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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파탈 - 치명적 매혹과 논란의 미술사
이연식 지음 / 휴먼아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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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전 인도와 네팔을 여행하다가 카마수트라 화집을 산 일이 있다. 호텔방에서 밤에 보다가 머리맡에 그냥 놔두고 나왔는데 비행기에 올라타고서야 생각이 났다. 영국에서 나온 책이 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책의 내용은 셀 수 없이 적나라한 성교자세를 담은 상당히 '음란한' 화집이었다. 새로 나온 책 <아트 파탈>은 그 음란함을 키워드로 미술을 재조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책 제목은 아트와 팜므파탈의 합성어 쯤 되겠다. 

   

미술은 애초부터 음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매체였고, 음란함은 매체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예컨대 사진과 영화는 발생 초기부터 음란한 내용을 담았고, 비디오와 인터넷은 포르노를 접할 수 있는 막강한 구실을 하며 급속히 확산되었다. TV 광고는 성적인 내용을 빼버리면 기실 보는 재미가 없어져 버린다. 미술이 흥성했던 것은 미술이 음란한 매체였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음란함’은 문화의 특정 장르가 매체로서 지니는 영향력이다. 저자 이연식은, 미술사(美術史)라는 학문이 음탕하고 저속한 취향을 만족시켜 왔던 미술의 역사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음란함이 미술의 본류가 아닌 소소한 일탈의 지류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 말한다. 미술의 음란함을 고찰하기는 하되 세미나, 심포지엄, 학술 논문 등의 고압적인 형식으로 포장하곤 했다는 것이다.

 

미술의 음란함을 둘러싼 소동과 논란은 미술사를 기술하는 데 유용한 분절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술과 음란함의 관계가 통념 이상으로 밀접했음을 강조하고, ‘음란함’이라는 키워드로 미술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더불어 음란함이라는 필터가 미술에서 얼마나 풍성한 결을 찾아낼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

작가는 음란함에 대한 기존 독자들의 인식의 균열을 바라고 있다.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음란함은 그것을 담고 있는 매개체와 어디까지가 음란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경계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그러므로 매개와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 경계선이 흔들려야 예술은 더욱 더 풍성해질 것이다.

 

“마리온은 비싼 여자였다. 그는 마리온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가진 돈을 다 썼다.”

 

이 글은 자크 롤라와 창녀의 만남을 묘사한 것이다. 롤라는 프랑스 작가 알프레드 드 뮈세가 1844년에 그 당시 매우 영향력이 있는 잡지 《두 세계의 평론》에 발표한 운문 소설의 주인공이다. 작가의 자전적 성격이 짙은 인물 롤라는 정숙한 마리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매혹적인 다중인격자, 다시 말해 마리온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고급 창녀이기도 하다. 롤라는 그녀의 매력에 넘어가 주색과 절망에 빠져 파멸에 이르고, 결국 마리의 팔에 안겨 독액을 마시고 죽는다. 롤라와 마리 사이의 중요한 성관계 장면은 이 소설의 절정부에 나온다. 뮈세는 이미 이런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는 악명을 얻은 사람이다. 그는 롤라가 보낸 사랑의 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창가에 서 있었다. 피곤함과 생각에 잠겨 그는 멜랑콜리한 눈으로 지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고, 창문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롤라는 마리의 등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젯밤의 사랑에 진을 다 빼 버린 듯 지친 상태였고,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앙리 제르벡스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포착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뮈세의 소설은 영향력 있는 잡지에 실렸지만 앙리가 그린 <롤라>라는 그림은 1878년 공식적인 전람회인 살롱에서 냉대를 받았다.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보자. 일단 작가가 비교하기 위해 선정한 그림을 올려본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그림이다. 아래 그림이 음란해 보이는가?

 

 

카바넬의 그림과 앙리가 그린 그림의 다른 점은 직접적으로 성적인 정황을 드러냈다는 이유에서였다. 난 아무리 보아도 두 그림 다 음란하게 보이지 않는다. 결국 금기는 사라지지만 그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금기가 들어선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좀 더 진전시켜보자. 위의 카바넬의 비너스에 치모를 그려넣었다면 카바넬 역시 형편없는 화가라는 매도를 당했을 것이다. 치모를 그려넣는 다는 것은 상당한 파격이자 금기였다. 그런데 이 금기를 멋지게 깨버린 화가가 있다. 바로 구스타프 쿠르베다.

 

  

1866년 그려진 <세상의 근원>이라는 위 그림은 개인소장품으로 있다가 1995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공식적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이 그림이 미술관에서 당당히 관객을 맞이하는데 100년도 넘게 걸린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 그림은 도색잡지의 한 장면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 대한 문제다. 쿠르베가 이 그림을 그린 것보다는 오르세 미술관이 이 작품을 대중들에게 공개하기로 한 결정이 더 파격적이라는 느낌이다. 암튼 이 책은 이런 저런 도전적인 질문들과 그에 관련된 그림들로 빼곡하다.

 

이런 책들이 우리 문화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존의 금기나 도덕적 엄숙주의의 그레이드를 높여주는데 의의가 있다.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인식의 차원이 높아지면 소위 말해 대중의 감각이 지금보다 좀 더 고양되면 예술가들은 그 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우리에게 제시해야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적어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보다 뭔가 더 새롭고 신선한 인식의 틀을 제공해야 예술가로 대접받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더 많은 삽화들은 책을 사서 확인해보시라. 읽고 나서도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상관없다. 당신 자신에게 스며들어간 이런 발칙한 화집들로 인해 당신은 이미 발칙한 상상력의 소유자가 되어 있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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