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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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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 한 번도 진짜로 버림받아본 기억이 없는지라
그렇게 나 자신을 방기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 개들이 개집에 매여 있듯이
일에 매여 있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 세상에서 단 한가지 소름 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상태에 놓이는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 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 한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 그렇게 시궁창을 철벅이며 걷다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제껏 한 번도 보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이 불쑥 시야에 들어 온다.

- 나와 비슷한 수많은 사람들이 프라하의 밑바닥, 지하실과 지하 공간에서 활기 넘치는 생생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걸 알고 나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운이 난다. 일도 한결 덜 부담스럽고 저절로 되는 것 같아 나는 시간을 되돌려 내 젊은 시절까지 거슬러올라가본다. 그 시절만 해도 나는 토요일마다 바지를 다리고 신발을 닦아 밑창까지 광을 냈다. 젊을 때엔 깨끗한 걸 좋아하고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해 그 이미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하니까.....

- 무얼 용서해달라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었지만 뭐, 놀랄 일도 아니었다. 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게 내 운명이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에 대해, 이런 성질을 가진 것에 대해, 심지어 나 자신에게까지 용서를 빌곤 했으니까......
나는 죄책감으로 무겁고 비참한 심정이 되어 내 지하실을 바라보면서 터키옥색 집시 여자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움푹한 자리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거리의 소음에, 현실의 저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귀기울였다.

-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전진, 미래로의 후퇴

- 자비로운 자연이 공포를 열어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 술과 노동으로 멍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 그들의 그리스 휴가 계획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헤르더와 헤겔의 책들은 나를 고대 그리스에 던져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건만 내가 막상 휴가를 떠나본 적은 없었다. 일을 따라잡느라 휴가는 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하루라도 결근을 하면 소장은 가차없이 추가로 이틀을 더 근무하게 했다.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 찾아와도 나는 수당을 받고 일하러 갔다. 일이 항시 밀려 있는데다,

내 역량을 넘어서는 종이 더미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 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그러나 부브니의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은 일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불안에 곤두선 책장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 안에 숨겨진 가치 따위는 전혀 아랑곳없이 냉정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 나는 쓰레깃더미를 치우듯 그것들을, 슬그머니 눈길이 가닿은 도덕 형이상학 마저 내 압축기 속에 처넣었는데, 그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 나는 익명의 꾸러미들을 미친듯이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고대나 현대 화가의 복제화 따위도 염두에 없었다.
나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예술과 창조, 미의 창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 속도로 일하면 혼자서도 사회주의 노동단원이 되어 연 50퍼센트의 생산성 향상을 약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업이 소유한 별장도 이용할 수 있겠고, 여름휴가를 그리스에서 보내며 속바지를 입고 올림피아 경기장을 돌거나 스타기라에 가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나는 우유를 병째 들이마시며 일했다. 부브니 사람들처럼 무심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저녁엔 일을 모두 마치고 쓰레기도 말끔히 치워, 나도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날 저녁 소장은 사무실 뒤쪽에서 샤워를 하며 내게 경고해왔다.

- 내 놀라운 기계가 나를 배신한 것이다.

- 나는 이러고 있는 게 좋다.

-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야 최상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적(敵)을 두기 마련이다.

- 그러고는 꿈을 꾸는 듯한 불행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 그때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르지차니의 아름다운 전원을 기리는 시를 읊었을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내게 사과를 했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힐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던 거다......

-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

- 부브니의 거대한 기계는 내 압축기 열 대에 맞먹는 일을 해치운다. ... 나는 녹색 버튼의 작동을 중단하고 폐지가 가득한 압축통 속에 나를 위한 작은 은신처를 마련한다. 아무렴, 나는 여전히 쾌활한 사내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 이제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을, 책장을, 쥐고 있다......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

-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압축통 벽에 눌려 내 다리와 턱이 들러붙고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이어진다 해도 결단코 두 손 놓고 천국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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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뉴스를 볼 여력도 없는 ‘직장인’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 경찰이 시위 참가자를 곤봉으로 무차별 폭행하고 연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경찰을 향해 질렀던 그만두란 육성을, 더 큰 목소리로 만들고자 기자가 된다.

