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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 - 아흔 살 넘은 부모 곁에서 살기, 싸우기, 떠나보내기
라즈 채스트 지음, 김민수 옮김 / 클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더스틴 호프만이 가장 예뻤을(?) 때, 시쳇말로 ‘리즈 시절’에 찍은 영화 <리틀 빅 맨>(1970)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줄거리는 거의 잊었지만, 유독 한 장면만큼은 지금껏 기억에 남아 있는데, 호프만이 분한 백인 청년이 무슨 연유에선지 그 무리 안에 끼어 자란―아무래도 이게 핵심 플롯이지 싶은데― 샤이엔 부족의 늙은 족장(아니면 그냥 부족 원로)이 어느 날 홀로 조용히 무리를 벗어나 길을 떠난다. 도착한 곳은 부족 거주지에서 그리 멀지는 않은 웬 언덕바지였는데, 노인은 장소를 한차례 훑어보고는 이내 적당하다 여긴 듯 평평한 곳을 골라 눕는다. 때 아닌 일광욕이 아니라 자신이 죽을 때가 된 것(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부락과 떨어진 곳에서 죽음을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하늘은 적당히 청명하고, 북미 인디언 거주지가 그렇듯 곧 비가 내릴 조짐 따위는 없다. 노인은 ‘완벽한 날’을 고른 것이다. 토착민의 지혜가 줄곧 그래 왔듯 이는 부족의 어른에게서 아이에게로 자연스레 흐르는 살아가는 방식―이 경우는 죽는 법이지만―이며, 딱히 애통해할 일―물론 부족 원로 한 명을 잃는 것은 백과사전 한 질을 통째 잃는 물리적 손실일 테지만, 이미 웬만한 지식 내지 지혜의 전수는 완수된 뒤였으리라―도, 더구나 밤낮으로 곡을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저런 담백한 죽음이라니! 나는 무릎을 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저것이야말로 ‘원 앤 온리’한 죽음에 이르는 법이라 여겼고,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저렇게 죽겠노라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놀랄 것도 없이 현대인의 죽음은 결코 이런 형태가 될 수 없다. 가능하면 병원에서 ‘죽어 주는’ 게 그 죽음을 처리(?), 감당할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며, 죽는 당사자의 편의를 위해서도 그편이 여러모로 낫다.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터.
이 위트 넘치는 책은, 그 풍성한 위트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끝내는 맞닥뜨려야 할 노화와 죽음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외동딸인 작가가 선택의 여지없이 모든 부수적인 작업의 최종 담당자이자 결정권자가 돼야 했던 부모님의 죽음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뒷날개에 적힌 ‘자기계발서’ 운운하는 언론의 평가는 지극히 적절하다(자기계발서 꼬리표를 달고 나오는 모든 책들에 회의를 품는 내 취향 따위는 차치하고).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부모님의 죽음을 두 번 겪을 사람은 없을 것이기에 충격 완충제(만화이지 않나!)를 포함한 이런 유의 책을 읽어 두고 준비하는 게 온당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작가가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들을 묘사한 부분에 크게 공감했다. 내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들이 딱 그러했기에. 끝없이 이어지는 잠과 틈틈이 공급되는 영양제. 특히 잊을 수 없는 건 해당 시기의 인간에게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냄새다(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냄새’다). 그 냄새는 처음 겪는 사람에게는 분명 충격을 안기지만, 그렇다고 트라우마가 되어 이후의 인생을 좀먹지는 않는다. 언젠가 나 또한 그러하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호미로든 가래로든 뭔가로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닌 까닭이다. 죽음에 대한 ‘선행학습’은 병원에서 태어나 결국 병원에서 죽을 지금의 우리들에게 특히나 더 요구되는 부분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선행학습 차원이건, 단순한 재미를 위해서건 이 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