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채식주의자 독후감


무언가 창작한다는 사람들, 노래나 그림, 문학 등등 여러 장르로 창조를 해내는 사람들은 그 작품 속에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부커스이니까 그들을 글 쓰는 작가라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작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메시지나 생각들을 쓰는 것이다. 그게 스토리로 이야기하던, 시어로 함축하던, 논리로 풀어내던지 간에 작가들은 주제의식이 있고 그것을 개성있고 공감가게 기록할 수 있으면 좋은 작가가 아닌가 싶다. 독서라는 것은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 좋은 독서법이라고 배웠다. 이걸 20세기적 독서법이라 할수 있는데 그 독서법에 의해 채식주의자를 읽어 보자.

한강은 채식주의자라고 제목한 3권의 단편집 모음을 통하여 인간의 폭력성을 고발했다. 고기를 잡는 과정,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과정, 고기를 안먹는 과정 속에 가해지는 폭력을 조금은 섬뜩하게 그려냈다. 자해, 근친, 단식 등은 그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이해되었다. 그 몸부림으로 육식거부와 토플리스는 당연한 결과였다. 영혜 주변의 사람들은 남들이 다 그러는데 왜 그러냐는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삶을 강요한다. 과연 정상이란 과연 무엇일까?다수가 동의하고 취하는 행위를 정상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한 개인을 둘러싼 소집단이 정상적(?) 삶을 강요한 폭력을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으로 고발했다면, 한강은 소년이 온다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사회적 폭력에 대해 당사자로서의 아픔을 고발했다.

채식주의자에서 자해씬, 몽고반점에서 형부와 몸을 섞는 씬, 나무불꽃에서 물구나무 씬은 섬뜩하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분명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임에도 가슴이 아렸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믿는 것은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언니, 내가 물구나무 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응,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라는 영혜의 독백은 단순한 저항, 그 이상이었다. 이 소설이 한 단계 뛰어올라 ‘인간의 보편성’을 다뤘다는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인정하는 지점이다.

너무 말라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되어버린 영혜는 끝내 나무가 되었을까? 상처로부터, 억압된 욕망으로부터,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았을까? 부디 그러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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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20세기 독서법에 의한 근쉬의 독후감이다^^;;;;

나는 이런 독서법이 익숙하다. 왜? 구 시대 사람이니까!! 20세기에 교육을 받았고, 그 시대에서 정서와 기호를 형성했기에 21세기적 사고와 정서에 익숙하지 않고 어색하기 때문이다. 꼴통으로 남고 싶지 않아서 21세기적 사고와 감성을 익히려고 애는 쓰지만, 딱~ 그 정도일 뿐이다. 사고구조나 감성이 어디 쉽게 바뀌겠는가!! 그래도 아는 모든 것을 끌어모아 21세기적 독서법으로 생각해 보면... 음~ 21세기적 독서법이라는게 뭐냐 하면 독서의 권위는 작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음악학자인 니콜라스 쿡의 『음악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이 책 읽으면서 고생 많았다 ㅠㅠ - 을 통해 배운 것인데 독자가 없다면 결국 작가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니콜라스의 주요 논지였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부커스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진짜 권위 있는 이야기였다는 말이다. 전혀 터무니없는 무논리의 쌩뚱맞은 말만 아니라면 부커스 선배들의 모든 말들은 한강보다 뛰어난 관점, 다양한 감성, 색다른 논리의 전개였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선배들의 말을 들으면서 한강이 아닌 나일강(?)을 본 듯 하였다. 영혜는 무속인이 있으면 나았을 거라는 말, 영혜는 정신병이 아니라는 말,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본거 아니냐는 말, 방어 때문에 회를 못 먹었다는 말, 영혜는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말, 졸혼 vs 휴혼, 등등 한강이 이렇게까지 생각했을까, 이것이 21세기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풍성함이었다. 한강도 동석했다면 아주 흥미롭다고 할 시간이었으리라.

근쉬는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라고 할 때 언니 인혜는 끝까지 곁에서 영혜를 돌보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었다. 1, 2부에서 가족과 남편마저 영혜를 버리고 내팽겨쳤을 때 인혜는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라며 가족들의 상흔을 홀로 앓는다. “그녀는 영혜를 버릴 수 없었다(169쪽)” 이것만이 야만에게서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았다. 영혜 곁으로 가는 인혜의 자세야말로 비극이 이어지고 있는 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보았다.

근쉬에게도 이런 인혜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ps. 참고로 한강의 아버지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유명한 한승원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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