그의 여러 에피소드, 이를 테면 폭력 진압 앞에 목소리를 내는 것, 홍어 표현과 세월호 관련 불공정 보도로 해고된 상사의 소송에 유일하게 증인으로 출석해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 MBC 민영화를 강변하는 사장에게 그건 MBC의 문제가 아니라 사장 잘못이 아니냐 지적하는 것, 권력 입맛에 맞게 보도를 잘 좀 하란 대통령 홍보비서관에게 반발하는 것까지. 본인 안위보다 지켜야 할 가치에 중심을 두는 그가 보인다. 그런 타고난 성격이 그를 기자로 이끈 것 같다.

그런 그가, 듣기 껄끄러운 뉴스는 가짜뉴스로 치부하는 권력과 객관적인 사실도 취사 선택하는 그 충신들과 겪은(겪고 있는) 분투가 씁쓸하고 어처구니없어 흥미롭다. 바이든 때문에 머쓱했던 대통령이 바이든 쪽팔릴 걱정을 내뱉은 뉴스 하나로 전용기 배제, 경찰 수사, 극우로부터 살해 협박까지 받는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 거기에 유산의 아픔까지 겪은 것은 인간적으로 마음 아픈 부분...

좁게는 사내에서 경력기자(2012년 파업 이전부터 근무한 ‘기존기자’에 대응하는 말)로서 겪은 내부 모순부터(제3노조의 존재도 처음 알았다), 권력 앞에 바람보다 먼저 눕는 기자들, 나아가 정치인으로 변모한 언론인들이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면면까지 ‘기자 정신’을 기준으로 비판하는 내용도 간결하지만 무게가 있다. 언론이 스스로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현직 기자로서 정치에 관여하고자 했던, 기사화 하지 못한 스토리도 함께다).

그런 그가 기자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취재원 보호와 진실을 쫓는 탐사 취재기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경찰이 은폐한 이춘재 범행의 피해자 부모님 관련 취재기는, 관련 뉴스를 봤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결국 국가를 상대로 한 피해 보상 소송의 1심 승소 전에 피해자 부모님 모두 돌아가신 것은 다시 한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저자가 공익소송의 대리인 선임까지 도운 것은 이번에 안 부분. ‘기레기’라는 오명도 있지만, 이런 언론인이 오늘도 어디선가 묵묵히 진실을 쫓고 있으리란 믿음이 생기게 된다.

저자는 국민이 기자에게 기대하는 상식을, 기자가 자신의 직업이 된 뒤에도 가지고 있고, 잃지 않고자 노력하는 사람 같다. 그가 계속 그런 기자이길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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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5
거울은 자기 발견의 도구이기보다는 자기기만의 도구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
신사의 존재는 외투의 맵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도와 발언과 몸가짐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p.70
아이는 어린이와 개 특유의,
예의에 대한 관념이 없는 호기심으로
백작을 살펴보고 있었다.
 
p.78
아페리티프
식욕을 증진하기 위해 식전에 마시는 술
 
p.97
아스파라거스 서버
 
볼셰비키: 구소련 공산당의 별칭 Bolsheviki
 
p.106
“난 고지식하지 않아.”
“그렇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자기가 고지식하지 않다고 전적으로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야. 정담하면 고지식한 사람이 되니까 말이다.”
 
p.107
대개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제들을 가장 새로운 명칭을 붙여 요란하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p.122
“시대가 해야 할 일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할레키 씨. 그리고 신사가 해야 할 일은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지요.”
 
p.150
“모두와 극소수의 차이는 숫자의 차이일 뿐이에요.”
 
p.194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 인간은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겪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관한 견해를 보류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p.232
... 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다. 와인의 색깔, 향, 맛은 분명 그 와인이 태어난 지역의 특유한 지형과 고유한 기후를 나타낼 것이다. 그뿐 아니라 와인은 생산된 해, 생산된 지역의 모든 자연 현상을 드러낼 것이다. ...
 그랬다. 한 병의 와인은 시간과 공간의 최종 추출물이고, 개성 그 자체의 시적 표현이었다.
 
