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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p.11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p.16
눈처럼 하얀 강보에 갓 태어난 아기가 꼭꼭 싸여 있다.
자궁은 어떤 장소보다 비좁고 따뜻한 곳이었을 테니,
갑자기 한계 없이 넓어진 공간에 소스라칠까봐 간호사가 힘주어 몸을 감싸준 것이다.
이제 처음 허파로 숨쉬기 시작한 사람,
자신이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방금 무엇이 시작됐는지 모르는 사람.
갓 태어난 새와 강아지보다 무력한, 어린 짐승들 중에서 가장 어린 짐승.
p.17
아기가 별안간 울음을 멈춘다. 어떤 냄새 때문일 것이다. 또는 둘이 아직 연결되어 있다.
...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채, 아직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
p.51
움켜쥘수록 차가워지는 자신의 창백한 두 주먹을.
p.53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눈을 바라본다.
... 이윽고 수천수만의 눈송이들이 침묵하며 거리를 지워갈 때,
더 이상 그걸 지켜보지 않고 얼굴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p.64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p.66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어떤 감각인지 그때 배웠다.
p.71
입김
...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p.75
이 도시에서 그녀의 머리에 흰 새가 잠시 내려앉았다가 날아간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p.78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p.79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 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p.80
당의정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호기심을 갖듯 그녀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온 알약들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p.86
반짝임
사람들은 왜 은과 금,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광물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걸까?
일설에 의하면 물의 반짝임이 옛 인간들에게 생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빛나는 물은 깨끗한 물이다. 마실 수 있는-생명을 주는-물만이 투명하다.
사막을, 숲을, 더러운 늪지대를 무리지어 헤매다가 멀리서 하얗게 반짝이는 수면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느낀 건 찌르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생명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p.87
흰 돌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p.94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다 벌어지지 않았다.
p.97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p.108
넋이 존재한다면, 그 보이지 않는 움직임은
바로 그 나비를 닮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해왔다.
...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p.133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p.147 해설
왜 살아남아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다른 존재자들을 그리고 다른 인간들을 착취하고 파괴하며 상처주는 것을 동반하거나 최소한 그런 사태 전반을 외면하는 것인데도,
p.152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하기로 하자면,
우리 모든 존재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아무리 볼품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이미 0이었고 무한이었다.
p.158
인간이란 무엇인가? 소년이 온다가 80년 5월의 광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범죄들에 근거해 증언하는바, 권력을 차지하거나 유지하기 위해서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 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존재다. 한쪽에서는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하고 다른 쪽에서는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라고 말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잇는 존재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반복적으로 타인을 살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 주겠다”는 듯이 그들의 인간적인 면을 모조리 깎아내는 고문을 자행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일이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행해졌다.
p.162
이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떠맡고자 했다.
군인들의 총에 맞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듯 그 죽음에 온 힘으로 마음쓰면서,
어찌해볼 수 없는 일에 자신의 삶을 걸었거나 삶의 경로를 이탈시켰다.
그들이 한 일은 그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움으로써 인간적인 어떤 것을 보존한 것이다.
...
인간의 죽음이 그런 식으로 훼손될 수는 없다고 항의하고 있는 한에서, ... 그들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며 인간적인 무엇인가를 보존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희생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인간적 삶을 힘겹게 그러나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것이다.
p.177
하지만 이 믿음을 뒤집어서 말해야 하리라. 현재가 과거를 돕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다.
p.185 작가의 말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을 교재로 택했다.
달콤한 것을 먹여 사랑스럽게 보살펴도 우리 육신은 반드시 무너지고,
비단으로 감싸 곱게 보호해도 목숨에는 끝이 있네.
p.186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