으로 남자로서 이러한 사랑의 모습에 의학적이고 경험적이며 학문적 의구심을 가졌다. 문제가 생기는 사랑의 유형들을 내담자들을 통해 보면서 Scott Peck 만의 사랑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말했다고 본다. 그리고 저자가 언급한 자기 영역의 확대 등을 말하면서 타자에 대한 의존성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말하면서, 자아가 주체적인 원인으로 의지를 발동하여 행동하는 것을 사랑으로 정의했다. 그 과정에서 자아 스스로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falling in love 류의 사랑은 정신병의 초기증상으로까지 말하며 부정적으로 말한 것 같다.

 

1부와 3, 4부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공감하고 잘 소화한 것 같아 줄여야 할 것 같다. 여기까지도 짧지 않아서 더 쓰기 부담스럽다. 근쉬 개인적으로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정신의학적 임상결과에 따른 색다른 정의와 이해라는 부분에서 유익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에서는 너무 전통적이었다. 20세기적이고 포스트모던 그 다음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고 보인다. 훈육 같은 일정 부분에선 분명 도움이 되었지만 그것은 작은 부분이고 전체적인 책의 논리는 구시대적이다. 다만, 한국의 개신교 집단이 최소한 이 정도만의 논리와 사상적 근거를 가지고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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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이라 불리는 이 소설은 75년에 연작으로 발표되었다가 78년 6월에 초판으로 발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96년에 100쇄를 돌파한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책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한번 피 마르게 아파서 소리 지르는 때가 있는데, 그 진실한 절규를 모은 게 역사요, 그 자신이 너무 아파서 지른 간절하고 피맺힌 절규가 `난쏘공`이었다고 조세희는 말한다. 긴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 난쟁이들의 소리에 젊은이들이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난쏘공`이 시대 문제의 핵심, 인간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이런 절규를 소설로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로 보면 정말 위대한 일이다. 어쩌면 (진정으로) 죽을 수도 있는, (진정으로) 죽음을 각오한 글쓰기였다고 생각한다. 정작 조세희는 난쏘공을 쓴 후 또 다시 침묵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더 위대한 점은 75년 당시 이런 주제는 대다수 대중이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시대였던 것을 기억하면 난쏘공의 가치는 대단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종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고, 그래서 아직도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난쏘공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지점이 어려웠다. 난장이였던 아버지인가, 아님 어머니? 큰아들 영수? 둘째 영호, 막내딸 영희?? 누가 피해자인가, 누가 해결자인가? 전통적인 소설의 스토리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불쑥 등장하는 배역들은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생뚱맞기도 하였다는 평도 있다. 그만큼 난쏘공의 전개는 쉽지 않았다. 다 읽은 후 드는 생각은 “주인공은 난장이로 대변되는 모든 인물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인들과 지주들 일부만이 거인이고 그들은 가해자로서 악역을 담당하고 있는 전형적인 선악 구조 속의 이분법에 대입시켜 보면 된다.


이 책은 예전에도 읽었지만 지금은 21세기이고, 나도 제법 늙었다. 난쏘공이 쓰였던 때와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고, 절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난쏘공에서 말하고 있는 거인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들을 리더로 알고 있고 지도자로 따르고 있었는데... 나는 묻고 싶은 것이다. 그들이 거인이 맞았는가!!! 만약 DJ나 노무현 같은 사람이 그 시대의 거인이었다면 난장이 아버지는 죽었을까? 누구는 맞고 틀리다는 차원이 아니라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그들이 그런 자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는 분명하다. 적어도 그들은 거인은 아니었고, 당연히 지도자가 되면 안 되었다고….


“나는 내가 마지막 눈을 감는 날의 일도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만도 못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그들 시대의 성격을 가졌다. 나의 몸은 아버지보다도 작게 느껴졌다. 나는 작은 어릿광대로 눈을 감을 것이다.” 계층이 있고 그 계층간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절망’을 보여준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라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이 없는 나라는 재난의 나라이다. 누가 감히 폭력에 의해 질서를 세우려는가?


난 낙원구 행복동에 위장전입이라도 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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