p.236
우리 인간은 결국에는 철학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이다. ...
 책에 의해 형성된 신중한 고찰을 통해서든, 새벽 2시에 커피를 마시며 벌이는 열띤 토론을 통해서든, 또는 타고난 성향에 의해서든 우리는 모두 결국엔 근본적인 틀을 채택해야 한다. 즉, 중대한 사건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온갖 조그마한 행동과 상호 작용도 조리가 서도록 이끌어주는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어떤 인과관계의 체계 – 의도적인 것이든 자연 발생적인 것이든, 납득이 가는 것이든 뜻밖의 것이든 간에 –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p.237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수 세기 동안 철학적 위안을 교회의 처마밑에서 찾아왔다. ...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일어나는 일들의 피할 수 없는 과정을 이해하도록, 설령 이해는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었다.
 
p.292
 백작이 조금 전에 보야르스키에서 로비로 내려왔을 때는 재킷에서 느슨하게 풀어진 단추를 단단히 조일 수 있는 흰색 실을 한 가닥 구할 생각으로 수줍음과 기쁨이 있는 마리나의 수선실로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반 년 가까이 미시카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백작이 오랜 친구의 필체를 알아본 바로 그 순간, 화분에 심어진 종려 나무들 사이 백작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작은 애완견과 함께 앉아 있던 한 여성이 마치 백작에게 자리를 양보하듯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운명의 여신을 받들어 모시는 백작은 재봉사 마리나를 찾아가려던 계획을 뒤로 미루고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앉은 다음, 봉투를 열었다.
 
p.676
당신은 늘 당신의 행동이 옳다고 확신하지요. 마치 신이 당신의 그 값비싼 예의범절과 유쾌한 일 처리 방식에 감동한 나머지, 뭐든 당신 맘대로 해도 좋다는 축복을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오. 그야말로 오만함의 극치죠.
 
p.713
백작의 친구가 얘기했던 대로, 우가티가 체포당하는 것에 대해 냉정한 반응을 보이고 밴드에게 연주를 계속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등의 술집 주인 행위는 타인의 운명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시사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소동의 여파로 쓰러진 칵테일 잔을 똑바로 세움으로써
한 사람의 가장 사소한 행동으로도
세상의 질서를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믿음을 실천해보인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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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지음/박종대 옮김/열린책들/2021


인터넷으로 자료를 베끼는 방법
p.65
인터넷상에는 자격 있는 사람들이 만든 믿을 만한 사이트 외에 오류투성이 사이트도 정말 많다. 그런 곳에서는 어설픈 지식을 가진 이들의 졸렬한 글을 비롯해 정신 이상자나 심지어 나치 범죄자들의 글까지 난무한다. 그렇다고 모든 인터넷 서퍼들이 그런 웹 사이트의 신뢰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모두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교육학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요즘은 초·중·고 학생이건 대학생이건 특정 정보를 찾아볼 일이 있으면 전문서나 백과사전을 뒤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터넷으로 달려갈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온라인으로 접하는 자료의 적정성 여부를 선별할 수 있는 기술을 학교에서 주요 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교사들조차 학생들과 매한가지로 그것을 구분해 내지 못해 난감해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p.67
인터넷의 결함을 교육적으로 활용할 효과적인 방법도 있을 듯하다.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과제를 주고 에세이나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인터넷상에서 전혀 신빙성이 없어 보이는 일련의 자료들을 찾아보고, 그것들이 왜 신빙성이 없는지 이유를 설명하시오!> 이는 여러 자료를 비교하는 기술과 비판 능력을 요하는 과제인 동시에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를 분간하는 기술을 연마할 기회이기도 하다.

교사는 어디에 필요할까
p.75~
인터넷의 등장 이후, ... 아이들은 지식의 상당 부분을 학교 밖에서 습득하고 있다.
...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교사는 대체 하는 일이 뭘까?
... 교사는 학생에게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교육을 하기 때문이다.
... 좋은 학급을 만들려면 단순히 사실이나 정보만 전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의견들을 비교하고 토론하게 해야 한다.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분명 텔레비전으로 알 수 있지만, 다른 데도 아니고 왜 하필 거기서만 그런 분쟁이 끊이지 않는지, 그것도 초기 메소포타미아 문명 때부터 왜 계속 그러고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곳은 오직 학교뿐이다.

... 대중 매체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심지어 그 가치도 가르쳐 준다. 하지만 매체들이 우리에게 가치를 전달하는 방식을 두고 토론을 벌이고, 신문과 방송마다 그 독특한 논조와 타당성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곳은 학교뿐이다. 게다가 대중 매체를 통해 확산된 정보들에 대한 팩트 체크도 학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p.78
인터넷은 학생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만, 그 정보를 어떤 목적에 맞게 어떻게 찾을지, 찾은 다음에는 어떻게 거르고 선별할지, 또 어떤 기준으로 수용해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음모와 비밀
p.101
음모론은 그 추종자들이 권력을 잡을 때만 실제 사건을 설명하는 이론과 같은 것이 된다.

음모의 심리학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많은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이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런 일은 드물지 않다. 우리로선 그런 불충분한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p.103
어떤 의미에서, 의심을 동반한 해석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해방시킨다.
... 다행인 것은 일상생활에서도 음모와 비밀보다 더 투명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음모는 그게 효과적일 경우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결과가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백일하에 밝혀지기 마련이다. 비밀도 마찬가지다. 비밀은 ...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게 돼 있다. 음모와 비밀이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어설픈 음모이거나 알맹이 없는 비밀, 둘 중 하나다.

비밀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힘은 그것을 숨기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밀이 있다고 우리가 믿게 하는 데서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비밀과 음모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갖고 노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p.104
역설적으로, 모든 가짜 음모 뒤에는 어쩌면 우리에게 그것을 진짜 음모로 믿게 만듦으로써 이익을 보는 사람의 음모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두 명의 빅 브라더
p.119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에서는 극소수의 인원이 만인을 관찰한다면 같은 이름의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정반대다. 모든 사람이 극소수의 인원을 관찰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빅 브라더를 매우 민주적인 것으로 여기는 동시에 무척 재미있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방송을 보는 동안에도 우리 등 뒤에는 진짜 빅 브라더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다.

p.120
<프라이버시>에 대한 국제회의에서 다룬 것도 바로 이 빅 브라더였다. 우리가 인터넷 웹 사이트를 방문하거나, 신용 카드를 사용하거나, 우편으로 무언가를 주문하거나, 병원에서 진찰을 받거나, 심지어 CCTV가 설치된 마트를 어슬렁거릴 때도 이제 이 진짜 빅 브라더는 속속들이 지켜본다. 모든 걸 감시하는 몇몇 권력 집단이 바로 그들의 정체다. 만일 이들의 활동이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의 등 뒤에서는 정말 엄청난 자료들이 축적될 테고, 이 자료들은 우리를 완전히 발가벗기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내밀한 면과 사생활을 훔쳐 갈 것이다.

지적인 말
p.123
<아시다시피 기자라는 직업은 감추어진 뉴스를 드러내기도 해야 하거든요.>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기자는 진실에 부합하는 뉴스만 전해야지, 진실을 지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촌스러운 상황을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는 콜카타에서 지구의 운명에 대해 토론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콜카타에서 누군가가 베를루스코니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지 나쁜 말을 하는지에만 관심을 보인다.

영웅이 필요한 나라는 불행하다
p.134~135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인, 용감하고 신중한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영웅이 필요한 나라는 불행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왜 불행할까? 그 나라에는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보통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정직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 요즘엔 이런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프로 정신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보통 사람들이 없다면 그 나라는 필사적으로 영웅적 인물을 찾기 마련이고, 그렇게 찾은 사람에게 금메달을 나눠 주기에 급급하다.

p.135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가 뭔지 몰라 일일이 지시 내려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필사적으로 찾는 나라는 불행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바로 그것이 『나의 투쟁』에 담긴 히틀러의 이념이었다.

히잡을 쓰라고 누가 명령했을까?
p.143~
최근에 이슬람 수니파에 속하는 예라히 할베티 형제단의 이탈리아 총대리 가브리엘레 만델 칸이 『이슬람』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 거기엔 얼굴과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이 이미 이슬람 시대 이전에도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주로 기후적인 원인에서 말이다. 그런데 히잡 착용과 관련해서 늘 인용되는 코란 24장에는 그런 규정이 없다고 한다. 가슴만 가리라고 기술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 이슬람 연합회의 코란을 찾아냈다. 거기 24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독실한 여성들에게 이르노니 시선을 늘 낮추고, 순결을 지키고, 밖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 외에는 어떤 장신구도 내보여서는 안 된다. 또한 천으로 가슴을 가려야 하고, 남편, 아버지, 남편의 아버지, 자신의 아들, 남편의 다른 아들, 자신의 형제, 형제자매의 아들> 등을 포함해서 <여자의 알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 말고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매력적인 곳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 이란 학자 알레산드로 바우사니의 고전적 코란 번역 ... <베일로 가슴을 가려야 한다>는 규정을 발견했다.
... 코란은 여성들에게 단순히 정숙하게 입을 것을 요구했다.
... 그렇다면 여성들에게 베일을 쓰라고 요구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만델은 어느 정도 고소한 심정으로 답한다. 그 인물은 바로 「고란도 전서」의 사도 바울이라는 것이다. 물론 바울은 이 의무를 설교하고 예언하는 여성들에게로 한정했다. 그런데 바울 이후 또 다른 기독교인인 테르툴리아누스가 코란이 나오기 아주 오래전에 자신의 저서 『여성의 치장』에서 이렇게 썼다.

너희는 오직 너희 남편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한다. 너희가 다른 남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남편은 더욱 흡족해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 마리아의 후손들이여, 어떤 아내도 남편의 눈에는 추해 보이지 않는다. ... 세상의 모든 남편은 만일 기독교인이라면 아내의 방정한 품행을 중시하지, 아내에게 아름다움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 살갗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화장으로 왜곡하고, 눈썹을 검정 물감으로 길게 그리는 여자는 하느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 하느님은 너희가 베일을 쓰길 원하신다. 아마 남들이 너희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오호, 이제야 알 것 같다. 과거의 온갖 그림들 속에서 성모 마리아와 독실한 여성들이 왜 무슬림 여성들처럼 베일을 쓰고 있는지.

사랑과 증오
p.175~
사람의 계명은 우리에게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요구한다. ...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이 계명이 우리에게 권하는 것은 누구도 증오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은 통상 개별적으로 나타나지만) ... 반면에 증오는 집단적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특히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 이렇듯 독재 체제와 포퓰리즘은 대중에게 증오를 요구한다. 심지어 사랑을 표방하는 종교도 근본주의에 빠지면 증오를 부추길 때가 많다. 적에 대한 증오는 국민과 신도를 하나로 묶어 동일한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몇몇 사람을 향해서만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하지만, 증오는 수백만 명의 사람이나 한 국가, 한 인종, 다른 피부색이나 다른 말을 쓰는 인간 집단들을 향해 나와 내 이웃의 가슴을 분노의 불꽃으로 뜨겁게 한다.

p.177
이것이 바로 우리 인류의 역사가 예부터 증오와 전쟁, 학살로 점철된 이유이다. 거기엔 사랑이 끼어들 자리가 별로 없다. 사랑의 행위가 우리에게 내재된 견고한 이기주의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고 나오려면 정말 불편하고 힘든 점이 많기 때문이다. 증오의 환희에 대한 우리의 본능은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국민을 그리로 몰아가기 무척 쉬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반면에 인간을 보편적 사랑으로 이끄는 것은 나병 환자에게 입을 맞추라는 끔찍한 요구처럼 우리 체질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의 발견
p.252
은유는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을 우리 <눈앞에 바로 떠올리게>...
달리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은유에 과학적 기능까지 부여했다. 그것도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다시 발견하는 과학이 아니라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처음 드러내는 과학으로서 말이다.

몬탈레와 딱총나무
p.255
딱총나무를 그렇게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형상화한 시인이 자연 속에서 실제 딱총나무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 따라서 산문의 원칙은 <사물이 먼저고, 말은 그다음>이다. 만일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사물을 잘 알고 있으면 그에 맞는 말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 반면에 시는 정반대다. 시인은 먼저 말과 사랑에 빠지고,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즉, <말을 먼저 장악하면 사물은 절로 이어지는 것>이다.

불신과 동일시
p.267
스칼파리는 괴테의 베르테르를 언급한다. 우리는 당시 얼마나 많은 낭만적인 젊은이들이 그 작품의 주인공과 동일시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안다. 그들은 그 이야기를 사실로 믿었던 것일까?
...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보바리 부인이 결코 존재하지 않은 인물임에도 그녀와 비슷한 운명을 겪은 여자들이 현실 속에 많이 있음을 알고, 또 우리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는 그녀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인생 일반과 우리 자신에 대한 가르침을 끌어낸다.

우리가 B를 아예 무시해 버리면?
p.287
아무리 <똥싸개>를 외쳐 대도 반응이 없자 나는 더 이상 <똥싸개>를 외치지 않았고, 그 뒤로는 좀 더 풍부하고 복잡한 어휘를 배우는 데 전념했다. 그런 어휘들을 감칠맛 나게 활용하는 나를 보고 부모님은 아주 유식한 아들을 두었다며 무척 기뻐하셨다.

골 빈 인간들과 신문의 책임
p.308
신문은 인터넷의 노예일 때가 많다. ... 이제 그런 습성을 버려야 한다. 그 대신 웹 사이트들을 분석하는 데 힘을 쏟는 게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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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2
그러나 부(夫)가 구체적인 경우에 처의 사정과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의 주장을 심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굴복시키기 위해, 성행위 이후에는 자신의 뜻대로 갈등이 해결된다는 망상에 빠지는 등 여러 가지 불순한 의도와 잘못된 판단으로 처를 강간하는 것은 상대를 인격체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당한 욕구충족과 의사관철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물화하는 것이다. 이 경우 부부의 성은 저주가 된다. 성적 결합이 부부 사이를 유지하는 중요한 용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보다는 정신과 영혼의 긴밀한 결합이 두 사람의 삶을 받쳐줘야 하며, 결합은 두 인격체의 깊은 사랑과 신뢰에 그 뿌리를 둬야 한다.
 
p.83
성적 자기결정권은 그 권리의 성격상 특정인에 대해 이를 포괄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우에 매번 개별적으로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남편의 성적 교섭 요구는 처의 소극적인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이때 남편은 현안으로 대두된 갈등 해소를 위해 대화와 설득 등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도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동거의무의 불이행을 전제로한 이혼 청구의 방법으로 사태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국가가 명백하게 불법으로 규정한 폭력적인 방법 등을 동원해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시도를 부부 사이라고 용인할 것은 아니다.
 
... 부부강간의 인정이 처에 의해 오용되거나 남용될 가능성이 있거나 입증곤란의 사정을 들어 그 같은 해석에 반대한다는 취지의 견해가 있으나, 이는 수사와 재판 등 형사사법 절차에서의 사실인정 문제다. 이를 내세워 폭력을 수단으로 한 부부강간을 부정하는 구실로 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p.88
호칭에 담긴 사회적 평가를 무시하고 기능만 담아 표현하자면 법관도 판결공이나 재판공에 다름 아니다. ... 재판이나 판결문 작성에는 전문가라는 의미가 담여 있는 것으로 읽힌다.
 
 판사는 왜 판결공이 아닌가
 
p.94
오래전 연구지만 산재사고에 관한 유명한 연구가 있다. 1931년 보험사에 근무하던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산재 사례분석을 통해 통계적 법칙을 발견했다. 산재가 발생해 중상자가 1명 나왔다면, 그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1대29대300의 법칙이라고도 부르는 하인리히 법칙이다.
 
p.95
죽음조차 비용과 편익의 관점으로 분석하는 기업의 비정함에, 그 많은 전조를 깡그리 무시하는 그들의 대범함에, 그 비정을 무정하게 규율하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무력하고 성긴 법을 들고 정의의 쪼가리라도 찾아보려는 내 한심한 한계에 신물이 났다.
사람의 생명을 손익계산서와 대차대조표의 숫자로만 파악하는 부도덕한 기업에게는 손해배상과 더불어 징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p.96 제너럴모터스가 수년 전부터 연료탱크가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제품회수보다는 재판으로 해결하는 쪽이 비용이 덜 들 것으로 판단, ... GM의 내부 보고서가 공개
 
p.97
위험을 외주화하고 하루 평균 노동자 다섯 명이 사망하는 나라, .... 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옴에 가장 적확한 단어는 퇴근이나 귀가일 수 없다. 생환이다.
 
p.115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깊은 고통에 빠질 때 우리는 기꺼이 그 고통과 슬픔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이다(영화 <공각기동대>).
 
p.133
아이들을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출생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고, 이 아이들을 완전히 태어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꾸준한 관심과 지지였다.
그 후로 나는 ‘사랑과 훈계, 위로와 독려의 효과가 즉각적이지 않다고 실망하지 말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거듭 다짐했다.
공허한 희망과 충고의 말도 그만뒀다. 대안 없는 충고와 희망이 아이들에겐 오히려 독이었다.
더 나은 삶을 현재와 대비해 고통을 키운다는 점에서,
변화할 수 있음에도 이런 진창에 머무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식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비하하고 학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동시에 아이들의 처지가 아무리 암담하고 변화가 미미해도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p.168
당시 재판장은 “내 기억은 ‘내가 그것을 했다’고 한다.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하며 요지부동이다. 결국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심리상태를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로 설명했다.
 
p.224
법원에 온 이후 한동안 세상이 아름다운지 추한지, 평화로운지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곳인지, 살 만한 곳인지 지옥인지 헷갈렸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무엇이 진짜 세계인지 현실감마저 떨어졌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의 종착점이 권태와 무료함이듯, 재판도 무덤덤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살인도, 강간도, 피고인도, 피해자도 그저 활자로만 보이고, 이 흉측한 사건들조차 오직 법원이라는 매트릭스 안에서만 일어날 뿐 내 현실세계에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고 인식한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온 세상이 평온해졌다. 나는 매트릭스와 현실세계를 분리함으로써 겨우 그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세계를 떼어놓고 분리된 인격으로 살아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착시이자 도피였다. ... 두 세계는 분리할 수 없고, 가상의 매트릭스도 아니다. 서로의 현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분리된 채 살 수 없다.
 
p.225
... 최선의 길은 사제와 공무원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다. 끊임없이 단련하고 노력해야 한다. 구도의 길은 멀고 험하지만, 항상 그 길 위에 있어야 한다. 매번 길을 벗어났다 다시 복귀할 수도 없다. 그건 위선적인 삶이다.
 
p.232
나는 사법농단을 야기했다는 동료 법관들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행동이 나빴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악행도 처음엔 다 선의고, 끝까지 선의일 수 있다. ... 문제를 제기한 법관들이 사법부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냈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p.233
조직의 논리를 내세워 그들이 순진하다고 욕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 누군가의 순수함이 정의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배를 띄웠다면, 고루한 반대편은 격랑 속에서 배의 균형을 잡는다.
 
p.238
상황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결론을 요구해도, 시절이 아무리 암담해도, 자신의 실수가 아무리 끔찍해도, 그들은 단일대오에서 벗어나 꿋꿋이 혼자만의 길을 갔다. 앞서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너무 외로워서,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을지언정(오르텅스 블루, <사막>), 그들은 잘못된 길을 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엇이 바른 길인지 알기 어려워 적극적으로 길을 떠날 수 없다면, 적어도 필경사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1999)라며 저항해야 한다.
 
p.243
과연 무엇이 바르고 곧은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라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주는 것’이라 했고,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 했고, 존 스튜어트 밀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칸트는 ‘도덕적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라 했고,
존 롤스는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주되, 사회적·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있을 때는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가장 많은 이익을 주는 것’이라 했고,
마이클 샌델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 했고, 로널드 드워킨은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p.266
병원에서처럼 법정의 언어 역시 삶의 고통을 표현하는 통증언어다. ... 그러나 내가 치아와 허리통증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듯, 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만 탓할 일이 아니다. 노련하고 성의 있는 의사가 되어 통증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그의 태도와 표정, 주변환경과 행동을 종합해서 통증을 눈치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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